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면 독립을 떠올릴 것이고 같이 살지만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것, 유행을 따르지 않는 자신만의 개성을 중시하는 삶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역시 자유와 책임이 함께 온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시민 불복종』을 읽으면서 주체적인 삶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이웃으로부터 1마일 떨어진 숲속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나는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수의 가장자리에 손수 집을 지었고, 내 두 손으로 직접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나는 그곳에서 두 해 두 달을 살았으나 지금은 문명 생활의 일시 체류자로 다시 돌아와 있다. (11쪽)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혼자 살아가면서 기록한 글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1900년 대의 삶이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사고와 철학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주제별로 쓴 글은 때와 장소를 바꾸어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가치도 변화하니까.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 가운데 필요한 노동을 회피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소로의 말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건 중요하다.
인간에게 필요한 노동을 조직적으로 회피함으로써 탐욕스러운 여가를 얻은 학생은 치욕스럽고 실익 없는 여가를 얻는 것이며, 인간의 여가를 유익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체험을 자신인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생활 실험을 직접 해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젊은이들이 인생을 더 잘 살아낼 수 있겠는가? (72쪽)

누군가는 현재는 소로처럼 살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의도적인 삶을, 삶의 본질적인 사실을 공부하기에 현대인은 너무도 바쁘고 철학적 사유에 집중할 수 없을 테니까.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여전히 소로의 삶을 원하고 소로의 글을 찾는다.
나는 의도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므로 숲속으로 들어왔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을 직면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을 배울 수 있을지를 살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삶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다. (121쪽)
얼핏 자연과 하나 되는 평온한 삶을 꿈꾼다면 그건 착각이다. 생각해 보라,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밭을 일구고 집을 보수하고 겨울이면 난방을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한 번씩 찾아오는 지인과 여행객들의 질문에 답도 해야 한다. 소로를 찾는 이들에게 소로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으로 여겨겼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다. 혼자의 삶을 위해 선택한 삶에 방문객은 반갑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연에서의 삶은 계절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그 경이로운 장면을 소로는 세밀하게 기록한다. 월든 호수가 어떤 모습인지 그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자연관찰 그 이상으로 훌륭하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서 얼었던 호수가 녹기 시작한다. 봄의 호수를 직접 볼 수 없지만 소로는 우리를 그곳으로 부른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 표면의 파문을 쳐다보는 것은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환희와 젊음으로 가득 찬 호수의 맨 얼굴은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는 모래의 즐거움을 대변하는 듯하다. 호수 표면은 물고기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리는데 마치 호수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 같다. 이것이 겨울과 봄의 극명한 대조다. 월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412쪽)
월든은 읽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평범한 에세이라 하기엔 너무도 비범한 소로의 사유가 담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월든은 한 번에 읽을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시민 불복종」은 뭐랄까 정치적인 글이다. 소로는 주민세를 납부를 거부해서 구치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단 하루 동안이지만 그 안에서도 소로는 평온하다. 이어지는 그가 바라는 정부, 권력에 대한 글은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이 국민의 손에 있을진대 그들 중 과반수가, 그것도 지속해서, 통치하도록 허용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그들의 정의롭다거나 소수에게 가장 공정할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물리적으로 가장 힘이 센 자들이기 때문이다. (「시민 불복종」, 449쪽)
나는 노예제를 지지하는 정부를 한순간도 나의 정부라고 인정할 생각이 없다. (「시민 불복종」, 452쪽)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정부 발전 형태에서 가장 나중의 것일까?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고 조직하는 쪽으로 한 걸음 더 나가갈 수는 없는가? 정부가 개인을 한층 더 높고 독립적인 힘으로 인정하고, 그 힘으로부터 정부의 권력과 권위가 나오며, 또 개인을 그런 위상에 걸맞게 대우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고 개명(開明) 된 국가라 할 것이다. (「시민 불복종」, 477쪽)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소로의 정부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 대한 통찰은 귀한 지침이다. 우리가 왜 소로의 글에 이토록 놀라고 감탄하는지 한 번 더 확인한다. 어떤 삶을 선택할지,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때로 흔들리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소로라는 등대를 따라가도 좋겠다.
*현대지성의 월든은 풍경 사진 66장이 함께 있어 더욱 풍성한 월든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