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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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의 소설에 대해 말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내가 느낀 것들이 작가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작가의 일부이기에 처음 받아들인 느낌이 변화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단편과 에세이를 만나는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녹색 갈증』으로 처음 만난 최미래의 소설은 복잡한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모호하기도 했고 그 모호함이 신선하기도 했다. 


『녹색 갈증』은 연작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장편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과거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화자인 ‘나’는 ‘윤조’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윤조 때문에 ‘나’는 가족과 친구, 다른 관계는 단절되었고 결국엔 윤조와 연을 끊었다. 시간이 흘러 「설탕으로 만든 사람」에서 ‘나’는 모텔 종업원으로 일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그곳에서 배달 일을 하는 옛 연인 ‘명’과 재회한다. 그러나 과거의 감정이 남아 있는 건 아니고 아는 체를 할 뿐이다. 함께 산에 오르며 다시 시작할 계기를 바라지만 서로의 간극만 확인하며 다시 이별을 한다. 


소설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어떤 질병으로 인해 모두가 힘든 시간을 지낸다. 특히 1월 26일은 모두 슬픔에 잠식된 날로 등장하는데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는다. 모텔에 거주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지니고 ‘나’는 그들을 관찰하듯 지켜본다. 그러나 ‘나’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나’가 느끼는 고독과 결핍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조’로 인한 것이다. ‘윤조’는 ‘나’가 쓴 소설의 인물로 ‘나’는 여전히 윤조를 원하고 그리워한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글쓰기, 소설 쓰기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내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밤에는 내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계절에는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일부러 우울해지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꿈에서는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걸 놓아버리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 모든 걸 무얼 말하는 걸까. 이 말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 말보다 내가 나에게 한 말이 더 많았다. (「설탕으로 만든 사람」, 72쪽)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다시 쓰면 되는 건 아닐까. 처음 윤조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 다시 윤조에게만 집중하니 현실에서의 관계는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언니와 엄마가 있는 집으로 온 「빈뇨 감각」에서 내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직장을 관두고 방에서 생활하는 언니와 매번 사랑에 실패하는 엄마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없다. 글을 쓰겠다고 집을 나간 나보다는 둘 사이는 조금 가까워 보인다. 


다시 모텔로 돌아가려 예전에 사용했던 방에서 물건을 챙기던 나는 보석함을 발견한다. 그건 윤조가 등장하던 소설 속 할머니의 물건이었다. 보석함을 열자 윤조가 기어 나왔다. 윤조가 등장한 후 일상은 활기를 찾는다. 「뒷장으로부터」는 예전부터 함께 지냈던 것처럼 윤조가 언니와 엄마에게 스며드는 일상을 그린다. 잘 웃고 언니와도 잘 지내고 엄마를 돕는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도시락을 싸서 산에 가자는 말에도 흔쾌히 동의한다. 엄마와 언니와 윤조를 따라 나도 산에 오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속하지 못하고 혼자다. 


내가 원하는 건 윤조였을지도 모른다. 언니와 맥주를 마시며 소소한 수다를 떨고 다정하게 엄마를 위로하며 살고 싶은 나의 욕망이 윤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윤조는 내가 아니고 윤조는 곧 사라질 것이다. 소설 속 보석함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언제든 그곳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보석함뿐일까. 윤조는 어디서든 불러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 아닌가. 나는 혼자가 아니고 윤조와 함께 생활할 수 있고 이곳이 아닌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내가 꿈꾸는 모습의 윤조를 만나는 일을 꿈꾸면서 말이다. 그건 ‘나’가 쓰기를 놓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에세이 「내 어깨 위의 도깨비」에서 느낄 수 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형태는 황정은을 잠깐 떠올릴 수 있지만 황정은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득 소설을 읽는 일도 윤조를 불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무언가와 닿고자 하는 욕망, 누군가를 만나고자 하는 바람이 있지 않은가. 불가능했던 일상이 아닌 무한 가능한 세계.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 그 안에서 어떤 결핍도 없이 살아가는 상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더라도 말이다. 


