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고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인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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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소유가 아니라는 걸 안다. 무조건적인 사랑도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상대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랑은 내가 원하는 사랑만 고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결혼에 이르렀지만 어딘가 잘못된 걸 느꼈을 때 그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랑수아즈 사강의 스물아홉 번째 소설로 30년 만에 부활한 『황금의 고삐』 속 뱅상과 로랑스 이야기다. 


결혼 7년 차에 접어든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사랑이었다. 부유한 로랑스의 집안에서 무명의 음악가 뱅상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뱅상과의 결혼으로 로랑스는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선택한 로랑스의 사랑은 뱅상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로랑스가 원하는 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뱅상은 움직였다. 양복 스타일은 물론이고 뱅상의 용돈, 사랑을 나누는 방식까지 로랑스가 결정했다. 뱅상은 그 사랑에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뱅상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살짝 외도를 하는 일상을 유지했다. 그가 만든 영화 음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뱅상의 성공으로 기울어진 사랑이 적어도 균형을 이루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그들의 사랑에 균열을 냈다. 뱅상의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그 돈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제껏 로랑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며 살아온 뱅상에게 돈은 내적 자유를 허락했다. 마음대로 양복을 고르고 친구와 함께 지낼 곳을 생각하고 새로운 피아노를 구입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상한 건 로랑스가 뱅상의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음악으로 받은 수입을 전부 지인이 만드는 영화에 투자하자고 제안하고 장인을 내세워 공동계좌를 만들었다. 그것은 돈을 찾을 때마다 로랑스가 서명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랑스와 뱅상의 거리는 멀어진다. 그 과정에서 뱅상은 로랑스와 자신의 사랑을 돌아본다. 로랑스는 분명 자신을 사랑했다. 하지만 뱅상은 로랑스에 대한 사랑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로랑스를 만나면서 어느새 자신을 지배한 로랑스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랑스가 뱅상을 가스라이팅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입을지 뱅상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영화 음악으로 성공한 뱅상의 뒤에 뛰어난 조력자인 로랑스가 있다는 기사와 인터뷰를 뱅상만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누가 봐도 뱅상을 향한 로랑스의 집착이었다. 안타까운 건 뱅상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랑스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의 절망의 근원에는 우선 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힘도, 신뢰감도 경쾌함도 갖지 못한 나, 유치하고 소심하고 보잘것없는 나, 마침내 나는 존재 그 자체보다 나 자신을 더 원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다른 내가 있어서, 그것은 보통 때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삶을 되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256쪽)


사강은 너무도 뻔한 사랑을 다루면서도 전혀 뻔하지 않게 사랑을 다룬다. 사강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아름답고 솔직하게 담아낸다. 로랑스와 뱅상의 교묘하게 주고받는 밀당으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게 만든다. 얼핏 『황금의 고삐』에서는 모두가 로랑스가 고삐를 쥐었다고 믿게 만든다. 사실 그렇다. 뱅상이 경마에서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는 일도 잠깐의 일탈처럼 여겨지니까. 뱅상이 집을 나가려 하자 로랑스는 자신의 진심을 토해낸다. 경제적인 지원이 아니면 뱅상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다고. 


나는 로랑스가 좀 지나치게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지나친 감정이 그녀에게 지옥 같은 생활과 맞먹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는 어리석고, 경멸한 만하고,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맹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그녀가 가진 어떤 그 무엇, 내가 알지 못했고,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것이며, 또 아쉬워하면서도 내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듯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을까? (301~302쪽)


독자인 나는 뱅상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 로랑스가 연기를 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 예나 지금이나 이토록 어렵고 힘든 게 사랑이다. 어쩌면 그건 로랑스가 뱅상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결말로 로랑스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했으니까. 사강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한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로랑스와 뱅상의 사랑은 어긋나버렸고 잘못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뱅상의 전부를 소유하고자 했던 로랑스의 사랑을 판단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뱅상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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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는 식물들 - 아직 쓸모를 발견하지 못한 꽃과 풀에 대하여
존 카디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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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장점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일 수 있다. (99쪽)


