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아파트먼트 - 팬데믹을 추억하며
마시모 그라멜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시월이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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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곧 사라진다.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도 곧 어제가 되고 과거로 진입한다.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에 의지하는 마음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는 아름답게 미화되고 추억의 일부가 된다. 전 세계가 겪는 이 코로나도 그럴 거라는 걸 안다. 이 시대가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될 거라고 말이 벌써 실행되었다. 팬데믹이 3년 째 이어지고 있으니 빠른 게 아닐지도. 마시모 그라멜리니의 『이태리 아파트먼트』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소설이다.


세상은 ‘현재’ 안에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를 사는 동안 그 현재는 언제나 이전의 모든 현재들보다 훨씬 나빠 보였다. 그렇지만 몇 년 뒤 사람들은 왜곡된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시간을 그리워했다.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299쪽)


2080년 화자인 ‘마티아’는 자신의 손자에게 들려줄 목적으로 60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에 등장했던 시기, 아홉 살 소년 마티아가 경험한 일상을 들려주는 소설이다. 마티아는 밀라노의 한 아파트먼트에 로사나 누나와 엄마와 함께 산다. 마티아는 바이러스 덕분에 생일 파티를 생략하고 학교도 가지 않아 좋았다. 마티아는 의자 친구 ‘퍼프’만으로도 충분했다. 위층에는 젬마 할머니도 사시니까. 바이러스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엄마가 지나칠 정도로 소독에 집중하는 모습과 별거 중인 아빠와 지내게 된 것이다. 로마에서 지내는 아빠는 한 번씩 마티아를 만나러 오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엄마와도 곧 이혼을 할 예정이고 이번에도 마티아의 생일이라 온 것이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로마로 돌아가는 길을 차단했다.


마티아에게 아빠는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마티아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한 집에서 지내야 하다니. 아홉 살 인생에서 최대의 고비였다. 소설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일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밀라노라는 배경만 다를 뿐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비대면으로 수업을 하는 마티아와 로사나, 재택근무를 하는 아빠와 엄마. 혼자 지내는 할머니. 이웃들의 근황은 테라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누군가 집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해 아파트 마당에서 인형 놀이를 하는 여자아이, 안부를 전하는 일도 어렵고 만나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러니 마티아는 아빠와 자꾸 부딪힌다. 아빠의 전화 통화 내용과 엄마랑 나누는 이야기도 듣고 로사나 누나와 아빠가 꾸미는 일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조금씩 아빠에 대해 알게 되고 잠을 잘 때 엄마에게 했던 이야기를 아빠에게도 하고 만다.


강제적 구금 상태는 가족의 사이를 멀어지게도 하고 가깝게도 했다. 엄마와 아빠도 그러했고 자신과 아빠의 사이도 그랬다. 그러던 중 마티아가 열이 나기 시작하고 응급실로 향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아닐까. 마티아도 검사를 받게 된다. 아홉 살 마티아의 시선에는 그 모든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인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주인의 모습이었으니까.


소설이 특별한 점은 바로 아홉 살 소년의 시선에서 그려낸다는 것이다. 아홉 살 소년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곳이고 바이러스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도 이상하다. 이웃 간의 교류는커녕 단절로 가득한 사회,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을 향해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그건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 역시 그렇지 않던가. 감염자가 다녀갔다는 장소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아무렇지 않게 마스크 사재기를 하는 이들도 많았으니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는 더 안전한 쪽으로 향할 것이다. 의학과 과학은 발전할 것이고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비도 할 것이다. 그건 아홉 살 소년 마티아에게도 그랬다. 아빠와 함께 지내는 동안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점점 아빠와 친해지고 좋아졌다. 아빠가 로마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상대는 오직 젬마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는 마티아의 마음을 다 아는 듯 공감해 주며 때로는 어려운 말을 많이 했다. 우리는 젬마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살피고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코로나로 인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건 아이들과 청소년이 아닐까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 소설 속에서 바이러스 종식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아홉 살 소년 마티아는 그 시간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알아가고 성장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경험하고 느끼는 것처럼. 


