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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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부모를 잇따라 잃고 누이와 함께 바람도 쐴 겸 1983년 8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기 5개월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도 꼭 같은 병으로 3년 전에 돌아가셨다니 두 남매 모두 그 슬픔이 컸을 것이다. 저자는 벨기에의 브뤼주에서 헤랄드 다비드의 ‘캄비세스왕의 재판‘이라는 그림을 보고 꽂힌다.
캄비세스왕은 기원전 6세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인데 그림 속 주인공은 판사로 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형벌을 받고 사망했다. 저자도 화가의 이름이나 이력이 생소했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렇다. 그림을 보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져 사실 계속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이런 그림이 또 있는데 이는 뒤에 언급하겠다). 아무튼 헤랄드 다비드가 활동하던 당시 벨기에의 브뤼주는 세심하게 그려진 정물화가 유행이었다. 정물화는 색감이 화사하니 보고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되어서일까 어디에 놓고 보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귀족들에게 정물화는 인기였다고.
저자는 이 그림을 보고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 아버지(저자에게는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저자의 아버지는 고국의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좀 더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떠했겠는가 그런 착잡함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맘대로 되는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운 그런 감정들이 내게도 와 닿았다.

저자의 두 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당시는 한 개인을 정치적 이슈로 몰아가 파멸로 이끌기에 넘치는 흑색 시절이었다. 저자의 두 형은 그렇게 감옥에 몇 년을 가 있게 되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형에 대한 상황과 저자의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실려 있다).

저자는 여행 전 루브르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아야만 한다고 점찍어두고 있었다. 작품을 보고 싶어했던 형을 대신해 저자가 직접 보고 그 감상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밧줄로 묶여 있는 노예는 상체와 하체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뒤틀어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눈동자는 볼 수 없지만 시선은 저항하는 눈빛임을 느끼게 한다. 이 조각상은 ‘반항하는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이를 보면서 저자는 형의 상황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일부러 보러 가지 않았더라도, 우연히 스쳐 가다가 봤을지라도 상황상 형이 생각났을 것이다. 조각상을 감상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써 내려갔을 그림엽서 속 편지의 내용과 그걸 받았을 형의 마음을 생각하니 나도 좀 울컥했다.

형에 대한 이야기는 고흐의 ‘거친 하늘과 밭‘ 그림을 보면서도 나온다. 고흐는 알려져있듯 테오라는 동생이 조력자였는데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자부심과 생활 사이에서 그는 여러 번 번뇌했다.
내 생활을 뿌리가 뽑히고 내 걸음걸이도 휘청휘청한다. 나는 내가 너희들의 저주스러운 짐짝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적으로 그렇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염려하게 되었다. - P60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고흐의 경우는 화구까지도. 그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구도자·혁명가를 괴롭혀왔다. ...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짝‘인 것이다. - P69
예술가라고 해도 생활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지 못한다면 생계를 어떻게 유지해나갈 것인가. 그럼에도 대중에게 먹히고 팔릴 그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때 고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테오는 고흐를 뒷바라지하면서 형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어쩔 때는 힘에 부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살아 있는 생애 고흐를 괴롭힌 것은 생활 문제였다. 저자도 형의 처지와 상황이 안타까우면서도 그의 존재가 때로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진품을 보지 않으면 그 훌륭함과 기막힘을 알 수 없는 그림이 있다. 모름지기 명작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게르니까」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도판으로 보면 「게르니까」에서 삐까쏘가 채택한 표현의 참신성이라든가 기발함 따위는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슬픔의 깊이, 분노의 격렬함 같은 것은 알기 어렵다. 바로 그와 같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러한 참신성이 산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깨달을 수는 없다. ...
일본에는 전쟁에 협력한 그림은 있어도 「게르니까」에 비길 만한 것은 없다. 전쟁 찬미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한다하는 명인대가들이 전쟁에 협력한 그림을 그린 그 자체를 ‘없었던 일‘처럼 괄호 속에 묶어넣어둔 채 능청거리고 있는 퇴영적 정신에서는 「게르니까」가 태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 P88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담은 게르니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좋았다. 이는 게르니카를 언급하기 전에 일본 화가인 코이소 료오헤이가 그린 그림 ‘낭자관 행군‘을 언급함으로써 대비 구도를 만든 것이다(그의 그림은 전쟁이 아니라 어느 사막을 군인들이 지나가다 잠시 쉬고 있는 풍경화 느낌을 받는다). 일본이 군국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때 당시 화가들은 전쟁을 미화하거나 선전하고 찬양하는 그림은 그렸어도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그림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그림 요소들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우성치고 뒤틀린, 몸부림치는 몸들을 말이다. 피카소는 한국전쟁 시기 학살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전쟁은 예술을 위한 하나의 표현적 배경이 된다. 예술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단번에 대중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동조하게 만든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화가, 작품들이 많다. 그중 레온 보나라는 화가가 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프랑스 미술사는, 들라크루아, 꾸르베, 밀레, 도미에, 마네, 모네 나아가서 고갱이나 고흐 같은 선구적 반역자들과, ‘쌀롱‘을 근거로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공식적인 아카데미즘 화가들, 곧 뽕삐에들과의 투쟁의 역사로 이해된다.
보나는 오로지 그러한 뽕삐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미술사상의 적방인 것이다. (이렇게) 보나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보나는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미술사상의 패자 무리 속에 처박혀버렸다. 비정하다고 할 만큼의 콘트라스트이다. - P119, P122