연필을 굴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는 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윤조는 여전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았던 장면은 내가 상상해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 있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그곳의 날씨는 자유자재로 바뀌었으며 처음 디뎌본 곳인데도 이미 예전에 와본 적 있는 것처럼 익숙했다. 긴 시간 뒤에 찾아올 거라고 예상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 당도한 것처럼. (…) 나는 다시 연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산과 같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윤조와 함께 라면 언젠가 눈을 감지 않고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프롤로그」,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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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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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부모나 선생님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만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인생에 있어 친구는 소중하다. 그렇다고 친구의 비밀을 무조건 알 필요는 없다. 내 비밀을 들어주는 친구의 비밀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도 하니까. 나는 그것을 ‘순환의 법칙’ 정도로 여긴다. 그런 삶의 순환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고 믿는다. 숨통이 조여오는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 생은 아름답게 빛난다. 발레리 페랭의 『비올레트, 묘지지기』 는 그런 소설이다. 켜켜이 쌓인 슬픔과 고통이 새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소설, 작은 틈을 벌려 그늘진 삶에 빛이 들어오도록 도와주는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묘지기기 비올레트가 들려주는 담담한 자신의 이야기는 모두를 울린다. 단순하게 묘지를 관리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나는 소설을 읽을수록 점점 그녀의 삶에 빠져들었고 제발 그녀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당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올레트는 묘지를 관리하고 방문객에서 묘지의 위치를 알려주고 화분을 팔고 정원을 가꾸며 고요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남편 필리프 투생은 실종 상태고 죽음에 둘러싸였지만 평온을 느낀다. 


죽음이란 늘 그 모양이다. 죽은 지 오래될수록 산 사람들에게 끼치는 죽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세월이 삶을 풍화시킨다. 세월이 죽음을 풍화시킨다. (21쪽)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비올레트, 소설은 그녀가 살아온 삶을 천천히 보여준다. 누군가 죽고 장례식이 진행되고 추모하는 이들의 모여 죽은 자를 위해 노래하고 편지를 낭독하며 그를 기억하는 일,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그 순간을 기록하는 비올레트.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녀의 상처와 슬픔, 죽음이라는 사유를 통해 조금씩 회복하고 치유되는 시간은 그녀만의 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것이기에 때로 엄숙해지고 때로 먹먹함을 숨길 수 없다.


죽음은 도처에, 언제나 있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안 그랬다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은, 늘 다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는데도 우리를 물어뜯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개와 같다. 더 나쁘게는 우리 측근을 물었을 때. (117쪽)


아무리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삶은 너무 복잡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슬픔의 파도가 덮쳐온다. 비올레트에게도 그랬다. 부모에 대한 흔적은 하나도 모른 채 고아로 시작된 삶. 비올레트란 이름에 의미조차 생각할 수 없다. 이리저리 위탁가정을 옮겨 다니며 그녀가 바란 건 그곳을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등장한 필리프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첫 만남에 끌렸고 그를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필리프와 미래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없었고 사랑하는 일만 중요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필리프의 부모를 그가 막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곧 비올레트의 전부가 된 딸 레오닌이 태어났으니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차단기를 관리하는 건널목지기도 비올레트는 충분했다. 


레오닌은 비올레트를 웃게 했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바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오닌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친구들과 신나게 캠프를 떠난 레오닌이 사고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 레오닌의 죽음은 비올레트의 삶을 꺾어버렸다. 슬픔의 무게로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레오닌이 잠든 곳의 묘지지기로 일하게 된 건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레오닌을 만나러 간 곳에서 사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비올레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침잠한 채 죽은 듯 살았을 것이다. 슬픔에 잠긴 비올레타에게 묘지지기를 하면서 그가 정원을 가꾸게 된 이야기를 듣고 흙을 만지며 그녀는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거기 레오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레오닌의 사고에 집착하는 비올레타에게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삶이란 이어달리기와 같아, 비올레트. 내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지. 내가 너에게 바통을 넘겨줄게. 언젠가 너도 다른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도록 해.” (383쪽)


