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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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의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가 궁금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시집의 제목 때문이다. 바다, 빗소리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작약에 꽂혔다. 작약을 취급하는 세계라니, 그 세계는 마치 나의 세계 같았다. 시집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그게 정확한 느낌이다. 잘 몰라서 읽고 잘 몰라서 좋다. 잘 몰라서 넘길 수 있고 잘 몰라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시를 먼저 읽는다. 그냥 지금 우리의 마음 같아서. 우리의 현실 같아서. 단단하지 않더라도 소멸하지 않았던 어떤 믿음이 한순간에 망가졌다. 망가졌으니 고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눈치를 보고 그냥 무리에 숨으려 한다.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행태를 지켜보자니 화가 난다.



늘 정확하게

네모반듯하거나 동그랗게

잘 지켜 준다니까


천 개의 연장통처럼 뭐든 다 들어 있거나

다 고쳐 준다니까


헛디뎠을 때

굴러떨어질 때

잘못 만났을 때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해결과 수습은 시간 문제라는데


늘 시간이 없다 (「방법」, 전문)



시는 이래서 좋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니 내 맘대로 해석할 수 있고 내 감정에 끌리는 대로 취하면 그만이다. 다른 독자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얼마나 많이 상처를 입어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공부는 끝이 없다는 걸 실천하려고 매번 인생 공부를 하려는 의도일까.



새와 저녁노을을 배우면

기차를 만들 수 있다


연도(年度)를 익히면 후회를 배울 수 있다


알파벳 여섯 개의 조합법을 배우면

배신하는 남자와 여자를 만들 수 있다


잠 안 오는 밤에

눈에서 제일 먼 엄지발가락을 주무르면

수면을 부를 수 있다


나사를 풀 때

심장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하는지는

수십 년째 외우지 못하고 헛돌지만


혀 닦는 법과

밤하늘의 별빛들만 제대로 습득해도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다 (「공부」,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너무 슬퍼서 목이 멘다. 너무 아파서 심호흡을 한다. 무엇에 휩쓸리는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이 떠올라서. 그 삶이 하나가 아니라 무더기여서 아프다.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설령 도움을 청했다 해도 내미는 손이 없어서 잡을 손이 없어서 결국 혼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에 닿지 않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 다시 일어설 힘이 아니라 욕할 힘이 필요하다는 절절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실컷 욕을 해도 괜찮다고 거든다. 아니, 나부터 한바탕 시원하게 욕을 해 볼까.



휩쓸려서 얼굴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시간을 버린 적도 많았다


휩쓸려서 폐허라는 말을 사랑하고

포도나무 밑 그늘이란 말을 좋아해서

곤란했던 때도 있었다


신발을 구겨 신듯

성격에 휩쓸려

인간에게도 바다에게도 가지 못했다


후회에는 갔다


나 혼자 내 힘으로

매번 (「휩쓸리다」, 전문)



나 없는 사이에 부가 내 발목을 훔쳐갔다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바닥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보니 손목도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다들 뭔가 애써 감추고 있는 눈치다


바닥에 앉으면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더니


별빛들이 매일 그런 식으로 계단을 오른다더니


다시 보니

목도 눈도 훔쳐 가고 없다


욕 좀 해도 괜찮을까요? (「바닥」, 전문)



진정된 마음으로 이제 이 시를 말해보자. 그래, 이 시였다. 이 시집의 표제 말이다.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를 마주하는 시. 상상하게 된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아니, 나 이거나 당신일게 분명하다. 나도 “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란 말을 기억했다가 꼭 말해보고 싶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 「취급이라면」, 전문)



어떤 이별을 상상하기도 하고 영원한 작별을 그려보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태도일까.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 오래 보고 있으니까. 작약을 만나려면 한 계절을 기다려야 하는데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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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김경미 시인의 시보다 이 시집은 공감도가 더 높아졌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건 또 왜인지 모르겠네요.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해보고 없으면 구입해야겠어요.
나의 세계가 취급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자목련 2024-12-15 10:21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지만 이 시집의 시 가운데 일상을 다룬 시와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나인 님도 즐겁게 만나실 바라요^^

꼬마요정 2024-12-1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뭔가 울컥 합니다.
‘후회‘는 배우자마자 쓸 수 있는 것 같아요ㅠㅠ

자목련 2024-12-15 10:25   좋아요 1 | URL
그쵸, 그 부분은 정말 울컥해요!
후회는 조금 천천히 써도 좋은데...

