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선의 사람들 - 후쿠시마 원전 작업자들의 9년간의 재난 복구 기록
가타야마 나쓰코 지음, 이언숙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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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오염수를 저장한 탱크 부지 사진을 보고 놀랐다. 규모가 그리 컸다니.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대규모 방사능이 누출된지 어느덧 10년도 훌쩍 지났다. 심지어 일본이 원전 오염수 방류를 한다고 했던 것도 몇 년이 훌쩍 지났지만 제대로 된 대응 및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은 후쿠시마 제1원전 누출 사고를 규명하기 위해 장장 9년간 잠입 취재를 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다. 작가는 도쿄신문 사회부 기자로 끈질기게 사고를 추적하며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수차례 만났다.
출간되고 얼마 안 되서 이 책을 구입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니 좀 부끄럽지만 이렇게라도 읽게 되어서 다행이다.

사고 후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생각 이상으로 참담한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폐선 등이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고 탱크 내부는 녹아내려 폐허와 다름 없었다고.

취재기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국에서 일어난 각종 재난 사고의 재현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대응 메뉴얼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원청, 그나마도 초반에는 억지일지 모르지만 사과라도 했다면 갈수록 철판을 깔고 자신의 살 길을 찾아가는 도쿄전력과 정부의 행태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피해를 본 건 결국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되어 흩어진 사람들과 도쿄전력 근로자, 하청 근로자들이다. 피해를 그나마도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발벗고 나선 자원봉사자들과 근로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근로자들은 각종 사고에 노출되었고 가족들과도 떨어져 긴 세월을 지냈다. 개인적으로 특히 고향을 등지고 떠나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근로자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일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정말이지 큰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오래 떨어져 지내다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되어 결국 결단을 내려 원전 근로자를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작업자들은 여러 모로 시달렸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호복에 마스크에 두겹세겹 장갑을 끼고 각종 장비를 했더라도 그들의 체내외에 피폭이 누적되었다. 그들은 누적되는 피폭량에 민감했는데 피폭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회사에서는 나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쓸때는 급하게 쓰면서 버려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피폭에 노출되니 솔로는 결혼도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불면증에 우울증, 번아웃, 알코올 중독, 부상, 사고까지 이어졌다.

대규모 방사능이 누출된 상황에서 사고 수습을 위해 발벗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참여한 것일까 궁금했다. 특히 나는 한 인터뷰 참여자의 사연이 가장 공감되었다. ˝전기를 쓰면서도 원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공기 같은 거였죠. 나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하달까?˝ 후쿠시마 지역은 수십 년전부터 원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 중 일하는 근로자가 많은 지역이었다. 원전과 함께 살아나간다고 해도 무방한 지역이었기에 그들에게 원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사고 수습을 지휘한 사람 중 ‘요시다 소장‘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2010년 제1원전 소장으로 취임해 사고가 터진 뒤에는 사고 현장을 선두지휘하며 독려했다. 사고 다음 날 원자로 노심 용융(녹아서 섞임)으로 통제 불능의 위기가 닥치자 그는 결단을 내려 냉각수 공급이 끊긴 원전 1호기에 해수 주입을 시작했다고 한다. 윗선의 지시가 내려오기까지 기다렸다가는 더 큰 사고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일부 비판도 받았으나 주변 사람들은 요시다 소장이 아니었으면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했을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게다가 그는 현장 작업자들을 하나 하나 다 챙긴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고 후 1~2년이 흐르기까지는 그나마도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있었지만 2013년 이후가 되면 관련 보도도 줄어든다. 작업자들이 사고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자신들도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정부는 도쿄, 후쿠시마의 일상화를 외치며 작업자들의 보상 규모를 줄여나간다. 작업 중 일어난 작은 사고나 부상은 언론에 보도조차 하지 않고 병원으로 호송되어야만 발표했다. 그나마 헬기 이착륙장이 생겨서 부상자 호송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그전에는 러시아워를 뚫고 다른 지역의 헬기 이착륙장까지 이동해서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해야만 했다).
도쿄전력 임원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되었으나 최종 무죄를 선고받는 등 책임자들은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쿠시마 제1원전 가동이 중단되고 나서 다른 원전들도 모두 가동을 중단했었으나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 둘 원전이 재가동된다. 후쿠시마 제1원전 폐로까지 30~40년을 잡고 있던데 세부 작업 기한이 하나 둘 늦어지고 있는 마당에 솔직히 현실 가능한 플랜인지 모르겠다.

사고 초반부터 시작해서 2019년에 이르기까지 피해 복구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곳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앞부분에 제1원전 부감도와 조감도, 부지 내부 등을 비롯한 각종 사진들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나는 원전은 가급하면 운영하지 않아야 한다는 탈원전의 입장이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생각하니 현실적으로 이를 위한 타개책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방향은 탈원전으로 가는 게 맞겠지만. 대한민국은 과연 원전의 안전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이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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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6-1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규모가 정말 엄청나네요.
일본이 원전수 방류한다고 했을때
사 놓은 소금이 아직까지 있는데~~
그 사이 망각하고 살고 있어요 ㅠㅠ
 

