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백 바깥여름 - 12g, 7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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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여름은 온통 장맛비 세상이다. 귀여운 무민은 반갑고 땡스투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커피를 잘 마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그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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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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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장면은 사라질까 두려운지 일부러 새긴 문신처럼 남았다. 그건 나의 아픈 상처이자 죄의식이다.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부질없지만 그 장면이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내가 싫어서 미칠 것 같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내내 그럴 거라는 걸 안다. 어쩌면 그게 나를 향한 벌인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8월은 악마의 달』은 그런 소설 같았다. 그러니까 강렬하고 아름답지만 끝내 온전히 수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


주인공 엘런은 아일랜드 출신의 스물여덟 살로 일곱 살 아들이 있는 이혼녀다. 아들은 전 남편과 캠핑을 가리고 했고 엘런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엘란에겐 만나는 남자가 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엘런과의 만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애인도 있다. 그런 남자는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데, 엘런은 그걸 늦게 알았다.


엘런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온 홀가분한 휴가지의 일상은 다채롭게 이어진다. 매력적인 엘런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엘런과 즐기기를 바란다. 휴가니까. 런던도 아니고 엘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뭐든 엘런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하게 만난 화려한 배우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무리의 분위기에 취해 엘런은 호텔을 벗어나 대저택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일행은 교통사고로 죽은 시신을 목격하지만 저택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술을 마시고 서로를 유혹하고 즐긴다.


휴가지에서의 하룻밤, 그게 뭐 대수겠는가. 엘런은 싱글이고 젊고 여긴 런던도 아니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러나 엘런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곧 도착한다. 전 남편이 전하는 소식,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엘런이 휴가지에서 뜨거운 태양을 즐기는 동안 아들이 죽었다. 이제 아들을 볼 수 없다. 당장 아들 곁으로 달려갈 수도 없다. 60 년 전 엘런이 느꼈을 절망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렇게 엘런에게 8월은 잔인한 악마의 달이 되었다.


엘런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을 견딘다. 곁에서 위로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맡기는 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엘런의 육체만 원했을 뿐이다. 결국엔 혼자가 된 엘런은 런던으로 돌아온다. 아들이 없는 집으로. 전 남편을 만나려 찾아갔지만 이미 젊은 여자와 떠나고 없다.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면 엘런은 자책감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나요? 나로 사는 삶을 그만두는 것.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 깊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필요하다면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요. (232쪽)


아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엘런이 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엘런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엘런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60년 전 엘런을 향한 시선은 아니다. 사회적 비난은 그녀를 말라죽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도 엘런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엘런이 아들의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바로 돌아올 수 없었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휴가지에서 따라온 몹쓸 병이 주는 고통이 엘런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엘런에게 8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8월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은 계속될 것이고 스물여덟의 엘런은 나아갈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좋았다.

나뭇잎이 떨어졌고, 앨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너울너울 떨어져 낙엽 더미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잎이 사방에서 그렇게, 단순하고 무던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두 달쯤은 이렇듯 서늘하고 감미로운 가을이 이어질 것이다. (236쪽)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짐작할 수 없는 엘런의 마음,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변화를 때론 차갑고 때론 뜨겁게 담아낸다. 사랑, 욕망, 젊음의 덧없음을 말해준다고 할까. 삶이란 알 수 없고 인간은 상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욕망을 채우려 발버둥 치는 존재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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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의 것들을 사랑한다.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을 떠올리지 않아도 저마다 사랑하는 한 글자가 있을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것들은 책, 빵, 시, 잔, 꽃, 봄, 눈, 비, 그리고 너. 한 글자에서 세세하게 파고들면 더 다양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책도 좋아하는 장르가 있고 작가가 있고 간직하는 책이 있다. 빵도 마찬가지다. 빵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더 애정하는 빵이 있기 마련이니까. 봄의 어느 순간이 좋은지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주말부터 시작되는 장마를 생각하면 선뜻 장맛비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상시화 시리즈 안미옥의 『빵과 시』를 말하려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다. 그리고 때마침 어젯밤에는 나에게 꽃이 도착했고. 친구가 보낸 사라 작약이다. 꽃과 함께 온 카드에는 안녕^^이란 말이 전부였다. 안녕의 모든 뜻이 담긴 것 같았다. 꽃을 받은 나도 친구에게 안녕^^이라 카톡을 보냈다.


빵과 시와 꽃이라니 좋지 아니한가! 내년의 작약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다시 작약이 왔고 나는 기분이 매우 좋다. 6월에도 작약의 시간은 계속된다. 잎을 떼지 않고 최대한 오래 두기로 했다. 왠지 더 풍성해 보이는 게 좋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활짝 피어날지 지켜본다.







6월의 책은 산문과 시를 만날 수 있는 안미옥 시인의 책 한 권이다. 한 권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싱그러운 청포도를 표지로 내세운 『소설 보다 : 여름 2025』와 김애란의 단편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곁에 두게 될 것이다. 6월의 책으로 3원 정도면 칭찬 감이다.