전야제 2024-12-1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드려도 문 안 열릴 때
두드린 적도 없는 문이 확 열렸을 때˝
이 구절에 꽂혀서 저도 이 시집 꼭 읽어야겠어요!
항상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님의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어루만져주시는 따뜻한 글 덕분에 힘이 납니다!^^

자목련 2024-12-15 10:26   좋아요 1 | URL
아마도 다른 시도 많이 꽂히지 않을까 싶어요!
저야말로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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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라는 시간은 딱 1년만 고생하면 다음으로 나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고3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이 시간만 지나면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냥 고등학교 3학년일 뿐인데 말이다.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연우’가 어느 날 큐브에 갇힌 설정으로 시작하는 보린의 『큐브』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우도 고3이다.

이유도 모른 채 투명한 정육면체 큐브에 갇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연우를 찾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연우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기력 그 자체다. 잠이 쏟아지고 잠에서 깨면 배가 고프다. 다행인 건 언제나 유부초밥이 있었다. 이상한 건 어디선가 ‘채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빨간 공, 언제나 같은 자리, 정육면체 한가운데 떠있다. 홀로그램 비슷한 것으로, 연우가 깨어날 때는 투병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시계처럼 아래에서부터 빨갛게 차오른다. 가끔 매미 소리를 낸 다음 메시지를 보여 준다. 넌 채집되었다, 근처에 먹을 게 있다, 의식을 통제할 거다, 내용은 딱 세 종류다. 공이 완전히 빨갛게 채워지면 큐브 안팎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온다. 연우 자신만 빼고. (19쪽)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데 어느 순간 ‘항상성 붕괴……부접합……조사종료……’란 말이 뜬다. 그리고 연우는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놀라운 건 연우가 큐브에 갇힌 아니 채집된 시간이 무려 1년이었고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연우는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자신만 빼고 모든 게 달라진 현실을 확인한다. 연우가 좋아하던 해고니는 꿈이었던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에서 일을 하고 다른 친구들도 대학에 갔다. 연우도 대학 입시를 위해 도서관에 다닌다.

연우에게도 변화가 있다. 그건 연우만이 아는 비밀이다. 큐브에 갇혔을 때 채집된 장치와 거기에 복제된 자아인 젤리 곰이다. 작고 귀여운 젤리 곰은 연우가 말을 할 때마다 연우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진짜 연우의 마음 같다. ‘나는 우연우, 너야’라고 말하는 젤리 곰이라니. 이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씩 연우는 또 다른 연우인 젤리 곰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연우는 1년 전 해고니에게 하려 했던 고백을 하지만 해고니는 연우가 고성을 떠날 거라며 받아주지 않는다. 연우는 해고니가 좋아서 고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아버지도 예전과 다르게 연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막연하게 대학에 가려고 했던 마음을 돌아본다. 그리고 해고니가 왜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 직원으로 일하는지 왜 바다를 무서워하는지 알게 된다.

연우는 큐브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갇혀 있었고, 1년이 지났어도 지난여름 교실의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해고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때 그 순간 속에. (178~179쪽)

보린의 『큐브』 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른 채 대학 입시만을 위해 살아가는 고3의 고민을 SF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연우가 큐브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은 인생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고3이라는 시간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위한 고민은 1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연우 같은 고3이나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과거의 한순간(큐브)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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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서울 경기권에 어마 무시한 첫눈이 내렸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첫눈이라는 걸 확인할 정도가 전부였다. 11월에 내린 첫눈과 함께 가을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을은 아직 남아있다. 곳곳에서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다. 그래도 12월이니 마음은 겨울로 이동한다.


12월이라고 쓰고 보니 마음이 바쁘다. 딱히 잡힌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게 있는 것만 같다. 그런 게 있던가.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달이라는 게 뭔가 압박으로 다가온다. 30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 올해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 그러나 반문한다. 그럼 뭘 했어야 하지? 나름의 계획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산되고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12월이라서 그런가 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책 이야기를 하자. 단 두 권이 주는 만족과 행복. 어제 도착한 책이다.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 스콧 피츠제럴드의 『바질 이야기』. 잠자냥 님의 리뷰를 읽고 구매했다. 땡투도 함께. 표지도 너무 근사하다. 책 구매에 있어 표지가 미치는 영향은 이렇게 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 작고 가볍다. 그러니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미루지 않고 바로 읽어야만 가능하다.