그러나 비올레트와 다르게 필리프는 묘지지기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묘지를 관리하는 일은 비올레트만으로 충분했기에 그는 예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를 만났다. 그의 외출은 실종으로 이어졌다. 죽음이 정착하는 묘지를 살피고 기록하는 비올레트에게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언을 위해 묘지를 찾은 남자 쥘리앵의 등장으로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경찰인 쥘리앵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비올레트에게 건넨다. 그 일기장에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록과 죽은 남자의 묘를 찾을 때마다 만난 묘지지기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발레리 페랭은 비올레트를 중심으로 남편 필리프와 쥘리앵과 그녀의 어머니, 레오닌 죽음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엮었다. 소설 곳곳에서 모든 죽음을 애도하며( ‘모든 죽음은 누군가의 사건이니까요.’ (49쪽)), 죽음과 삶을 사유(‘우리는 목숨을 구하는 방법은 배우지만, 자신 혹은 타인의 삶을 되살리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496쪽))하고 통찰한다. 동시에 아름다운 한 편의 연애소설이자 끝을 예상할 수 없는 추리소설의 형식도 지닌 놀라운 소설이다. 부서질 것 같은 비올레트의 생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적과 신비를 배운다. 저마다 생의 비밀을 간직하며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상실과 회복을 반복하는 모든 생을 위로한다. 좋은 소설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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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2-07-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덕분에 좋은 소설 하나 더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7-28 08:20   좋아요 0 | URL
저는 무척 좋았던 소설입니다. 오거서 님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 2022-08-0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저..자목련님 리뷰읽고 바로 책주문했어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2-08-08 15:17   좋아요 0 | URL
좋은 느낌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게 만나세요^^
 
멀쩡한 남자를 찾아드립니다 - 그웬과 아이리스의 런던 미스터리 결혼상담소
앨리슨 몽클레어 저자, 장성주 역자 / 시월이일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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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몽클레어의 장편소설 『멀쩡한 남자를 찾아드립니다』은 한창 방송가를 휩쓰는 연애 상담이나 일반이 출연해 커플로 이어지는 내용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세상의 수많은 남자 가운데 운명처럼 누군가 만나는 일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기에 전문가의 도움과 조언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21세기의 현재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남을 시작하지만 소설 속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영국의 현실은 다르다. 그러니 소설 속 ‘바른 만남 결혼 상담소’ 는 시대의 요구상을 반영한 기발한 사업이다. 


상담소의 사업자는 두 명의 여성 아이리스와 그웬으로 고객이 원하는 타입의 상대를 꼼꼼히 기록하고 연결시키려 노력한다. 아이리스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추구하지만 뭔가 비밀에 가득하다. 그웬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아들의 양육권은 시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시댁에 살지만 아들의 양육에는 권리가 없다. 환경과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둘은 서로를 보완하는 완벽한 파트너다. 상담소는 별 탈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여성 고객 틸리가 상담소를 통해 소개 받은 남성 고객 트로워에게 살해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담소에 찾아온 형사는 아이리스와 그웬에게 살인도구인 칼의 피에서 틸리의 혈액형과 일치하고 그 칼이 트로워의 침대 밑에서 발견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작 트로워는 틸리에게 만남 취소의 편지를 받고 만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담소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환불 요청이 끝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업이 망할 지경이다. 그웬은 트로워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아이리스에게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범인을 잡자고 제안한다. 


소설은 달콤한 연애 로맨스가 아니라 살벌한 미스터리였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웬은 트로워의 무죄를 확실하면 그를 면회 가기에 이른다. 그웬은 자동차가 아닌 지하철, 버스를 이용할 방법을 모르는 우아한 사모님이었다. 하녀의 도움으로 트램을 이용한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을 잃고 발작으로 힘들었던 그웬에게 상담소는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구였다. 자신이 본 트로워는 절대 범인이 아니었기에 기필코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구치소에서 자신이 기르는 금붕어를 걱정하는 남자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는가. 


