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은 어둠과 통한다. 어둠은 암흑이며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이어진다. 새벽 두 시 어슴푸레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의 실루엣만 목격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우선 공포가 몰려올 것이다. 그 여인이 누구인가는 나중 문제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 뒤로 어디선가 자신을 쫓는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는 누군가를 찾는 행동은 지나친 것일까. 권정현의 장편소설 『검은 모자를 쓴 여자』 속 ‘민’에게 일어난 일이다.


주인공 ‘민’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건실한 남편과 아들 ‘동수’와 고양이 ‘까망이’, 반려견 ‘무지’까지 누가 봐도 단란한 가족의 일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찾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다녔던 학원에서 우연하게 남편과 만나 결혼한 민은 은수를 낳고 행복했다. 유모차에 세 살 된 은수를 태우고 산책을 나갔던 약수터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 민이 화장실에 간 사이 은수가 유모차에 나와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때 민은 무언가를 목격했다. 알 수 없는 형체, 빠르게 지나가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사고일 뿐이라고 민을 달랬다.


민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더 이상 아이를 갖기 않기로 한 민과 남편은 ‘무지’라는 반려견을 키웠다. 그러다 동수를 입양한 건 우연한 계기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교회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했고 그것이 입양으로 이어졌다. 신기한 건 아이가 아주 갓난아이가 아니었고 아이의 품에 고양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아이를 지키려는 것처럼.


동수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모든 게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검은 모자를 쓴 여자를 목격하지 전까지는. 민은 상담을 받던 의사를 찾아 약을 처방받고 일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동수와 무지, 까망이와 함께 나간 산책길에서 무지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짖기 시작했고 까망이가 무지의 눈을 공격했다. 단순하게 여길 수 없었던 민과 다르게 남편은 여전히 별일 아니라 여겼다. 그건 시작이었다. 기괴하고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났고 민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민에게 남편은 여행을 권했고 집에는 친정엄마가 오셨다. 여행을 떠난 민에게 닥친 소식은 엄마의 죽음이었다. 화재로 인해 엄마가 죽은 것이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민은 집에 설치한 홈 카메라를 떠올렸다. 동수의 부주의로 불이 난 것으로 보였다. 엄마는 동수의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민은 모든 게 그 검은 모자를 쓴 여자 때문이라고 여겼다. 남편과도 관계가 있는 여자, 어쩌면 동수의 친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남편의 자동차에서 증거도 발견했다. 차계부에 그동안 여자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완벽한 증거를 찾기 위해 민은 남편의 제안대로 순순히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한다.


병원에 입원한 민은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면서도 약은 먹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전직 경찰이었던 아버지에게 남편의 자동차에서 증거를 수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확인한 자동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민이 직접 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민은 자신이 직접 모든 걸 밝히기 위해 몰래 병원을 나왔다. 정말 이 모든 게 남편의 계락은 아닐까. 소설을 읽는 나는 남편은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고 민이 치유받기를 바랐다.


병원에서 나온 민의 앞에 나타난 남편과 여자, 그리고 동수의 모습은 진짜일까, 거짓일까. 그 어떤 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 민은 도망자처럼 오래전 동수를 발견한 폐허가 된 교회에 숨어든다. 인적이 끊긴 밤에 나와 먹을거리를 사며 자신의 집을 바라본다. 그런데 만약 민이 정말 허상을 보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검은 모자를 쓴 여자가 민이 만든 이미지라면 말이다.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민의 망상이라 여길 수도 있고 누군가는 모두가 민을 속이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재하는 것이 허상이고 허상 또한 실재합니다. 무대 밖으로 내려가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모자의 안팎에 진실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순간 비로소 형체를 갖고 여러분을 따라다닙니다. 따라서 삶이란 모자 속 고양이를 꺼내는 일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꺼내는 겁니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꺼내는 순간 결정되는 거예요.” (212~213쪽)


