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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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의 일부)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일부처럼 한 사람을 알게 되는 일은 진정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와 관계를 맺는다는 일은 나를 보여준다는 일이고 나 역시 그에게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 관계는 일생에 몇 번이나 올까.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 그의 일생을 지켜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며 강요하지 않고 관계를 지속하는 일,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영원할 것 같은 앤과 조지의 우정이 한순간의 결별로 이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앤’과 ‘조지’는 1968년 대학교에서 만났다. 기숙사의 같은 방을 쓰는 사이였다. 앤과 조지는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앤, 똑똑하고 예쁘고 모든 게 완벽했다. 조지는 그 반대였다. 서로 다른 둘은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달라서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 역시 평생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가까웠다가 멀어지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소설 속 앤과 조지처럼.


앤이 바라던 삶은 자신과 정반대의 삶이었다. 가난하고 약자인 삶을 강력하게 바라고 원하는 앤을 조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완벽 그 자체인 부모를 원망하고 무시하는 앤이라니. 자신의 아버지처럼 가정을 버리지도 않았고 엄마처럼 폭력과 욕을 일삼 지도 않는 다정하고 친절한 부모를 왜 그렇게 싫어할까. 사실 이 궁금증은 이 소설의 축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로 앤이 부모와 자신의 환경을 증오하고 경멸하는지 말이다.


소설은 조지의 시선으로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이어간다. 1968년 집을 떠난 홀가분한 기분, 반전시위, 인권운동, 히피, 마약에 취했던 순간들, 앤과 끊임없이 마음을 나누던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가고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그것을 대하는 앤의 격렬하고 단호한 태도까지. 그런 이유로 때로 혼란스럽다. 그러나 결국은 ‘앤’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 조지와 앤 둘 사이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걸 알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은 앤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앤이 살아온 삶에 대한 기록이다. 앤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의 복잡한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사회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앤이 사랑한 한 남자로 인해 조지는 앤과 결별한다. 앤보다 열 살이나 많은 흑인 남자, 결별의 이유는 사소했지만 그 사소함에서 앤은 조지가 흑인을 대하는 편견을 보았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해도 걷잡을 수 없다. 조지는 자신만의 삶에 집중한다. 1학년을 마치고 그만둔 학교로 돌아가고 연애를 하고 가출했다 돌아온 여동생을 돌본다.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는 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다 조지의 삶에 앤이 스며든다. 앤이 경찰을 죽인 사건이었다. 경찰이 남편을 과잉진압하고 폭력을 가하고 총을 쏘았기에 앤은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총으로 쏜 것이다. 백인 여성이 경찰관을 살해한 사건, 죄를 시인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앤의 단호함. 변호를 거부하며 자신의 행동의 당당함을 주장한다. 앤은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감옥에서 앤은 오히려 평온하다. 약자가 있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조지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일어난 사건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과 다르게 조지는 대학시절 처음 만났던 앤을 떠올리며 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앤이 자유로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 그토록 부모를 미워하고 약자를 위한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 조지는 이제서야 비로소 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삶을 극단적으로 앤과 조지의 그것으로 분류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부류일까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인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에 대해서도 말이다. 가늠하건대 앤이 아닐는지. 소설에서 앤을 ‘시몬 베유’와 ‘개츠비’와 비유하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인데 사실 그 부분에서 앤을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앤이 선택한 삶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녀의 삶은 존중 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지의 삶 또한 그렇다.


불평등과 차별이 여전한 세상이다. 여성으로 살아내기란 더욱 힘듦을 체감한다. 수많은 앤과 조지를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우리 역시 앤과 조지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 찾아온 특별한 방문객을 헤아린다. 앤과 조지처럼 나에게도 그런 소중한 우정이 있어 감사하다. 지켜보며 응원하고 때로 질책하며 나를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는 친구, 자매, 닉네임으로 존재하는 이들까지. ‘누구와 알고 지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589쪽)란 소설 속 문장처럼 내 인생에 그들과 알고 지내며 살아간다는 게 감격스럽다.


