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시 - 그 어떤 위로보다
박형준 지음 / 사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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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지러운 마음으로 가득할 때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 불현듯 전화를 걸어도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는 전화를 걸지 못한다. 내 작은 상처와 아픔에 나보다 더 아파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럴 땐 속울음을 쏟는다. 그러다 시를 읽기도 한다. 소리를 내어 시를 읽다 보면 신기하게도 괜찮아지는 듯하다. 물론 시를 읽다 끝내 참았던 울음이 터지기도 한다. 이상한 일이다.

 

 계절마다, 달마다 생각나는 시도 있다. 비가 오면 읽고 싶은, 눈이 오면 꺼내고 싶은 시집도 있다. 시 전부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다시 찾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시의 세계는 넓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시는 여전히 많다. 그래서, 나는 시집을 산다. 박형준이 엮은 『그 어떤 위로보다 당신에게 시』을 읽으면서도 몇 권의 시집을 메모한다.

 

 박형준이 소개한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부터 황동규, 허수경, 문태준, 이정록, 정현종, 김기택, 함민복, 이제니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시인과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 만나는 시도 많았다. 한 편의 시와 함께 박형준의 글이 있다. 박형준이 고른 시는 힘겨운 삶에 위로가 되어주는 시다. 그러니까 어떤 시는 밥이고, 어떤 시는 뜨거운 포옹이 고, 어떤 시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시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고운 손이 되기도 한다. 봄을 품었지만 유난히 추워 마음까지 옹송그리게 만드는 이 겨울, 이런 시는 이 시대의 모든 어른에게 위로가 된다.

 

 「코코로지(CocoRosie)의 유령」

 

 지금은 거울 속의 수염을 들여다보며 비밀을 가질 시기

 지붕 위의 새끼 고양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희고 작은 깨끗한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겨울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 위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나는 어른으로서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른으로서

 봄이 되면 지붕 위가 조금 시끄러워질 것이고

 죽은 물고기들을 닮은 예쁜 꽃들을 볼 수가 있어

 봄이 되면 또 나는 비밀을 가진 세상의 여느 아이들처럼

 소리치며 공원을 숲길을 달릴 수 있겠지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겨울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가질 시기 (56쪽)

 

 황병승의 시에 박형준 시인은 이런 글을 덧붙혔다. ‘어른들의 슬픔은 신문에서, 방송에서, 회사 사무실에서 떠들어대며 객관화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슬픔이다. 그들은 슬픔을 나누고 곱하고 빼고 더하며 슬픔의 양을 잰다. 거울을 비춰보면 수염이 가득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슬픔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려는 어린이다. 어린이들의 슬픔을 유리창을 맑게 닦아내는 세상의 창이다.’ (57쪽) 겨울이 지나고 나면 분명 봄은 올 것이다. 저마다 기다리는 봄의 풍경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리 생이 올라탄 롤러코스터는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희망도 있을 터. 이성복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롤러코스터가 어디쯤 와 있을까, 생각한다.

 

 「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100쪽)

 

 ‘우리는 사소한 존재이지만 언제나 인생이란 강물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쓸쓸하고 아프더라도 그 기척은 아름답다’(101쪽)고 전하는 박형준의 글처럼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귀하고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시가 지닌 힘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읽은 때마다 아릿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니 말이다.

 

1년 단위로 매듭지는 생인 양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괜히 더 심란하기도 하다. 도망치듯 떠나온 1월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새로 세워질 계획들을 생각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 게 아닌가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날들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을 1년,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절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1년」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216쪽)

 

 겨울에 마주한 까닭인지 기형도의 시 「겨울. 눈(雪). 나무. 숲」의 이런 시구를 여러 번 읽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窓) 너무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138,139쪽)

 

 ‘시는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숨통 같은 것이다. 숨을 잘 쉬면 육신이 맑아지고, 육신이 맑아지면 숨결이 맑아진다.’ (6쪽)는 박형준 시인의 말처럼 고단한 영혼에 위안을 줄 시들이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번지는 당신의 슬픔을 시가 위로한다.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크기의 맹렬한 위로와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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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브다. 택배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나를 위한 선물이 곧 도착할 것이다.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 하성란의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을 주문했다. 작가정신 이벤트가 있어서 작가향 시리즈를 몇 권 더 구매할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읽고 고른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고 있다. 오늘 읽은 부분은 이렇다.

