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항구의 끝. 콘크리트 방파제에 서서 바다를 봤다. 아주 짙고 또 넓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지만 먼바다는 잔잔하게만 보였다. 수평선은 단호했다.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는 내가 살던 일본. 그 건너의 건너편에는 또다른 얼굴들. 그 모두를 잇는 커다란 바다. 송희가 말한 커다란 사랑의 모양과 크기를 상상해보려 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이들, 정희정, 이저벨라 린, 박규영도 포함될 만큼 둥글고 크게. 그런데 아까의 아주머니가 가질 수 있는 것이 그 커다란 사랑의 어떤 조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록이 산 수건 세트가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졌는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었다. 나는 그냥 선 채로…… 있었다.

플래그는 서랍 속에 접힌 채로 있다.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혼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멀리 떠났다가도 돌아와 몸을 눕히게 되는 침대처럼, 있는 힘껏 뛰어올라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중력처럼 혼자 됨이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이미 혼자인데 어떻게 더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혼자는 다른 혼자보다 더 완성된 것일까.

혼자를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 것. 적극적으로 혼자 됨을 실천할 것.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

리아는 사랑이란 우리가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며, 눈을 뜬 자에게는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왜 사랑을 성애性愛에서만 구하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도, 계절을 사랑할 수도 있지. 조카의 해맑은 웃음에서, 동네 빵집에 진열된 갓 구운 빵에서, 뜻밖에 가뿐하게 눈뜬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성숙이라고.

저게 나인가. 아니지. 저것도 나인가. 그건 맞지. 완두는 맹희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이긴 했다. 나 생각보다 관종이었을지도. 맹희는 갖가지 조합의 검색어를 입력하여 시청자들의 반응을 찾아 읽었다. 각오는 했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부당했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맹희 자신도, 감자도 토마토도 양파도 그들이 비난하는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로사에서 혜원의 시에 차운하다甘露寺次惠遠韻
김부식

속객은 찾아오지 않는 곳
올라와 내려다보면 생각이 맑아지네.
산의 형세 가을이라 더 아름답고
강물빛 밤이어도 밝기만 하다.
하얀새 홀로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돛배 하나 가벼이 떠가네.
부끄러워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평생 공명 찾으며 살아왔구나.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清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白鳥孤飛盡 孤帆獨去輕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동문선』 제9권

산중의 눈 내리는 밤山中雪夜
이제현李齊賢

종이이불에 한기 돌고 불등 어두운데
사는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는다.
아마 성을 내리, 묵던 손이 일찍 문을 열고
암자 앞 눈 쌓인 소나무 보려 함을.

紙被生寒佛燈暗 沙彌一夜不鳴鍾
應塡宿客開門早 要看庵前雪壓松

『동문선」 제21권(『익재난고益齋藁』제3권)

교동喬桐
이색李穡

바다 어귀 아득하고 푸른 하늘 나지막한데
돛 그림자 날아오고 해는 서편에 기우네.
산 아래 집집마다 막걸리 거르고는
파 썰고 회치노라니 닭은 둥지로 드네.

海門無際碧天低 帆影飛來日在西
山下家家蒭白酒 斷葱斫膾欲雞棲

-『동문선」 제22권 (『목은집牧隱』 제6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문학으로 희곡 작품은 처음 읽게 되었는데 참 인상적이었고 재미나게 읽었다.

청말 시기부터 중국 항일전쟁 이후 미군이 들어와 있을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1막의 배경은 청말 원명원이 서양 세력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이러다 청나라 망하는 것 아니야?’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럽던 때였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언제끌려갈지 모를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의 입장으로 갈려 있었다.