“마티아, 사랑은 춤이야. 인생은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지.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출 때는 상대의 발을 밟지 않으면서 변하는 박자에 맞춰야 해. 두 사람에게 계속 춤을 출 힘을 주는 이유를 찾으면서 말이야.”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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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2-23 1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80년 미래라면 69세의 마티아도 중년이겠고 훗날 증손자에게까지 2020년 펜데믹 이야기를 하게 되겠네요^^ 어떻게 이야기가 전해질까요?^^그런 상상 해본 적 없다가 자목련님 페이퍼 읽으면서..^^

자목련 2022-02-24 09:02   좋아요 3 | URL
아마도 그렇겠지요. 돌아가신 할머니가 우리에게 전쟁이야기를 해주셨던 것처럼요.

mini74 2022-03-08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3-10 11:18   좋아요 2 | URL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월요일 같은 목요일 즐겁게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03-08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3-10 11:18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 저도 축하드려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03-08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3-10 11:19   좋아요 3 | URL
저도 새파랑 님의 당선 축하드려요^^
맛있는 하루 보내세요^^
 
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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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리뷰 대회


생은 유한하기에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며 산다. 죽음을 이해하거나 아는 건 아니다. 다만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고 슬픔을 달래며 사는 일도 죽음을 인식하는 일부라고 여긴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죽음이 우리 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떠난 빈 공간, 부재로 존재하는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삶이 어느 순간 일생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걸 알기에.


랍비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를 읽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참석한 누군가의 장례식장의 풍경이나 모습은 우리가 느꼈던 슬픔과 의구심은 우리가 느꼈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죽음을 말하는 건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느낀다. 가족, 이웃, 친구를 잃은 이들을 위로하면서 나눠야 할 것도 바로 그렇다. 비탄과 상심이 가득하겠지만 죽은 이의 생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고 겹쳐지는지.


오르빌뢰르가 마주한 죽음은 다양하다. 죽음이 특정한 누군가를 정해놓은 게 아니니까. 책에서 그가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만난 이들은 다양하다. 원리주의에 희생양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정신과 의사 엘자, 엘자와 죽음과 공포에 대한 생각을 서신으로 교환했던 마르크,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란 비밀을 혼자 간직하고 쓸쓸히 죽은 사라, 아픈 역사로 우리에게 남은 아우슈비치에서 함께 지내 생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응원한 시몬과 마르셀린. 같이 놀던 형을 남기고 떠난 어린 동생 이사악, 암에 걸린 오르빌뢰르의 친구 아리안. 성경 속 모세와 이스라엘의 죽음까지. 그녀는 랍비로서 죽음을 알려주며 남겨진 삶을 위로하고 성찰의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의 장례식 날에 우리의 삶이 비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스릴러, 로맨스 시리즈, 신화, 심지어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처럼 간주될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례식에선 우리가 우리의 죽음으로 요약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7쪽)


사실 이 책은 너무 슬프다. 내 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떠올리기에 충분하고 저마다의 죽음은 곧 그들의 삶이니까. 생의 마지막인 죽음 앞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자식을 잃은 부모를 에둘러 위로하는 말들, 안타까운 사건에 대한 탄식과 비난이 아니라 죽음의 당사자, 곧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이다. 한 사람의 고유한 생이 그려낸 아름다운 기록.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죽음과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무엇인지 인식하면서도 그것의 공포는 여전하다. 팬데믹의 시대, 가족과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사회적 죽음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몇 년 전 여름의 뜨거운 날에 떠난 큰언니는 가을에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남겨진 이들의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게 힘들 거라면서. 그게 조금 더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는 걸 어리석은 나는 바로 알지 못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보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큰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암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친구 아리안을 지켜보며 오르빌뢰르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어떤 날은 친구로 어떤 날은 랍비로 아리안을 대하며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있을지 모를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어둘 수 있다. 죽음은 두 세상을 분리하지만 때로는 죽음을 실제로 만나야만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 (200쪽)


종교적인 색채와 성경의 의미를 뒤로하고도 오르빌뢰르가 들려주는 죽음의 사유는 아름답고 귀하다. 이 책에 대해 잘 말하지 못해 아쉽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주 훌륭하고 좋은 책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한다. 언제일지 모를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먼저 떠난 일들을 생각하며 삶의 거룩함을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은 삶의 연장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경건하고 진실해야 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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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생애 소설Q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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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지쳐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여기만 벗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은 마음이 요동칠 때, 다른 곳을 갈망한다. 누구나 살면서 느껴봤을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이곳만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은 어떤 절박함. 그곳에 누군가 아는 이가 있어 기댈 수 있다면 떠나는 일은 쉽다. 시징, 윤주, 미정도 그랬다. 업무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시징에게 한국의 영등포는 연인 은철의 공간이었다. 방송작가를 그만둔 윤주가 우연하게 연락된 미정이 있는 제주도로 떠난 이유도, 미정이 제주로 이주를 결심한 건 보경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주는 영등포의 작은 원룸을 시징에게 빌려주고 제주로 떠난다. 미정이 머무는 공간 역시 누군가에게 빌린 공간이다. 자신의 공간을 내주고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건 잠시나마 타인의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홍콩에서 한국으로 온 시징도 그러했다. 2014년 은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방을 내주었다. 처음엔 그게 사랑인 줄 몰랐다.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은 시징, 윤주, 미정의 공간인 홍콩, 영등포, 제주도를 교차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삶을 살았지만 한 공간을 공유하며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생각하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을 털어놓는다.