여름은 무성한 잡초를 만나기 좋은 계절이다. 밭과 논에는 기르는 작물과 함께 풀이 자란다. 농작물이 주인의 발걸음을 듣고 자란다는 소리는 풀을 매러 얼마나 자주 밭에 오느냐는 성실함이 숨겨져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맘때 벼를 심은 논에는 김매기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더위를 피해 이른 새벽이나 저녁 어스름에 논에서 김을 매는 풍경은 볼 수 없다. 병충해를 막고 잡초를 제거하는 농약을 치기 때문이다. 물론 우렁이 농법이나 오리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노동력이 부족한 시골에서 친환경 농법을 고수하는 일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작물에 피해를 주는 잡초는 어떤 게 있을까? 어린 시절 마구잡이로 뽑거나 잘라낸 쓸모없는 풀들이 약용 성분을 가진 귀한 식물이라는 걸 알 게 된 지금 잡초는 잡초가 아닐지도 모른다. 『미움받는 식물들』이란 흥미로운 제목에 끌려 궁금했던 이 책은 잡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잡초와 인간의 이야기, 다른 방면으로 말하자면 생명력에 대한 보고서 정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30년 넘게 잡초를 연구한 자연 관찰자 존 카디너 박사는 여덟 종의 잡초의 특성과 어떻게 잡초로 전락(?) 했는지 그 과정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그가 선택한 여덟 종은 민들레, 어저귀, 기름골, 플로리다 베가위드, 망초, 비름, 돼지풀, 강아지풀이다. 민들레, 비름, 강아지풀 정도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나머지는 생소한 풀이었다. 봄이면 노란 잎이 반가운 민들레는 어쩌다 잡초가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토종민들레가 아닌 서양 민들레는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걸로 안다. 서양 민들레가 잡초로 찬밥 신세가 된 경우는 인간의 욕망이 있었다.


약용으로 재배했던 민들레는 정원의 등장으로 초록 잔디에 눈에 띄는 노랑이 되었다. 완벽한 잔디만을 원했던 인간에 의해 민들레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그 결과 제초제가 등장했지만 뿌리에 탄수화물을 축적했다 봄이 되면 다시 개화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민들레는 지금까지 우리 곁에 생존한다. 민들레는 진화하여 잔디에 적응한 개체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똑같이 복제한 씨앗을 다른 잔디에 옮긴다. 대단하지 않은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바람을 타고 어디듯 날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잔디밭에 노란 민들레가 있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아닌데,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민들레도 그것에 적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저귀가 잡초가 된 사연은 남다르다. 대마와 함께 북아메리카에 스며든 어저귀는 처음에는 섬유작물로 대접받았다. 어저귀 생산을 장려하기도 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저귀 대신 대두가 주목받는다. 한때 장려했던 어저귀가 스스로 자멸할리 만무하니 저자의 바람처럼 어저귀가 잡초가 아닌 작물이 되어 대두와 함께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에 공감한다.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더 강력한 제초제가 등장한다. 일일이 손으로 잡초를 뽑던 이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기름골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저자가 동아프리카 잡초 사찰을 하면서 마주한 현실은 가혹했다. 잡초를 죽이는 제초제를 판매하면서 그에 대한 설명은 전무한 것이다. 사용 방법과 보관 방법을 몰라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잡초는 사라지지 않았고 땅을 갈아엎는 대신 제초제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일은 잡초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그것에 적응하는 다른 잡초를 탄생시킨다.


농부들이 쟁기질을 중단하자, 죽이기 쉬운 한해살이 잡초가 사라지는 대신 죽이기 어려운 두해살이 또는 여러해살이 잡초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196쪽)


더 많은 수확량을 얻기 위해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등장하면서 제초제의 성능은 더욱 좋아졌다. 그에 따라 새로운 잡초의 등장은 아니지만 잡초는 제초제에 저항성을 발달시켰다. 잡초의 시선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감기를 앓거나 백신 투여 후 면역력이 향상되는 것처럼 말이다. 제초제가 잡초에 주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스트레스 테스트로 알게 된 사실도 흥미롭다.


스트레스는 식물에 후생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후생적 변화가 유전자의 DNA 서열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DNA를 둘러싼 화학반을 바꾸고, 그로 인해 유전자가 작용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후생적 변화는 유전자가 조절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즉 유전자 발현을 켜기도 하고 끄기도 한다. 그 과정에 반드시 돌연변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초제 저항성으로 이어진 과정에 관여한 유전자도 그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215쪽)


대규모의 기업화와 산업화로 생산되는 농업의 세계에서 잡초는 불필요한 존재라 여긴다. 그러나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잡초 역시 진화한다.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도 박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지구의 회복력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자연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식량 생산을 지속하는 방법으로 잡초를 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삶에 파고든 잡초에 대한 이야기는 재밌고 놀라웠지만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어쩌면 이런 분야의 책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마주하는 풀들이 이제는 생소하게 다가올 것 같다. 그저 잡초로 보였던 식물에 숨겨진 대단한 역사와 생명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말이다.