 

 

  ‘우리가 억누르고 있는 걱정거리는 생의 특별한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다. 거기엔 우리가 나이를 먹고, 건강을  잃고, 시들고 쇠약해진다는 사실이 딸려 있다. 생의 현 단계는 순식간에 흘러가고, 돌이켜보면 무상하기 그지없다. 스무 살이 되면 일곱 살 때 보낸 수천 시간은 휴지 조각처럼 느껴진다. 쉰 살이 되면 이십 대에 보낸 십 년 세월이 한순간처럼 덧없어진다. 삶의 문제들은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질 며칠, 그리고 강렬하거나 혹은 멍한 몇 시간 동안 아주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사소해져 기억조차 하찮은 과거의 일이 된다.

 

  예술은 여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술이란 현재를 앞질러 가, 자연이 우리를 데려갈 종착역에 대비해 우리의 합리적, 감각적 자아를 준비시켜주는 상상의 힘이기 때문이다. 얀 호사르트의 나이든 남녀의 초상화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각기 약간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끌고 온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나 상대방에게 특별히 만족하는 듯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환멸을 느끼거나 우울해 보이지도 않는다. 

 

 

 

 

 남자의 모자에는 작은 금색 배지가 꽂혀 있고, 배지에는 그들보다 훨씬 젊은 남녀의 벌거벗은, 확실히 에로틱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 배지는 그들이 관계를 맺기 시작하던 시절, 이제는 희미하게 멀어진 그때의 기억을 추억하는 기념물이다. 이 작품은 노년이 아니라 젊은 시절에 봐야 할 이미지를 담고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식을 전해주곤 한다.’ (영혼의 미술관, 142쪽)

 

 

 

 

 

 읽고 싶은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 존재의 순간들 맨부커상 수상작가 하워드 제이콥슨의 『사랑의 행위』, 강창래의 『책의 정신』, 최근 알게 된 문학치료와 비슷한 맥락 일 것 같은 존 폭스의 『시詩치료』,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인 손미의  『양파 공동체, 윤제림 시집 새의 얼굴, 아직 만나지 못한 최진영의 장편 『나는 왜 아직 죽지 않았는가, 강렬한 표지로 말을 거는 듯한 박선희의 『이브가 말했다』,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순간, 나는 아프다.

 

 

 

 

 

 

 

 

 

 

 

 

 

 

 

 

 

 

 

 

 

 

 

 

 

 

 

 

 기다리고 기대했던 소식은 들리지 않는 오후다.  그러니까 소식의 주인은 내가 아닌 것이다. 조금은 천천히 흐를 오후, 어떤 책을 읽어야 빨리 지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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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개의 마음이 서로를 견제한다.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짐작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12월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어떤 마음은 처참하게 무시했고 어떤 마음은 은근슬쩍 힘을 보탰다. 모두 내 마음이다. 그러니까 여러 개의 마음을 가장하여 진짜 마음을 감추고 싶었던 거다.

 

 어제는 병원에 다녀왔다. 어떤 통증을 확인받으러 간 것이다. 단순한 통증이었고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방법이 현명하다는 뜻을 담아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해주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고 3시간 동안의 병원 일정을 끝내고 돌아왔다. 피곤한 육체는 어제가 아니라 오늘 본색을 보인다. 살짝 미열이 지속된다. 내 몸이 내게 전하는 신호, 나쁘지 않다. 그로 인해 나는 충실하게 몸을 돌볼 수 있으니까. 책에 대한 구매욕이 주춤했다. 그건 위장이었다.

