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이은조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한다. 모두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나의 불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의 행복은 당장이 아니라 한 달 혹은 일 년 뒤로 미뤄도 괜찮다고 여긴다. 그러다 켜켜이 쌓인 불편은 화가 되어 폭발한다. 이은조의 소설집 『수.박.』속 인물의 관계가 그렇다. 8편의 소설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가족, 연인, 친구의 관계가 어떻게 단절되는지 보여준다.

 

 표제작 「수박」은 고교 졸업 후 가족을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난주’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는 오빠와 돈타령이 끊이지 않는 엄마를 위해 난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올케와 조카까지 돌봐야 할 지경이다. 남편 뜻대로 형편이 좋아지면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지만 8년 동안 한 번도 피임을 한 적이 없었다. 거리를 헤매던 난주는 수박 한 통을 사 들고 남편과 사랑한 맹세한 도시로 향한다. 8년 전 가보지 못한 절 근처 노점에서 한 노파와 마주한다. 함께 수박을 먹으며 노파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치 고단한 난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노파의 목소리는 수박처럼 달콤하다.

 

 “수박씨는 꼭 뱉어내야 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안에서 수박이 열린다고. 씨가 있다고 수박을 안 먹으면 미련한 거지. 씨앗은 뱉으면 돼. 그냥 툭, 툭……”

 

 “수박이란 넘이 그래. 겉만 보면 이게 무겁기만 하고 무슨 꿍꿍이 속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속이 빨갛고 단맛이 있을 거란 상상이 잘 안 되지.” (「수박」, 91쪽)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수박뿐일까. 살을 맞대고 자는 남편, 나를 낳아준 엄마의 속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 맘에 수박씨를 키우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관계란 그렇다. 나와 상대가 모두 열려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통이 단절된 관계도 소멸할 뿐이다.

 

 난주가 꿈꾼 행복은 「비자림」의 화자 ‘나’의 꿈과 닮았다. 나는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를 다시 찾는다. 함께 오기로 한 남편이 공항에서 사라져 혼자 제주도에 도착한다. 나는 비자림을 찾는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의 해설을 듣는다. 비자나무를 바라보면서 남편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돌아본다. 피아노 강사였던 나는 수강생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단란한 삶을 꿈꾸지만 남편은 달랐다. 자유롭게 자란 아와 달리 남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기한 그림이라는 꿈을 찾겠다며 떠나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비자림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 덩굴과 떨어질 수 없는 비자나무처럼 자신도 남편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설사 죽게 되더라도...

 

 나무는 나무대로 덩굴은 덩굴대로 살고 있죠. 나무와 한길을 가면서도 한 몸이 안 되려고 버둥거리고 있수다. 저기 저 허연 가지를 좀 봐요. 비자나무 가지와는 좀 다르죠? 새들이 씨앗을 물어 와 나무에 똥을 싸고 해서 피어낸 가지랍니다. 비자나무는 자기와 습성이 다른 가지들도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조끄드레만 오라게(이리 와봐요). 비자나무와 덩굴이 기가 막히게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봐요. 쟤들은 서로한테 덤벼드는 게 없어. 덩굴이 제 속으로 파고들면 비자나무는 제 땅까지 내줄 거야. 그건 덩굴도 마찬가지야. 평행선은 결코 한 지점에서 만나지 않지. 선 하나가 기울이기만 해도 그건 평행선이 아니니까. 그래서 비자나무는 죽을 거야. (「비자림」, 141~142쪽)

 

 어쩌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 끊어질까 회피하는 대신 인정하고 나면 노력에 대한 믿음도 싹트지 않을까. 그 믿음이 「가족사진」처럼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말이다. 소설의 화자 ‘나’는 초등학교 5학년으로 판타지 소설을 쓴다. 평소에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던 가족들은 작은언니의 결혼식에 쓸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놀이동산에 모인다. 처음으로 함께 온 놀이동산, 가족들은 역시나 자신의 취향을 고집한다. 작은언니가 도착해 은하열차에 탑승하고 사진을 찍게 된다.

