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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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 낮보다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때문에 밤은 새로운 세상의 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밤을 소유하며 즐길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누군가는 밤에도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밤을 지켜야 하며 누군가는 밤의 그늘에 속해 숨어버린다. 소설 『우선권은 밤에게』의 스물 두 살의 주인공에게 밤은 거대한 안식처이자 불안의 공간이다.  

 

 주인공 나는, 미혼모였던 엄마 대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의 재혼으로 잠깐 아빠가 존재했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스물 두 살의 나는 서울의 어느 전문대 근처의 한 부동산에 근무한다. 할아버지와 할어니가 차례로 죽고 혼자 남은 나를 그가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다. 죽은 엄마의 남편이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계부가 아닌 전 계부가 운영하는 부동산에서 매물로 나온 집들을 원하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1년 넘게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 뚱뚱해진 몸은 계절마다 같은 옷, 같은 신발로 지낸다.

 

 작은 읍에서 혼자 지낸 나에게 서울은 연극무대와 같았다. 나의 감정을 숨긴 채 다른 나로 사는 것이다. 누군가 남기고 간 먼지 가득한 살림살이,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최신 유행의 원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속내를 읽는다. 밤은 나에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면의 밤은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밤, 나는 주인을 찾지 못한 집들을 청소하고 들의 이야기를 듣다 그곳에서 잠들기도 한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그 외투에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를 덮어 쓰고 밤의 거리를 걷는다. 커다란 주머니에는 언제나 편의점의 음식들. 그것들을 만지작거려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끈적이거나 가슬가슬한 손가락.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까닭인지, 밤의 거대한 반죽에서 떨어져 나온 한 점 부스러기로 보이는 때문인지, 반년쯤 이어진 밤의 산책길에서 내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5쪽

 

 소설은 단조롭다. 나의 일상이 단조롭기 때문이다. 부동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거나 편의점에서 사온 단 음식들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 되면 매물로 나온 빈 집을 기웃거린다. 부동산은 찾은 신입생에게 여러 집을 보여주면서 나는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움츠러들고 두려운 모습을 숨기며 방어하는 자신을 말이다. 그러다 집을 구하러 온 쌍둥이 여사가 장독대집의 주인이 되고 그들이 운영하는 나이트룸을 만나면서 달라진다. 그 방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고 단 한 번도 내놓지 못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혼자 외로웠던 시절에 대해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 대해서 말이다. 쌍둥이 여사가 드려주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되는 대로 살아온 삶, 나를 돌보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따끔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인 것이다.

 

 “사람은 잘 먹지 않고 잘 입지 않고 잘 자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잘 살 수는 없어요.” 159쪽

 

 서울의 밤이라는 공간은 얼마나 화려한가. 그러나 그곳의 삶이 모두 편안하지는 않을 터. 소설은 집을 보러 다니는 스물 두 살의 여자를 통해 밤을 견디는 다양한 사람들의 상처와 삶을 이야기 한다. 어둡고 깊은 밤이 지나야 밝고 환한 아침이 오듯 그 상처를 이겨내야 한다고 나즈막하게 말한다. 지친 육체와 영혼이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없는 그들의 밤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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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에 보라색 표지로 나를 설레게 만든 박연준의 시집에 이은 자주빛 표지의 이승희 시인의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과 신동옥 시인의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시집을 들일 것이다. 이승희 시인의 시집은 만난 적이 있지만 신동옥은 낯설다. 풍성하게 11월을 채워 줄 『나우 이즈 굿』『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는 이미 곁에 있다. 포근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이런 책이 나와 함께 11월을 보낼 것이다. 오전에 주문한 이제하님의 소설 『코』, 제목이 독특한 김중일 시인의 『아무튼 씨 미안해요』, 문학동네 세계문학 외로운 남자. 그러나 정작 11월을 채울 책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내가 기다리는 책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시옷의 세계』와 제목을 알지 못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도언의 산문집이다. 두 권의 책이 11월에 나올 거라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두 작가의 산문집 『마음사전』『불안의 황홀』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책이다. 때문에 아직 만나지 못하는 두 권의 책에 대한 기대도 크다.

