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서평을 써주세요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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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김훈은 내게 무서운 인상이었다. 버럭 소리라도 지를 듯한 모습이었다. 앵커와 마주하며 자신의 소설을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은 그랬다. 그의 글이 처음이기에 기대도 많았지만, 딱딱한 글 일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나를 만나는 글은 여린 글이었다. 산문 <바다의 기별>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거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 부른다.본문 13쪽 아, 어쩌랴. 사랑은 이렇게 슬픈 노래인 것을, 김훈에게도 사랑은 그러하니. 그 짧은 글은 가만 눈을 감게 했다. 내게 지나간 사랑은 과연 그리했나. 잡고 싶은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가 알리고 싶은 기별은 사랑이었나.
 
 치열한 삶의 현장,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곳을 기록하던 연필, 그 연필이 사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생경한 느낌이 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딸아이에 대한 애잔함을 연필로 써내려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 시절, 부산에서 미군에게 쪼꼬렛을 얻어 먹던 시절, 그 후로 다시는 허쉬 조꼬렛을 먹지 않는다는 작가 김훈. 추억속에서 그의 단호함, 그가 아버지로 부터 받았을 강직함이 설핏 스친다.  그의 글 중 나는 이 글에 밑줄을 긋고 그 글을 이해하고 싶다. 나의 고통은 나의 생명 속에서만 유효한 실존적 고통이다. 인간의 존엄은 그 개별성에 있을 것이다. 소설이 인간의 개별성 위에 언어의 구조물을 쌓아가듯이, 의학고 인간의 개별성을 구성함으로써, 문학과 의학은 만날 수 있다.본문 42쪽 실존적 고통, 개별성, 그리고 문학, 언젠가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그것들과의 소통하는 시간이 멀더라도 오기만 한다면 좋으렸만.
 
 그가 기자로써 밥벌이를 할 때,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며 밤을 새우던 시간, 그가 만난 고 박경리에 대한 글. 읽는 내내 분명 특종기사를 실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의 마음엔 무엇으로 가득차 있었을까.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오치균과의 만남의 글에서 자신이 연필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동되는 내 몸의 힘이 원고지 위에 펼쳐지면서 문장은 하나씩 태어난다. 살아 있는 몸의 육체감, 육체의 현재성이 없이는 나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글은 육체가 아니지만,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인 것이다. 111쪽
 
최근 강연 내용을 원고로 쓴 글과 부록으로 그간의 서문 모음과 수상 모음을 만나는 것은 김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특별한 배려다. 또한 그 글을 통해, 김훈이라는 작가와의 거리는 좁혀진다. 오치균의 그림을 보며 그와의 만남을 기록한 부분을 자연스레 다시 읽어보니 글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13편의 산문은 그의 고백과 같다. 그는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미 긴 서사시를 쓰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단단할 것만 같았던, 심연에서 흐르는 글은  마치 두부처럼 부드럽다고 할까. 고즈넉하게 해가 지는 모습이 떠오르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이 생각나게 했다. 감정이 배어있는 편지글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들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함은 당연한 것이라 위안을 삼는다.
 
 김훈, 강철같은 느낌은 아직 남아 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 과 같은 남성적이고 전투적인 글로도 유명하지만 나는 그의 <화장>, <언니의 폐경>속에 녹아든 소통으로의 언어가 궁금하다. 이제 곧 그와의 소통이 시작된다. 우선 <화장>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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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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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롯이 글을 쓰는 작가, 당연 모든 작품이 같을 수는 없다. 같아서도 안 될 것이다. 조경란을 떠올리면, 아무말 없이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만나는 듯한 느낌, 가만 마주 앉아 켜켜히 쌓아둔 슬픔을 가져갈 것 같은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글 때문이리라.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소설, ‘나의 자줏빛 소파’, ‘불란서 안경원’을 참 좋아한다. 장편도 만났지만, 단편에서 느껴지는 조경란의 글이 더 좋다. 