김소연의 『생활체육과 시』는 아침달의 ‘일상시화’ 시리즈다.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와 비슷하다. 시를 좋아하는 이이라면 시인의 산문과 시를 함께 읽을 수 있다. 두 시리즈를 비교해도 좋을 것 같다. 출판사의 같은 듯 다른 기획, 독자의 선택의 폭은 다양해진다.


일기예보를 자주 찾아본다. 폭설이 올까 무서우면서도 눈을 기다리기도 한다. 겨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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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12-0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질책 샀어요ㅋㅋㅋ˝생활체육과 시˝는 제목이 독특하네요. 꼭 무슨 교양과목 중에 있을 것 같은;;

자목련 2024-12-04 12:57   좋아요 0 | URL
12월엔 바질~~
<생활제육과 시>는 정말 강의 제목 같기도 해요^^

구단씨 2024-12-0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바질이야기.
소개글 흥미로워서 궁금했는데, 저도 이번 기회에 장바구니에 쏘옥~ 합니다.

여기는 첫눈이 완전 함박눈 수준으로 내리다가, 거의 매일 비가 내리다가 그럽니다.
겨울이 추운 건 당연한데, 조금만 추웠으면 좋겠네요.

자목련 2024-12-04 12:58   좋아요 0 | URL
바질, 같이 읽어요!
너무 춥지 않은 겨울, 적당한 추위를 기대해요^^

희선 2024-12-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해 마지막 달도 조금 있으면 삼분의 일이 가겠습니다 늘 십이월엔 한 게 없네 하는군요 2024년에 더 한 듯합니다 눈이 많이 와서 피해도 있다고 하는데, 눈을 못 본 저는 부럽기도 합니다 눈이 와도 피해가 없으면 좋을 텐데...

자목련 님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24-12-09 15:31   좋아요 1 | URL
어느 지역은 폭설로 피해가 크고 어느 지역은 눈을 보기 힘들죠.
희선 님도 아프지 마시고 따뜻하고 건강한 날들 이어가세요^^
 
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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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은 삶은 바깥에 있다. 일부러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면 생이 끝날 때까지 바깥에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 소설이 아닐까 싶다.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소설 『운명의 꼭두각시』을 읽으면서 그랬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잘 모르는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지독하게 아픈 역사의 상처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대해서. 소설은 한편으로는 역사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그들의 사랑에 관한 소설로 각인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다른 소설을 바깥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그 결과는 한강의 2024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윌리엄 트레버의 『운명의 꼭두각시』는 시대적 배경과 없다면 내가 느낀 것처럼 복잡하게 다가올 소설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편에서 반대였던 독일군과 싸운 아일랜드가 독립을 원했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갈등과 싸움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배신과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서로를 적대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애나 우드컴은 영국인이지만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했다. 킬네이에서 퀸턴 가문의 안주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일랜드를 도왔다. 그런 애나 우드컴의 증손자이자 주인공인 윌리의 어머니도 영국인이었다. 그들이 사는 로크 지방은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며 각자의 신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들의 평화를 지켜주지 않았다. 윌리의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와 가업인 제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윌리엄 퀀턴도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킬개리프 신부는 아일랜드의 제국주의 혐오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막고자 파견한 왕립 경찰대 ‘블랙 앤드 텐즈’가 스파이를 처단하는 명목으로 생을 마감했다. 퀀턴 씨의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고 집안에 있던 가족들의 죽음도 있었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남편과 두 딸을 잃은 윌리의 어머니에게 남은 생은 화염으로 무너진 저택 그 자체였다. 저택을 재건할 의지는커녕 삶을 살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위스키에 취한 일상을 보내는 큰 딸을 윌리의 외조부모는 그냥 볼 수 없었다. 딸이 걱정되어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아일랜드를 방문하겠다 하지만 윌리의 어머니는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윌리의 이모가 사촌 메리엔을 데리고 퀸턴가에 오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윌리와 메리엔의 만남 말이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다. 윌리와 메리엔 사이의 사랑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의 불운 같은 건 잊어버리고 둘 사이의 사랑이 폐허가 된 킬네이를 다시 세우며 살아가면 좋았을 것이다. 윌리와 메리엔에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은 둘 사이의 절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윌리의 시선에서 들려주는 처음은 조금 복잡하고 어렵지만 메리엔의 등장으로 독자는 퀀텀가를 떠날 수 없게 된다. 소설은 윌리와 메리언, 그리고 그들의 딸인 이멜다의 관점으로 그들의 사랑과 남겨진 이들의 삶을 들려준다.