잡초는 인간 본성이 식물에 표출된 결과이자 식물과 인간 사이에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진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잡초화 패턴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새로운 작물 생산법이 등장하면 새로운 잡초가 등장한다. 잡초의 성공 여부는 공진화 파트너가 탐욕, 근시안, 게으름, 순진함, 기술 집착, 교만 같은 인간 특유의 형질을 어떻게 발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사람이 있는 곳에 잡초가 있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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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19 1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잡초들 볼 때마다 참 생각이 복잡해지곤했는데요...이 책이 저의 생각을 정리해줄 듯 합니다.
자목련님 요즘 환경 자연에 관한 책 열심히 읽으시네요.👍

자목련 2022-07-21 14:47   좋아요 1 | URL
잡초는 왜 잡초일까, 근원적인 질문과 맞닿는 시간이었어요.
책은, 어쩌다 보니 연달아 읽었는데 이 책도 좋았어요.

서니데이 2022-08-10 2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08-12 08:47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시원한 날들 이어가세요^^

mini74 2022-08-10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2-08-12 08:48   좋아요 1 | URL
미니 님, 저도 축하드려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8-10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8-12 08:48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맑고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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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말 좋은 산문이다. 더 잘 쓰고 싶고 더 잘 읽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 어떤 연습을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이란 게 이렇게 좋구나 싶은 걸 전해준다. 참 좋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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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2-07-18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래요 🐥

자목련 2022-07-18 15:03   좋아요 0 | URL
비타 님도 분명 반하실 책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7-18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 두고 아직 읽질 못했는데 책이 좋다니...안심되고, 기대 됩니다.

자목련 2022-07-19 16:01   좋아요 1 | URL
천천히, 끌리는 그 때에 읽으셔도 기쁨을 안겨줄 책입니다^^
 


소읍에 사는 덕분에 아침마다 새소리를 듣는다. 여름인 요즘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와 뻐꾸기의 소리를 접한다. 그러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은 궁금해진다. 비가 오는 날에 새들은 어디서 비를 피할까, 어디서 휴식을 취할까. 어린 시절 흔하게 보던 참새로 보기 힘들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까치도 그렇고 가을이면 들판을 가득 채우던 잠자리 떼도 기억 속에만 있다. 그만큼 그것들에게서 멀어진 탓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이 변화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의 모든 것들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는 내게 레이철 카슨 외 다양한 이들의 에세이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는 제목처럼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 사는 축복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아가는가 깨닫게 만든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자란 탓에 자연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삶은 아닐지라도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 좋았다는 걸 어른이 돼서 알게 되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갯벌과 바다를 볼 수 있었고 확실하게 다른 계절을 느끼는 일을 추억할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인가, 묻는다. 레이철 카슨을 포함한 다수의 저가가 랠프 월도 에머슨의 에세이집 『자연』에서 말하는 주제를 생각하고 그것에 쓴 글에서도 다르지 않다. 랠프 월도 에머슨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숭배의 교훈을 배우는 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자연에게 배워야 할 것은 여전하다. 자연에 대한 사유와 시선을 생각하면 얼핏 농부나 환경활동가, 생물학자나 생태학자를 떠올리겠지만 에세이에 참여한 이들은 시인, 에세이스트, 저널리스트, 활동가, 조경가, 농부, 과학기술 전문가 등 다양하다. 자연이라는 광범위한 세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들이 선택한 저마다의 자연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습관이나 기억으로 시작해 코로나로 인해 실내수영장이 아닌 연못에서 수영을 하면서 느낀 것들, 가을밤 야간 비행을 하는 새들을 관찰하는 일, 자연 안에서 어떤 편견과 거부감도 없이 존재만으로 자유를 느끼는 경험, 육류를 소비하며 가장 큰 해악을 키지는 현재 우리의 먹거리에 대한 걱정, 이 모든 중심에 자연이 있다.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걸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치유와 회복을 자연에게 찾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연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숨 막히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독기를 뚫고 눈부신 경치로 나아가는 길이 되어, 자신의 고통을 버릴 용기를 지닌 사람을 인도한다.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연은 같은 것을 제공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말지는 그들과 그들이 믿는 신 사이의 문제이며, 자연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75쪽, 후안 마이클 포터 2세)