2막의 배경은 원세개가 죽고 난 뒤 온갖 군벌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일으키던 때다. 이 때도 ‘개량(개혁)’을 해야 하느냐 ‘보수’를 내세워야 하느냐로 갈등이 심화될 때다. 내전으로 민심은 흉흉해지고 공포와 두려움, 불안감이 팽배하다. 양분으로 나뉘어진 시기에 적당히 시류를 타는 이들이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회색분자는 안 좋은 늬앙스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오래 살아남을지도…

3막의 배경은 항일전쟁 이후 미군이 북경에 들어오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충돌이 있던 때다.
반동으로 몰리면 재산이 몰수되거나(사실 갖다 붙이기 나름인 ‘반동’이지만) 잡혀가서 처형되기도 하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주인공인 왕이발이 경영하던 유태찻집은 시류에 맞게 계속 찻집을 변화시켜갔다. 그런데 그 끝은 참.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못할 것은 없을 것이다. 살다 보면 싫은 소리도 해야 할 때가 있고 반대로 그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네!’라는 이야기를 되뇌이게 되기도 한다.

100년 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극의 내용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이 많다.

“나랏일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라는 찻집의 글은 꼴도 보기 싫은 요즘의 정치를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밥 먹여주는 이에게 충성을 바치자!“라는 말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그저 밥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해서 공감이 갔다.

”우리 이 예술이 몇 년만 더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거지!“ 라는 말에서는 오래된 것은 무조건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폐기하는 인식에 대한 세태 풍자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는 비단 예술 뿐 아니라 구식 건물을 부수고 아파트나 주상 복합건물을 짓는 대한민국이 생각나서 씁쓸함이 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백인은 무르델레(murdele), 즉 바다에서 나온사람들이다. 흑인들의 전승은 오늘날까지도 백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 P609

그 놀라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대양 위로거대한 배 한 척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 배는 새하얀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칼처럼 빛나고 있었다. 백인들이 물에서 나와서 말을 걸었는데 그 말을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겁을 먹었다. 그리고이 백인들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인 붐비(Vumbi)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활을쏘며 이들을 바다로 다시 내몰려고 했다. 그러자 붐비들은 천둥소리를 내면서 불을 내뿜었다........." 흑인들은 이렇게 백인들을 처음 접했을 때 그들이 배 밖에서 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610

유럽의 탐욕스러운 수요에 직면해서 아프리카는 결국 고전적인 경제규칙에 맞추어 행동했다. 가격을 올린 것이다.
필립 커틴은 가격과 교역조건(terms of trade)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의 명제를 증명했다. "화폐"의 성격이 원시적이라고는 해도 그것으로도 가격이나 교역조건 등의 문제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사실 세네감비아의 명목화폐인 철괴에 대해서 영국 상인이 30파운드 스털링으로 산정한 것은 가격이아니라 하나의 가공화폐인 파운드 스털링 화와 또다른 가공화폐인 철괴 사 - P617

이의 환율을 나타낸다. 철괴로 나타낸 (그리고 결과적으로 파운드 스털링 화로 나타낸) 상품 가격은 본문의 표가 보여주듯이 계속 변동했다. 우리는 세네감비아에 대해서 가능성 있는 수입 총액 및 수출 총액을 계산해볼 수 있으며 "한 경제가 외부와의 교역에서 어느 정도의 이익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추산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인204) 교역조건을 개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커틴은 수출과 수입, 이 나라에 들어갈 때의 가격과 나갈 때의 가격을 비교함으로써 세네감비아는 외부와의 교역에서 갈수록 유리해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 많은 금과 노예, 상아를 얻기 위해서 유럽인들은 그들의 상품 공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어야만 했다. 세네감비아에 대해서 확인한 이 사실은아마도 블랙 아프리카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블랙 아프리카는 신대륙의 플랜테이션, 사금채취장, 도시들의 요구에 응해서 점차 더 많은 노예들을 공급했다. - P618

러시아라는 거인은 변경지역까지 확고하게 지배하지는못했다. 베이징, 이스탄불, 에스파한, 라이프치히, 르비우, 뤼베크, 암스테르담, 런던 등지에서 러시아의 교역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조정되었다. 러시아 상인들이 기를 펴고 활동한 것은 러시아 내부의 시장들, 러시아 영토 내의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정기시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나 아르한겔스크에서 외국 상품을 수입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멀리 이르쿠츠크 너머에서까지 교환화폐처럼 사용함으로써 [이전에 당한 패배에 대해서/역주] 복수를 한 것이다. - P650

튀르키예 제국의 대지는 ‘근동(東)‘이라는 요지를 창출했는데 이것은 이 제국의 권력의 생생한 원천이 되었다. 특히 1516년에 시리아, 1517년에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위대한 제국의 건설이 완수된 이후 이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근동은 이전의 비잔티움 시대나 이슬람이 승리를 거두던 초기 시대와 같은 세계 유수의 요지는 더는 아니었다. - P657

아메리카의 발견(1492)과 희망봉 항로의 발견(1498) 이후 유럽이 유리한 위치에 섰다.