시위 속에서 쓰러진 시징을 도와준 은철, 둘 사이의 만남과 사랑은 3개월 정도였지만 6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시징은 영등포에서 은철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윤주의 방에서 은철을 떠올리는 시징,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시징에게 자신의 마음을 메모로 남긴 윤주. 윤주는 함께 일하던 이들에게 상처를 받고 일을 그만두었다.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온 지난 모든 시간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정의 연락에 계획 없이 제주로 왔다.


인권법재단 간사로 일했던 미정은 지금은 제주에서 새 공항 반대 활동가로 일한다. 미정에게 어떤 신념이 있는 건 아니다. 제주로 미정을 부른 보경언니와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미정도 법조인의 꿈이 있었지만 모의재판에서 다른 사건으로 인해 꿈을 접었다. 국가 폭력에 대한 사건으로 상대가 베트남전을 예로 들면서 무너졌다. 미정의 아버지는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변호한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그 시절에 대해 물을 수도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 끝을 확신할 수 없는 신념은 애초에 갖지 않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고민을 거듭하고 애쓰며 투신할수록 생애는 엉망이 되는지, 미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85~86쪽)


“윤주야, 난 여기가 편하고 사실 갈 데도 없어. 그게……”

“그게 내 잘못인 거야?” (101쪽)


그게 내 잘못이냐는 미정의 질문은 윤주에게 화살처럼 박힌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그렇다. 윤주가 잘못한 게 무엇일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더 나은 삶을 원했을 뿐인데 그게 잘못일까. 시장, 윤주, 미정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이웃과 사회의 모습을 목격한다. 시징을 통해 홍콩의 우산 혁명과 독립 시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윤주에게서 결혼, 아이, 미래를 포기하며 하루하루 견디는 이들을 보고 미정과 미정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의 상흔과 제주를 비롯한 여러 곳의 난 개발을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타인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그것을 본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삶들이 있다. 시징에는 윤철이 그랬고, 윤주에게는 연인 선우가 그랬고 미정에게는 아버지가 그랬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봐 진심을 내보여줄 수 없어서 얇은 막 같은 걸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야 서투른 화해를 하거나 이전보다 조금 더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다. 은철의 공간이었을 영등포에서 제대로 이별하는 시징, 두렵지만 아버지에게 베트남 참전 이야기를 들은 미정, 멀리서 선우를 지켜보며 그를 이해할 것 같은 윤주.


부유하는 삶은 불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부유하고 떠돌면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도 하고 몰랐던 상처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해진 작가는 언제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삶의 고단함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 만나고 그들에게서 위로받는 생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는다. 누군가 있어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는 생의 여행이라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라고.


내 좋은 친구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고, 이 행성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손님일 뿐이라고요. 친구의 그 말을 상기할수록, 그가 나와 헤어진 뒤에야 다른 사람과의 정착을 결심한 걸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의 생애에서는 필연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것뿐이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요. 그것이 우리 각자의 여행이겠죠. 물론 필연적인 과정들을 통해 생애가 완벽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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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 피플, 나라는 세계 - 나의 쓸모와 딴짓
김은하 외 지음 / 포르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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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 하는지 알아도 성공한 인생이다. 즐기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추구하고 다가가는 삶은 지루하지 않다. 그럼 그런 이들은 어쩌다 그런 즐거움에 빠졌을까. 어떤 이는 필요에 의해, 어떤 이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게 다르고 그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제목부터 힙하게 다가오는 『힙 피플, 나라는 세계』에서 크리에티브 디렉터, 서점 MD, 라디오 작가, 신문기자, 출판사 대표, 브랜딩 전문가, 갤러리 대표, 정신과 의사 SNS 마케팅 대표까지 9명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캐와 딴짓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지는 일상, 당신의 딴짓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힙 피플, 나라는 세계』는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9명의 딴짓 혹은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한 에세이로 페이스북 사용자라면 이미 친구가 되었거나 즐겨찾기를 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9명의 저자는 현재 자신의 일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와 현재의 위치에 이르까지 어떤 시간을 지내왔는지 알려준다. 성공의 노하우라고 해도 좋으며 한편으로는 다양한 SNS의 세계 가운데 페이스북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페이스북의 이용기이자 애용기라도 해도 맞을 듯하다. 페이스북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저자 익숙한 이름이 있어 그의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바로 온라인 서점 예스24의 MD 손민규다.