 

 ‘나는 착각한다. 착각은 나의 행복이다. 아버지가 고급 양복을 입고 열대 과일을 사 들고 들어오는 착각, 엄마가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클래식을 듣는 착각, 큰언니가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는 착각, 작은언니가 매달 내게 용돈을 주는 착각, 오빠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는 착각, 내가 쓴 판타지 소설이 실재가 되는 착각. 착각은 멈추지 않는다.’(「가족사진」, 163쪽)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에 서로에게 소홀하게 대하는지도 모른다. 폰트 개발자라는 경쟁자이면서도 룸메이트인 「우리들의 한글 나라」속 정연과 나는 ‘친구’라서, 행복을 위해 재혼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선택하면서 딸이라는 관계를 버리는 「효녀 홀릭」에서는 ‘가족’이라서, 3년 동안 혼자 보스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는 「흐르는 물에 꽃은 떨어지고」속 나는 ‘부부’라서 괜찮다고 위장하는 것이다. 이은조는 그 위장이 얼마나 위태로운가「전원주택」에서 잘 묘사한다.

 

 누구나 바라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지만 행복한 삶은 없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지인과 가족을 거부할 수 없어 그들을 위한 전원주택으로 전락한다. 집안을 청소하고 텃밭을 가꾸던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사는지 허무할 뿐이다. 가족, 친구가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주문을 외운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게 전부였던 것처럼,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텃밭이나 가꾸고 손님들 치다꺼리만 하려고 이사한 건 아니었다. 금세 사라지고 말 연기 속에서 나는 애써 위안을 찾았다. 그리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우리에겐 근사한 전원주택이 있다고. 나는 모두가 그리워하는 지상에 마지막 남은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전원주택」, 119쪽)

 

 근사하게 보이는 전원주택은 행복한 삶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진짜 행복이 아니었다. 관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심이 아닌 가식과 의무라는 장치로 이어가는 관계는 무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서투르고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내밀한 관계를 발견하고 지속하기에 삶은 견딜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잡는다. 가름끈을 연다. 책을 읽는다. 아니, 잠든다. 책이라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매번 힘들다. 읽고 있다고 믿지만 책의 내용은 어디론가 흩어진다. 소설, 시, 인문, 철학, 어떤 분야든 그렇다. 약속이란 이름으로, 선물이란 이름으로 도착한 책들이 쌓인다. 그럼에도 다시 책을 주문하다. 다짐을 위한 변명과 함께 말이다.

 

 왜 이 책이냐고 묻는다면, 그저 그냥 끌림이라고 말한다. 책에 대한 정보나 소개글을 읽지 않았기에 나는 이 책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만, 제목처럼『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사라질 존재이므로. 아버지의 옷가지를 불에 태우면서 엄마의 사진도 함께 사라졌다. 큰 고모의 의도가 담긴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속이 상했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는 한강이라는 작가가 이유다. 나는 한강을 좋아한다. 한강의 글에서 만나는 차가움 속에 감춰진 뜨거움을, 절망처럼 보이는 가늘한 희망을 나는 사랑한다. 이문재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은 출판사 트윗에 올라온 글을 주시하며 기다렸던 시집이다.  

 

 예고 없이 도착한『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는 예쁜 동생의 선물이다. 깜짝 선물은 언제나 즐겁다. 다정한 동생의 마음까지 담겼기에 행복하다.  아직 읽지 못한『이제야, 비로소 인생이 다정해지기 시작한다』와『가족 문제』는 좀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인생과 가족이라는 단어의 울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2014년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내가 좋아하는 이웃에게 선물한 책이다. 그리고 내게도. 책으로 만난 사람, 책으로 깊어진 관계를 사랑한다.

