잡지를 구매한 적이 언제였던가. 화장품, 악세사리 같은 사은품에 눈이 멀어 구매한 적이 있었다. 문학잡지는 아니었다. 문예지를 정기구독한 적도 있지만 섬세하게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나 리뷰 정도가 전부였다. 악스트는 나 같은 이를 위한 잡지다. 가격도 이렇게 착할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착해도 되는 건가?
구성과 필진을 보면 기존의 계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읽은 작가의 소설, 연재, 단편이 있다. 색다른 점은 시가 없다는 것. 그렇다. 악스트는 오로지 소설을 위한, 소설에 의한, 소설을 주로 다루는 잡지인 것이다. 시인 김민정은 시가 아닌 그림을 소개한다.
김태용과 최진영에 대한 에세이도 있다. 최진영에 대한 글을 읽고 『구의 증명』이 읽고 싶어졌다. 단편집 『팽이』에서 만난 최진영에 끌려 장편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책장에 두었다는 잊고 있던 기억도 떠올랐다.

좋아하는 작가 정용준이 천명관을 인터뷰한 내용도 읽고 천명관의 소설을 읽는다면 소설 쓰는 천명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 같다. 인터뷰를 마무리한 정용준의 이런 문장이 어떤 믿음을 안겨준다.
‘소설쓰기는 권투 같다고 했던 헤밍웨이의 말을 비슷하게 바꿔본다면 천명관에게 있어 소설쓰기는 격투다. 그는 권투도 하고 킥도 쓰고 필요하다면 레슬링도 하는 종합 격투기 선수다. 빠르고 유연하며 강한 선수다. 상대는 그가 뭘 사용할지 모른다. (…) 그는 능숙한 테크니션이자 지지 않는 싸움꾼이다.’

꼭꼭 씹거나 정성을 다해 한 줄 한 줄 읽은 건 아니다. 그러니까 훑어보기라 할 수 있다. 첫 시작엔 든든한 박수가 필요하다. 박수가 그치고 나면 지속적인 응원과 조언이 필요하다. 만드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말이다. 좋아했던 『풋』처럼 사라지지 말고 도끼날이 무뎌지지 않고 영롱하게 빛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