많은 것들로 채워졌고 그 이상의 것들을 말하며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하여 자꾸만 뭔가 더 설명하고 싶은 소설이다.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말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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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도 이책!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설!!
꺼내 놓지 못할 정도로! ㅎㅎ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_/)
⠀(。ˆ꒳ˆ)⠀
ଫ/⌒づ🎁

자목련 2021-12-24 16:39   좋아요 1 | URL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이 조금씩 좋아집니다. ㅎ
스콧 님, 즐겁고 평온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해피 크리스마스~~
 

차갑지만 맑은 공기가 흐른다. 따뜻함이 더욱 간절해진다. 이 계절은 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걷잡을 수 없는 팬데믹의 혹독한 겨울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훗날 이 잔인함은 한 편의 영화가 되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줄 게 분명하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는 인간의 복잡한 심연을 다룬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서 꺼내는 이야기는 인간의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음악, 미술, 공간, 의상, 말 그대로 영화 속 모든 것이 우리를 자극한다.


배혜경이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 가 바로 그렇다. 수필가로 탄탄한 내공을 지닌 저자가 분류한 주제에 따라 영화를 읽는다. 아련한 기억과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게 연결된 75편의 영화를 통해 그 안의 삶과 우리의 그것을 비춘다. 어떤 영화는 너무도 똑같이 포개어지고 어떤 영화는 어긋나고 어떤 영화는 전혀 다른 삶을 비춘다. 영화를 보던 순간의 기억,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야기는 마치 그 영화를 함께 보는 듯한 착각에 빠드린다. 나도 좋았던 영화라서, 잊고 있던 감각을 깨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 부모님 몰래 늦은 시각까지 TV를 보던 주말, 낡은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이제는 어디서나 너무 손쉽게 볼 수 있는 영화라서 영화만의 고유성을 찾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서 조금 쓸쓸해졌다. 연인과 처음 갔던 영화관에서의 떨림이나 혼자 영화관을 찾았던 그때의 절망이 떠오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기억 속 저편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75편의 영화 가운데 내가 본 영화는 너무 적어서 손에 꼽을 수도 없다. 그랬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영화를 메모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유명한 영화는 그런 이유로 천천히 보고 싶어 미루고 정작 간절히 원했던 영화는 내가 사는 소읍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아 놓치고 나중엔 기억에서 사라진다. 영화 OST로 내게 남은 영화, 책과 영화로 모두 본 영화, 나만의 영화에 속하는 영화를 목록에서 발견하는 일은 괜히 뿌듯하다. 그러니까 영화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건다. 팬데믹의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일까.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삶,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사랑! 시간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나면 기쁘고 행복한 추억만 남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대로 그러기를 누구나 바랄 것이다. 자연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고 쉬지 않고 흘러간다. 시간의 잔혹함은 그만 미루어 두고 마음의 시간에 집중하자. 우리에게 남은 시간, 남은 사랑이 지리멸렬하지 않도록. (53쪽)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보석 같은 영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밀양>과 <파주>는 손에 데일 듯 뜨겁게 다가온다. <밀양>의 원작을 읽어 그런 걸까. 아니면 내게 각인된 영화 속 한 장면 때문일까. 인상적인 장면 때문이라면 <흐르는 강물처럼>도 빼놓을 수 없다. 어쩌다 보니 세 영화 모두 신에 대한 부분이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생각하지 못한 접점이다.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마주하는 영역이다. 신에 대한 나의 생각도 일정 부분은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내야 할 것 같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인연과 관습, 정석이라고 믿었던 어떤 조류이기도 하다. 우리는 강물에 모든 걸 맡기고 함구한다. 그리고 흘려보낸다. (104쪽)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대한 글로 좋았다.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더 객관적으로 영화를 생각할 수 있었고 보고 싶어졌다. 고흐에 대한 부분, 그러니까 영화로 만날 수 있는 고흐가 많다는 걸 몰랐기에 궁금해졌다. 책에 대한 주제로 소개한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책을 말하는 영화, 그 영화를 말하는 글이니까.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유독 내게 스며든 영화는 모두 일본 영화였다. 평범한 일생이지만 그 안의 모든 것들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말해주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와 소란한 마음속에서 진정한 고요를 찾기를 바라는 <안경>은 포스터도 너무 재밌다. 두 영화는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고 무심하면서도 다정했다.


