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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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나가는 게 삶이라고 한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난과 역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할 뿐. 살아남기 위해 죄책감이나 죄의식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 앞에 펼쳐진 죽음이 당도하기 전에 달아나 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서라도 말이다. 그 삶을 감히 평가할 수 없다. 내가 알 수 없는 시대의 비극, 부조리를 직접 살아내는 일, 설사 같은 시대를 산다 해도 우리는 함부로 타인의 삶을 평할 자격이 없다. 얼마나 절박한지, 얼마나 어두운지 그 어둠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으니까. 


러시아 출신 작가 안드레이 마킨의 『어느 삶의 음악』 속 ‘알렉세이 베르그’가 살아낸 삶이 그러했다. 스물한 살의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살아온 시대, 암흑으로 가득한 소련 스탈린 치하의 정권, 밀고와 은밀하게 벌어지는 숙청이 자행돼된 공산주의. 1941년 5월 24일 그에게는 가장 최고의 날로 기억될, 자신이 연주회가 예정되었던 날 그는 도망쳐야 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을 버리고 자신과 닮은 죽은 병사의 이름으로 살아온 삶. 어느 순간부터 ‘알렉세이 베르그’인지 ‘세르게이’ 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된 그의 삶. 


소설은 처음부터 그의 삶을 들려주지 않는다. 극동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오다 우랄 지방 어딘가에서 눈보라로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며 춥고 어두컴컴한 대합실을 둘러보는 ‘나’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아무런 대책 없이 느긋해 보이는 승객들의 모습에서 빠져나오려는 ‘나’는 어떤 소리에 이끌린다. 혼잡한 대합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아노 소리. 피아노 앞에 앉은 노인과 마침내 도착한 모스크바행 기차에 오른다. 예상하지 않았던 노인과의 대화, 그리고 그가 살아온 지난 삶을 듣게 된다.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전쟁.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삶은 다채롭다. 긴박한 상황에서 재미를 찾고 유머가 넘치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알렉세이 베르그’가 아닌 ‘세르게이’로 살게 된 그도 그랬다. 피아니스트의 삶이 아닌 병사의 삶으로 살아야 했다. 장군의 운전기사로 위험한 순간에 그를 구하고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음악을 향한 갈망은 버릴 수 없었다. 장군의 딸이 치는 피아노, 음악을 모르는 무지한 운전기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은 딸의 짓궂은 욕망. 그것은 그를 향한 호기심이자 사랑에 속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소설에서 음악은 정치나 이념을 뛰어넘은 하나의 고귀함이다. 그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삶의 존엄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받아 마땅한 인격과도 같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그 시대를 살지 못한 ‘나’는 노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대합실에서 마주한 사람들과 똑같이 게으르고 수동적인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가 어떤 삶을 견디고 살아왔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안드레이 마킨은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으로 음악을 들려준다. 아니, 삶을 들려준다. 누구나 고유한 자신만의 음악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응시하는 곳곳마다 절망과 폐허로 가득한 시대를 살지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그것. 『어느 삶의 음악』은 어느새 ‘나의 삶의 음악’이 된다. 나를 채우는 것들, 내가 희망하는 삶이 된다. 


그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밤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얼음과 나뭇잎과 바람의 무수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이 밤의 투명하고 불안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 (119쪽)


읽는 내내 피아노 연주를 듣는 기분이다. 고요하고 차분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과 격렬한 몸짓의 연주자를 상상하기에 이른다. 연주에 집중하고자 흐트러짐 없는 모습,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 우리 각자의 삶이 연주할 음악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소망을 간직한 아름다움이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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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28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잠자냥님 리뷰가 좋아서 담아둔 책인데 자목련님 리뷰도 역시 좋네요. 도서관가면 아무도 안 빌려가 늘 눈에 띄었는데 꼭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23-03-28 12:07   좋아요 1 | URL
아무도 안 빌려가다니! 이런.......ㅠㅠ 쿨캣님이 꼭 빌려가세요! ㅎㅎㅎ

coolcat329 2023-03-28 19:19   좋아요 0 | URL
네네~^^

자목련 2023-03-29 11:19   좋아요 1 | URL
이번에 만나면 냉큼 집으로 데려오세요^^

레삭매냐 2023-03-28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 보겠다고 사둔 책인데...

어느새 헌책방에 나왔더라구요.
아이구 참.

다른 책도 있던데, 그 책도 다시
읽어 보고 싶습니다. 기억이 나
질 않아서요.

자목련 2023-03-29 11:20   좋아요 0 | URL
실은, 저도 그런 책이...
읽어보겠다고 사두셨으니 이제 꺼내 읽어보세요.
레삭매냐 님도 좋아하실 소설입니다!

잠자냥 2023-03-28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죠... 조용히 묵묵히 살아가는 인생을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었어요.
대부분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자목련 2023-03-29 11:21   좋아요 1 | URL
네, 참 좋았어요. 잔잔하게 흐르는 삶, 아름답고도 슬픈.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구나 싶었어요.
 