소설 속 민이 입원한 병원에 강연을 하는 마술사의 말처럼 모든 건 마음속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실재와 허상을 구분하는 일 말이다. 모자 속에 숨겨진 고양이를 볼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고양이를 꺼낼 수 있는 이는 또 얼마일까. 모호함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미로에 갇힌 채 출구를 알 수 없는 길을 계속 걷는 느낌이라고 할까. 작가의 말 가운데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글쎄, 모르겠다. 읽는 동안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를 떠올린 건 나뿐이 아닌 것이다. 몽상과 악몽 사이를 오가는 서늘한 공포에 소름이 돋는다.


이 소설은 처음과 끝이, 왼쪽과 오른쪽이, 위와 아래가,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고 동그라미 안에 뒤섞여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제 꼬리의 기원을 찾아, 제 꼬리를 물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진실과 정의, 시대와 역사, 슬픔과 기쁨, 잠깐 스치는 인연들, 나아가 우리 삶이 이럴 것이다. (263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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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 모자를 쓴 여자]도 읽으면 푹 빠지겠지만, 자목련님, 글에 첫문단부터 푸욱 빠져서...^^

자목련 2021-11-19 13:56   좋아요 1 | URL

얄라 님의 과분한 댓글에 하루가 신나게 열립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금요일 보내세요^^^*
 
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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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전에 드러내기 전에 나의 내면을 알아봐 주는 이를 만나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순간을 오래 이어가고 싶어 만나 친구가 된다. 상대도 나와 같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 계기가 글이라면 더욱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테디 웨인의 장편소설 『아파트먼트』 화자 ‘나’가 ‘빌리’를 향한 간절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설 합평 시간에 모두가 단점을 나열할 때 오직 단 한 사람, 빌리만이 나의 장점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마치 나의 가능성을 알아본 것과 같았다.


『아파트먼트』의 두 주인공 ‘나’와 ‘빌리’는 1996년 컬럼비아대학 문예 창작 수업에서 만났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갈망을 놓지 못하는 나에겐 안타깝게도 재능은 없는 듯하다. 그런 나에게 빌리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를 계기로 둘은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러는 과정에 빌리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 대고모의 아파트에서 거주하며 학비에 대한 걱정도 없었던 나는 빌리에게 아파트에서 같이 살자고 말한다. 미안한 빌리는 청소와 음식을 하겠다며 짐을 챙겨 나의 아파트로 들어온다.


각자의 방에서 글을 쓰며 서로의 글을 읽고 조언을 해주는 멋진 사이, 함께 영화나 TV를 보면서 둘의 우정은 깊고 단단해진다. 거기다 이혼 가정으로 아버지의 부재와 엄마와 살아온 경험은 서로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와 빌리는 같거나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 소심한 나는 스포츠를 즐겨 하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잘 어울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속에 있었고 즐거운 척 연기했다. 빌리는 처음 보는 이들과도 손쉽게 대화를 이어갔고 금세 친해졌다. 파티나 모임에서 만난 여자들과도 그랬다. 나에게 없는 것들이 빌리에겐 있었다. 그건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배우지 않고 쓴 빌리의 글은 모두에게 칭찬을 받았고 그건 진짜 소설이었다.


빌리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하찮은 존재였다.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게 유일하게 나았다. 빌리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바텐더로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서 충당해야 했고 그 와중에 글도 너무 잘 썼다. 나는 빌리의 재능을 질투했다. 그것은 빌리와의 사이에 틈이 생겼고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파트에서 살게 해주고 경제적으로 지지해 준 나만이 빌리의 유일한 친구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빌리는 점점 나에 대한 고마움을 잊었고 다른 친구들을 사귀었다. 대고모의 아파트에서 자신들이 산다는 건 공식적인 비밀이었는데 빌리는 그 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부질없는 나의 열등감은 빌리를 곤경에 빠트리는 계획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그 사건으로 인해 대고모의 아파트에서 쫓겨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아파트를 지키고 싶었던 나와는 다르게 빌리는 벌써 거주할 곳을 알아두었다. 단호하게 “넌 정말 네 인생 전부를 여기서 보내고 싶냐?”(281쪽)고 말하는 빌리에게는 아파트도 나도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었을 뿐 정착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그게 제일 힘들고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그게 전부라고 여길 수 있으니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서 다른 경험으로 채워진 삶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던 시절이니까.