레온 보나는 처음에는 지지부진했지만 초상화가로 이름을 알린 후에는 계속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당시로 말하면 프랑스 미술사에서 주류 화가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화가 누이의 초상‘ 그림을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그러나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고흐나 마네, 밀레, 고갱 등의 이름과 그들의 그림은 알려져 있지만 레온 보나(와 그 그림)는 거의 알려지지 못한 것 같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안 읽었으면 그 이름도, 그림도 보지 못했을 것 같다. 하긴 고흐도 생전에 자신의 그림이 이리 인기 있게 될 줄 몰랐을테니 생각해보면 놀랍다.

이제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그림을 마지막으로 소개할 차례다.

이 치졸하고 짝이 없는 무명의 그림장이는 ‘죽음을 생각하라‘는 외침 속에서, 그의 시대의 요구에 미련하게 충실한 응답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졸렬함으로 인하여 진실을 나타낼 수 있는, 으스스하고 더러운 한 폭의 그림을 남긴 것이다. 선남선녀들은 이 그림 앞에 망연자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 P194

제목만 ‘죽은 연인들‘로 남아 있는 이 그림은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찾아보니 15세기 독일의 어느 고딕 화가가 그렸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보고 있으면 기괴하기도 하기도 으스하기도 하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인다. 만약 내가 관 속에 묻힌다면 저런 모습이려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사람은 죽으면 시체가 되어 썩고 부패한다. 혼이 있다고는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육신의 모습 뿐이니 흙이 되기 전까지는 적나라한 과정이 진행이 될 것이다. 마치 그 과정의 어느 한 순간을 그림으로 포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임에도 이제야 읽게 되었으니 너무 늦은 셈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이나 화가의 원문을 발음이 나는 대로 한글로 표현했다는 점(미껠란젤로, 삐까쏘, 게르니까 등)인데 이것이 좀 어색한 독자가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자는 정착자의 시선이 아니다. 경계인이자 이방인인 저자의 시선이 여행자의 위치와 오버랩된다고 느꼈다. 여행 일기이자 자신(과 주변)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읆조림, 그림과 절묘하게 섞이는 설명이 참 인상적이었다.

청한 하늘이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듯이, 하나의 희망 뒤엔 금세 새로운 불안이 밀려든다. 역사는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 세계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좋은 변화가 많이 있었다고는 하기 어려우며, 가까운 미래가 희망에 차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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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관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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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이었나 정수리에 흰머리를 처음 발견하고 순간 철렁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전만 해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이제는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진하게 잡히고 팔자 주름은 말할 것도 없게 되었다. 조금만 무리하면 ‘아이고야...‘ 하는 소리가 나오니 나이듦에 대한 화두는 이제 자연스레 피부로 와닿는 주제가 되었다.

이 책은 손택이 여성에 관해 언급한 에세이들을 묶은 것이다(일부 벗어난 글들이 있는 것 같지만).
신체적 노화는 성별의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유독 여성에게만은 외모 지적이 뒤따르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여성은 나이가 어리든 들든 왜 하나같이 외모에 대한 언급이 끊이지 않는지.

우리가 물려받은 아름다움 개념은 남성이 발명한 것이며 (더 우월하고 심오한 자신들의 가치를 지탱하기 위해) 지금도 거의 남성의 손에 관리되고 있다. 남성은 이 체제에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배제한다.

이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이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건만 나도 모르게 그 기준에 동조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여자다움‘이라는 기준도 그렇다. 여성은 반드시 이래야 하는 기준이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었다.
어딜 가도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남자인가(요)?˝ 질문을 받았던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답변을 하면서도 ‘왜 내가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거지‘ 화가 나는 것이다. 여성이면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어야 하며 상냥해야 해야 한다 등등등. 돌이켜보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내게 여자다움을 강요하신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너는 너무 딱딱하고 섬세하지 않다. 나긋나긋하게 굴어라 등등... 어머니의 그 지시에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반대로 행동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은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어차피 인간은 어떤 순간이 되면 혼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때 누구에게 의지해야할 생각을 해선 곤란하니까. 물론 여성이 선택할 직업에 대한 고정 관념이 존재하고 여성의 직업적 능력에 대하여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이는 제도적 시스템이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여성들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하여 나가서 자기 주장을 할 필요가 있다.

여성은 그저 친절한 것이 아니라 현명해지기를 염원할 수 있다. 그저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 유능해지기를, 그저 우아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기를 원할 수 있다. 그저 남자와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야심을 품을 수 있다. 여성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며 이 사회의 나이듦의 이중 잣대에서 비롯된 통념에 적극적으로 불복하고 저항할 수 있다.