 풍선을 꼭 사야할 것만 같았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유독 떠나는 이, 남겨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나를 지켜주는 이들은 언젠가 모두 나를 떠나고 만다. 죽음으로 인한 영원한 부재이거나, 사랑의 이별, 그래도 남겨진 이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어김없이 하루를 맞이하고 살아내야 한다. 

 매번 그녀의 소설에는 요리가 등장하고, 나이가 등장한다. ‘풍선을 샀어’ 에서 독일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어린 조카와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한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여성 화자가 많았던 기존의 소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두 소설, ‘달팽이에게’ 와 ‘달걀’ 이 갖는 변화는 크다. 예상할 수 없는 아니, 치유할 길이 없는 알츠아이머, 파킨슨, 치매라는 질병을 안고 사는 소설 속, 고모, 엄마, 이모.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가족의 죽음, 부모를 대신해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던 고모, 이모의 죽음을 말하지만, 결국 남성 화자를 통해 여자를 이야기한다. 고모라는 여자, 이모라는 여자, 그들이 사랑한 여자들에 대한 초상이다.  

 남편을 찾아 낯선 도시에 지도 한 장을 의지하며 길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형란의 첫번째 책’. 형란에게 지도는 남편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할머니가 손녀인 나를 떠나보내는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손녀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항상 결핍은 있었다. 다만, 그 전작들에서는 결핍, 그대로로 남았다. 이 소설집에서는 부재를 채울 수 있는 긍정, 희망을 보여준다.  부드러워지고, 느슨한 느낌을 받는다. 어쩜 작가 역시 삶에 대해 떠남에 대해 좀 자유로운게 아닐까 싶다. 

 
쓴다는 건 종이 위에 나를, 나의 표상 하나를 거기에 내려놓는다는 게 아닐까요. 이것은 보잘것없는 지도 한 장에 불과하지만 이 얇고, 가벼운 한 장 종이 위에 나는 나의 첫번째 표상을 내려놓았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첫번째 책입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단 한 권의 책과 조우할 수 있듯이 이 지도 또한 누군가와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1월의 편서풍과 7월의 무역풍 속에서 우리는 간은 바람과 같은 기후로 살고 있듯. 우리의 은밀한 의식은 이 한 페이지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119~120 쪽

 인간의 고독, 우울함, 내면의 출렁임을 하나 하나 풀어나가는 ‘밤이 깊었네’, ‘마흔에 대한 추측’은 가끔씩 소리 내어 웃거나 울고 싶은 우리네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소설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일에서 니체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도 독일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도 홀로 남겨졌지만 우울을 이겨내려는 몸짓들도 다르지만 하나의 모습이다. 고립되지 않고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려 애쓰는 흔적들이 조경란의 변화인지 모른다.  서른을 노래했던 작가, 이제 그녀는 마흔을 노래한다. 치열한 삶, 둔탁하면서도 날카롭던 그녀의 글을 떠올리기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떻게 할까.

 그녀의 책을 만나면서 나 역시 내게 올 마흔이라는 초상을 그려본다. 모나지 않기를, 혹여 두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나만의 풍선을 기억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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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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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꿈/ 악몽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도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책을 열면 만나지는 문장들이다.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1973년의 기록들. 그러나 그 기록은 35년 전의 기록뿐이라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만큼 이민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게  중심, 경계의 안이 아닌 밖에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다. 
 
 한 남자의 이민 이야기(그는 모든 이주노동자이다)를 시작하여 유럽 각국의 실정, 그들이 타국에서 견뎌내는 환경, 그들의 생활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현상을 기록한다. 그 시절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시절의 경제, 유럽의 시장 경제를 알지 못한다. 다만, 한국에서도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일자리를 찾아, 꿈을 찾아, 외국으로 향한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조국이 아닌 고향이 아닌 타국 타향에서의 삶이 어떠할 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 주변에서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는 그들, 35년 전 그들을 만난다.
 