비가 내렸다. 광택이 나는 나무관 위에서 조약돌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턱을 가슴 쪽으로 세계 누르는 것을 보았다. 한두 번 당신은 얼굴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 같은 고뇌가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위로를 해줄 수 없었고, 손을 잡을 수도, 정직하게 당신만을 위해 울 수도 없었다. 우리는 돌아서서 모두가, 비를 긋기 위해 우산을 들고, 무덤에서 멀어졌다. (194쪽)


아름다운 퀸턴가의 비극과 그곳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러나 윌리는 사랑이 아닌 퀸턴가의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킬네이를 떠나야 했고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떠난 킬네이엔 메리언과 딸 이멜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볼 수 없었지만 이멜다는 잘 성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멜다를 그냥 두지 않았다. 퀸턴가의 비밀을 찾아 나서고 운명의 그늘은 이멜다를 조종한다. 노년이 돼서야 메리언과 재회한 윌리는 이멜다를 지킨다.


반쯤 탄 집이 아무리 음울해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거기 속했으므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었다.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263~264쪽)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291쪽)


어렵고 힘든 소설이었다. 밖에 있던 나는 소설을 통해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 속으로 아주 살짝 들어간 기분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윌리와 메리언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굴곡진 삶을 버티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들은 사랑했고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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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예언자의 노래> 읽었는데, 그 책은 가상현실이구요, 이 리뷰 보니 이것도 얼른 읽고 싶네요. 아일랜드 작가들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목련 2024-11-28 17:30   좋아요 1 | URL
아일랜드 작가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그들만의 결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2024-11-27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28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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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연습이 있다면 잘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연습이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실전에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연습할 수 없기에 순간의 감정은 가짜가 아닌 진짜 최고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부끄럽고 후회로 남더라도 말이다. 윌라 캐더의 장편소설 『루시 게이하트』를 읽으면서 루시야말로 그런 삶을 살았구나 싶다.


추위에 떨지 않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추든 발걸음을 내딛던 루시, 어든 계절이든 쉬엄쉬엄은 루시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루시는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이 소설이 좋아서, 소설 속 루시를 상상하며 만나고 싶다. 살짝 상기된 얼굴에 긴장을 감추지 않는 표정을 상상한다. 루시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다. 안타까운 사고로 생을 마감했지만 루시를 아는 모든 이의 가슴에는 루시가 살아있을 것이다. 소설로 만난 모든 독자에게도.


작은 마을 해버퍼드 중심가에서도 1킬로미터쯤 떨어진 서쪽 끝자락에 살았던 루시는 피아노를 잘 쳤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간다. 그곳에서 운명의 만남이 이뤄진다. 우연하게 듣게 된 성악가 서배스천의 노래를 듣고 스승의 추천으로 그의 연습 시간 반주자가 된다. 매일 서배스천의 연습실로 향하는 길은 루시에게 가장 행복한 길이 된다. 그건 서배스천도 마찬가지다. 루시를 통해 잊고 있던 생의 기쁨을 생각한다. 서배스천을 향한 루시의 감정은 점점 깊어지고 서배스천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행복을 바라는 사이일 뿐이다. 루시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루시가 성장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가장 부유한 해리였다. 해리는 루시를 찾아온다. 오페라ㄹ를 보며 일주일을 시간을 보낼 셈이다. 루시는 해리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짐작했다. 친구를 만나 반갑고 좋았지만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해리는 곧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루시는 아무렇지 않았다. 루시의 마음에는 서배스천이 있었고 그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둘 사이에 어떤 약속이나 다짐은 없었다. 서배스천은 루시에게 아버지뻘이었고 아내가 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배스천을 통해 배우고 더 좋은 연주를 하고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비극적인 운명이 도착했다. 공연을 위해 떠난 서배스천이 사고로 죽은 것이다.