타인의 경계가 그려내는 특별한 윤곽선은 우리 자신의 그것과 충돌하고,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286쪽)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과 그런 공간이 있다. 절교하듯 헤어진 친구와 함께 사라진 그 시절.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삶을 살아간다.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이 더 이상 통증을 불러오지 않는 순간과 마주했을 때 아무렇지 않아 문득 서글퍼진다.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날들을 회상하는 것처럼 쓸쓸한 일도 없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누군가와 함께 머물렀던 공간이 그리운 것 어쩔 수 없다. 완벽하고 영원한 교집합을 원했지만 결국엔 서로에게 차집합으로 남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작게나마 겹쳤던 그 부분을 다른 누군가의 무엇으로 채우면서 살아가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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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6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 👍

자목련 2021-11-16 17:19   좋아요 2 | URL
♡♡♡~~~

- 2021-11-25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리뷰들이 다 근사해서 읽고 싶어 집미다요😩

자목련 2021-11-25 11:58   좋아요 1 | URL
소설이 나쁘지 않았고요, 아마도 리뷰 대회 영향도 있을 듯 해요, ㅎㅎ

scott 2021-11-30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 당선 축하 합니다 ^^

자목련 2021-12-02 12:32   좋아요 1 | URL
스콧 님, 감사합니다.
좋은 소설이었어요^^

mini74 2021-11-30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1-12-02 12:32   좋아요 0 | URL
미니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1-11-30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11-30 21:24   좋아요 0 | URL
저두요~

자목련 2021-12-02 12:32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님, 저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날이 추워요. 안온하게 보내세요^^

thkang1001 2021-12-01 0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02 12: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1-12-0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잘 챙기세요!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전범선 지음 / 포르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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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치킨을 배달시키고 추운 날씨에 뜨근한 국물이 생각나 돼지 등뼈탕을 먹었다. 맛있게 먹고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걱정과 배달비가 꽤 많이 올랐다는 걸 생각했다. 내가 먹은 동물, 그러니까 닭이나 돼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먹었던 음식이고 닭이나 돼지는 반려동물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이들이 채식을 선호하고 사회적으로도 비거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나와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여겼다. 당연히 동물을 착취로 인해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동물권을 보호하고 차별에 반대하는 사상과 철학인 ‘비거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밴드 활동을 하고 글을 쓰는 작가, 책방 풀무질의 주인 전범선의 비거니즘 에세이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는 열흘 동안 지리산 산청 집에 살면서 쓴 글이다. 열흘 동한 하루에 하나씩 주제를 갖고 쓴 초고를 완성시킨 책이다. 나 같은 독자에게는 조금 낯설고도 어려운 책이었다. 동물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인간의 폭력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부터 주변에 채식주의자가 없는 내가 변화와 실천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좀 더 솔직해자면 이성적으로는 동조하면서도 동참에 대해서는 회의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내가 몰랐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비거니즘, 동물해방에 대해서는 조금 더 다양한 시각과 토론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저자의 말처럼 채식을 통해 재료 본연의 맛을 알고 몰랐던 맛의 세계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도 비거니즘의 즐거움이라는걸. 거기다 환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가 매일 쉽게 세상과 접속하는 스마트폰을 오래 쓸수록 고릴라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콜탄이 생산되는 곳이 고릴라의 서식지로 콜탄의 생산이 서식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 자연을 군림하고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종일까.책은 에세이라는 형식을 지녔지만 인류가 언제 어떻게 육식을 하게 되었는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자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에 대한 안내서라 볼 수 있다.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높은 식견으로 채워진 비거니즘으로의 계도서라고 할까.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남성 중심 사회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이 건너야 할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한다.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살림으로 하나 된다. 모두 생존과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비거니즘은 우리의 밥상을 죽임이 아닌 살림의 먹거리로 채우는 것이 시작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고 폄하했던 살림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35쪽)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을 비거니즘이 왜 필요한 것인지 그는 독자를 설득하고 강조한다. 그 설득의 과정 역사가 있고 현재 세계의 흐름과 유명인의 주장과 글들을 소개한다. 소로우가 채식주의자가 된 배경과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을 언급하며 동물해방운동이 21세기의 그것이라 설명한다. 인권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처럼 동물권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거니즘의 목표는 동물해방이다. 비건 세상이란 에덴동산과 같이 모든 동물이 고통 없이 사는 곳이다.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처럼 들릴 수 있어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필요하다. 비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선택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종 차별주의와 육시 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125쪽)


