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 - 영화가 묻고 심리학이 답하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김혜남 지음 / 포르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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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삶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이다. 유머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영화에도 슬픔이 있고 고단함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인간의 심연에 닿는 것처럼.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박사가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에서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인간의 마음이다. 쉽게 들여다볼 수 없어서 잘 모르고 어려운 그것. 영화라는 질료를 토대로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분석을 이끌어내며 성장할 수 있도록 알려준다.


모두 34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데 최근 개봉된 작품보다는 그 이전의 작품이 대다수다. 저자의 10~20년 전 원고를 뒤늦게 책으로 출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작품이 아니라도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그에 맞게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고민과 삶에 대한 의문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끌리는 영화, 좋았던 영화, 궁금한 영화를 먼저 읽어도 큰 무리는 없다.


살면서 사랑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때가 있다. 모든 게 사랑으로 응집되는 순간들, 기쁨으로 채워지기만 바라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 이별의 수순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고통스럽다. 사랑했던 기억만을 안고 아름답게 이별하면 좋겠지만 머리의 생각은 가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영애와 유지태 주연의 <봄날은 간다>에서 쪼잔하고 유치한 행동을 일삼는 유지태처럼 말이다.


실연은 일상을 빛이 사라진 어둠의 세계로 전락시킨다. 그 과정에 개인차가 있겠지만 단 번에 벗어나기는 어렵다. 아마도 지금 이별 중이거나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라면 저자의 이런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사랑에 국한된 건 아니다. 어쩌면 모든 관계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친구와 다투고, 오래된 이들과 관계를 단절할 때 상처를 받는 이유도 비슷하니까.


우리가 사랑할 때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릴 때 자아가 수축하고 감소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할 때 느낀 충만함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허탈하고 공허해지는 것이다. 사랑 중에 느꼈던 합치의 희열은 반대로 실연후의 외로운 자아를 더욱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연인이 함께 만든 우리라는 세계는 이제 나라는 원소로 환원된다. 자신만이 상대의 유일한 사랑이라 여겼던 행복감이 사라지고, 고갈되고 무가치하며 무의미한 자신만이 홀로 남는다. 실연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자아 중심부를 강타하여 그것을 흩트리고 부수어버리기도 한다. (「사랑의 종말이 마치 죽음처럼 느껴질 때」30쪽, <봄날은 간다> 중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들의 사랑에 스스로를 대입시킨다. 타자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좋은 인생 교과서가 된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경험하지 못한 부분,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과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이런 영화를 보면 좋을 것 같다. 노년의 부부에게 찾아온 돌봐야 할 아이와의 시간. 영화에서 불화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주변에서 흔한 모습이다. 딸이 남자친구의 아들을 부모에게 맡긴다. 내가 부모의 입장이라고 맘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돌봄의 시간에서 부모는 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게 분명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모르고 온전히 저자의 소개에 따라 짐작하고 상상한다.


우리가 삶을 지루해하거나 따분해하지 않는다면, 주변에 돌봐야 할 사람이나 일이 있다면, 또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감수할 만큼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으며 성숙하다면 늙는다는 것은 그리 어렵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다. 노년을 향한 행진은 유아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동안 겪어온 수많은 상실과 이별은 인생 최후의 상실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를 충분히 준비시켜주었다. (「시간이 모여 황금빛 호수를 이룬 곳에서」141~142쪽, <황금 연못> 중에서)


무기력하게만 여기는 노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스스로 포기한다면 삶은 앙상한 가지처럼 쉽게 부러지고 말 것이다. 뭔가 생산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관계를 돌아보며 할 수 있는 일에 참여한다면 노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사와 즐거움이 충분하지 않을까.