 

 김훈의 『개』, 안현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도 주문한다. 김연수의 산문집도 나왔다. 하지만 이 책이 먼저다. 세계문학으로 만나는『대성당』. 그나저나, 김연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책을 잡는다. 가름끈을 연다. 책을 읽는다. 어김없이 책을 읽는 일상은 이어질 것이다. 조금은 천천히 말이다. 그리고 찬찬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나친 것들은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나친 사랑, 지나친 관심도 그러하다. 문제는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기준이라는 점이다. 사랑을 절제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식에 대한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다. 부모에게 자식은 소유물은 아니지만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지나친 사랑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이해할 수 없다.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은 이처럼 지나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인공 앨릭스에게 어머니의 애정은 집착처럼 여겨졌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감시와 다르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에게 성은 무한대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기 충분한 주제였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은 화장실로 제한되었다. 화장실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 화장실을 지키는 어머니, 아들의 자유로운 설사가 부러운 변비로 고통받는 아버지라니. 정말 필립 로스답다.

 

 “다들 나 좀 가만 내버려두면 안 돼요?” 34쪽

 

 앨릭스의 주장은 옳았다. 그냥 내버려둬야 했다. 아들은 사춘기였으니까, 머릿속 음란과 쾌락이 꽃을 피워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 채 화장실에 오래 있다는 건 건강과 직결된 문제였다. 어디 그뿐인가. 앨릭스는 유대인의 삶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부모와 종교로 대립하는 일도 어느 집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다. 앨릭스에게는 평범 그 이상의 문제였던 것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성에 대한 이야기(그러니까 아주 대놓고 직설적인 묘사를 통해)를 들려준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 연인과의 마찰도 함께 말이다. 서른 중반이 된 엘리트 변호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불평으로 가득하다. 앨릭스 스스로 유대인의 전통과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가 자신의 고통을 정신과 의사 슈필포겔에게 쏟아놓는 게 안쓰러운 정도다.

 

 “아, 내가 왜 계속 이렇게 늘어놓는 거죠? 왜 내가 사춘기 때의 졸린 듯한 높은 목소리로 계속 이렇게 늘어놓는 겁니까? 맙소사, 부모가 살아 있는 유대인 남자는 열다섯 살 난 애예요. 부모가 죽기 전에는 계속 열다섯 살 난 애라고요!” 162쪽

 

 왜 앨릭스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반복하듯 등장하는 통제 불가능한 성에 대한 욕구와 여성편력으로 여겨지는 행동, 그 뒷면에 가려진 앨릭스의 냉소적인 내면이 궁금할 뿐이다. 출판 당시인 1969년을 생각하면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을 게 맞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적나라하게 표현한 분노 표출은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읽기 불편한 정도는 인정한다. 필립 로스의 유머와 풍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어느 누구도 앨릭스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슈필포겔 선생님, 이게 내 인생입니다. 내 하나뿐인 인생이라고요. 나는 유대인의 우스갯소리 한가운데서 인생을 살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유대인의 우스갯소리에 나오는 아들이에요. 문제는 이게 전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거죠! 정말이지, 누가 우리를 이렇게 불구로 만든 거죠? 누가 우리를 이렇게 병적으로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약한 사람들로 만들었느냐고요? 왜, 왜 그 사람들은 지금도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58쪽)

 

 고백하자면,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꼬마 앨릭스를 만나는 동안은 정말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앨릭스’보다 『울분』의 ‘마커스’에게 애정을 표한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에 대한 무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잔인한 4월이다. 눈이 닿는 곳마다 꽃비가 내린다. 그러나 눈부신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없는 날들이다. 이런 책을 통해 잠시 잔인한 봄을 외면한다. 벚꽃 흩날리는 밤이란 매혹적인 제목의 책은 맥주바 ‘가나리야’ 를 운영하는 마스터 구도를 중심으로 단골손님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연작 소설집이다. ‘가나리야’ 는 퇴근 후 맥주 한 잔과 맛있는 안주를 곁들여 수다로 지친 하루의 피곤을 푸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섯 편의 소설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우리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발이 닿는 범위 내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안도감을 안겨 준다. 혹은 맥주와 술안주, 그 밖에 여러 가지 요소가 정신을 맑아지게 하는 장소. 그곳이 바로  ‘가나리야’ 다.’ (15주년, 13쪽>