책을 읽으면서 자꾸 즐겨 먹었던 삼겹살과 불고기가 되기 전의 돼지와 소의 모습이 생각났다. 고기를 먹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 그 반대에 선 이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거나 비건을 선택한 이들 말이다. 최근에 학교나 군대 같은 단체 급식에서 비거니즘을 위한 식단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개선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변화하는 게 중요하다.


비거니즘의 목적은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나의 도덕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현시점에서 최우선 과제는 공장식 축산을 철폐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채식 인구를 늘려야 한다. 도살장의 소는 내가 무슨 이유로 자신의 젖과 살을 안 먹는지 알지 못한다. 동물해방은 의도보다 결과가 중요한 운동이다. (147쪽)


비거니즘의 삶을 계획하거나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동지애를 전해준다. 더불어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이 책이 정확한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나 같은 독자에게는 왜 비거니즘의 사회로 전환해야 하는지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현재 동물 관련한 생업 종사자를 위한 구체적인 지원이나 사업전환에 대한 사유를 찾을 수 없는 게 아쉽다.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아름답지만 가야 할 길이 멀다. 심각한 기후 위기로 인해 지구가 아닌 우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세계 갑부의 주장이 이뤄질 날도 쉬이 오지 않을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연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더 힘을 써야 한다. 나부터도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지만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변모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능력을 키운다. 환대하고 경청하고 공감하고 돌보고 연대하고 지각하는 힘을 연마한다. 하나 되는 요령을 터득한다. 뭇 생명과 연결하고, 스스로 온전해지고, 분열된 로고스와 에로스, 정신과 육체를 통합하는 연습을 한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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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웃고 있는 돼지가 그려진 삼겹살집 간판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저도 고민이 ㅠㅠ

자목련 2021-11-16 10:1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결심까지는 못해도 조금씩 바꿔나가는 방법을 깊게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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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의 형태를 원하지만 그쪽으로 발을 내딛는 일은 어렵다. 섣불리 내밀었다가 깊은 수렁에 빠질까 두렵기도 하고 현재까지 살아온 게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사소한 취미를 새로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이처럼 크다. 하지만 정작 시작을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운전이든, 언어든, 동호회 가입이든 결국엔 깊이 내재된 두려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의 주인공 67세 남훈 씨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은 현직에서 물러나 자신만의 위한 삶을 살기로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평생 한 몸처럼 지냈던 중고 굴착기를 파는 일도 주저했고 후회와 실수뿐인 지난 삶에 대해 딸 선아와 아내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혼자만의 기록으로 남긴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버킷 리스트는 대단한 게 아니었으니까. 아내나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화내지 않기, 백화점에서 명품 정장 사기, 체력 키우기, 외국어를 배우고 해외여행하기 정도였다. 은퇴 후 여유 자금도 괜찮았으니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버킷 리스트는 혼자만의 기쁨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의논할 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떤 외국어를 배워서 여행을 떠날까. 남훈 씨가 선택한 나라는 스페인, 그러니 당연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광장에서 추는 플라멩코에 빠진 것이다. 스페인어 강사의 말이 이상하게 그를 들뜨게 했고 이상한 확신도 안겨주었다. 진짜 달라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말이다.