아이리스와 그웬은 틸리의 주변을 탐색한다. 가명으로 미리 틸리와의 친분을 꾸미고 그녀가 근무한 여성복점과 그녀를 추모하는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해 틸리가 누구를 만나고 사귀고 은밀하게 알아본다. 그 과정에서 틸리가 조직적으로 암거래를 주도하는 무리의 일원이었음을 확인한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되지 않은 런던에서 배급받은 물품은 빼돌리거나 뒷돈을 받고 거래하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거기다 배급표를 위조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 계획과 비밀을 모두 틸리가 알고 있다면 무리에서 틸리를 죽일 동기가 충분했다. 경찰은 트로워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용의자의 등장으로 아이리스와 그웬의 활동은 더욱 대담해지고 활발해진다.


틸리를 죽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고 성장하는 아이리스와 그웬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함구하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와 연락해 위기를 극복하는 아이리스는 그웬에게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지만 부상으로 참여하지 못했으며 작전에 참여한 다른 동료가 돌아오지 못함을 말한다. 그웬 역시 남편의 전사 소식으로 충격을 받아 감금과 같았던 정신병원의 입원 생활과 현재 시어머니가 지정한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양육권을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복종하듯 지내는 시간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까지. 


아이리스와 함께 틸리가 만났던 사람을 만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서 그웬은 조금씩 달라진다. 진범을 찾는 활동에 못마땅한 시어머니와 대립하면서도 자신감을 찾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유머까지 넘치는 아이리스와 뛰어난 통찰력으로 진중하면서도 단호한 그웬의 연대는 서로를 더욱 성장시킨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대단한 활약뿐 아니라 경찰 조직이나 가십을 다루는 신문기사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보여주며 비판하는 목소리까지 담은 소설이다. 소설 곳곳에서 의견을 나누는 아이리스와 그웬의 대화는 시원하고 유쾌하다. 


“내가 너한테 이 정신 나간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한 건,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평생 남자들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리 듣는 게 아주 지겨워 죽을 것 같아서였다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 살지는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어서였다고. 그랬는데 이제 그게 다 물거품이 될 판이야. 웬 미친놈이 죄 없는 여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죄가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어.”

“죄가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여자 본인도 살인자였다면 모를까. 희망을 손에 넣어야 할 밤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는 신세가 된 건 너무나 부당해. (…) 우린 지금 궁지에 몰렸고, 난 궁지에 몰리면 싸우는 쪽이야. 그것도 아주 지저분하게, 손에 잡히는 무기는 뭐든 다 이용해서.” (178~179쪽)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미루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 절망이 아니 희망을 보려는 아이리스와 그웬의 의지는 전쟁 후 폐허속에서도 삶이 이어가는 모두의 것과 닮아 가슴이 뭉클하다. 지루함은 1도 없는 유머와 재치에 넘치는 감동까지 안겨주는 멋지고 통쾌한 소설이다.


폭격의 흔적이 더 많이 눈에 띄었고, 2층 좌석에 앉은 덕분에 보도 쪽의 시선을 가리려고 세워둔 임시 가림벽 너머까지 언뜻언뜻 눈에 들어왔다. 폭격이 무차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남아 있는 증거에 또렷이 드러났다. 극장 한 곳은 조금도 망가지지 않는 채 우뚝 서 있었지만 바로 옆의 극장은 무너진 상태였고, 무대만 그대로 남아 다시는 오지 않을 관객들을 기다렸다. 허물어져가는 벽에 붙은 광고들은 희망찬 내용을 담고 있었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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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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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의 장편은 처음이다. 여성의 상처와 연대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다. 함께 살아가는 삶을 향한 태도가 비관과 부정이 아닌 낙관과 긍정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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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효석 수상작집을 통해서 이서수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요^^ 하이퍼 리얼리즘을 구사하더군요. 현실을 너무 잘 묘사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이 책 저도 마음 속으로 찜해놓고 있었는데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자목련 2022-07-27 14:21   좋아요 0 | URL
<미조의 시대>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그 단편이 좋아서 작가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 장편도 좋았어요^^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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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강의 초기 소설을 더 좋아한다. 최근 그녀의 소설이 사회 전반에 큰 울림을 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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