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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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한 시기가 남은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라고 부를 수도 있는 그것, 대부분 그 실체는 지독한 사랑이거나 상처다. 어떤 이는 추억이나 기억으로 간직하지만 어떤 이는 내내 같이 살아간다.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받아들여 넘어가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20세기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가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 속 ‘미하이‘는 내내 같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현재에 충실하려고 안정된 중산층 삶에 안착하려고 ‘에르지’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왔다. 하지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에르지와 자신의 성향은 맞지 않고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다. 그런데다 신혼여행지인 이탈리아 베네치아까지 자신을 찾아온 친구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 


친구의 등장으로 미하이의 학창 시절이 소환된다. 미하이는 에르지에게 자신이 전부를 걸었던 친구 ‘터마시’와 그의 동생 ‘에바’, 그리고 성직자가 된 ‘에르빈‘와 보냈던 시간을 들려준다. 미하이 가족과는 다른 분위기의 터마시 가족, 배우가 되고자 했던 에바, 죽음을 갈망했던 터마시가 끝내 성공한 이야기. 미하이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친구들과 보냈던 그 시간, 절정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던 시절, 터마시와 에바를 향한 감정들. 그들과 헤어졌다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휩싸였기 때문일까. 미하이는 에르지와 탄 기차가 아닌 다른 기차에 오른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 에르지와 만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미하이는 에르지에게 돌아가지 않고 친구들을 찾아 떠난다. 


이제 소설은 신혼여행으로 시작했던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미하이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 청춘도 아닌 그의 행동을 방황이나 일탈로 볼 수 있을까. 미하이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에르지의 생각처럼 에바는 첫사랑이 맞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사랑한 에바, 자신은 사랑한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미하이의 기억 깊숙한 곳에 에바는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찾는 건 에르지 한 사람이었다. 아내 에르지는 미하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하이는 그런 아내에게 자신을 찾지 말라는 전보를 보내고 길을 떠난다. 


여행자가 된 미하이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악 도시에 도착하고 배회한다. 강풍과 추위에 지친 그 앞에 죽은 터마시의 환영이 보인다. 병원에서 눈을 뜬 미하이는 의사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다. 회복된 미하이는 그곳을 떠나야 하지만 경제적 문제가 있던 차 예술사를 공부하는 미국인 젊은 여성 ‘밀리센트’가 나타나 도움을 청한다. 그녀에게서 미하이는 방황하던 청춘 시절을 발견한다.


인간은 방황의 시기에 더욱 소심해지고 겁이 많아지며, 가장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은 영원히 남는다. (142쪽)


방황하던 시절로 여행하는 것, 그 회귀는 단지 시간을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그리고 더 먼 과거, 자신의 개인사로 가야만 하는 계단일 뿐이다. 방황하던 시절은 그냥 쓸모없는 방황으로 채웠던 시간인 것처럼 낯선 여인은 항상 낯설 뿐. 그는 집으로, 낯설지 않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세상 곳곳을 떠돌던 바람이 그들을 휩쓸어버렸다. (154~155쪽)


밀리센트는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랐지만 미하이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미하이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어지러움과 발작 증상이 나타났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 ‘에바’와‘ 에르빈’으로 추정되는 이의 소식을 듣는다. 밀리센트에게 돈을 빌린 미하이는 에르빈이 있는 구비오로 향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곳에서 성직자가 된 에르빈을 만난다. 에바와 터마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만 그는 구체적인 답을 피한다. 성직자로 그 본분에 충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에르빈은 없었다. 


“나는 이미 그 어떤 것도 그립지 않아.” 

미하이는 에르빈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지운 듯했다. 실제로 에르빈은 모든 이와 단절해야 했고, 사람들 간에 감정의 싹이 틀 수 있는 뿌리마저 영혼으로부터 덜어냈다. 지금, 이제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여기 버려둔 땅에 그는 머물고 있다. 메마르고 척박한 이 산에서…… (186쪽)


단호하게 말하는 에르빈과 과거에 매달려 질척거리는 미하이의 모습은 무척 대조적이다. 각자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온 결과라고 할까. 그러니 미하이의 철없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을 찾는 일,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아내를 버리고 도망친 무책임한 남편,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이사로 재직한 아버지 회사에 닥칠 어려움을 모르는 아들이 분명하다. 도대체 그가 찾는 건 무엇일까. 첫사랑 에바를 향한 욕망, 죽음을 갈망하고 실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죽음을 갈망했던 미하이는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고서야 삶에 대한 의지를 찾는 미하이가 안타까우면서도 그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이쯤에서 에르지를 떠올려보자. 그녀는 미하이를 찾고 기다리는 대신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혼자서 헝가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파리에 있는 친구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전한다. 친구는 당장 이혼하라고 말하지만 에르지는 여러 상황을 고려해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전 남편, 시아버지의 사업에 투자한 돈, 그리고 미하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 그런 그녀에게 놀랍게도 베네치아에서 만난 미하이의 친구가 접근해 페르시아인를 소개한다. 미하이가 사기꾼이라 말했던 그는 에르지를 이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사고로 페르시아인과 단둘이 남겨진 에르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는 기분, 대성당과 미술품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안겨주지만 복잡하고도 어려운 소설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소설처럼 우리도 때로 현재에 처한 어려움을 피하려 과거로 도피한다. 그러나 결국엔 알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은 바로 현재라는걸. 둘로 시작했던 여행은 각자의 여행이 되었다. 동반자가 있어도 결국엔 혼자라는 게 인생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 한 여행은 출발지이자 도착지에서 끝난다. 다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끝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여행 말이다. 


살아남아야 한다. 폐허 속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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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3-2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이네요.

과거의 어떤 것도 그립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겠다는 단호한 삶
의 모습 -

자족적인 결단인지 아니면 무모
한 결정인지 궁금해지네요.

자목련 2023-03-28 11:03   좋아요 0 | URL
아름다우면서도 철학적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어려웠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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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비 때문에 망설였던 책과 선물, 커피와 함께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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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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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을 당신도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심스럽게 건넨 선물. 우리가 어느 순간 같은 문장에서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을지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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