그리하여 근동의 요지는 가치를 상실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제로가 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레반트 무역은 튀르키예가 시리아를 정복하고(1516) 이집트를 정복한 때(1517)에도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으며 지중해의 인근 통로들이 완전히 버려진 것도 아니었다. 홍해와 흑해는계속 이용했다. - P658

"유럽의 지중해, 북해, 대서양에서 볼 수 있는 다양성과 큰 규모의 해상교역의 망"이 등장했고 갈수록 더 명확해졌다. 비단, 향신료, 후추, 금, 은, 보석, 진주, 아편, 커피, 쌀, 인디고, 면, 초석, 티크 목재(조선용으로 쓰인다), 페르시아의 말, 실론의 코끼리, 철, 강철, 구리, 주석, 높은 분들을 위한 호화로운 직물들, 향신료를 생산하는 섬의 농민이나 모노모타파 왕국의 흑인을 위한 거친 직물 등 사치품이든 통상적인 상품들이든 모든 것이이곳에 섞여 들어가고 또 혼합되었다. "인도 내 무역"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호 보충적인 상품들이서로 유인하고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아시아의 바다에서도 유럽의 바다와 유사한 상품순환의 끝없는 움직임을 활성화시켰다. - P682

상업수지가맞기 위해서는 한쪽의 열정이 다른 쪽의 열정과 맞아떨어져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아시아는 로마 시대 이래로 귀금속만 받아들이면서 이 교역을 수행했다. 즉, 금(코로만델 해안에서 선호했다)과 더 흔히는 은을 받고서야 교역에응한 것이다. 이미 자주 이야기했지만 중국과 인도는 세계에서 유통되던 귀금속의 묘지가 되어버렸다. 귀금속은 이곳에 들어갔다가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이 이상한 상수 요인은 서유럽에서부터 동양으로의 출혈을 유발 - P687

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약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유럽이 아시아에서, 혹은 유럽 내에서도 대단히 수익성이 좋은 시장을 개방시키는 수단이었다. 16세기에 아메리카의 발견과 신대륙 광산의 개발 덕분에 이 수단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정도로 크게 강화되었다. - P688

분명 18세기의 인도에서는 혁명적인 산업자본주의가 탄생하지 못했다. 인도는 자기 자신의 경계 안에서는 안도하며 잘 살았고 자연스럽고 힘 있고성공적으로 움직였다. 인도의 농업은 전통적이기는 하지만 조밀하고 생산성이 높았으며, 산업은 옛날 유형이기는 하지만 극도로 활력 있고 효율적이었다(1810년까지 인도의 강철은 스웨덴제보다는 못하지만 영국제보다는 높은품질을 자랑했다). 이 나라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화폐경제가 작동하고있었다. 그리고 많은 효율적인 상인집단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상공업의 힘은 활기찬 원거리 교역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넓은 경제 공간을 무대로 했다. - P727

사회 전체가 산업생활 방식을 향해서 움직여간다는 의미의 산업주의(industrialisme)라는 말이 산업혁명이라는말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농업 우위의 사회로부터산업생산 우위의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심대한 움직임이다-산업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분명하다. 산업혁명은 말하자면 산업화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근대화라는 말은 산업화보다도 더 넓은 뜻을 가진다. "산업발전만이 근대경제의 전부가 아니다. " 성장은 더더욱 넓은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역사의 총체성을 포함한다. - P8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국의 동인도회사(VOC) 때문에 안달하고 이 회사의 특권들을 질시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경쟁국인 영국,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지의 동인도회사에 자본을 제공하거나 더 나아가서 오스텐더 회사 같은 것을 설립 - P281