책을 파는 서점에서 그가 하는 일과 그것을 페이스북을 통해 어떻게 홍보했는지 알려준다. 이건 뭐 다 예상한 일이다. 흥미로운 건 어떤 종류의 글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가 하는 건데 ‘ 더 팔린 책, 더 알리고픈 책’, ‘쓸모없지만 재밌는 기획전’ 같이 호기심 유발의 글이었다. 책을 좋아하기에 읽으면서도 궁금해져서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유머를 중요하게 여기며 웃음에 대해 진심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페이스북 게시글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도 전한다. 그가 알려주는 건 성실함과 대중성이다. 성실함이란 친구의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는 일, 친구 신청하기와 받아들이기에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블로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사용자는 모두 같은 마음일 테니까.


다음으로 형식. 간단히 말하자면, 잘 찍고 잘 써야 한다. 사진 품질이 떨어지고, 문장이 노잼이면 따봉이 덜 달린다. 요즘은 동영상까지 다룰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58쪽)


손민규의 경우 페이스북에 업무 외에도 산 관련 포스팅을 지속적으로 했고 그 결과 출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손민규처럼 업무로 시작한 일이 부캐로 이어져 활발한 활동한 김진방 기자도 마찬가지다. 연합뉴스 김진방 기자는 ‘금진방’이라는 이름으로 말 그대로 부캐에 완벽하게 성공한 케이스다.


그는 베이징 특파원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취득한 인맥과 정보를 수집해 취재하는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것들을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했다. 중국 음식 포스팅으로 그쪽으로는 전문가 되어 책과 강연까지 했으니. 그는 페이스북을 떠나지 않는 이유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 공간’이라고 말한다. 베이징 특파원을 하면서 하루 종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기사를 쓰면서 직업적 글쓰기에 지쳐갈 때 페이스북에서 자신만의 글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고 해도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때 만족감과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을 것 같다. 중국 관련해서 맛집을 시작으로 예술로 확장되니 기자 본연의 역할에 도움을 주니 훌륭한 부캐다.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에서 하나의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게 된 페이스북을 출판사 녹색광선 대표 박소정은 창업기로 활용했다. 퇴사 후 자신이 좋아하는 책 가운데 고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를 창업하기로 결심한 후 그 모든 준비과정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소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과정에 독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SNS. 혼자 일하는 그에게는 페이스북 공간이 업무의 공간이자 휴식의 장소였다. 개인적인 일상을 포스팅한 글에서 댓글을 나누며 느끼는 기쁨은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딴짓은 제2의 일이 되었고 본업에 시너지효과를 주었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우리가 원하는 힙한 일, 딴짓은 힘겨운 일상에서 잠시나마 즐거움을 찾고 휴식을 위한 것에서 비롯된다. 라디오 경제 방송 작가가 향수를 제작해 판매하고 일상 에세이를 쓰는 일도 그러하고 아픈 마음을 치료하며 종이접기에 진심인 정신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좋아해서 종이접기를 시작한 의사가 아들은 그리기 매력에 빠졌지만 종이접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좋아서다. 나를 알리고 관심을 받는 일은 지탄을 받거나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즐기는 일, 그게 바로 힙한 인생이며 퍼스널브랜딩에 성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브랜딩은 남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쌓아가는 것이다. 남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신경 쓰기 전에 가장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은 ‘자기다움’이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브랜드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79쪽)


모두의 딴짓이 9명의 저자처럼 책이나 강연으로 이어질 수는 없겠지만 딴짓을 통해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을 찾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취미로 시작한 무언가, 아직은 서툴고 능숙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미래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난 후 멋진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인생을 채우는 다채로운 빛깔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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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봄을 향하는 걸 느낍니다. 자꾸만 화사한 옷들을 검색합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말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검색을 멈추지 않습니다. 제법 자란 머리카락을 묶을 머리끈을 한 번씩 찾아봅니다. 저 멀리 초미세먼지가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활짝 창을 열어 바람을 맞고 싶은 날들입니다. 아직 겨울은 우리 곁에 머물지만 다가서는 봄의 기운을 느낍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이런 문장을 함께 읽고 싶어졌습니다. 당신과 나누고 싶은 문장이라도 해둘까요. 박준의 『계절 산문』에는 그런 문장이 참 많습니다. 편안하게 안부를 건네는 문장들입니다. 추위가 달아나지 않은 이 계절에 여름의 서늘한 온기를 느낍니다.