영화를 말하는 책이 주는 즐거움은 영화제 수상작은 물론이고 좋은 영화를 다시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감동하고 치유받는 일이다. <가위손>, <굿 윌 헌팅> , <러브레터> , <흐르는 강물처럼>, <왕의 남자>, <박하사탕>, <기생충> 같은 영화를 다시 찾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제목만으로 익숙한 영화도 많이 글로 영화를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기회가 닿으면 보고 싶은 영화는 <더 도어>였다.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가 지난 삶을 수정하고 싶은 모두의 욕망을 잘 보여준 영화라고 여겨진다. 소재나 구성도 독특하고 그 안에 담긴 사유도 훌륭한다. 물론 이 모든 건 저자의 소개 덕분이다.


세상에는 완전히 악한 사람도, 완전히 선한 사람도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흘러가며 윤회한다. 우리는 종종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의 선택들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다.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언제나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 잘못된 선택을 통해 배워나가면서 그만큼 성장하고 오늘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일 테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을까」155쪽, <더 도어> 중에서)


정신분석 전문의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도 훌륭하다. 균형 잡힌 해설이라고 할까.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는 느낌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어 이제껏 만나지 못한 영화에 대한 갈증도 해소시킨다.


영화 속 인물은 현실 속 우리와 닮았기에 쉽게 빠져들어 공감할 수 있다. 현실에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영화를 통해 만났을 때 어쩌면 그랬을 수 있겠다 하는 유연한 생각을 안겨준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그런 건 아닐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인간의 내면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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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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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읽고 쓴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말한다. 개인적인 공간에 남긴 기록은 한순간 사회적 공론에 휩싸일 때도 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에 댓글로 다툼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교정 같은 단순한 일부터 문맥이 맞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좋아서 쓰던 글이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의문이 생긴다.


궁극적으로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일까. 글의 형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한 행복, 기쁨, 즐거움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장르 중 하나가 소설일 것이다.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이야기, 그 안에서 독자는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한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기에 일률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러니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나누는 획일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니까.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정부가 관리하고 판단하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나오키상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요미우리문학상 등을 수상한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소설『일몰의 저편』(북스피어, 2021)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성애 소설을 쓰는 작가인 주인공 ‘마쓰’는 ‘문예윤리위원회’(이하 문윤)라는 조직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독자의 고발이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설명 없이 강습에 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며칠이면 끝날 거라는 직원의 설명에 아무런 의심 없이 길을 나선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말이다. 마쓰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단절된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한 ‘요양소’다. 마쓰에게 지정된 방은 형무소와 같았다. 작은 책상, 화장실, 지급되는 생필품으로 생활하며 식사, 목욕도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다. 인터넷도 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와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건물 곳곳에서 자신과 같은 복장의 사람들을 지나쳤지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 이곳에 왔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말 그대로 고립 상태에 놓였다.


그곳에서 마쓰는 이름이 아닌 ‘B98’번이었고 소장이라는 사람과 상담이 시작되었다. 마쓰가 쓴 소설이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라고 문윤이 판단해 요양소에서 갱생과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간은 마쓰가 얼마나 문윤의 조치에 따르고 협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B98번이 된 마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설은 그저 허구이며 상상의 세계가 아니던가. 단지 한 장면의 묘사, 몇 줄의 표현으로 인해 소설 전체를 평가받는 일은 부당했다. 독자의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당연한 감정이다. 작가에게 그 누구도 그런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제재를 가할 수 없으니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주의 국가에서 개인을 갱생한다는 상상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소설은 너무도 비참한 방법으로 마쓰를 구속하고 학대한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위반하면 요양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묵살했다. 그들의 설명은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창작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산책을 빌미로 요양소를 탐색하는 마쓰가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잔인했다. 하루하루 요양소에 적응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처음에 끓어올랐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작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말이었다.