한 것을 보면 사실 놀랍지 않은가?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기 나라 배들을 공격하기도 하는 됭케르크 출신의 프랑스 해적들에게 돈을 투자하고, 북해에서 활동하는 바르바리 해적들(사실 이들은 흔히 조국을 등진 네덜란드인인경우가 많았다)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가? 1629년에 아바나 근처에서 스페인의 갤리온선 한 척을 나포한 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주주들이 약탈물의 즉시 분배를 주장함으로써 이 회사의 최초의 약점을 만든 것은또 어떠한가? 1654년에 포르투갈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산 무기를 가지고헤시피에서 네덜란드인들을 축출했고 루이 14세 역시 네덜란드 무기를 사서 1672년에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프랑스군의 군자금 지불은 암스테르담의 중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의 동맹국이면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영국의 분노를 자아냈다. 네덜란드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이 나라에서는 상인이야말로 왕이며, 상업이해가 국가이성이기 때문이다. - P282

네덜란드의 최초의 거창한 약진은 발트 해 및 플랑드르, 독일, 프랑스의 상업이라는 북쪽의 극점과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개방성을 갖춘 세비야라는 남쪽의 극점 양쪽을 선박과 상인들로 확고히 연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은 원재료와 공산품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든 아니든 그에 대한 대가로 현찰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한 은은 상업을 원활하게 유지해가는 보장이 되었다. 발트 지역과의 교역에서 수입 초과를 기록하던 이 나라로서는 은이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고 경쟁자를 눌러이기는 수단이 되었다. - P288

동인도회사의 역사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영욕이 겹치는 역사였다. 대개 17세기에는 사정이 좋았다. 그러다가 1696년을 전후한30-40년 동안에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유럽에서 후추의 우월성이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은 1670년부터잠재적으로 보이던 현상이다. 이외의 보상으로서 고급 향신료들이 중요한지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나아졌으며, 비단류나 면직류염색을 한 것이든 아니든와 같은 인도의 직물이 갈수록 중요한 자리를차지했고 또 차, 커피, 라카, 중국 도자기 등의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했다. - P306

앞에서 말한 것들 이외에도 과거의 유통로와 시장에서 고장이 일어났고, 이 회사가 많이 이용하던 순환로에 틈새가 벌어졌다.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때로는 옛 체제가 계속 살아남는 것이 새로운 적응을 방해하고는 한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차 무역의 확대 그리고 각국 상인들에게 중국이 개방된 일일 것이다. 1698년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재빨리 직교역(즉, 현찰교역)에 뛰어든 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기존의 방식을고집했다. 즉, 후추와 약간의 계피 그리고 산탈 목재, 산호 등을 사러 바타비아에 오는 정크선들에서 중국 상품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했기 때문에 현찰에 의존하는 일 없이 상품을 통해서 거래하는 간접교역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면화, 은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을 주고 차를 구하는 벵골-중국사이의 연결이 영국에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그동안 이 회사의 성공에 큰도움을 주던 코로만델 해안이 인도 내의 전쟁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것이 큰타격을 가했다. - P307

전국시장은 정치적 의지이 역시 언제나 효율적이지는 않다와 동시에 상업, 특히 원거리 국제무역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압력에 의해서 강요된 응집성이다. 대개는 외부교역이어느 정도 꽃피는 것이 전국시장의 힘겨운 통합에 선행하여 일어난다.
이런 점들 때문에 우리는 전국시장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세계경제의중심지 또는 중심지와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그물망 속에서 발전하기 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국시장의 발달과 지리적인 차별화점진적인 국제분업에 따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된다. 반대로 전국시장의 무게는 세계 지배의 후보자로 나선 여러 세력들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18세기에는 이 투쟁이 암스테르담이라는 한 도시와 영국이라는 "영토국가" 사이의 결투로 나타났다. 내부요소와 외부요소들의 압력 아래에서 산업혁명의 출발로 이행하는 핵심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런 전국시장이라는 틀 속에서였다. - P386