 

 표제작 <벚꽃 흩날리는 밤>은 형사인 간자키가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편지를 읽고  ‘가나리야’ 을 찾은 이야기다. 아내가 그곳에 간자키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부탁해 두었다는 것이다. 간자키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곳의 분위기를 살피며 구도가 권하는 음식을 먹는다. 분홍빛 녹차밥을 먹으며 아내가 해주었던 녹색의 녹차밥을 생각한다. 그러다 연두색 꽃이 피는 벚나무의 이름이 교이코라는 것을 떠올린다. 5년 전에 간자키가 담당한 사건 피의자와 관계된 인물이었던 유리에를 감시했던 사연을 구도에게 이야기한다. 교이코가 필 무렵 한 공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것이다.

 

 교이코는 왕벚나무가 다 지고 나서 꽃을 피우는 품종이었고, 꽃잎이 연두색이라는 점도 특별하다. 무엇보다 다른 벚나무의 꽃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공원 안이 아주 훤해진다. 쇼부 호수의 건너편에서도 나무 아래 서성이는 유리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터였다.’ (벚꽃 흩날리는 밤, 81쪽)

 

 간자키는 그 뒤에도 봄마다 교이코 꽃이 필 때 그 공원에서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유리에를 지켜봤다고 고백한다. 어느 해 그녀가 종적을 감출 때가지 말이다. 아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가나리야’ 까지 와서 녹차밥을 먹게 만들었을까. 작가 ‘기타모리 고’는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묘사로 죽은 아내와 사라진 유리에게 대한 궁금증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이성적 판단을 요구하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 미스터리다.

 

 섬뜩하거니 기괴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를 하는 히우라가 고향 단골 요릿집의 15주년 행사 초대장을 받는<15주년>도 마찬가지다. 파티에서 히우라는 요릿집 딸인 유미에게 15년 전 고향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의 범인을 찾아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는다. 그건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딸 유미를 지켜줄 사람으로 히우라를 시험한 것이다. 그 외의 단편도 마찬가지다.  ‘가나리야’ 에 들러 구도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걱정을 털어놓을 뿐이다.

 

 특별한 점은 맥주바  ‘가나리야’ 의 마스터 구도의 역할이다. 정성을 담은 음식으로 지친 영혼을 달래주면서 묵묵히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건을 분석하고 해결한다. 마치 그곳에 오면 모든 걸 구도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면 맞을까. 이 단편집이 감성을 자극하는 건 음식 때문이기도 하다. 단편마다 등장하는 음식은 마치 묘약처럼 느껴진다.

 

 입안에 넣자마자 춘권의 외피가 생두부 껍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용물은 송이버섯만이 아니었다. 가늘게 썬 갯장어와 잘게 썬 파드득나물이 섞여 있다. 그리고 일반 당면 대신 칡당면을 사용했다. 옆에 곁들여진 기포 모양의 음식에는 가쓰오부시와 다시마의 진한 맛이 배어 있었다. 입에 넣자마자 음식은 사르르 녹아들면서 환상적인 맛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그네의 진실, 164쪽)

 

 피곤한 일상과 걱정을 뒤로하고 편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치유의 공간, ‘가나리야’를 상상한다. 꽃이 진 자리 남겨진 슬픔의 봄을 찬연한 소설이 위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들의 존재를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나에게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신비로운 끌림이라 설명하고 싶은 이누이 루카의 단편집 『여름 빛』을 읽으면서 내내 그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내게 속한 어떤 특별한 감각 같은 것 말이다.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이야기는 무섭기보다는 아련했다. 누군가와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사다 지로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이 떠올랐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처연하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 · 귀와 이 · · 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신체 부위와 감각에 대한 사연인 것이다. 