마쓰가 그들의 요구대로 쓴 글을 읽고 검열하며 문윤은 그녀가 충분히 갱생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윤에서 원하는 글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누구나 감동을 느낄 착하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훌륭한 소설이라며 노벨문학상을 언급한다. 마쓰도 쓸 수 있었다. 요구하는 대로 변절자, 배신자도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건 작가가 원하는 글이 아니고 쓰고 싶은 글이 아니었다. 무엇을 쓸지 창작의 영역까지 허락이 필요한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글은 다양성과 고유성은 무시한 AI나 써내는 글이 아닐까. 기능적으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를 원할 뿐 마쓰라는 인간 개인의 글은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의 싸움이었다. 누가 봐도 개인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마쓰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정하며 그녀를 자극했고, 도발하게 만들어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드는 게 문윤의 전략이었다. 인간은, 그것도 예술가인 작가는 갱생되거나 교정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소설은 마치 문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한다. 독자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선별할 능력이 있냐는 듯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세계, 작가의 창작적 자유는 그들의 집단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곧 개인이며 독자다. 소설속 문윤의 논리에 따르면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처럼 좋은 소설만 읽는 독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이다.


이쯤에서 독자인 나는 어떤 독자인가 생각한다. 더불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지난 정부의 예술가 명단을 떠올린다. 정부의 뜻에 반하는 목소리를 지닌 이들은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다. 정치가 예술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예술가의 정치적 신념은 작품과는 별개다. 설령 같다고 해도 그건 개인의 자유 영역이다. 그렇다면 소위 문학상 수상작, 베스트셀러, 고전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다양한 시도를 하는 실험적인 소설이나 사회를 비판하는 고발 소설과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는 탐사 소설은 읽지 말아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 마쓰가 아닌 비주류 소설을 읽는 독자도 문윤의 요양소에서 갱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인 21세기에 불가능한 이야기라 장담했지만 막상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무도 모르는 권력이 움직이는 검열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쓰는 이 글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317쪽)


“내가 말하는 건 작가가 책임을 지고 표현한 작품이야. 허구의 이야기 말이야. 허구는 다양한 인간을 묘사하지. 개중에는 차별적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지. 왜냐하면 인간 사회가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의 고통을 그리는 게 소설이니까 아름다운 것만 쓸 수 없지.”(317쪽)


그리하여 마쓰의 처절한 외침은 곧 내 것이 된다.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고 좋은 소설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꾸며진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 인형처럼 똑같은 얼굴과 마음을 지닌 인간들이 가득한 사회를 상상하자 오싹해진다.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마쓰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떠냐고 말이다. 소설 속 디스토피아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인간의 심연을 포착한 글이 소설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배우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마쓰가 문윤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그 때문이다.


단순하게 재미만 놓고 봐도 스릴 넘치는 소설이다. 하지만 묵직한 여운을 안겨 준다. 흥미롭게 진행된 마쓰와 소장의 토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다 정신을 차린다. 읽고 싶은 소설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독재의 사회가 될 것임을 알기에 모든 소설을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갈 수 없다. 작가와 독자의 인격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처사를 따를 수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쓰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현명한 독자가 되려는 묘한 욕망과 함께 말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소설 밖 현실에선 ‘일몰의 저편’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Littor》 33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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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2-09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 누구지 내가 아는 작가인데...찾아보니 옛날에 재미있게 읽은 <아웃>의 작가였네요.
신간이 나왔군요. 문학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다룬 스릴러~~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자목련 2021-12-10 10:43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소설로 처음 만났는데 쿨캣 님은 이미 만나셔군요.
재미와 함께 많은 생각을 안겨준 소설이었어요. 소설은 나에게 무엇인가 생각도 하고요.

scott 2021-12-09 1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자목련님
리뷰가 잡지 릿터에 실렸네요!^^

2021-12-10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1-12-09 1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사랑과 어듐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나쁜독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내용이지만 그 부분만은 닮은 듯한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님 *^^*

자목련 2021-12-10 10:46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 나쁜 소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좋은 독자와 나쁜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어요.

