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엉뚱하지만 소설가의 첫 에세이는 언제쯤 출판되는 게 좋은가 생각해 보았다. 독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는 등단이나 활동 기간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반갑다. 글이라는 건 같지만 그 주제가 다르니 기존에 만났던 글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을 떠올리면 어떤 작가는 주 종목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시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 작가의 에세이가 연이어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출판사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초엽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반갑다는 말이다.


SF 소설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준 작가라고 할까. 그러니 김초엽이 들려주는 SF 이야기, 책과 소설 작업에 대한 이야기,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과 우연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게 되었는지, 거기가 SF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진솔한 진심이 담긴 책이다. 특히 내게는 SF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작가라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할 거라는 생각에 편협한 독자라는 답이 왠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은 제목만으로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정작 그의 글로 통해 만나보니 궁금하고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권의 소설을 쓰면서 부수적으로 읽은 책도 많았다. 역시 쓰기 위해서는 읽는 일도 중요하구나 싶다. 과학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작가, 과학과 SF의 경계는 미묘하다면서도 그가 과학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에세이에서 독자는 작가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다. 김초엽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대학원 시절 직접 소설 쓰기 모임을 만들고 주말마다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때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소설 작법에 대한 책도 소개하는데 한 번씩 소설을 쓰다가 난항에 빠질 때 참고를 하는 정도였다. 결국엔 쓰기는 누군가의 기술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을 보면 든든한 마음이 드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


에세이에서 김원영 작가와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는 과정을 들려주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초엽 작가가 후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을 읽고 한참 후에 알았던 나는 그가 기고한 글을 검색해 읽은 기억이 있다. 해서 초고를 거의 뒤엎는 과정, 편집자가 제시한 방향성, 기술발전으로 인한 장애의 미래를 다루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4쪽)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아니 에르노가 떠올랐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글 쓰는 일은 때로 세계 전체를 뭉쳐 내 손에 가져다 놓고, 과거와 현재 곳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는 빽빽한 거미줄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작업 같다가도, 때로는 나를 뚝 떼어내 좁고 작은방, 오직 책들로만 둘러싸인 방에 고립시킨다. 재미있지만 가끔은 심심하고 외롭고 심지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154쪽)


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에 책방이나 읽은 책에 대한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책을 사야지 하고 들어갔지만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엉뚱한 책을 손에 넣게 되는 일, 일이든 여행이든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 작은 책방을 찾아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사는 일. 책 목록에서 내가 읽고 좋았던 책(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을 발견하는 일도 즐겁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책과의 우연한 만남도 즐겁다. 에세이의 제목처럼 말이다.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234쪽)


작가의 에세이는 그가 쓴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를 위한 안내서 같은 역할을 한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일부라도 느낄 수 있기에 이미 읽었던 소설이나 예정된 소설 읽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김초엽의 소설로 SF 소설에 대한 친근감이 생긴 후 예전보다 SF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책과 우연들』 통해서 읽고 쓰는 일의 기쁨이 커졌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유토피아 자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불가능에 맞서는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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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1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런 문장을 쓰시면 괜히 저는 감동을 받잖아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무물론 저한테 쓰신 말이 아니라 아니에르노와 김초엽과 여타의 훌륭하신작가님을 포함해!!! ㅋㅋ. 글을 쓰는 우리 모두가 감동받을 문장이지만... 괜히 오늘 쓴 글도 생각나고 그래서 저는 그냥 감동을 받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는 그래온 것 같아요. 어느 시기마다 분명 어떤 책이 있었고 어떤 문장이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저도 그 경험들을 토대삼아 읽고 쓰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멈추지 말아요, 우리! ​힘!!

자목련 2022-11-06 10:37   좋아요 2 | URL
♡♡♡♡♡♡♡
네, 우리는 그럴 수 있어요. 말씀처럼 어떤 시기에 어떤 책의 어떤 문장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서로를 알지 못해도 서로를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것이 서툴고 애쓰는 몸짓일지라도 말이에요!