낮이 분명하게 길어졌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저의 하루를 살아가느라 이렇게 지쳐있는데 어둠은 조금 전에야 막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허정허정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초입에는 어느 집 담장 너머 만발한 능소화들이 이정표처럼 서 있습니다. 이 길이 제 집으로 가는 길이 맞는다는 듯이, 혹은 지금부터가 여름이라는 듯이.


능소화는 바람에 흔들리고 덩달아 능소화가 만들어낸 그림자도 흔들립니다. 발끝으로 그림자를 따라 몇 번 따라 짚어보다가 그만둡니다. 온통 흐르는 것들을 지나 드디어 제 방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누우면 하루와 어둠과 가난도 따라 눕습니다. 함께 잠이 듭니다. 벌써부터 방은 덮고 새벽쯤 땀을 흘리며 잠이 깬 저는 일어나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고 살금살금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다시 눕습니다. ( 「여름 자리」, 전문 84~85쪽)


바람의 길을 따라 걷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서 차분하게 이런 글을 마주해도 좋겠지요. 다정한 그리움, 송곳처럼 솟아난 날카로운 미움과 분노를 가만히 안아주는 커다란 손길을 느낍니다. 뽀족한 송곳의 마음을 다 뭉그러뜨리지는 못할지라도 한두 개쯤은 사라질 것 같습니다.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갓 지은 밥을 공기에 퍼두었는데 반찬도 따로 담아 상 위에 올렸는데 아직 그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 그래도 언제라도 저 문을 열고 웃으며 들어설 것 같을 때, 그릇 뚜껑이나 보자기를 올리듯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고 네가 다시 그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쳤으며 그사이 숨어 있는 잘못의 세목들, 이런 것들은 들추어 밝히는 대신 그냥 덮어두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또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과 그 사람의 마지막을 같이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간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거나 아니면 그가 중간쯤 왔을 때 나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덮어둔다는 것은 어느 낮은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하는 것이고, 그곳으로 흘러오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반긴다는 뜻이며 한참 세상이 지나 그 위에 무언가 쌓였다 해도 변함없는 것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입니다. (156~157쪽, 「크게 들이쉬었다가는 이내 기침이 터져나오는 겨울밤의 찬 공기처럼」, 전문)


서로 다른 계절이 만나고 헤어지는 날들, 어떤 이는 환절기를 앓기도 하지요. 그래서 짧은 몸살이나 감기로 며칠을 고생하기도 하고요. 헤어질 계절과 온전히 이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통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계절과 헤어지듯 그 안에 담긴 나의 시간과도 헤어지는 일. 반성의 시간이 아니더라도 후회의 순간과 마주하니 안에서 탈이 난 밖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요. 그러니 마음이 쉬어야 몸이 편안해지겠지요.


‘쉬다’라는 낱말은 여러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몸을 편안히 두다. 일이나 활동을 잠시 그치다’라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쉬다’가 우리에게 없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조금 부정적인 의미의 ‘쉬다’로 변하는 것이지요. ‘탈이 나서 목소리가 거칠고 맑지 않게 되다’의 ‘쉬다’ 혹은 ‘음식 따위가 맛이 시큼하게 변하다’ 할 때의 ‘쉬다’. 더불어 ‘쉬다’라는 말에는 ‘빛깔을 곱게 하려 뜨물에 담가두다’ 하는 뜻도 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천천히 숨을 쉬어보았던 시간 같은 것으로 긴 겨울날이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쉼 쉼 쉼」, 전문 170~171쪽)


‘빛깔을 곱게 하려 뜨물에 담가두다’ 란 뜻이 참 예쁩니다. 더 곱고 빛나기 위해 쉼이 필요하고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박준이 제게 알려준 것처럼 말이에요. 박준의 유려한 문장은 읽을 때마다 어떤 맑고 고운 힘을 불러옵니다. 두 권의 산문집과 두 권의 시집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이런 먹먹함 때문인지 저는 여전히 그의 첫 시집의 이런 시가 제일 좋습니다. 봄이 오고 있어서, 자꾸만 마음이 들썩입니다. 정작 봄이 와도 달라지지 않을 일상이 이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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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6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7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22-02-1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자목련 2022-02-17 09:3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 님,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