이들에겐 말이 필요 없다. 긴 대사가 필요 없는 이 영화는 말치레와 소음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람과 고요한 내면으로 돌아가게 한다. 나를 찾으라는 게 아니라 나를 그냥 놓아 버려도 좋다. (296쪽)


영화를 읽은 일은 책을 읽는 일과 다르다. 영화를 읽는 일은 입체적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건 통찰의 힘이 필요하고 저자는 그런 능력이 뛰어나다. 영화라는 매개로 삶을 배려하고 타인을 관찰하고 진솔한 사유를 건넨다. 내가 그 모든 걸 온전히 흡수할 수 없기에 안타깝지만 공감할 수 있기에 기쁘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일도 책을 읽는 것도 그런 일이 아닌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좋은 날, 영화를 찾아 채널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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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2-18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목련님처럼 [버닝] 글이 유난히 더욱 좋았어요^^ 아무래도 보았던 영화에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나봐요^^

자목련 2021-12-20 09:01   좋아요 0 | URL
잊고 있던 영화가 다시 막 보고 싶어졌어요. ㅎ
얄라 님, 따뜻한 한 주 시작하세요^^

프레이야 2021-12-19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양초 옆 책 사진이 참 따스해 데려갑니다^^
몸도 마음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불빛 잃지 않고 의연하고 명랑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고마워 영화,에도 그러셨는데 제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조근조근 읽어 주셔서 마음 따스해져요.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1-12-20 09:03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 님의 깊은 통찰과 사유에 놀랍고 감탄했습니다.
저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는 것도 좋았고요.
쌀쌀한 기운이 감돌지만 그래도 포근한 하루 이어가세요^^

희선 2021-12-20 0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지금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오겠네요 소설은 조금 나오기도 했더군요 나중에 지금을 보고 그때는 그랬지 하면 좋을 텐데, 그 나중이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보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기도 하겠습니다

자목련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1-12-20 09:04   좋아요 1 | URL
현재의 삶이 영화가 되는구나 싶었어요.
지금의 이야기가 따뜻한 결말로 이어지는그런 영화이면 좋게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선 님 건강하고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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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익숙해지면 빛의 소중함을 잊는다. 어둠이 전부였던 걸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희미한 빛이 시작일 것이다. 꺼질 듯 희미한 빛, 설사 꺼졌다 하더라도 빛이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면 충분하다. 빛을 기억해 낼 수 있으니까. 김호연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은 그런 빛 같은 소설이다. 밝고 환한 온기를 전하는 작은 빛 말이다. 거기 빛이 있으니 어둠은 사라지고 빛을 향해 나갈 수 있다. 엉뚱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다.


소설은 제목처럼 편의점을 배경으로 그곳의 사람들 이야기다. 편의점 사장, 편의점 알바, 편의점 손님이 모두 주인공이며 화자가 되어 그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 ‘ALWAYS’에서 벌어지는 크리마스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할까.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독고’ 씨는 사장 염 여사의 지갑을 찾아준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술에 찌든 그에게 염 여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게 해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아르바이트생 시현은 사장의 지시가 맘에 들지 않지만 매일 저녁 8시에 찾아오는 독고를 상대한다. 이상한 건 독고가 조금 늦으면 걱정되고 신경이 쓰인다. 도시락을 먹고 주변 청소를 해준 탓일까. 그런 독고가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는 습득력이 빨랐다. 물건 파악도 잘 하고 한 번 알려주면 모두 잘 따라 했다. 시현은 점점 그가 궁금하다. 그건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다. 뭔가 대단한 과거가 있을 것 같은 호기심.


소설은 이처럼 독고란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편의점을 중심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자칭 ‘아싸’인 시현에게 편의점은 자신만의 시간을 위한 공간이다. 오전 알바를 하는 50대 선숙은 대기업을 그만두고 영화감독 교육을 받다가 백수로 전전하며 게임만 하는 아들이 걱정이다. 가장 역할을 하는 엄마의 마음도 모르는 아들 때문에 화가 날 지경이다. 거기다 이상한 알바 독고까지. 그런데 동네 할머니를 도와주고 물건을 배달하는 그의 행동이나 속상할 때 마시라고 내미는 ‘옥수수수염차’가 선숙을 기분 좋게 만든다. 이상하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아들에 대한 말들을 털어놓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독고가 말한다.