서니데이 2022-12-0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09 08:57   좋아요 1 | URL
^^*
 
내가 너에게 가면
설재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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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돌봄을 받는 이와 돌보는 이 모두를 성장시킨다. 돌보는 동안 상대를 지켜보고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고 사랑을 주게 된다. 내 손길, 내 말, 내 마음에 따라 상대가 변화하는 걸 느끼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올바르고 좋은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관성처럼 말이다. 처음 만나는 설재인의 장편소설 『내가 너에게 가면』 은 그런 따뜻하고 애틋한 돌봄의 마음과 시선을 말하는 소설이다. 


죽은 할머니가 혼자 남은 손녀딸을 지켜보기 위해 사물에 깃드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SF 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할머니 종옥이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는 손녀 성주는 작은 항만군의 초등학교 돌봄반 교사로 일하며 복싱을 한다. 그러니까 성인 여자다. 평생을 사랑하며 키운 성주가 밥을 안 먹어서 빵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저승사자에게 부탁해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성주에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복싱을 하려면 체중이 중요한데 밥과 빵은 절대 피해야 할 음식이라는 걸 할머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먹을 날리며 싸우고 받아온 트로피를 던져버렸으니까. 그 목이 나간 트로피에 할머니의 영혼이 깃든 것이다. 


할머니의 영혼이 성주를 지켜보듯 것처럼 성주는 돌봄반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애린이를 지켜본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 외국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애린. 아빠는 일하느라 외국에 있고 웹툰을 그리는 삼촌 도연이 애린을 키우고 돌봤다. 도연은 애린이 친구와 싸운 일로 미안한지 빵을 만들어왔다. 빵을 먹을 계획이 없었는데 애린의 집요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 한국말도 잘 하고 똑 부러지는 애린은 성주를 잘 따랐고 성주가 복싱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성주 집에 오게 된 애린이 목이 부러진 트로피를 가져가고 체육관에 등록할 줄은 몰랐다. 그 속에 깃든 종옥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덕분에 종옥은 체육관으로 옮겨져고 그곳에서 매일 성주를 볼 수 있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단을 지키고 있던 성주였는데 애린과 도연의 등장으로 자꾸만 그게 무너졌다.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운동이 끝난 후 도연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고 함께 달리기를 하고 애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성주는 애린을 통해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친구의 손녀를 키운 할머니와 자신을 향하던 수많은 시선과 편견들, 부모도 아닌 삼촌이 키우는 애린에게는 어떤 말들이 오갈지 잘 알고 있었다. 


소설은 성주가 일하는 돌봄반을 통해 여전한 사회적 차별을 말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돌봄 교사인 성주를 정규직과 다르게 대하는 교장의 태도, 부모가 아닌 이들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참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동시에 그 반대의 시선도 들려준다. 성주를 키운 종옥, 애린을 돌보는 삼촌, 성주를 응원하는 교사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다. 어린이만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애린을 통해 성주와 삼촌도 돌봄을 받고 있었다. 


아이의 작았던 세계에 낯선 사람들이 생겨난다.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강을 헤엄쳐 흠뻑 젖은 채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또 어딘가에서 발을 구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작았던 아이를 그 사람들이 키운다. 점차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그 사람과 또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마음에 심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태생에서부터 내재된 본능의 씨앗이 발아하여 알게 된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씨앗을 심고, 더 많은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오고, 꿀을 슬그머니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229~230쪽)


소설은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성주가 도연과 애린을 만나면서 “웃는 일이 많고 싶었다.”(244쪽)고 느끼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에 누군가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지 확인시킨다. 누군가 돌보는 일은 돌봄을 받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나를 키우고 돌본 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한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소설 속 도연이 만드는 빵처럼 맛있고 부드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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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지음 / 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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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는 일은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설령 내 사랑이 끝났을지라도 사랑과는 멀리 떨어져 나온 삶이라도 사랑을 읽는 동안 나를 휘몰아졌던 사랑 속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시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던 침잠의 시간. 어느 날 이유 없이 서러워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쏟아내던 그 쓰라린 시간과 마주한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설렘의 순간, 무엇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어 잠들지 못하던 밤이 고스란히 밀려온다.