 

 내일은 입동이고 모레는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수험생이 없으니 수능은 남의 일이 되었다. 11월은 근면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달이다. 단 하루의 휴일도 없는, 빈틈없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달이다. 11월처럼 근면한 사람이면 좋겠다. 11월처럼 빈틈없는 사람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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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0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불안의 황홀, 보관함에 던집니다.^^
아직 못 읽었는데 새로운 산문집이라니...
11월은 제 개인적으로도 그야말로 휴일 없는 근면의 나날들입니다. 휴~

자목련 2012-11-06 17:09   좋아요 0 | URL
보관함이 경쾌하게 받아줄 것 같아요!!
근면과 함께 휴식과 웃음의 날들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2012-11-06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06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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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순하게 뜻을 같이 하고 동참하는 경우라도 그 순간, 삶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 선택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겁내지 않는 이가 있다.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이 새겨진 붉은 색연필의 표지 목수의 연필에서도 그런 사랑을 만난다. 한 치의 균열도 찾을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같은 사랑이라고 하면 맞을까.

 

 소설은 에스파냐 내전을 배경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의사인 다 바르카와 그의 연인 마리사, 그녀를 흠모하는 간수 에르발이 들려주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다. 책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인 다 바르카를 취재하기 위해 신문기자가 그를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혁명가이자 의사였던 그의 생은 항시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에르발이 감시하게 된 이유는 마리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마리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르발은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다 바르카의 연인이라는 건 그에게 거대한 상심과 분노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다 바르카가 감옥에 있을 때 마리사의 면회나 물건을 전달해주는 일을 거부할 수 없었다.

 

 혁명가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 바르카와 신념이 달랐던 마리사의 집안에서는 그를 반대했고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면서 사랑을 굽히지 않았다. 함께 한 시간보다는 지켜보는 시간이 더 많았을 사랑이다. 소설은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에브발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담아낸다. 다 바르카가 감옥에서 만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에스파냐의 역사와 정치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지루했고 어려웠다. 감히 내가 감옥이라는 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동질감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집행해야하는 에르발에게 환청이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가 된 에르발이 자신이 죽인 화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에르발의 도움이 있었다. 다 바르카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랬다. 사랑하는 여자의 남자를 감시하면서 그녀의 행복을 빌어줘야 하는 그 마음은 어땠을까? 세월이 흐른 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그들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다.

 

 난 그전에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 둘을 떼어놓지 못했어. 내가 마리사 마요와 다니엘 다 바르카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안 건 그때였지. 사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부부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어. 소설에선 그럴 수 있어도 그 시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그건 마치 향로에다 화약을 뿌려대는 짓이나 다름없었으니까.  164쪽

 

 신념대로 살아 온 남자와 그를 지지하며 사랑한 여자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해 그들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의 삶은 얼마나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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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2-2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습니다.

혁명과 로맨스, 거의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만 보니 제 리뷰는 전자에
더 비중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10월을, 붙잡지 않는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그 겨울이 끝나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만날 거라는 믿음으로 바뀐 어떤 계기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막연하게 그렇다. 계획을 세우려고 마음 속에 담가두었던 말들을 꺼내기 시작하자 마자 날씨는 마스크를 벗내고 감춰둔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갑자기 추워졌다는 말이다.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멈춤이 되고 말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말을 생각한다. 계획은 여전히 계획중이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여전히 멈춤에 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왜 이리 먼가요. 나의 두려움과 나의 게으름 때문이겠지요.

 

 가을과 겨울을 통과하는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텃새가 아닌 철새가 되어 가을과 겨울을 말랑말랑한 기운이 감도는 낯선 곳에서 보내고 싶다. 검은 빛깔의 새가 되어도 좋겠다. 검은 바위 위에서 졸고 있거나, 추수를 끝낸 논의 물 웅덩이의 물을 마시거나, 좋아하는 이가 사는 집의 창틀에 살그머니 내려 앚아 그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도 좋겠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고 나직하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은 8월에도, 9월에도, 내가 좋아하는 4월에도 있는데 가을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오늘이라고 믿어서 그런 걸까.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불을 켜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하늘의 빛깔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창으로 들어오던 빛이 점차 사그라 든다. 설악산에는 첫 눈이 내렸으니 내린다는 비는 어디선가 눈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벌써 첫, 눈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라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몇 권이 책으로 달랜다.

 

 처음 문학동네 시선집이 나올 때는 몰랐다. 무지개보다 더 고운 색깔의 표지를 마주하게 될 줄 몰랐던 거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시집들을 기다리며 기대할 지도 말이다. 드디어, 보라를 만나는 시간이다. 박연준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는 제목부터 목이 메인다.  다른 글로 만난 시인 강성은의 첫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도 조만간 곁에 두려고 한다.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한 쿠코츠기의 경우와 작가 정신의 소설樂 시리즈인 이신조의 우선권은 밤에게도 읽고 싶은 책이다.