기억의집 2021-12-09 10: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2/3까지 읽다가 포기 했어요. 지하방에 감금될 때… 그래. 그래도 공권력이 어떡해서든 찾아 와 이들을 처벌하고 자유가 될 거야… 아무리 읽어도 경찰의 관여할 낌새가 안 보여 결말 봤다가.. 걍 접었어요. 기리노여사 지금 칠십이라던데… 끝까지 독자를 절망에 빠뜨리는구나 원망하면서요. 전 일몰의 저편이란 제목에서 저편 너머에 있는 게 어둠인지 빛인지 모른 상태에서 그래 결론은 희망적인 빛일거야라고 희망회로 돌려가며 읽었는데… 기리노 여사님 참 독하더라구요 한편으론 자민당에 대한 정치적 은유인가 싶기도 하고…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1-12-10 10:47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저도 계속 그곳을 탈출하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나 봐요.
어쩌면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자꾸 생각나요.

책읽는나무 2021-12-09 19: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늘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자목련 님의 글입니다.
릿터 잡지에도 실리다니...축하 드립니다^^

2021-12-10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1-12-09 23: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책을 읽으시고 꾸준히 조근조근 말하시는 것처럼 올려주시는 리뷰의 힘!! 멋져요!! 계속 화이팅!!^^

자목련 2021-12-10 10:50   좋아요 3 | URL
꾸준히 읽고 쓰는 일, 알라딘에서는 대단한 분들이 많지요. ㅎㅎ
라로 님의 응원으로 하루가 따뜻할 것 같습니다^^

희선 2021-12-11 0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축하합니다 이 글이 릿터에 실렸군요 뭐든 자유롭게 써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곳도 있고 한국에서도 마음대로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네요


희선

자목련 2021-12-11 20:02   좋아요 1 | URL
희선 님,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였어요.
읽고 쓰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고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12-11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ns와 다양한 플랫폼!
서재와 블로그 관리도 겨우 하고 있는 저로서는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자목련 2021-12-11 20:03   좋아요 1 | URL
저 역시 그렇습니다. ㅎㅎ
운이 좋았어요.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새파랑 2021-12-11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릿터를 읽어본적은 없지만 33호는 읽어봐야 겠어요 ^^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1 20:04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감사합니다. 릿터33호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포근한 주말 이어가시고요^^
 

겨울인가 싶을 정도로 포근한 오후다. 미세먼지가 걱정이지만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도 좋을 것 같다. 이대로 겨울 추위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겨울 속 봄 같아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친구와의 통화는 언제나 반갑고 고맙다. 나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울컥한다. 잡다하고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면 웃으면서 그 안에 숨겨진 걱정과 속상함을 알아차리는 친구다.


떨어져 있지만 항상 그립고 그리운 친구다. 우리는 어쩌다 친구가 되었을까. 긴 시간 친구로 지내지만 자주 통화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겨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 그저 목소리만 들어도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런 친구이고 싶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따져보면 어떤 공통점도 없다. 친구라는 끈이 우리를 지탱할 뿐이다. 그래서 친구가 좋다. 가족과는 무언가가 서로를 끌어당긴다. 우리의 통화는 한동안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거기 네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친구처럼 좋은 시집을 곁에 두었다. 한 권은 이혜미의 『빛의 자격을 얻어』이고 다른 한 권은 윤희상 시인의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다. 모두 나를 위한 선물이다. 한 권은 내가 나에게 선물한 시집, 다른 한 권은 감사한 선물이다. 시집은 내게 좋은 친구다. 거기 시집이 있어 좋다. 거기 시집이 있어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 거기 시집이 있어 마음의 한자리를 부드럽게 안아준다.


불을 켜두고 집을 나선다


들어서면 표정을 감추는

오래된 친구들을 위해


어제는 옛날에 대한 이야기했어

우유 투입구로 불쑥 들어오던 손

싸구려 장난감이 든 캡슐

손끝을 떠나지 않던 새

두꺼운 만화 잡지와

알코올램프, 비커, 샬레

과학실의 아름다운 이름들


꺼지지 않는 벽난로와 단단한 비눗방울

불붙은 들판과 끝없이 이어지는 날개를


가졌으나 잃어버린 것

잊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것

슬픔의 다른 이름들에 대해


집이 조용히 불타고 있다


고마워요 이 방에서

너무 오래 어두웠거든요


방문을 연 채 잠이 들었다

꿈속까지 부드러운 채들이 밀려들어왔다 - (이혜미 「도형의 중심」, 전문)