이병률의 에세이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누군가 여전히 사랑의 조각을 붙잡고 있음을 인식하거나 소식을 모르는 그의 안부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음에도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이가 지금은 곁에 없어도 어느 시절 당신과 보냈던 짧은 시간, 스치든 지나간 계절, 그리고 가슴에 남은 기억들은 누군가의 사랑이고 감정이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세상은 사랑의 풍경을 보여주며 페이지를 남긴다. 그러니까 당신아, 우리는 그 페이지를 따라 여행해야 하고, 그 길에서 나 자신을 에워싼 모두를 괴롭혀서라도 영혼을 다 소모할 수 있을 때만 이번 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인공 말고 주인이.(49쪽)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는 노랫말처럼 때로 사랑의 고백은 발화되어서는 안 되는 침묵으로 남아야 했다. 정성껏 써 내려간 치밀한 프러포즈가 그러하듯 상대에게 부담으로 남을 뿐이다. 여행을 하고 시를 쓰고 강의를 하고 꽃집을 운영하는 그가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자 모두의 사랑에 해당된다. 어떤 사랑은 시로, 어떤 사랑은 일기로, 어떤 사랑은 하나의 사연으로, 어떤 사랑은 편지의 형태로 쓰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담론이며 사랑과 이별에 대한 고백이자 누구나 공감하는 애틋한 사랑이자 사랑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사랑의 조각을 소개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떤 글에는 오래 머물게 된다. 생일에 꼭 장갑을 선물하고 싶다는 글, 비 오는 날 연인이 저 멀리서 우산을 들고 있는 걸 발견하고 냉큼 쓰고 있던 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여자에 대한 글, 사귀는 걸 주변에 알리지 못해 둘만이 아닌 여럿이 보낸 크리스마스에서 사다리 게임으로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글이 그랬다. 어느 시절 매만지던 약지 손가락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비가 오던 날 우산을 하나만 사 오던 모습이 좋아서 심장이 뛰던 순간, 어느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장갑이 떠올라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번복자가 되어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당신이라는 세계가 놓치고 만 것들을 붙잡는 것.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있는 힘껏 몸을 돌리고 관점을 되돌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다면.(98쪽)


과거가 돼버린 이야기다. 시인은 모든 걸 번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며 지나간 사랑을 후회하지만 어떤 사랑은 우주의 의지를 끓어 모아도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는 걸 알기에 그저 담담하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담담함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둘이어야 가능한 일이고 둘이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한 사람이 혼자서 하는 게 사랑은 아니기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우리는 사랑하다가고 어긋나고, 이어보려 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 남긴다.(124쪽)


그럼에도 책에서 만난 사랑은 한 편의 영화 같고 음악 같다. 그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별을 견디는 시간조차도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있다. 좋았던 기억이 왜 이별로 이어지나 분노하면서도 훗날 그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아련해지고 흐릿해진 아름다움으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그저, 사랑하는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의 뒷전을 자주 느끼는 일이며, 사랑이 사랑의 힘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불가능을 여러 번 체험하는 일이며, 도무지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신산한 시절을 그저 견디고 견뎌야만 하는 일, 피할 수 없어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쓸쓸함을 삼키고 또 삼키며 삽니다.(160쪽)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는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찬란한 사랑으로 나가는 격려가 될 것이고 혼자만의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주는 기쁨과 힘을 확인하며 용기를 북돋을 것이고 사랑이 끝났다고 여기는 이에게도 결국 삶이란 사랑에 속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을 읽는 일은 가만히 내 사랑을 헤아려 보는 일이다. 서툴고 아팠던 사랑부터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았던 사랑과 이제는 그의 이름을 들어도 덤덤해진 가슴이 서럽기도 한 사랑까지. 그 모든 사랑으로 받은 것들로 인해 내가 살았던 날들과 부디 내가 주었던 것들로 그 사랑도 살았던 날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꺼내보는 일이다. 사랑이 얼마나 눈부시고 소중한 것인지 나만의 공간에 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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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책이다’란 최재천 교수의 추천으로 시작하는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는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의 인류 역사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1만 2000년 전부터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물 지리적으로 추적한다. 하여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관심 있게 읽은 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과정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인문 지식의 안내서로 충분하다. 