로 체제가 실패함으로써 결국 파리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1716년에 로가 설립한 국왕은행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대신 프랑스 정부는 조만간(1724) 파리에 새로운 거래소를 세워서 수도 파리가 이제부터 수행하게 될 금융 역할을 맡겼다.
그후 파리의 성공은 갈수록 분명해졌다. 그러나 계속된 이 진보 가운데 의심할 바 없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때는 상당히 이후 시기로서 동맹관계의 역전과 7년전쟁 종전의 중간인 1760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유럽을 포괄하는 대륙의 중심지에 위 - P466

치한 파리는 경제망의 중심점이 되었다. 이 경제망의 팽창은 이전과는 달리더는 적대적인 장벽에 부딪치지 않았다. 2세기 전부터 프랑스를 포위하던합스부르크 가문 소유지의 장벽은 이미 깨졌다.......부르봉 왕족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들어서서 동맹을 붕괴시킨 것으로부터 우리는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 및 서부 독일, 네덜란드 등 프랑스를 둘러싼 지역의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발전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파리로부터 카디스로, 파리로부터제노바로(그리고 이곳을 경유해 나폴리까지), 파리로부터 오스텐더와 브뤼셀(빈으로 가는 중개지점)로, 파리로부터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도로들이 자유로워졌고 이 도로들은 30년 동안(1763-1792) 전쟁 때문에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 P467

영국의 전체 경제공간은 런던이라는 최정점에 복종한다. 정치적인 중앙집권, 영국 국왕의 권력, 상업활동의 집중 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수도 런던의 위대함을 만들었다. 반대로 이 위대함이 이번에는 자기가 지배하는 공간을 조직하는 힘이 되며 이곳에 행정망과 시장망의 다양한 연결을 창출한다. 그라스는 보급영역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런던이 파리보다 한 세기 이상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런던에 우위를 가져온 요인 중에는 런던의 항구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는 점(런던의 항구는 적게 잡아도 영국 전체 교역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했다)도 작용했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사치와 낭비곧문화적 창조와도 연결된다의 거대한 기생적 기구로서 파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런던이 아주찍부터 수출입을 거의 독점한 결과 영국 전체의 생산 및 재분배망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다양한 지역들에 대해서 런던이라는 수도는 일종의 조차장(場)이었다. 모든 것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가-국내로든지 국외로든지 다시 배분되어 나갔다. - P511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취하게 된 힘은 단지 팽창하는 영국 시장의 상승 또는 조직화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물질적 풍성함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사실 활기 넘치던 18세기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이 풍성함을 누렸다). 그것은 영국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근대적인 해결책들을 취하도록 만든 일련의 기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파운드 스털링 화라는 근대적인 화폐, 근대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변형되던 은행제도, 그리고 장기채 또는 영구채라는 안정성 속에 닻을 내린 공채 경험적으로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걸작품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 마지막 것은 되돌아보건대 영국의 경제가 건강하다는 최고의 표시였다. 이른바 영국의 재정혁명으로부터 탄생한 이 솜씨 좋은 체제는 영구히 지불되는 공채이자를 규칙적으로 지불했다. 이자지불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파운드 스털링 화의 가치를 계속 유지한 것만큼이나 특출한 묘기에 속한다. - P526

유럽은 자신에게 필요한 자양분과 힘의 많은 부분을 전 세계로부터 끌어왔다. 유럽이 진보해가는 도상에서 부딪친 여러 과제들 앞에서 자신의 원래능력보다 더 상승할 수 있던 것도 이와 같은 가외의 소득 때문이었다. 이항구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18세기 말 이후 유럽의 운명의 열쇠가 되었던 산업혁명이 가능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 P544

아메리카 전체는 다양한 사회와 경제의 병존 또는 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층에는 어떻게 부르든 간에 상관은 없지만 반쯤 폐쇄적인 경제가 있고 그 위에 반쯤 열려 있는 경제가 존재하며 마지막으로 상층에는 광산, 플랜테이션그리고 아마도 목축업을 하는 일부 조직(이것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과 상업조직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기껏해야 가장 상위의 상업층에만 해당한다. - P6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