 

 천둥 소리가 들렸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이 비는 추위를 데리고 올 것이다. 비는 가을과의 이별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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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3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연준의 시집 제목, 아,, 저건 뭔가요. 호기심이 이네요.
담아가요, 자목련님.^^
그나저나 이곳 남쪽도 오늘은 꽤 싸늘했어요. 좀 두께감 있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까봐요.
계절이 가고 있는 것도 미처 몰랐네요. 내일이면 11월인데.

자목련 2012-11-01 06:4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박연준의 시집 정말 궁금해요.
어제보다 아주 아주 많이 추워요. 조만간 여기 저기, 첫 눈도 내리겠지 싶어요.
11월, 따뜻하게 포근하게 시작하세요^^

블루데이지 2012-11-03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연준시인의.시집제목이 정말 하루 종일 입에 맴돌아요~~왜그럴까요!!
11월이예요...11월에도 좋은글 많이 읽게.해주세요~~
재미있는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12-11-05 11:17   좋아요 0 | URL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젠 아버지라는 말만으로도 먹먹해져요..
프로필,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군요!!
 
워커바웃
김하경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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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이는 과거에 매달린 채 살고, 어떤 이는 오로지 내일만 보고 산다는 것이다. 모두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다르다. 김하경의 소설집 『워커바웃』은 당신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냐고 묻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은 우리와 다르지 않게 이 시대를 사는 시민들이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혼자만 끙끙앓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하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분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 누군가의 일기처럼 다가온다.

 

 표제작 <워커바웃>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고 사는 한홍이와 그녀의 마음을 열게 만드어 준 발데르를 통해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리랜서인 홍이는 친구 희선의 부탁으로 율포조선 해고자들의 농성집회를 취재하기 위해 율포로 향한다. 25년 전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굴뚝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와 그들을 지지하고 걱정하는 그들의 가족과 동료를 통해 그녀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 때문에 가족 모두가 힘들었기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율포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삶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들이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을 응원하며 자신의 취재를 도와주는 발데르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들과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말하게 되었다는 것을. 같은 마음으로, 같은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 비로소 굴뚝 위 사람들과 굴뚝 아래 사람들이 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198쪽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진숙과 크레인을 떠올린다. 함께 염려하고 함께 기도했던 순간들을 말이다.  아버지의 삶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홍이가 굴뚝 집회 현장을 지켜보면서 발데르에게서 느꼈던 그것은 같이 가는 것이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다 함께 가는 길이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일라는 걸 우리는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초란>은 과거 노동 운동의 지도자였던 강준을 통해 여전히 노동 운동의 현실은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라고 말한다. 시골로 들어와 닭을 키우는 강준은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과거 대산중공업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함께 노동 운동을 하던 친구 영호가 감옥에서 죽은 것이다. 그 뒤로 강준은 그 일과 관련된 이들과는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러다 늦었지만 영호의 추모비를 세우는 행사로 후배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강준을 통해 1980년대를 마주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선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자는 강준의 말은 이 시대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

 

 ‘1980년대처럼 싸우라는 말이 아이다. 그렇게 싸울 수도 없꼬. 지금은 분명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아무리 세상이 절망적이라 캐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데이. 그 유일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촛불 시민이 아무리 거리로 몰려나와도, 인터넷 누리꾼이 아무리 떠들어싸도, 조직적으로 되지 않으모 반짝하고 끝나고 마는 기라. 눈을 뭉칠라카모 먼저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그 작은 덩어리를 굴리모 많은 눈들이 거 들러붙어 큰 덩어리가 되는 기라. 그 작은 덩어리 하나하나가 노동조합 아이가?’  69~70쪽

 

 촛불 시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동참을 유도하는 <지르 자자! 찌찌!>, 교통사고로 뇌사자가 된 친구의 죽음을 통해 안타까운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누가 죽었어요?>, 개혁을 꿈꿨지만 당에 이용만 당하고 빚만 지고 만 씁쓸한 정치 현장을 보여주는 <비밀과 거짓말>, 사회적 약자지만 보호받지 못한 채 결국 불행으로 생을 마감하는 둘례와 윤철의 이야기 <둘례전>은 모두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준다. 

 

 김하경은 힘겨운 현실에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인물을 내세웠지만 포기를 말하는 대신 앞으로 나가가라고 말한다. 강준의 말처럼 인생에는 연습도 실험도 없으니까.  희망을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이다.

 

 ‘어차피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실험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전이 있을 뿐이다. 분명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간다. 빌어먹을……. 그게 내 운명이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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