가만히 바람을 느끼고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주는 위안, 여름에 수확한 감자를 맛있게 먹는 일, 작은 땅을 일구며 흙을 만지며 살고 싶은 바람의 끝에는 모두 자연이 있다.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에서 마주한 놀랍도록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피어난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늘 목도한다. 자연의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사라지는 벌들을 통해 배운다. 너무 늦은 배움이다. 지구라는 생명체에 거하면서 우리가 돌아갈 그곳도 자연이라는 걸 생각하면 자연과 공생해야 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


계절은 자연의 시계이자 달력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자연의 단계들을 중심으로 돈다. 나는 계절을 밀어낼 수도, 끌어당길 수도 없다. 걸음을 늦추라거나 서두르라고 설득할 수도 없다. 자연은 지극히도 아름답고 잔혹하며, 내가 아무리 무수하게 애원해도 통보도 없이 나를 버려둔 채 나아가고 변화해왔다. 자연은 자애롭지도, 악의적이지도 않으며 무심할 뿐이다. 우리는 전체의 일부이고 자연은 그걸 안다. (182쪽, 맥스 모닝스타)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자연에게도 휴식이 필요함을 모른척한다. 순환과 회복을 위해 인간이 자연과의 거리를 유지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마주하는지 코로나19를 통해 체감하고서야 뒤늦게 인정하는 어리석음이라니.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를 통해 접한 자연은 나와는 다른 세계가 아닌 곁에 두고서도 우리가 몰라보는 자연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침묵의 봄』의 작가 레이첼 카슨의 글은 1962년의 연설이지만 지금 현재에 적용해도 뛰어난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한다. 무너지고 사라지는 일부가 될 것인지, 보존하고 연대하여 함께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나가야 한다는 걸 말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자 그 자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시간은 앞을 향해 흐르고 인간도 그 흐름과 함께 움직입니다. 우리 세대는 환경과 타협에 이르러야 합니다. 진실에 대한 외면이나 오만으로 대피하지 말고 현실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중대하고 냉엄한 책임이 주어졌으니, 한편으로는 그것이 빛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나아갈 세상에서 인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성숙함과 지배력ㅡ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지배력 ㅡ을 증명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과 운명이 놓여 있습니다. (29쪽, 레이첼 카슨)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를 읽으면서 자동으로 떠오르는 건 이 책의 시작이 된 랠프 월도 에머슨의 에세이집 『자연』,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김산하의 『김산하의 야생학교』였다.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중시하려면, 뭇 생명을 중시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희생시키지 않는 철학이 삶의 밑바탕을 이룰 수 있다. 타인은 물론 심지어 사람이 아닌 생명체에게까지도 이심전심이 미칠 때에만 생명 존중 사상은 체화(體化)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문명 자체가 진정으로 생명을 받들어야 한다.( 『김산하의 야생학교』, 중에서)


자연을 지킨다는 말은 우습지만 우리가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자연을 지키는 방법이다. 매일 사용하는 플라스틱 컵, 더위와 추위를 참지 못해 지키지 못하는 적정 온도. 그 작은 실천이 모아지면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고 지구는 좀 더 건강해진다.


자연이라는 주제를 떠나서도 각각의 에세이는 매우 훌륭하고 아름답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좋은 에세이를 만나는 일,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커다란 매력이자 즐거움이다. 그런 점에서는 경이로운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경쾌하고도 우아한 문장이 가득한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으로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똑같은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완벽한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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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연도 휴식이 필요하다...이 말이 너무나 와닿습니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지배력‘을 이젠 정말 보여줘야 한다는 레이첼 카슨의 말 모두가 새겨들었음 하네요.

자목련 2022-07-14 17:56   좋아요 0 | URL
쿨캣 님, 감사합니다. 이 책 참 좋았습니다. 주제로 다룬 자연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고 참여한 저자의 글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고 맑았다고 할까요.
 
소설 보다 : 여름 2022 소설 보다
김지연.이미상.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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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단편집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소설 보다 여름 2022에서 만나니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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