 

 단편과 시집으로만 만난 이장욱의 장편 <천국보다 낯선>이 민음사 젊은 작가 시리즈 4로 나왔다. 이장욱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이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장욱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성란의 산문집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는 제목이 참 좋다. 물론 내용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왈왈>보다 긴 호흡의 글을 기대한다. 김연수, 김이설, 황석영, 천명관 등 활발히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이 읽은 세계문학을 만나는 책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은 세계문학에 대한 길잡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문학에 대한 기사를 읽고 다시 검색하니 절판이 된 황정은의 <양의 미래>, 좋아하는 작가들의 단편은 나중에 단편집으로 만나야 할 것이다.

 

 

 

 

 

 

 

 

 

 

 

 

 

 

 

 

 

 

 

 

 

 여러 갈래의 마음은 모두 나의 것이다. 나의 마음인데 나는 왜 그 마음들이 두려울 때가 있을까? 12월이라서 그럴까. 감기로 이어질 미열을 챙기듯 나의 마음을 챙겨야 할 12월이다. 12월과 1월 사이, 길을 잃는 나의 마음을 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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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읽어보고 싶군요. 보관함에 콕!!

마음 다독일 책 한권 고르고 갑니다...

자목련 2013-12-18 12:15   좋아요 0 | URL
제목 때문인지 더욱 관심이 가는 책이에요^^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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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군가에서 나로 바뀔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읽는 건 아닐까. 소설이야말로 꾸며진 이야기라는 완벽한 신뢰를 바탕으로 가장 내밀한 우리네 삶과 대면할 수 있는 최고의 통로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통해 그 확신에 한 발 다가선다.

 

 열네 편의 소설은 고스란히 우리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때로 평범함에서 특별함을 꿈꾸는 일탈의 조각들, 아득한 기억 속에 숨 쉬는 어떤 기억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로 채워진 소설집이다. 하여 어떤 단편은 지루하게 읽히기도 하고, 어떤 단편은 조미료 맛이 그리운 음식처럼 무미건조했고, 어떤 단편은 고즈넉했고, 어떤 단편은 은밀하게 다가온다. 우리 삶이 특정한 감정으로 말하여질 수 없듯 말이다. 놀라운 건 앨리스 먼로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다. 그것은 여든을 넘은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산물이다.

 

 단편마다 나의 이야기처럼 소름이 돋고 빠져드는 이유가 그 증거다. 한 남자의 아내로 딸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시인이라는 완벽한 자아까지 갖춘 한 여성의 일탈과 마주하는 <일본에 가 닿기를>는 어떤 특별함을 꿈꾸는 이들에게 묘한 충만을 안겨주기도 한다. 남편이 아닌 남자를 향한 욕망에 충실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끝나 뒤에 남겨진 죄의식이 현실을 지배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죄. 그녀는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결연하고 탐닉적인 관심을 아이가 아닌 다른 것에 기울였었다. 죄.’ (일본에 가 닿기를, 39쪽)

 

 정말 그것은 죄일까. 다른 어떤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마음일까. 앨리스 먼로는 이처럼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다른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건 누구나 그런 상황과 마주할 수 있다는 암시인지도 모른다. <아문센>은 계획된 대로 모든 게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시골 요양원의 권위적인 의사와 도시에서 그곳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교사. 둘은 그 자체로 주변인의 관심과 수다의 주인공이 된다. 여교사와 의사는 사랑을 나누고 결혼식을 하러 떠난다. 하지만 그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이 결별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헤어지는 장면과 몇 년 후 다시 조우하는 모습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통증으로 짐작할 뿐이다. ‘여전히, 우리가 그 무리에서 빠져나오면 금방이라도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각자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만큼 확신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아문센, 87쪽)

 

 우리 생엔 이처럼 명확하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절도 있다. 슬프도록 아름답거나 가혹하게 잔인한 시절이 그러하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닐이라는 다른 사랑을 선택해 원하지 않는 변화를 겪어야 하는 아이의 이야기<자갈>에서 어른이 아닌 아이들에게 생은 더욱 잔인하다. 유치원에도 다니지 않았을 나이인 나는 가족처럼 기르던 개를 물에서 구하기 위해 죽은 언니 카로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고 있다. 왜 그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그 과경을 목격한 나의 상처를 돌아봐 줄 이는 왜 없었을까. 여전하게 트라우마로 따라다니는 장면, 어른이 되어 만난 닐의 말은 슬픔의 크기를 줄어들게 만든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자갈, 142쪽)