들어주면 풀려요. (108쪽)


책을 읽던 나는 순간 울컥한다. 들어주면 풀린다는 말이 나에게 건네는 말 같았다. 대화 자체가 사라진 가족의 일부에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들킨 것 같았다. 정말 독고는 어떤 사람일까. 쌍둥이 딸을 둔 가장이자 영업을 하는 40대 경만에게도 그는 옥수수수염차를 권한다. 집에 가기 전 혼술의 자유를 느끼는 경만은 그가 사장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편의점에 오는 쌍둥이 딸들이 하는 말들을 전해주고 술을 끊을 수 있다고 독려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편의점 손님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들이 원하는 걸 주려고 노력했다. 새벽마다 찾아오는 극작가 인경에게도 그랬다. 인경이 찾는 도시락을 챙겨주는 그가 불편했지만 손님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궁금해졌다. 독고와 편의점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하다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수 있었다. 정말 묘한 편의점이다.


작가는 편의점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해 독자를 그곳으로 이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과 함께 도시락과 옥수수수염차를 먹고 만 원에 네 캔인 맥주를 계산대에 놓고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나와 우리였다는 걸 인정한다.


누구나 한 번쯤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어디 한 번뿐일까. 수없이 많은 실패에 넘어지고 일어나지 못한다. 그때 누군가 내민 손, 건네는 말 한마디가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된다. 어쩌면 식상하고 긍정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는 절실하다.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 편의점에서, 아니 그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252~253쪽)


독고에게 염 사장이 그랬고 편의점을 찾는 이들에게 독고가 그랬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순간, 온통 어둠뿐이라 여기는 순간에 우리가 기댈 곳은 아마도 소설 속 ALWAYS 편의점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항상 환한 빛을 밝히는 그곳. 소설이 아닌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그런 곳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무람없이 가서 말을 건네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당신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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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2-17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도서관에 대기가 너무 많아 빌릴 수가 없더라구요.
구입해서 아이랑 같이 읽어볼까 합니다.

들어주면 풀려요...저도 울컥🥲

자목련 2021-12-18 12:18   좋아요 0 | URL
아이랑 읽어도 좋을 소설이에요.
들어주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요, ㅎ
쿨캣 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희선 2021-12-18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의점 불빛이 따스한 곳도 있겠지요 편의점도 사람이 오고가는 곳이니 정이 오고가기도 하겠습니다 사람하고 잘 지내지 못해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기도 하네요 그걸 잊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자목련 2021-12-18 12:19   좋아요 1 | URL
누군가에는 편의점이 그러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다른 어딘가가 그러하겠지 싶어요.
희선 님, 날씨가 차네요. 건강하고 포근한 오후 이어가세요^^

2021-12-19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0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0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소설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올해 내가 읽은 소설을 돌아보고 몇 권을 생각한다. 거의 십 년 만이다. 한국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많이 읽지는 못했고 읽었지만 리뷰를 쓰지 못한 책도 많다. 어떤 책은 기대보다 살짝 아쉬워서, 어떤 책은 너무 좋아서 그 기대를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미루고 미룬다. 내 맘대로 정하는 2021 한국소설은 올해 출판된 소설에 한한다.


이런 시간이 좋은 건 내가 쓴 리뷰를 훑어보면서 책과 다시 만나는 일이다. 사실 책이라는 게 읽고 나서는 줄거리가 날아가 버리거나 주인공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 나만 그런가. 점점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가 줄어든다고 한다. 한국소설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김엄지의 『겨울장면』은 지금 이때 읽어도 좋다. 얼음, 겨울, 차가운 공기, 쓸쓸함이 가득하다. 익명의 주인공들의 여정, 죽음, 그 모든 모호함에 빠지는 소설이다. 눈이 내리는 저수지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 상념의 시간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조남주의 첫 단편집 『우리가 쓴 것』도 좋았다. 동시대의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의 삶은 우리의 것이었기에. 소설을 읽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위안을 주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내 주변의 친구, 가족, 그리고 알지못하는 모든 여성을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조해진의 단편집 『환한 숨』과 편혜영의 단편집 『어쩌면 스무 번』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외로운 사람들, 혼자 고독한 이들의 풍경이다. 그들의 모습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어 더욱 공감하면서도 속상한 마음도 감출 수 없었다. 단편처럼 곱고 아름다운 최은영의 『밝은 밤』은 먹먹하면서도 따뜻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넣어두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빛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밝은 밤』중에서)