 자본주의 윤리에 따르면, 가난이란 개인이든 사회든 기업에 의해서 구제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기업은 생산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 판단되며, 이 생산성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된다. 28쪽 정말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게 자본주의일까. 그렇다면 왜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까.  이민노동자들은 귀중한 경제적 자원이었다. 꿈을 찾아, 국경을 넘고 일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검사에 검사를 받고 드디어 합격자가 되어 기차에 몸을 싣는 많은 사람들. 그들은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당당한 귀향을 소망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악조건이었다. 좁은 잠자리, 반복되는 단순 노동, 본국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 채, 변두리의 삶이 된다. 

 ‘정상적인’것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경우는 그 반대가 되는 행동, 즉 ‘비정상적’이며극단적’이거나 혁명적인 행동들을 통해서이다. 그 정상적인 것이 이렇게 해서 그 정상성이 박탈되어 버리고 나면,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느낌은 그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그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 전채로 확장되어 나간다. 106쪽 부당한 대우를 받음을 알았을 때, 상사나 사회에 요구 조건을 말해도 무시당한다. 그러나 결코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은 그들을 기다리는 고국의 부모 형제, 사랑하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글과 함께 한 사진은 한 편의 다큐다. 내일을 희망하고 돌아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진 속, 메마른 표정에 담겨있다. 그 눈빛을 그 표정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강자라는 이름으로 고용주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불법체류자들을 우리는 고용한다. 그들에게 어떤 복지도 어떤 약속도 해주지 않는게 우리 사회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부끄러운 모습을 마주한다. 이 책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아니, 실제 기록을 통해 무엇을 호소하는가. 도시로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 결국 사라지는 농민들, 1970년대 유럽의 모습은 21세기의 현재 많은 개발 도상국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시에 실제 그들의 삶의 한 컷은 끔찍하기도 하다. 

 그 시절 새로운 희망의 땅에 첫 발을 내디딘 누군가가 말한다. “여기서는 땅바닥 위에서 금덩이를 주울 수가 있대. 나는 이제부터 그걸 찾기 시작할 걸세. ”그 도시에 온 지 2년이 되는 친구가 그 말에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야. 그러나 그 금덩이는 굉장히 높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땅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아주 땅속 깊이깊이 박혀 버렸다네” 72쪽 땅속 깊이깊이 박혀 버린 금덩이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우,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함께 이 사회에서 먹고 자고 배우고 생활할 터전을 마련해줘야 한다. 악몽이 아닌 진짜 꿈을 꿀 수 있더도록, 경계의 밖으로 몰아세우지 말 것이며, 경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동료이며 이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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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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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백일몽이 아니라, 연결입니다. 현실과 연결되거나 혹은 다른 책과 연결됩니다
 
 과연 그랬다.한 권 한 권 그의 책을 만나보니 저 글귀가 맞춤이었다. 김연수의 책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김연수라는 원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김연수라는 원은 결코 완전한 원이 될 수 없다. 또한 독자는 김연수라는 원이 그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계속 원을 향하여 나가기만을 희망한다. 혼란스러운 7번 국도를 여행하고 스무 살을 만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7번 국도에서 만난 그들을 이 단편집에서 만날 수 있을꺼라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도 책에서 만나면 실제의 그것보다 조금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에서 찾지 못한 이상을 우리는 소설에도 찾기도 한다. 아마도 작가 김연수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9편의 소설내내 작가인 화자가 등장한다. 김연수이거나 그의 그림자이거나. 다시 말하면 그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좀 더 과감하게 좀 더 직설적으로 세상에 말을 건다.

 유머로 위장하여, 궤변에 궤변을 이어가며 자신이 겪은 스무 살을 회상한다.  <마지막 롤러코스터>, <뒈져버린 도플갱어>를 통해 현실에 살면서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젊음을,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연작에서 그는 7번 국도의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을 부활시킨다.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속에서라도 죽은 자들을 살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이미 많은 이들에게서 죽은 자로 기억된 그들을 잊지말라고 당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하게 온전한 그들이 아닌 결핍투성이인 그들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안전한 스무 살에 대한 아련함도.