아는 게 많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사람보다는 무지하지 - P76

만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이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그 두 경우보다는 제대로 알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
(1931, 11, 13)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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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일기 - 세계의 중심, 북경을 가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7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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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을 간 사신인 조헌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이다. 누가 갔는지를 보지 않고 북경에 간 기록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청이 들어선 이후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니까 북학파 등이 활동했던 시기다. 그러나 주인공은 조헌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관료다. 당시는 명과 조선의 조공-책봉 관계가 철저히 지켜지던 때라는 점이 중요하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출신의 관료다. 그가 어떤 관료였고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기행문을 읽는 일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교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조헌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보자. 그는 학문적으로는 이이를 계승했으며 정치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했던 쪽에 속했던 것 같다. 소위 바른 말을 했다가 눈 밖에 여러 번 났다고. 그의 동료들조차 이러다 무슨 일 나겠다고 걱정을 했을 것 같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지어 군사를 모집했고 문인들과 함께 각종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나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천일기'는 1574년 명나라로 가는 사절단에 그가 질정관의 역할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질정관이란 조선 시대 문서의 음운(音韻)이나 제도 따위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 오는 일을 하는 임시직이다. 비록 임시직이지만  쓰는 말과 소리 나는 말이 다른 언어를 기반으로 확인하고 질문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5월 11일 출발하여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11월이니 총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실질적으로 이동 시간이 길고 북경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 1개월 뿐이었다. 북경에서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에 일정을 소화하려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은 9월 14일 이후의 조헌의 기행기는 전하지 않고 있어서 사절사로 동행했던 허봉의 '조천기'를 참고하여 뒷부분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다 그의 눈과 귀를 통해 기록된 것이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조헌이 이용한 사행 경로는 요령을 지나 우가장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 후기가 되면 요령에서 우가장이 아닌 성경부를 찍고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코스로 바뀐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첫 번째 코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지내던 곳의 지붕에서 물이 새 유숙을 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조헌은 그 와중에도 마치 동정호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즐겼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놀라웠다.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고 사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이전에 그림이나 책에서 만났을 중국의 여러 명승 고적지를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었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당시는 한자가 지식인의 기본 언어였으니 한자 문화권에 가서도 별 무리 없었을텐데, 그는 중국어로 듣고 말하는 일이 가능했다.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경험의 폭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짧은 경치를 보더라도 더 깊은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산해관의 망해정은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백이숙제의 묘(현재의 하북성 노용현)를 찾아가 벅찬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백이숙제의 묘는 조선 지식인들이 답사를 하게 되면 필수로 찾는 코스였다고.


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각각이었다. 상술처럼 뇌물을 받아먹는 관리, 길을 지나가려면 돈을 내놓거나 합당한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공자가 있는가 하면 선정을 행하는 관리들도 있었다.  

특히나 조선과 중국 경계나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는 관리들을 보면서 그도 배우는 바가 많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조헌이 귀천을 막론하고 열심히 독서하는 유소년을 보면 가지고 있던 책 등을 선물하고 여러 조언을 하는 장면은 참으로 흐뭇했다. 사실 당시를 생각하면 신분 차별로 그 아이가 성인이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평생 책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북경에 있었던 기간은 8월 5일부터 9월 5일까지였다. 당시 천자는 12살에 불과했는데 그런 어린 황제를 보고도 감격했다는 그의 감정을 생각하며 뭉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열대 과일인 용안과 여지를 맛보았던 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방문했을 때의 소회, 조선 사실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환송연을 2차례 열어주어 감읍했다는 소회까지 적혀 있다. 

조헌은 명황제인 만력제의 생일 축하를 기념하여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만력제를 보았고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소회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길에 벼루와 부채 등을 주고 명의 사신을 통해서 책을 교환한다. 조선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각종 고전이나 서책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컸을 것이다(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벼루나 부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책은 쉽지 않으니까). 


조선 시대 역사서를 얼마만에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가벼울 수 있지만 어쨌든 조헌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당시 사행사들의 경로를 통해 중국과 조선의 풍속을 경험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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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유머 코드가 종종 보인다.

처세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웃었다. 타인과 협업을 하는 목적은 사랑, 두려움, 나머지 하나는 소유욕?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제외하고 두려움, 소유욕은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처세에 능하다고 평가받으며 성공의 길에 다다른다고 여기니까.
근데 러셀은 거기에 펀치를 날린다. 웃프지만 현실에서는 역시 타인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는 사람을 더 좋게 평가하는 것 같다.

오늘날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과거에도 그랬듯이 대담하게 굴거나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소심하게 굴며 환심을 사야만 한다.

- P69

능한 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되, 그것이 여의치않다면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귀어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 인물들 전원으로부터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충고이긴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 충고를 따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1931. 11. 2) - P70

나는 우리가 매일 30분씩만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을 수있다면 개인적 ·국가적 · 국제적 차원의 모든 사안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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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선입견을 만들수도 있겠구나.‘

내가 내리는 결정들의 대부분은 경험에 의거한 것이 많다. 물론 이성과 기존의 지식에 의거한 것들도 있지만.
그러나 경험은 때론 위험하다. 특히나 좋지 않다고 여긴 경험이 나도 모르는 고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버릴 수 있다.

조금이라도 위험성을 낮추려면 충분한 자료 조사와 여러 차례의 경험이 더해져야함을 새길 것.

경험에서 진정으로 무언가를 배우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과학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태도가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열린 마음은 과학적 기질의 정수다. 경험에 바탕을 둔 과학은 경험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고, ‘소싯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해준다. - P56

대체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다. 우리의 이론이 세상을 빚어내며, 우리가 믿음으로써 그 이론은 진실이 될 수 있다. 다른 믿음이 지배하는 다른 사회에서는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선입견이 경험으로 확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만일 전에 다른 경험을 했다면 완전히 다른 선입견을 확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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