어제의 빗줄기를 풀어 스웨터를 짠다


습한 공기의 타래를 풀어 헤치면

간신히 꿈에 가까워지는 온도들

눈송이들, 새가 되려는


눈송이는 겨울의 파본

일렁이며 찢기다 금세 낱장이 무르는


엮인 공기들


비밀을 누설하는 목소리로

희게 엮인 그물을 빠져나오면

날숨으로 짜인 눈송이들이

공중에서 솟구치다 곧 흐려졌다


실타래가 풀려

새로운 면과 색을 얻듯

우리는 곁에 없을 때 사랑한다


얼음을 거느리고 순간을 말할 때

휘날리다 바래가는 색들의 목록

낱장으로 쌓이는 폭설의 밤들 - (이혜미 「겨울의 목차」, 전문)











상처가 된 아픔은 흉터로 남아 이젠 한없이 흐릿해

져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럴

수록 어김없이 그 자리에 새살이 먼저 돋는 일이 거

듭된다 어느덧 그 시절도 다 지나 받아들여지는 것

이 내키지 않다 톺아보면, 모든 것이 찰나다 이처럼

사람의 기억 장치는 바보다 그래서, 다시 산다 십 년

을 이불을 덮지 않고 살았다 눈이 내린다 어쩔 것인

가 생각하는 사이, 불현듯 지난봄과 전혀 다를 낯선

봄이 미치도록 꽃 그림자로 펼쳐진다 - (윤희상 「열 번의 겨울과 열한 번의 봄」, 전문)

빠르게 아래로 흐르던 물이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북쪽에서 온 물과

남쪽에서 온 물이 만나

몸을 섞었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도 그랬다

어떨 때는 몸을 섞는 소리가 달빛 아래 가득했다


이제, 어렴풋이 키를 맞추고

마음마저 붙잡았다


가까스로 함께 어깨를 겯고,

하나가 된 물은

다시 바다 쪽으로 흘렀다 - (윤희상 「두물머리」, 전문)












시를 읽는 오후는 부드럽다. 시를 읽는 오후는 따뜻하다. 시를 읽는 오후는 시와 나 단둘의 시간이다. 그래서 달콤하고 황홀하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순간이다. 친구와의 대화처럼, 친구와 나 사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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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는 내게 『환상의 빛』으로 각인되었다.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작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소설로만 만나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국내 작가가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고 나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 겨우 몇 권이 소설만 읽었을 뿐이지만 문학에 담긴 분위기, 쓸쓸한 고즈넉함이 좋았다. 그러나 소설과 다르게 산문을 읽고 나면 더욱 그 작가에 대해 끌리는 경우가 있는데 미야모토 테루도 그런 쪽에 속한다.


보통의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가 전부인 이야기. 에세이는 그런 것이지만 『생의 실루엣』이란 제목 때문인지 지나온 삶의 중요한 순간을 마침표를 찍듯 정리하는 고해성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소중했던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그리운 이의 흔적을 찾는 일을 생각하면 왠지 숙연해진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을 앞둔 시점이 아니더라도 간간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생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 일이라고 할까.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온통 슬픔이거나 우울의 분위기에 갇혀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기쁨과 웃음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지만. 미야모토 테루가 들려주는 가족, 소설, 질병, 여행에서의 사유가 담담하게 이어진다. 어머니의 첫 번째 결혼과 이혼, 아버지가 다른 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들었던 시절, 그 세대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시대적 고통과 아픔은 내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의 고단한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어쩌면 모두 힘들었을 시대, 그때 자녀를 돌보는 일은 생계를 유지하는 일보다 우선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정을 헤아린다고 할까.