장르 소설에 대한 흥미와 기대를 안겨준 이선영의 『지문』과 케이시의 『네 번의 노트』는 영화나 드라마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대거상 수상으로 영향력이 더 커진 윤고은의 『도서관 런웨이』도 인상적이다. 윤고은의 놀라운 상상력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결혼보험이라니. 가까운 시일에 그런 보험 광고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목록을 작성하면서 알게 된 사실, 모두 여성작가다. 여성이라서 그들의 삶에 내밀하게 파고드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젊은작가상’이나 ‘소설 보다 시리즈’도 좋았다. 새로운 작가, 새로운 소설을 읽은 일은 즐겁다.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지만 올해의 소설로 꼽는 소설은 최은미 단편집 『눈으로 만든 사람』와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소설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리뷰를 꼭 쓰고 싶다. 


살구꽃이 피면 톡 하겠대.  (최은미 소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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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16 1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페이퍼를 쓰면서 돌아보는것도 정말 좋은거 같아요~!!
<겨울장면>과 <눈으로 만든 사람>은 읽어보고 싶네요 ^^

자목련 2021-12-17 09:31   좋아요 2 | URL
매달의 읽기를 정리해도 좋은데, 그게 잘...
말씀하신 두 권 다 괜찮았어요. 새파랑 님도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scott 2021-12-16 15: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1년 서재의 달인 추카 합니다 ^ㅅ^

자목련 2021-12-17 09:31   좋아요 1 | URL
스콧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쎄인트saint 2021-12-16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7 09:32   좋아요 0 | URL
감사드리며 셰인트 님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 이어가세요^^

mini74 2021-12-16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서관런웨이가 눈에 딱. ㅎㅎ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1-12-17 09:33   좋아요 1 | URL
제목 때문에 더 끌렸던 것 같아요. ㅎ
미니 님도 축하드려요. 환한 하루 이어가세요^^

얄라알라 2021-12-16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낮에 이 글 읽으러 들어왔는데 두 번째네요^^ 축하드리러 왔어요 이번에는

자목련 2021-12-17 09:34   좋아요 0 | URL
두 번씩이나 들려주시다니요. 감사합니다.
얄라 님, 저도 축하드려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12-16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과 좋은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21-12-17 09:3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달인,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새파랑 2021-12-16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왕 자목련님 달인선정되신거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1-12-17 09:35   좋아요 1 | URL
페이퍼의 왕을 향해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ㅎ
저도 축하드립니다. 맑은 하루 이어가세요^^

책읽는나무 2021-12-16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쓴 것>,<밝은 밤> 두 권 읽었네요^^
<눈으로 만든 사람>은 읽으려다 못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사다 놓고 안 읽었고...
<런웨이도>랑 <환한 숨>도 늘 눈도장은 찍었었는데...
자목련님이 선정하시는 책들이라 더욱 눈길이 갑니다.늘 믿고 따라 읽게 만드시는 한국 소설 길라잡이 친구 같달까요??
올 한 해도 수고 많으셨어요.내년에도 더 좋은 글을 통해 계속 읽고 싶네요^^
저도 서달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7 09:37   좋아요 1 | URL
나무 님의 길라잡이 친구가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ㅎ
저도 서재 달인 축하드리며 책과 함께 달콤한 하루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1-12-16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21 서재의 달인!‘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자목련 2021-12-17 09:38   좋아요 0 | URL
축하와 응원의 댓글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건강한 하루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1-12-1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7 09:3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저도 축하드려요^^
향기로운 하루 이어가세요!