 그는 말한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말 내게도 그랬다. 설렘과 기대로 시작된 20대의 첫 해, 열정도 없이 미흡하고 모자란 실수 투성이로  어떤 즐거움도 안겨주지 않았던 나의 스무 살, 그 이후는 그저 20대의 나머지로 기억된다. 작가 김연수가 겪었던 그 스무 살과 같은 시대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스무 살이란 형태는 달라도 본질적인 형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싱그러운 나이, 청춘으로 대표되는 나이, 그러나 결코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닌 스무 살에 대한 자화상이다. 다른 듯, 같은 스무 살을 지나온 모든 이들의 자화상. 스무 살을 기대하는 어떤 이에게는 스무 살을 연결해주는 터널이 될까.  지나간 스무 살, 이제는 내게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곱절의 나이. 작가 김연수는 내년에 그 곱접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에 내놓을 마흔을 이미 준비해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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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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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날개에 풋풋한 모습의 김연수처럼 소설 7번 국도는 낯설었다.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작가의 초기작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의 김연수가 아닌 10여전의 김연수를 만나는 일, 약간의 흥분과 설렘이 있다. 7번 국도라는 매개체로 작가 김연수는 독자에게 지도를 펼치게 한다. 그러나 7번 국도의 여행을 따라가는 것은 적지 않은 인내를 요한다.
 
 누구에게나 그만의 트라우마가 있기 마련이다. 삶을 노래하고 한 여자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재현, 우연한 만남으로 운명처럼 다가와 그들의 인생에 한 분기점이 되어버린 화자, 재현이 사랑한 여자 서연, 자신만을 위한 포근한 공간을 원했던 세희, 그들이 꿈꾸던 7번국도, 지금보다 젊었던 그 어느 날, 나 역시 7번국도를 지났던 추억이 있다. 그 시절, 참 열정적이었던 모습이 스쳐지난다.

 비틀즈, 기형도, 팝송, 낯선 시, 그리고 조각 조각 나뉘 놓은 퍼즐로 이어지는 이야기. 과거로 현재로 이어지는 재현과 나의 만남, 언제나 등장하는 7번 국도. 재현에게 서연은 그 자체가 트라우마다. 사랑했던 여자, 이제 존재하지 않는 여자. 그 자리를 세희는 결코 대신할 수 없다. 그들에게 7번 국도는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이 함께 했던 그곳은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노래하게 했는가.

 소설은 사실 모호했고 난해했다. 이유도 모르게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가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안개속을 걷는 듯한 느낌. 재현의 슬픔을 토해내는 소리가, 세희가 스스로를 못견뎌하면 그리워하는 일본 아버지, 외계인과 수신하는 카페 7번 국도 주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끝내 자살하고 마는 7번국도씨라는 인물. 90년대를 살고 있는 화자를 비롯한 주변 인물은 80년대를 이어온 상처를 이제 버리고 싶다. 7번 국도에 그들의 슬픔과 상실를 토해내고 자유롭고 싶어한다.  망각을 위한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문학적 폭이 좀 더 넓었더라면, 김연수가 살짝 비틀어 수록한 작품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이 책에 더 빠져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 김연수는 자신의 시대를 껴안고 사랑한다.

사람은 모두 은어와 같은 것이다. 세희야, 넌 아느냐? 동풍이 불고 나면 다시 서풍이 불어온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지. 네가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것처럼 어차피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은 한 번은 그렇게 죽게 된다. 하지만 벗어난 자리도 바로 너의 자리이고 돌아온 자리도 바로 너의 자리이다. 난 이제 곧 죽게 된다. 하지만 이 끝없는 윤회 앞에 도대체 죽음이란 없다. 불생불멸, 그 무엇도 없다. 숨결 없이, 그 본성으로 숨쉬는 단 한 가지, 그것말고는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 본문 202쪽. 세희의 아버지가 세희에게 들려주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삶에 대한 답이 아닐까.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7번 국도를 검색해보고 주절 주절 중얼거린다. ‘동풍이 불고 나면 다시 서풍이 불어온다.’ 주문을 외듯 자꾸만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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