어떤 일들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에 대해 제대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으니까. 미야모토 테루가 겪은 공황장애의 증상처럼 말이다. 당시에는 공황장애에 대한 개념도 없었으니 치료는커녕 이해받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과정에 나타난 발작으로 지하철을 탈 수 없어 직장을 그만둔 일(전업작가로 위해서라지만)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미야모토 테루가 쓴 것처럼 지우고 싶은 경험도 언젠가는 큰 깨달음을 안겨주니 그게 인생이 아닐까 싶다.


내가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얻은 수많은 보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는 그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몸소 깨달았다는 점도 덧붙여둔다.(87쪽)


때로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불확실한 기억과 그것을 향한 궁금증과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어린 미야모토 테루가 무허가 터널 연립주택에서 보았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불화하는 타인들의 모습은 삶의 모순 투성이지만 그 안에서 웃고 울었던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어떤 만남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만 오랜 여운을 남기고 어떤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면서도 먼 훗날 바람이 전해준 죽음의 소식으로 만난다. 생은 우리가 주관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인데, 그것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12월이라서 그런 걸까. 괜히 마음이 분주하고 복잡해진다. 뭔가 더 채워야 할 것 같은데 나의 삶은 텅 빈 바구니처럼 썰렁하다. 1947년 생 노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산다는 게 별게 아니라는 확신은 언제쯤 올까 궁금해진다. 오긴 올까. 말로는 쉽게 내뱉지만 사는 일은 언제나 난해한 문제를 받아는 것 같으니 생이 다할 때까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도 이런 문장을 읽으면서는 그래 사는 건 그냥 그런 거지 하면서 저자의 아버지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다.


네 살부터 서른다섯 살 사이, 싫은 일도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기쁜 일고 잔뜩 있었고 나를 둘러싼 것도 크게 바뀌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그때만큼 안녕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음미한 적이 없다. ㅡ 뭐가 어찌 되건 간에, 대단한 일은 없어.(139~140쪽)


2021년을 맞으며 품었던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진 것도 아닌데 2022년에 대한 어떤 기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생의 실루엣은 어떤 모양일까. 지금의 나는 얼마큼의 실루엣을 완성했을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는데 12월은 유독 쓸쓸하다. 마치 한 해의 뒷모습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뒷모습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게 아닐 테니. 2021년을 떠나보내며 우리가 마주하는 뒷모습이 따뜻하면 좋겠다. 


뒷모습에는 아무래도 ‘떠나간다’는 인상이 늘 따라붙겠지 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는 사람의 뒷모습에 끌리게 되었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반드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마음속에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한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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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2-07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쓸쓸˝이라는 발음이 쓰게 입에 걸리면서도, 또 찾고 싶어지는 맛일 듯 합니다. 쓸쓸을 통해 같이 살고, 살아 있음을 더 강하게 느낄지 모르겠구나...하는 혼자 생각도 하면서요.

˝쓸쓸˝이라는 말씀 때문에 그런지, 나란히 놓인 네 권 책 표지도 한결같이 가라앉아 차분해 보입니다. [생의 실루엣] 표지 정말 아름답네요

자목련 2021-12-08 15:13   좋아요 1 | URL
저도 ‘쓸쓸‘을 입에 달아봅니다.
제가 만난 저자의 책들인데 정말 표지가 하나로 통하는 듯해요.
표지도 책의 일부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었을 때
박주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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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기자이자 앵커인 박주경의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었을 때』를 읽기도 전에 나는 ‘구원’이란 단어에 사로잡혔다. 현재 복잡한 내 마음 때문이다. 그러면서 거창한 제목이 아닐까 혼자 심통을 부렸다고 할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원이구나,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려는 사람과 살리려는 사람들. 안아주는 마음과 견뎌내는 용기. 언제 누가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재난재해와 사건사고, 범죄, 참사 현장의 아비규환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맞잡아 생명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들어가며 중에서, 8쪽)