 

 그럴지도 모른다.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이 희극이 되지는 않겠지만 옅어질 것이다. 그런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게 우리 삶이라고 앨리스 먼로는 말한다. 고요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이다. 누구나 늙고 죽는다. 늙는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 하나쯤 품었다면 서글픔이 사라질까. 부유한 아버지를 둔 소아마비를 앓는 여자 코리와 유부남인 젊은 건축가의 밀회를 다룬 <코리>는 그런 비밀이다. 둘의 관계를 알고 협박하는 이가 있지만 개의치 않고 오랜 시간 만남을 유지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숨 막히고 떨리는 생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행복할 수 있다면 삶은 찬란할 것이다.

 

 모든 삶이 그럴 수 있을까. 당신 혹은 나의 삶도 <호수가 보이는 풍경>처럼 머리에서 맴도는 기억들이 어지럽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먼저 떠나고 요양원에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삶. 거부할 수 없는 생의 진실이다. 앨리스 먼로는 현재형인 삶이 과거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사라졌다고 믿는 과거가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자전적 소설인 어린 시절 동생들의 태어남을 통해 탄생을 경험하고 친밀했던 이의 죽음으로 처음 시체를 발견하는 <시선>, 알 수 없는 충동과 불안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의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한 <밤>, 교사였던 어머니와 동행한 댄스파티에서 성에 대해 눈 뜨는 이야기 <목소리들>, 내가 아닌 타자他者가 되어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해 담담하게 들려주는 <디어 라이프> 를 통해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진리이자 대단한 발견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디어 라이프, 416쪽)

 

 일기를 다시 써야겠다. 사라질 시간에 대한 기록, 내가 모르고 지나온 삶의 기척을 모을 수 있도록 말이다. 어제가 되는 오늘을 가만히 꺼내볼 시간을 기약할 수 없지만, 어쩌면 사라질지 모르는 일상이라는 찰나를 몇 줄의 메모로 붙잡고만 싶어진다. 모든 게 앨리스 먼로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앨리스 먼로를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아무런 기대나 설렘 없이 그녀의 글과 만났다. 열네 편의 단편은 시냇물이 흐르고 흘러 생이라는 바다에 닿는 여행 같았다. 그 물길은 때로 요란하게 요동치기도 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부유물과 함께 흘러간다. 긴 시간 흘러 바다에 닿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충만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의 그것이라는 명백한 진실과 맞닿는 순간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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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내리는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 점심에는 캔맥주를 마셨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치지 않는 눈 때문이라고, 해두자. 긴 낮잠을 자려했으나 깨어 있다. 전화를 건 친구와 겨울 난방비 걱정과 반찬 이야기를 했고, 좋아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긴 통화를 했다. 그리고 시집을 주문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다섯 번째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 이 시집을 받는 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책장에서 시집을 본다.  방금 주문한, 이제 구판이 된 시집이다.

 

 

 

  새로운 시간의 시작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27쪽)

 

 

  행복

 

 산에서 내려와서

 아파트촌 벤치에 앉아

 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아 행복하다!

 

 나도 모르겠다

 불행 중 다행일지

 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와서

 그 순간은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

 그 순간은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간이 기나긴 고통을

 잡다한 욕망이 낳은 괴로움들을

 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

 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 (62, 63쪽)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할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74, 75쪽)

 

 

  절망의 그림자

 

  순간순간 절망을 넘어서려고 그러는 거야.

  산보

  술 한 잔

  한숨과 눈물

  어떤 꽃

  어떤 웃음

  무책(無策)을 밀고 나가는 듯한

  힘찬 몸짓

  무슨 지껄임

  뒷모습만 있는 그림자. (55쪽)

 

 

  흰 종이의 숨결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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