희선 2021-12-17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소설도 괜찮지요 읽기는 해도 여전히 잘 못 읽지만... 자목련 님 축하합니다 다음해에도 책 즐겁게 보시고 글도 즐겁게 쓰시기 바랍니다


희선

자목련 2021-12-17 09:40   좋아요 2 | URL
많이 읽지는 못하고요. ㅎㅎ
희선 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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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얀 마텔의 소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질문이다. 질문은 삶의 분명한 목적을 알고 사는 이가 있을까로 이어졌다. 존재함과 동시에 그냥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연작소설이라 설명해도 좋을 얀 마텔의 소설은 묘하고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내게 난해함이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끄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의 여정은 고단했지만 흥미로웠고 슬프고도 애통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모두 세 명의 주인공의 삶을 들려준다. 그들의 연결점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고 그것들의 의미하는 바는 같은 듯 다르다. 「1부 집을 잃다」는 1904년 리스본에 사는 토마스의 이야기다. 고미술 박물관 학예사로 연인인 도라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를 잃었다. 상실의 슬픔은 신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그는 뒤로 걷는 일로 그것을 실천하다.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그는 박물관에서 17세기 사제의 일기를 발견한다. 일기 속 십자고상을 찾아 떠난다. 소설의 제목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근처의 교회에 있다고 단정한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뜨게 해줄까? 고난의 결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까? (「1부 집을 잃다」, 127쪽)


부자인 숙부의 자동차를 타고 시작된 여행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자동차가 기괴한 물체로 인식되었고 정작 토마스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가는 곳마다 구경꾼은 모여들고 토마스는 그들을 피해 달아나는 형국이었다. 휘발유를 구하는 일도 어려웠다. 급기야 자동차는 망가지고 불이 붙고 토마스는 아이를 치고 만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토마스는 도망을 택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교회에서 찾은 사제의 십자고상은 그에게 침팬지였다. 그가 그토록 찾았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2부 집으로」의 주인공은 포르투갈의 의사로 부검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온갖 서류로 가득한 병원에 두 여인이 찾아온다. 에우제비우의 아내 마리아와 남편 라파엘의 부검을 부탁한 여인 마리아. 아내는 그에게 복음서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 얼마나 비슷한지 설명한다. 하지만 에우제비우는 아내의 설명이 지루할 뿐이다. 아내가 돌아가고 그를 찾아온 또 다른 노부인 마리아.


부검에 참여한 마리아에게 에우제비우는 과정을 설명하지만 그녀는 발부터 시작해달라고 말한다. 그럴 수 없다고 설명하다 포기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시작한다. 마리아는 죽은 남편과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에우제비우에게 들려준다. 첫 만남, 결혼, 아이의 죽음까지 담담하게 말한다. 마리아의 아들이 「1부 집을 잃다」에 등장한 토마스가 차로 친 아이였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죽은 아이를 곰이라 부르며 겨울잠을 자는 거라고 말했던 라파엘. 아이를 잃은 후 부부가 겪은 상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살았는지 천천히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아이와 남편과 같이 잠들기를 원한다.


1부와 2부 모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등장한다. 3부에서도 마찬가지다. 「3부 집」의 주인공 1984년의 캐나다에 사는 상원 의원 피터도 아내 클래라를 잃었다. 아들 부부는 이혼을 했고 피터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우연한 기회에 방문한 동물원에서 침팬지 오도를 만난다. 운명처럼 오도에게 끌린 피터는 오도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더 이상 피터는 캐나다에 살 이유가 없었다. 오도를 데리고 그의 고향 포르투갈로 떠난다. 말 그대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포르투갈에 도착해 말이 통하지 않는 그곳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구한다. 피터와 다르게 오도는 빠르게 적응하며 자신만의 삶을 방식을 유지한다. 그런 오도의 자유로움에서 피터는 돌고 돌아 편안한 집에 온 기분을 느낀다. 오도는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는다. 여인들은 오도에게 먼저 말을 건다. 피터는 마을을 관찰하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장례 조문 행렬이 마을을 지나 교회로 향할 때, 그는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하다. 많은 조문객들이 뒤로 걷고 있다. 그것은 슬픔의 표현으로 보인다. 길을 따라 내려가고, 광장을 가로지르고, 계단을 오르면서, 그들은 슬픔을 곱씹으며 수심에 젖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고 뒤로 걷는다.( 「3부 집」, 374쪽)


모든 퍼즐이 제자리를 찾는 듯하다. 토마스의 반발, 라파엘의 애통, 피터의 슬픔이 도달한 곳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걸. 그러나 정작 책 어디에서도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찾을 수 없다. 높은 산은 어디에 있는가. 저마다 찾아 헤매는 높은 산은 실재하는 것일까.