빛을 착각한다

매일 쏟아지고 있다고

사랑과 분노처럼

흐린 날이나 캄캄한 날에도

쏟아지고 있다고

어느 날엔 그림자와 빛을 혼동했다

섞이지 않는데도

사랑만 이야기하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길에는 어제 내린 눈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 발자국에 단단해진 눈

흰빛을 잃고 녹지도 않고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잘 다져진 마음들

나는 슬픔의 버터와 위로의 반죽을

겹겹이 쌓아 빵을 구웠다

깨끗한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까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나는 오독되기 위해 애쓴다

식탁 위 놓아둔 빵

만져보면 돌처럼 딱딱했다

(「크루아상」, 전문)



시를 읽으니 빵이 먹고 싶다. 빵이 없다. 빵을 살까 생각한다. 작약이 부풀어 오른 빵 같다. 빵을 먹는 대신 작약을 본다. 눈으로 먹는다. 맛은 모르고 상상할 수 없다. 그냥 작약 빵이라는 말이 재밌다. 어딘가 작약 빵이 있을 것 같다. 빵과 시와 꽃! 정말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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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약빵!
부드러운 맛일 것 같아요.^^
마지막 작약이라고 하시니 이제 곧 수국꽃이 두둥 등장할 차례이겠습니다.
공원에 수국꽃이 몇 송이씩 눈에 띄더라구요.
소설 보다 시리즈 이번 여름책도 넘 이쁘네요. 어제 딸아이가 소설 보다 책 예쁘다고 완전 흥분하더니만 저 표지였군요. 음…봄 책도 예뻤었는데 생각이 많아지네요.^^
김애란의 소설은 기다리고 있구요.^^

자목련 2025-06-15 10:07   좋아요 1 | URL
부드러운 작약빵을 상상합니다!!
나무 님은 벌써 수국을 보셨군요. 이번 소설 보다 시리즈 표지가 정말 예뻐요.
김애란의 소설은 기대가 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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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애타는 그리움만 남긴다.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나 <폭삭 속았수다>속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손을 잡고 눈을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을 아는 소설이 있다. 죽은 영혼이 땅에 뿌리를 내려 피어난 꽃, 사혼화. 그 꽃잎을 달린 물을 마시면 꽃에 깃든 영혼과 마지막 한 마디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이야기 김선미의 『귀화서, 마지막 꽃을 지킵니다』가 그것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사랑했던 사람을 딱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마지막으로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혼자 남은 마리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혼화를 보는 능력이 있다. 마리는 사혼화를 찾아주고 관리하는 ‘귀화서’에 계약직으로 취직한다. 떠난 이를 향한 간절함만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혼화. 그러나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못했기에 사혼화를 찾는지도 모른다. 귀화서에서 마리는 그들을 돕는다. 하지만 사혼화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간절하게 찾는다 해도 누구나 사혼화를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화서가 존재하는 것이고, 마리 같은 이들이 있다. 소중한 이의 사혼화를 찾는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안타깝다. 마지막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다는 설정. 꽃으로라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슬그머니 내 슬픔도 꺼내고 싶다. 꿈에서라도 선명한 얼굴을 보고 싶은 엄마, 돌아가신 엄마는 왜 한 번도 내 꿈에 나오지 않는 걸까. 어쩌면 소설 속 시혼화처럼 어딘가 꽃으로 피어나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닐까.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엄마가 나의 영혼을 선택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사혼화를 만나면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관계없는 사람 눈에는 야생화일 뿐이지만 영혼이 선택한 사람에게는 빛이 확실히 보이고 자신을 당기는 듯한 강렬한 에너지도 느껴져 그냥 지나칠 수 없거든요.” (101쪽)


사혼화를 찾아 전하고 싶었던 단 한 마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화서’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사혼화로 피어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남을 생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후 그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떠난 이들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니까.


“저는 앞으로도 사혼화의 미련을 보는 사람이 될 거예요. 사혼화를 찾고, 지키고,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도와주고 싶어요.” (325쪽)


김선미의 『귀화서, 마지막 꽃을 지킵니다』를 읽다 보면 영혼을 소재로 한 사마란의 소설 『영혼을 단장해드립니다, 챠밍 미용실』이 떠오른다. ‘챠밍 미용실’은 죽은 사람을 단장해 주는 미용실이다. 챠밍은 이런 일을 500년 동안 해왔다. 죽은 사람을 보는 건 물론이고 고양이와도 말을 나룰 수 있다. 소설은 챠밍 미용실에 방문하는 죽은 자의 사연이나 원한 같은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닌 호러이면서 판타지인 세계로 안내한다. 죽은 자를 안전하게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과정을 들려준다.



챠밍은 죽은 자를 단장해주고 그들에게 구슬을 받는다. 구슬은 챠밍에게 깊은 잠을 안겨준다. 죽은 자와 챠밍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존재인 것이다. 마리와 귀화서 식구들이 그러하듯이. 떠나간 이들과 그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연결하는 존재. 일본 소설 『퐁 카페의 마음 배달 고양이』 속 고양이도 그러하다. 19년의 묘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고양이 ‘후타’는 의뢰한 사람이 만나고 싶은 인물을 찾아가 그들의 마음 중 일부를 전한다.