“어떤 언어형식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는 것과 같지요. 이 언어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멋진 기회와 새로운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56쪽)


몸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연습처럼 확실한 보답을 주는 것도 없었다. 언어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춤이 문제였다. 아무리 연습해도 원하는 만큼 실력이 늘지 않았다. 해외여행도 중요했지만 그에겐 남은 중요한 버킷 리스트가 있었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을 만나는 것으로 남훈 씨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보연을 만나는 일 역시 스페인어를 배우고 플라멩코를 추는 일처럼 그에게는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 남은 삶에 보연이라는 가족이 들어오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전과는 다른 삶, 더 이상 후회로 남겨두고 싶지 않은 삶.


낯선 언어를 배우고 낯선 리듬을 타며 몸을 움직이는 일은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맞추어가는 것으로 보연을 향한 마음도 그러했다. 보연을 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어른으로 대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때를 놓쳤다고 포기하고 단념한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67세 남훈 씨는 지금 보다 늦은 때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이는 아버지를 떠올릴 것이고 어떤 이는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단순하게 ‘플라멩코 추는 남자’만 보고 춤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분명 소설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있다. 쓸쓸하고 작아진 모습의 아버지, 사느라 바빠 돌보지 못한 가족의 마음, 그리고 나만의 시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소설은 그것들과의 관계, 사랑에 대해 말한다. 정열적인 플라멩코에 담긴 사랑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굴착기의 기본 작업은 땅을 파고 메우는 것. 그것은 불도저처럼 한 번에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바닥을 다기지만 하는 롤러처럼 작업자를 지루하게 하지도 않는다. 보드라운 땅에서 쓰레기나 암석을 골라내고, 수도관 따위를 교체하느라 파헤친 땅을 되메우는,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버킷으로 땅을 덮고 다지면, 그 뒤에 도로가 깔리고 집이 생기고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섰다. (258~259쪽)


지금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땅을 파고 메우는 단순하고 지리멸렬한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버킷 리스트처럼 나중에 분명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자리할 거라는 걸 믿는다. 남훈 씨와 소설 속 인물들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소중한 이들과 단단한 끈으로 연결된 사랑처럼.


그러므로 67세 남훈 씨의 버킷 리스트는 우리의 그것이 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삶, 그 안에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우리들의 이야기. 편안하고 따뜻하고 까칠한 유머를 지닌 우리네 모습을 발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하루하루 코로나19시대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태연의 소설이 밝고 환한 감동을 안겨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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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7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고솜에게 반하면 - 제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6
허진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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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동화 <오즈의 마법사> 속 동쪽 마녀와 서쪽 마녀가 생각난다.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했던 마녀. 착한 마녀가 동쪽 마녀였는지 서쪽 마녀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런 신비한 능력을 지닌 마녀를 한 번쯤 만나 단 한 가지 소원을 말해야 한다면 어떤 소원을 말해야 하나 상상을 할 뿐이다. 마우리가 사는 세상에 마녀가 있다면 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동화 속 이미지처럼 별 그림 모자를 쓰거나 빗자루를 타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도 요즘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모든 걸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제10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허진희의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독고솜이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일 거라 생각했다. 풋풋하고 순수한 중학생의 첫사랑을 기대했다고 할까. 버려야 할 편견이다. 기대와 달랐다고 해서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중학교 1학년은 청소년이라고 하기엔 살짝 아쉽지만 그렇다고 어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중학교의 세계는 초등학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춘기로 고민이 많아지고 친구와의 사귐과 부모님과의 관계에 있어 생각이 자라는 시기다. 『독고솜에게 반하면』는 그런 열네 살 아이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학년 2학기 전학을 온 독고솜에 대해 반 아이들은 묘한 경계심을 보인다. 그 중심에는 반장인 단태희가 있다. 여왕이라 불리는 아이, 그 곁에는 태희의 말을 전하는 박선희가 있다. 삼삼오오 모여 함께 다니는 사이라면 큰 문제가 없는데 독고솜을 마녀라고 말하고 따돌린다. 독고솜과 한동네에 살았던 단태희는 독고솜 모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전학을 왔을 때 반갑지가 않았다. 독고솜의 교과서가 찢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당사자인 독고솜과 다르게 탐정을 꿈꾸는 서율무는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서율무는 독고솜이 점점 더 궁금했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서율무와 단태희가 화자가 되어 교차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독고솜은 정말 마녀일까. 서율무가 목격한 장면, 놀랍게도 정말 그랬다. 기분이 좋으면 모든 걸 공중으로 띄울 수 있었다. 모계로 전해지는 마녀 집안. 서율무는 독고솜과 진해지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이 뭐라 생각하건, 솜이는 진짜 멋진 아이니까.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돼 버려.”