‘WEIRD’(위어드)는 서구의(Western)의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사회를 이끄는 이들(강대국의 모습), 아마도 현대인이 추구하는 대표적 모습이라고 하면 맞겠다. 하지만 인류가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과 전쟁 정도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워어드 심리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할 때 부족과 씨족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족장과 대표의 권한이 가장 컸고 그들은 대부분 연장자였고 남성이었다. 부족 내 결혼을 통해 인구를 확장시켰고 부족 내의 결속을 중시했다. 그러나 집단 형태의 삶은 어느 순간 개인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심리적 변화도 일어났다.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알 수 있다. 개인주의와 개인적 동시가 발생하여 자기중심, 자존감, 자기 고양의 태도가 생겼고 전통과 연장자에 대한 순응과 복종은 낮아졌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전체론적 사고보다는 분석적 사고를 키우게 만들었고 단체가 아닌 개인의 소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단에서 벗어나니 자유의지의 선택이 중요해졌다. 누구가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렇지만 개인이 아닌 부족사회로 돌아가 보면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바뀌는 일, 그것은 친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강력한 동기로 종교를 언급한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문해율을 높이고 결혼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을 내세운 '결혼 가족 강령'을 통해 집단적 친족 기반 조직을 해체하고 파괴한다. 기독교의 이러한 관행은 기독교 제도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한 방한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방침들은 설득, 배척, 초자연적 위험, 세속적 처벌과 결합되며 점차 의례로 포장되어 가능한 모든 곳에 전파되었다. 이 관행이 서서히 기독교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이후 세대들에게 상식적인 사회규범으로 전달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삶과 심리가 크게 바뀌었다. 이 방침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집약적인 친족 기반 제도가 없는 세계에 적응하고, 이 세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습을 재편하도록 강제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서서히 변형시켰다. (220쪽)


친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이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집단적으로 보였던 도덕적 심리적 기준이 개인의 몫으로 바뀐 것이다.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경제적 활동을 하거나 모든 분야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와 그림도 사촌 간의 결혼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만큼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많은 그림과 표, 그리고 그래프가 등장한다. 하여 어렵고 힘들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았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의존적 심리를 전쟁과 연결한 부분도 흥미롭다. 알다시피 전쟁이 인간 심리에 작용하는 부분은 크다.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에 대한 결속력이 커지고 그 분야에 투자한다. 사회 규범은 집단의 생존을 증진하도록 문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전쟁을 비롯한 충격적 사건은 심리적으로 이런 규범 및 관련된 믿음에 대한 헌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상호 의존으로 집단을 단결시키고 전쟁, 지진, 그 밖의 재난을 통해 종교에 더 헌신하고 참여하게 된다고.


전쟁은 사람들의 상호의존적 심리를 부추김으로써 도시 중심지의 시민 전체를 포함한 자발적 결사체 성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을 것이다. 전쟁은 또한 자발적 결사체의 성원을 늘렸을 것이다. (431쪽)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혁신이라는 것은 결국 집단 지성으로 이끌어 낸 법률, 과학, 사회 전반의 규범 같은 것들이다. WEIRD(위어드)의 심리가 더 낭느 사회로의 진화를 이끌어내고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라는 걸 저자는 말한다. 최재천 교수의 말대로 놀라운 책이며 방대한 자료에 감탄한다. 무려 10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연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저자가 고백한 대로 편향된 인구 집단을 표본으로 했다고 하지만 아시아(특히 한국)의 경우는 많이 부족해 아쉬운 건 사실이다. 


책 전체를 다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인류 심리 진화와 문화를 조금이나마 배우고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인류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며 인문 교양서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오늘날의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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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10-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올해 <총 균 쇠>를 읽기로 했던 연초의 계획이 생각나네요… 이 책도 흥미롭네요~

자목련 2022-10-28 14:09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흥미로운데 어렵기도 했어요.
목표치를 정해두고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고요. ㅎ

stella.K 2022-10-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 같긴한데 책값도 장난 아니고
벽돌책이네요.ㅠ

자목련 2022-10-28 14:11   좋아요 1 | URL
벽돌책은 하루에 읽어야 할 양을 정해두어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책값이 너무 비싸요. ㅠ.ㅠ
 

가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들고 있다. 환기를 시킬 때 창문을 열어두는 짧은 시간에 느끼는 바람은 가을이 곧 떠날 거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니 집 밖을 나갈 때는 단단히 옷깃을 여미게 된다. 드러나 맨살을 꽁꽁 숨길 기세로 말이다. 