이승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딸은 저승에서 잘 지내고 있고 내년이면 학교에도 들어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한 그 마음을 들은 부부의 사연은 여전히 뭉클하다. “추억도 소중하게 키우면 성장하는 걸까.” (124쪽)그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추억을 기억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 고양이 ‘후타’를 만날지도 모르니 주변의 고양이를 잘 살펴봐야 할 것만 같다.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는 대로, 기억하면 기억하는 대로 잊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삶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는 일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미안하다는 말, 그립다는 말, 그 모든 걸 담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번의 삶과 죽음은 모두의 숙명이다. 알고 있지만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 번만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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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1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혼화!
좀 슬프게 들리는 꽃이네요.
그래도 누군가에겐 간절한 꽃.
어떤 영화를 보다가 죽은 엄마가 딸의 꿈에 찾아간다면 엄마의 기억이 조금씩 망각되어 나중에 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저승사자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 대목을 보고선 아, 그래서 내 꿈에 엄마가 안 나탈 수도 있겠구나. 조금 안심했었던 적 있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였지만 한결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근데 그 후로 한 번씩 엄마 아빠 꿈을 꾸게 되면 다시 불안해지더군요. 나를 기억못하면 어쩌나? 싶어서요.
하나의 고민거리가 해결되면 늘 다른 고민거리가…ㅋㅋㅋㅋ
빨간 작약인가요?
왠지 책과 잘 어울리는 꽃처럼 보입니다.^^

자목련 2025-06-11 17:2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영화처럼 그런 걸까 싶네요. 저도 엄마 얼굴이 가물가물해요.
기억한다고 해도 선명했던 기억이 조금씩 옅어지니까요.
네, 빨간 작약(레드 참)이에요. 어쩌면 누군가의 사혼화는 작약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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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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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 제발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끝이기를 바란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배명훈의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속 윤해도 그러했다. 간절하고 간곡한 바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통하는 순간 ‘윤해’의 세상은 달라졌다. 윤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병과 마법사』은 이상한 소설이다. 그랬다. 처음에는 역사소설인가 싶었다. 가상의 국가 사라의 성군이었던 왕은 폭군이 되고 저자에는 죽음이 낭자했다. 살기 위해서 왕의 눈치를 살피고 욍의 조카 윤해는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해야 했다. 가문과 아버지를 위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약혼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윤해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마주해 목숨을 구한다. 윤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 속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할까.


약혼자의 죽음은 수도 소라울에 살던 윤해를 북방지역의 ‘술름’으로 몰아냈다. 유배와 다름없었지만 윤해는 오히려 반가웠다. 북방 지역을 지키는 기병 ‘다르나킨’을 만난다. 그리고 ‘거문담’을 본다. 벽만 끝없이 이어진 형태는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영민한 윤해는 그곳이 낯설지 않았다. 이 역시 꿈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는 꿈, 확실한 무언가가 윤해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윤해를 만난 다르나킨은 그녀를 도와 전략을 짜고 변방의 전투에 함께 나선다. 집 안에서만 지낸 윤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말(言)로만 두는 장기를 배웠다. 그것은 술름에서 유용했다. 이쯤 되면 소설의 제목인 기병과 마법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것 같다. 다르나킨은 기병이고 마법사는 윤해라는걸. 짐작과 달리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윤해의 마법은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윤해의 능력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만난 사람, 그녀는 자신을 ‘마로하’라 말한다. 윤해가 꿈에서 만나는 일들은 모두 윤해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윤해가 오랜 시간 꿈속을 헤맬 때마다 술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요새 거문담과 알 수 없는 숫자 1021.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윤해는 모든 걸 밝혀낼 수 있을까. 윤해는 정말 마법사일까.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물리칠 묘수가 윤해에게 있을까. 어쩌면 윤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는걸, 단순한 예지몽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세계가 끌어낸 예언자고, 너는 네 세계가 빚어낸 예언자지. 네 세계를 구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건 너의 몫인 것 같아.” (283쪽)


소설이 흥미로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윤해 스스로 자신을 믿는 일,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에 거문담과 1021이라는 기묘한 숫자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법을 불러올 수 있는 주문이 있느 것도 아니고, 특정한 수신호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니까.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이라는 건, 다른 세상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로하 또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오래전부터 윤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예언자 중 하나가 된다는 건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일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예언자라는 역할과 임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대체할 수 없는 막중한 사명이. 궁극적으로 윤해는 거기에 속하고 싶었다. (327~328쪽)


윤해가 가진 능력만으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기병으로 대표되는 다르나킨와 같은 이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배명훈이 그리고 싶은 세상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SF속 판타지 속 윤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라고 말이다. 윤해가 만날 세상, 그리고 그 다음의 다른 윤해가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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