독고솜 가방이랑 교실의 책상, 창가 화분까지 한꺼번에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건지 떠오른 것들은 다 반짝이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의자랑 교탁이랑 급훈 액자까지도 붕 떠올라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러자 마치 눈에 뭐가 씐 것처럼 세상이 다른 색으로 보였다. 미지의 세상에 훅 들어온 기분! 스스르 다리에 힘이 플리고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제멋대로 어깨가 들멍댔다. (17~18쪽)


율무가 솜이네 집에 놀러가면서 둘은 가까워지고 친한 친구가 된다. 솜이는 고구마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물론 마녀의 능력도 있기는 했다. 기분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만드는 능력. 그런데 왜 다른 아이들은 솜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을 만들어낼까. 그런 소문은 같은 반 아이 영미가 밤길에 폭행을 당해 입원을 하면서도 이어진다.영미의 마음과 상황을 잘 모르면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입원비 모금을 하고 그 과정에서 분실사고가 일어난다. 범인은 누구일까, 이번에도 단태희의 무리가 벌인 일일까.


중학교 1년의 모습은 아직은 어린 철이 없는 아이의 모습일까. 어쩌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잘 모르는 사실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편을 가르는 어른의 모습 말이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명랑 탐정 서율무가 활약하는 탐정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십대 아이들의 관계를 다룬다. 서로에게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는 진심을 보여주는 용기가 필요하는 걸 알려준다. 거기다 마녀라는 독특한 인물 설정으로 재미를 더하고 그 안에서 가정폭력과 따돌림이라는 심각한 문제을 유연하게 풀어낸다.


독고솜이 영미를 향해 마법을 부리는 이런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춘기 시절의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나의 행동과 서툰 마음이 그립기도 하고 그때 그 친구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십대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고 어른에게는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성장소설이다.


영미의 등 뒤 창문을 통해 열감 없는 가을 햇살이 밀려들어 왔다. 빛무리가 내려앉은 영미의 옆얼굴이 파도가 부서지듯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순간, 솜이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솜이의 손이 영미의 손에 부드럽게 가닿았다. 쏟아지는 햇살에도 끄떡없는, 그 빛에 조금도 묻히지 않는 솜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영미에게 향했다. 그 순간 눈 안에는 영미밖에 없었다. 흔들림 없는 솜이의 검은 눈동자가 빛 속으로 사라져 가던 영미의 먼지 같은 얼굴을 붙잡았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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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2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마법이 가지는 의미가 참 다양하게 해석되는 거 같아요. 아이랑 같이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반가워요 ㅎㅎ

자목련 2021-11-13 15:53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이 동화는 다양한 의미를 전하는 것 같아요.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남은 주말 따뜻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