이른 오후, 그들은 ㅡ 지도에 따르면 ㅡ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도 도착한다. 공기는 더 서늘하다. 피터는 어리둥절하다. 산이 어디 있지? 그가 예상한 것은 겨울 색을 입은 우뚝 솟은 알프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숲이 높은 골짜기 사이로 숨어 있고, 봉우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들쭉날쭉하고 황량한 사바나도 아니었다. 피터와 오도는 초원에 제각각 자리를 잡고 앉은, 거대한 잿빛 암석들이 솟아난 평원을 지나간다. 어떤 바위는 2층 건물에 닿을 만큼 높다. 어쩌면 바위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변이 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바위는 길게 뻗어 있다. (「3부 집」, 319쪽)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찾으로 애쓰는 것도 같을 것이다. 찾을 수 없어서 더욱 애태우는 그것.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그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아 운명처럼 이끌린 세 명의 이야기. 죽음의 애도와 상실에 대해 말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삶이란 무엇인가 묻는다.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결코 쉬운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더 매혹적인 지도 모른다.


정녕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수많은 답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랑이다. 소설의 흐름처럼 집을 잃고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발견한 집에 안착하는 일.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사랑이며 그 끝에도 사랑이 있다. 놀랍도록 눈부신 소설의 여러 문장 가운데 이 부분을 오래 읽고 기억하려 한다. 우리가 거하는 집, 그 안을 밝히는 따뜻하고 환한 사랑에 대해서.


사랑은 방이 많은 집이다. 사랑을 먹이는 방, 사랑을 즐겁게 하는 방, 사랑을 씻기는 방, 사랑에게 웃음을 입히는 방, 사랑을 쉬게 하는 방. 이 방들은 또한 웃음을 위한 방, 이야기를 듣는 방이거나 비밀을 털어놓는 방이거나 단란함을 위한 방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새로 들어온 식구들은 위한 방들도 있다.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어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1부 집을 잃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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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14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는데 리뷰 보니 읽었네요.;;;

얄라알라 2021-12-15 13:21   좋아요 2 | URL
애서가 그레이스님, 얼마나 많이 읽으셨으면^^


자목련 2021-12-16 09:43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정말 그레이스 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 소설이 아름답지만 어려웠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1-12-16 15:21   좋아요 0 | URL
;;;;

얄라알라 2021-12-15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페이퍼는 글씨체도 장평도 눈에 편해서 읽기가 참 좋아요. 닉네임과 어울리는 활자^^
장평 넓히는 건 어떻게 하시는 지 궁금하네요. 따라해보고 싶은 따라쟁이^^:;

scott 2021-12-15 13:27   좋아요 2 | URL
저도 .🖐 자목련님 글씨체 따라하고 싶습니돵
알라딘에서 이런 글씨체 기능 없는데 ^^

자목련 2021-12-16 10:01   좋아요 2 | URL
아, 그런가요?
저는 서재가 아니라 블로그에서 작성하고 복사하는 편이거든.
그래서 딱히 장편 넓이는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ㅠ
폰트는 Courier new 입니다.

자목련 2021-12-16 10:02   좋아요 2 | URL
스콧 님, Courier new는 알라딘에도 있습니다.
설명을 잘 해드려야 하는데...

새파랑 2022-01-07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1-10 08:36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저도 축하드리며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mini74 2022-01-0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무슨 책 사실지 궁금 ㅎㅎ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2-01-10 08:37   좋아요 1 | URL
사고 싶은 책은 항상 너무 많아요. ㅎㅎ
미니 님, 축하드리며 맑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1-0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님~~

자목련 2022-01-10 08:38   좋아요 1 | URL
저도 많이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2-01-07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자목련 2022-01-10 08:38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한 월요일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