책을 통해 만나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뉴스를 통해 놀라고 분노하고 감동하는 이들의 진짜 이야기. 짤막한 꼭지로 소개되는 그들의 사연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팬데믹의 시대를 살면서 기뻐할 일을 찾을 수 없어 불운과 불행 사이를 헤매는 우리에게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는 이들의 진심은 가장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나의 안위보다는 위기에 빠진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의 시작은 어디일까. 1장 ‘인간의 시간’에서 소개하는 위인들은 보통의 우리 이웃이었다. 먼저 그 자리에 있었고 발견했고 도움을 줄 수 있었기에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2장 ‘분노의 나날’에서는 모두가 울분을 토했던 사회 전반을 흔든 사건을 언급한다. N번방 사건과 차마 이름을 부르는 것도 미안한 정인이 사건. 매번 사건이 발생했을 때 뒤늦은 진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한다. 어쩌면 모두 방관자는 아니었을까. 뉴스에서 다룰 때에만 반짝 관심을 갖고 이후에는 내 일이 아니라고 잊어버리는 우리의 습관을 반성하게 만든다. 관련 지자체와 정부의 미흡한 대책에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이기에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을 저자는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통해 함께 사유하기를 권한다. 그저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분노하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가 묻는다.


3장 ‘상실의 계절’과 4장 ‘역병의 시절’에서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과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들려준다.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구하지 못한 세월호, 기본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인명 사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가 그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올바른 판단력과 실천에 대해 묻는다. 2005년 발생한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세월호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다시금 통탄하고 만다.


재난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귀한 목숨들이 경각에 달렸고 1분 1초의 판단이 생사를 가른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는 노력, 방법이 엿보이면 일단 시도해 보는 결단, 움직여야 할 때 빨리 움직이는 적극성이 조금이라도 살릴 가능성을 높인다. 그 증거를 세월호와 카트리나 등에서 우리는 역으로 목격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오판의 결과는 매번 참극이었다. (#25 “가만히 있으라” 중에서, 195쪽 )


그가 전하는 사연은 하나하나 우리의 이야기였다. 29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치킨을 배달하는 배달기사의 사연, 코로나19로 단절의 시대를 연결해 주는 사람들의 노고, 도움과 돌봄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홀몸노인과 장애인들의 고충까지 사회가 두루 살펴야 함을 언급한다. 누구 하나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바이러스의 전염처럼 각계각층 모두의 삶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안전한 거리 두기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확진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료진들, 격리자와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 감염자가 폭증하는 나라에 고립된 교민과 유학생들, 확진자 방문 장소를 쫓아다니며 조사하는 공무원들, 환자를 옮겨야 하는 구급 대원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주는 택배기사들, 음식 배달 라이더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면과 접촉을 감수하면서 우리 생활을 떠받치고 있다. (#36 ‘거리 두기’의 역설 중에서, 256~257쪽)


사회를 읽는 올바른 눈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사는 방법을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주경 앵커의 글은 좋은 지침서다. 적확하며 부드럽고 차갑고도 안온하다. 2020년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간다. 현재 5천 명을 넘나드는 확진자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뉴스로만 보는 먼 일상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견디는 삶이다. 힘겨운 일상이지만 그래도 힘을 보태야 하는 한다. 터널은 끝이 있고 우리 삶은 계속되니까.


세상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어둠 다음에는 반드시 빛이 오는 것이 순리이니까.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현실을 어찌 버티겠는가. (#48 그로부터 1년 중에서,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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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03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마다 만나는 박주경 앵커로군요. 글도 쓰네요. 몰랐습니다.
근데 29층까지 걸어서 치킨 배달을 했다구요? 이거 실홥니까?
왜 얼리베이터를 못 타나요?
그걸 시켜 먹는 사람은 사람은 누구죠?
암튼 생각할게 많은 책 같네요. 읽어 봐야겠습니다.

자목련 2021-12-03 17:28   좋아요 1 | URL
네,그 앵커가 맞습니다. 이미 다른 책도 두 권이나 있더라고요.
치킨 배달은 실화입니다. 갑질 이파트의 이야기지요.
다양한 사회이슈에 대해 우리가 무엇 놓치고 생각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고 할까요.
뉴스 이면의 이야기와 함께 저자의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