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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일기 - 세계의 중심, 북경을 가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7
조헌 지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9월
평점 :
북경을 간 사신인 조헌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이다. 누가 갔는지를 보지 않고 북경에 간 기록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청이 들어선 이후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니까 북학파 등이 활동했던 시기다. 그러나 주인공은 조헌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관료다. 당시는 명과 조선의 조공-책봉 관계가 철저히 지켜지던 때라는 점이 중요하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 출신의 관료다. 그가 어떤 관료였고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기행문을 읽는 일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교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조헌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보자. 그는 학문적으로는 이이를 계승했으며 정치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했던 쪽에 속했던 것 같다. 소위 바른 말을 했다가 눈 밖에 여러 번 났다고. 그의 동료들조차 이러다 무슨 일 나겠다고 걱정을 했을 것 같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지어 군사를 모집했고 문인들과 함께 각종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나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천일기'는 1574년 명나라로 가는 사절단에 그가 질정관의 역할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질정관이란 조선 시대 문서의 음운(音韻)이나 제도 따위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 오는 일을 하는 임시직이다. 비록 임시직이지만 쓰는 말과 소리 나는 말이 다른 언어를 기반으로 확인하고 질문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외교 문제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5월 11일 출발하여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11월이니 총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실질적으로 이동 시간이 길고 북경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 1개월 뿐이었다. 북경에서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내에 일정을 소화하려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은 9월 14일 이후의 조헌의 기행기는 전하지 않고 있어서 사절사로 동행했던 허봉의 '조천기'를 참고하여 뒷부분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다 그의 눈과 귀를 통해 기록된 것이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조헌이 이용한 사행 경로는 요령을 지나 우가장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 후기가 되면 요령에서 우가장이 아닌 성경부를 찍고 산해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향하는 코스로 바뀐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첫 번째 코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지내던 곳의 지붕에서 물이 새 유숙을 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조헌은 그 와중에도 마치 동정호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즐겼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놀라웠다.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고 사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이전에 그림이나 책에서 만났을 중국의 여러 명승 고적지를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었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당시는 한자가 지식인의 기본 언어였으니 한자 문화권에 가서도 별 무리 없었을텐데, 그는 중국어로 듣고 말하는 일이 가능했다.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경험의 폭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짧은 경치를 보더라도 더 깊은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산해관의 망해정은 하늘과 바다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백이숙제의 묘(현재의 하북성 노용현)를 찾아가 벅찬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백이숙제의 묘는 조선 지식인들이 답사를 하게 되면 필수로 찾는 코스였다고.
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각각이었다. 상술처럼 뇌물을 받아먹는 관리, 길을 지나가려면 돈을 내놓거나 합당한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공자가 있는가 하면 선정을 행하는 관리들도 있었다.
특히나 조선과 중국 경계나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는 관리들을 보면서 그도 배우는 바가 많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조헌이 귀천을 막론하고 열심히 독서하는 유소년을 보면 가지고 있던 책 등을 선물하고 여러 조언을 하는 장면은 참으로 흐뭇했다. 사실 당시를 생각하면 신분 차별로 그 아이가 성인이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평생 책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북경에 있었던 기간은 8월 5일부터 9월 5일까지였다. 당시 천자는 12살에 불과했는데 그런 어린 황제를 보고도 감격했다는 그의 감정을 생각하며 뭉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열대 과일인 용안과 여지를 맛보았던 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방문했을 때의 소회, 조선 사실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환송연을 2차례 열어주어 감읍했다는 소회까지 적혀 있다.
조헌은 명황제인 만력제의 생일 축하를 기념하여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만력제를 보았고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소회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길에 벼루와 부채 등을 주고 명의 사신을 통해서 책을 교환한다. 조선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각종 고전이나 서책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컸을 것이다(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벼루나 부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만 책은 쉽지 않으니까).
조선 시대 역사서를 얼마만에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가벼울 수 있지만 어쨌든 조헌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당시 사행사들의 경로를 통해 중국과 조선의 풍속을 경험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