루시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어둠과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와 언니 폴린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지만 루시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해버퍼드에는 루시에 관한 소문이 자자했다. 오며 가며 해리를 볼 수 있었지만 해리는 어떤 틈도 내주지 않았다. 루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추운 거리를 명랑하게 걷는 루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램지 부인은 루시를 부르고 따뜻한 말을 건넨다. 루시가 겪고 있는 상실과 슬픔을 위로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시보다 먼저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루시를 아끼는 마음이 전해진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긴 나이, 스물하나, 스물둘에게 인생의 봄이 지나고 있을 뿐이니까.


“인생은 짧아.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잎을 그러모아야지. 분명 루시도 조금 모았겠지.”

“조금요.”

“루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봄이 힘든 일이 있었다고 낙담하면 안 돼. 네 앞에 긴 여름이 있는 데다가 모든 일은 때가 되면 풀리기 마련이니까. ” (173쪽)


그러나 타인의 말 한마디로 무너지고 가라앉았던 마음이 일어서는 건 아니다. 루시는 스스로 일어선다.오랜 시간 닫혔던 문을 열고 나간다. 아버지와 폴린과 함께 오페라 순회공연을 보고 온 다음 루시는 잊었던 마음을 찾는다. 순회 극단의 가수의 노래를 듣고 무대에 올라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를 통해 서배스천을 본 것일까. 어떤 뜨거운 갈망. 그랬다. 루시의 가슴엔 여전히 서배스천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배스천 자체가 앎으로 향하는 문이자 길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191쪽)


만약, 만약 생 자체가 연인이라면? (중략) 아,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 (192쪽)


루시는 다시 한번 성장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일만 남았다. 이 소설은 루시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수많은 루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과거에 루시였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소설이 아름다운 건 루시 때문이 아니다. 작가가 그려낸 소설 속 모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들 역시 성장해서다. 루시의 재능과 반짝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지원한 서배스천. 그가 루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루시를 향한 서투른 마음으로 다른 선택을 한 해리의 인생도 그렇다. 고향에 돌아온 루시를 대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루시와 그녀의 가족이 모든 떠난 뒤에도 루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해리. 루시의 꿈을 응원하며 음악을 사랑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 대신 가계를 책임지고 살아야 했던 폴린.


혼자 남은 해리가 그 모두를 기억한다. 루시의 반짝이는 삶을 기억하고 무언가를 지향했던 루시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루시가 되고 누군가는 해리가 된다. 인생이 연습이 있었다면 그런 전제는 필요 없다. 그러 모아놓은 장미 꽃잎이 적다해도 말이다. 인생이 어느 계절을 살든 순간을 사랑하는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겨울 따위는 두렵지 않을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할 것 같다. 어느 계절에 읽어도 좋겠지만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겨울에 만나면 더 애틋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 추운 날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강렬해진다는 루시를 만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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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4-11-2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장소설과 성장영화를 정말 좋아하는지라 소개해주신 소설 <루시 게이하트> 바로 구매했습니다. 추운 날에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강렬해진다는 제목에 이끌려 서평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여름의 무기력함이 겨울이 되자 사라지는 기분이 참 신기해요. 작년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제대로 겪었기에 그런가봐요. ˝연습할 수 없기에 순간의 감정은 가짜가 아닌 진짜 최고가 된다˝ 라는 서두의 문장에 흠뻑 반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을 한번에 정리해주는 감사한 문장입니다. 연습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이제서야 비로소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네요. 덕분에 좋은 소설 읽을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자목련님의 감각적인 서평들 하나씩 소중하게 읽어나가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친구신청도 해봅니다ㅎㅎ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자목련 2024-11-20 17:1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전야제 님^^
댓글 남겨주시고 친구 신청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 겨울도 어마어마하게 춥다고 해요. 하지만 겨울이니 추운 게 당연하겠지 싶은 마음을 가져봅니다. <루시 게이하트>는 정말 아름답고 좋은 소설이에요. 전야제 님도 반하실 게 분명합니다.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레삭매냐 2024-11-2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느린 속도로 읽고 있는
책이라 반갑네요 :>

분발해서 빨리 읽어야겠습니다.
루시 양의 성장소설.

자목련 2024-11-26 10:23   좋아요 0 | URL
루시를 어떻게 만나셨을까 궁금하네요.
리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