 

 표제작인 「여름 빛」은 표지를 통해 예상할 수 있는 눈에 대한 내용이다. 소설은 현재가 아닌 1945년 2차 세계대전 말 큰어머니 댁인 세토우치 어촌으로 피난 온 소년 데쓰히코와 다카시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다카시는 학교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다. 얼굴 왼쪽 전반에 시커먼 반점이 있는데 다카시의 엄마가 임신 중 배가 고파 상괭이를 먹어서 생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마을에선 상괭이는 신령과 같은 존재라서 다카시에게 저주가 내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였을까, 놀랍게도 다카시에겐 죽음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누군가 곧 죽을 사람을 보면 다카시의 왼쪽 눈동자의 푸른빛이 반짝이는 것이다. 그러나 데쓰히코에겐 상관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다카시는 저주받은 괴물처럼 보였지만 데쓰히코에게는 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친구였다.

 

 ‘다카시의 작고 둥근 밤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하나, 둘 헤엄친다. 더 집중해서 응시하자 암흑 속에서 광점이 순식간에 증식했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되지 않는 신기한 푸른빛이 줄지어 움직인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여름 빛」, 54~55쪽)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공습경보가 끊이지 않는 날들, 가족과 떨어진 소년의 외로움은 오직 다카시를 통해서만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딧불 처럼 반짝이는 눈을 통해 죽음을 예감하는 능력이라니, 어린 소년에게는 참으로 가혹하다. 이누이 루카는 이처럼 소외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들은 모두 다카시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요양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교수가 소개한 집에서 지내는 「쏙독새의 아침」의 주인공 이시쿠로는 마스크를 쓴 기묘한 소녀를 본다. 마스크를 벗은 소녀의 입술은 새의 부리와 수염이 있었다. 이시쿠로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 개의 꽃」에서 기미는 자신보다 예쁜 동생 마치를 두고 저주의 주술을 외운다. 모두가 동생에게만 관심을 보여 속상한 것이다. 형제나 자매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졌던 마음이라 기미가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2부에서는 기르던 금붕어가 돌연변이 괴물 금붕어가 되어 사람을 공격한다는 섬뜩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이」, 마술사 아빠에게 학대를 받는 소년 다쿠의 하늘을 나는 능력 「Out of This World」, 감정을 냄새로 맡을 수 있는 아야코의 사연 「바람, 레몬, 겨울의 끝」에서도 이누이 루카는 공포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누군가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맡는 후각을 지닌 「바람, 레몬, 겨울의 끝」은 정말 매혹적인 이야기다. 주인공 아야코는 폭군인 아버지와 함께 동남아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소녀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는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 소녀들에게는 슬픔과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소녀 츠마는 희망을 나타내는 녹차 향기가 감돌았다. 온갖 핍박과 절망 속에서도 츠마는 바다를 보러 간다는 아빠의 말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츠마를 통해 아야코 역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살을 에는 바람. 이어서 아직 푸르른 빛을 머금은 상큼한 레몬. 그리고 겨울의 끝을 알리는 풀과 흙의 기척. 그런 다른 향이 잇따라 생겨나면서 서로 쫓으며 줄짓다가 뒤섞였다. 꼭 음악 같았다. 초등학생 시절 음악실에서 들은 파헬벨의 캐논을 떠올렸다. 한 가지 선율이 또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겹치고, 깊이를 더해 더욱 퍼진다 ― 츠마가 내뿜는 건 환상적으로 피어오르는 향의 캐논이었다.’ (「바람, 레몬, 겨울의 끝」, 317~318쪽)

 무척 기묘하고 독특한 소설이다. 강렬했던 첫인상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끝을 맺는다. 문득 지금도 어딘가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기적이라 불릴 수 있는 일들,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