가을이, 인사도 없이 사라질 가을이 아쉬워서 이런 단편을 곁에 두었다. 단편을 읽는 시간이라는 제목이 괜히 근사하다. 단편 읽는 시간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나 차분한 음악이 있었으면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김연수의 단편집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란 제목도 좋다. 사실, 뭐가 안 좋겠는가. 김연수를 기다린, 그의 단편을 기디란 독자라면 다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사인 인쇄본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김연수의 사인본에 약간의 사연이 있다. 김연수의 소설과 그런 에피소드(나만이 아는)가 있다는 게 좋을 뿐이다.책 사이에 스며든 엽서에는 “가을이 되자,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당신에게”라는 인사말이 있다.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계절마다 좋은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되자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우리는 곧 겨울이 되면 눈 내리는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계절이 오고 가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봄에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있다면 가을에는 등단 1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있다. 이 작품집에 김연수의 단편도 있다. 오랜만에 김애란의 단편도 만난다. 문지혁 작가의 단편은 처음이지 싶다. 아니 작가의 소설 자체가 처음인 것 같다. 작년 대상 수상자의 이름을 보고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가을에 읽는 단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양식 같다고 할까. 단편을 더 즐겁게 읽을 이유를 찾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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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10-25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사진에 등장하는
책 읽는 소녀를 제가 좋아합니다 ㅎㅎ
가을에 읽는 한국 단편 좋으네요.
편혜영 작가도 반갑고요**

자목련 2022-10-27 11:58   좋아요 1 | URL
저도 많이 좋아합니다.책장에 소녀가 몇 명 더 있습니다. ㅎ

scott 2022-10-2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왼쪽 한낮 우울 부터 맨 오른쪽 끝과 시작 까지 전부 저의 최애작들!ㅎㅎ 올해 젊은 작가 수록작중에 백수린 작가 단편이 인상 깊었습니다. 연수옹의 <진주의 결말>은 우수상작 ^^

자목련 2022-10-27 11:59   좋아요 1 | URL
우와 정말요? 백수린의 단편은 아직입니다. 편혜영와 김연수만 읽었어요!

blanca 2022-10-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김연수 단편 중에 뭐가 제일 좋으셨어요? 궁금해요. 저는 아직 아껴두었죠. 가을이 가는게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정말 이 가을 하늘, 햇살을 어디에 비할 바 있을까요?

자목련 2022-10-27 12:00   좋아요 0 | URL
아직 다 읽지는 못했어요. 블랑카 님처럼 아끼는 이유도 있고 한 편씩 읽다보니 조금 천천히 읽고 있어요.
쏟아지는 햇살을 한 줌 나만의 공간에 숨겨두고 싶은 날들입니다. 이 가을 충만하게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2-10-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보고 금방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을이 곧 떠나갈까 두렵네요. 단풍이 제법 많이 떨어졌더라구요ㅜㅜ 은행잎은 아직 물들기 전이긴 합니다만^^;;;
저도 김연수 작가의 싸인 문구를 보고, 음🤔
했습니다. 좀 섭섭할 정도로~ㅋㅋ
근데 이승우 작가님 싸인본 신간 책을 보고 헉!!!!! 차라리 김연수 작가님 싸인 문구가 친절하셨어요^^
김스옥 문학상 표지의 편혜영 작가님 넘 예뻐서 늘 입꼬리가 올라가던데, 이 사진이어 더 반가운 책입니다.^^

자목련 2022-10-27 12:01   좋아요 1 | URL
가을을 데리고 돌아오셨을까요? 사인본에 대한 매력이 크게 없습니다. ㅎ
편혜영 작가의 표지 사진 좋아요. 저도 따라해보고 싶은 ㅎㅎ

coolcat329 2022-10-2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읽는 단편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양식‘
아 너무나 와닿는 말입니다.
저도 책장에 있는 단편을 찾아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22-10-27 12:02   좋아요 1 | URL
우리 가을 밤에는 단편을 읽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