더 많은 직업의 기회를 열어젖히고 어린 자녀를 맡길 무료 보육시설을 세움으로써 돈 벌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일은 한낱 선택지이거나, 가정주부와 어머니라는 더욱 흔한 (그리고 규범적인) ‘커리어‘의 대안이어서는 안 된다. 대다수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일하고,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되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는 고리를 절대 끊을 수 없다.

앞선 이런 글들도 좋았지만 나는 추가적으로 특히나 아래와 같은 글들이 좋았다.

우리가 역사의 연속체 위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요. 이때 우리 뒤에 놓인 과거는 무한히 두텁고 현재는 면도날처럼 얇습니다. 미래는, 음 문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눈다고 한다면, 마치 세 부분이 현실에서 동등하게 나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과거가 셋 중 가장 실질적이에요. 미래는 어쩔 수 없이 상실의 축적이 되고, 우리는 모두 평생 죽어가고 있어요.

과거에 ‘해석‘이라는 공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나는 글이든 사진이든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서 보관되어 들여다볼 수 있기에 인식의 매개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현재와 미래의 나는 인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당장의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물론 종착지는 죽음이지만). 손택이 과거를 실질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런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제 생각에, 옹호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지성은 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이며 회의적이고 단순화를 거부하는 지성이에요. 갈등을 완벽히 해결하려 하는(즉 갈등을 진압하려 하는) 지성, 조종을 합리화하는 지성(물론 공상과학 소설의 주요 전통에 계속 출몰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대심문관의 훌륭한 주장처럼, 그 명분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입니다)은 내가 생각하는 규범적 지성 개념이 아니에요.

손택이 말하는 지성의 개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진정한 지성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질문하고 심문하며 끊임없이 회의하며 나아가는 과정, 그것이 지성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일부 챕터에서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다루며 전체주의와 미학이 양립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파시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독일의 나치즘이 발돋움을 해 나갈 때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예술은 이에 동조하고 협력하고 선전하는 데 쓰였다. 그녀는 1934년 9월 히틀러의 요청으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6차 나치당 전당대회를 촬영한 영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를 만들었고 1936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영화인 <올림피아>를 만들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으로 몰린 그녀는 자신이 정치와 무관하고 영화(예술)적 이상을 좇았다라고 변호했다. 예술(미학)과 도덕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예술은 정치와 구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삶이 곧 예술이라는 이상, 아름다움 추종, 용기에 대한 맹목적 숭배, 공동체에서 느끼는 황홀경을 통한 소외의 해소, 지성에 대한 거부, (지도자를 부모로 둔) 인간 가족처럼, 다른 기치 아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다양한 이상을 옹호한다.

쓰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잡다한 글이 되버렸는데 아무튼 이번에 나온 <여자에 관하여>가 국내 초역본이라고 알고 있어서 더 값진 독서 경험이 되지 않았나 싶다. 손택은 여성이 성별이란 고정 관념에 갇히지 않고 개인의 권리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손택과 같이 깨어 있고 나아가려는 여성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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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2-1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지긋 지긋한 통념을 정작 깨야할 주체는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일인입니다.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께서 밥그릇을 밥상 아래에 놓고 잡숫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치밀어오르는 화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아... 얼굴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군요. 들킬까봐 후다닥~~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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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어보려고 시도했거나 읽어본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책장 한 켠에 여전히 그 책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행을 하기 전 관련 지식을 훓어볼 때 도움을 받곤 했다.
이 책이 나온지는 꽤 되었으나 그동안 구입을 망설였다. 분명 도서관에 많이 들어올 것 같아 도서관을 통해서 볼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책의 소개글 취지에 마음이 움직여 구입을 하게 되었다. 저자의 한국미술사 강의 내용을 한 권에 담았다고 하여 부담이 덜할 것 같아서다.
한국사를 공부하고 관련 책을 읽지만 늘 문화와 미술에 대한 부분은 막히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외울 것도 많고 볼 때마다 왜 매번 헷갈리는지… 아무래도 용어가 한자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아서 한글만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인 것 같다.

책은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의 한국 미술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각 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면서 관련 용어,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유산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여 이해를 더욱 높였다.
또 무엇보다 업데이트된 소식을 다룬다는 점이 좋았다. 여전히 한반도에서 과거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음에도 평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알기가 쉽지 않은데 아주 최근인 2023년까지의 소식도 다루고 있다(그야말로 따끈따끈하다). 또 한반도 이남의 유물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지역을 근거로 삼아서 좋다. 북한의 유물, 유적은 직접 가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관련 설명과 사진은 여러 모로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600 페이지가 훌쩍 넘는 책이지만 관련 내용을 외운다는 강박을 갖지 않는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사진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올컬러로 내지를 선택했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더 생생하게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간단히 언급해보려고 한다.

석굴암의 조형미는 완벽하다. “실제로 신라인들은 기하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석굴암을 지었으며 1밀리미터의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공이었다”(P176)고 수학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는 성덕대왕 신종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녹음하여 공학 박사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종의 높이와 너비, 종 높이와 천판에서 당좌까지의 길이가 서로 같다고 한다. 어떻게 그시절 이런 정확한 측량을 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랍다. 둘 다 종교에 과학적 측량을 바탕으로 정확성을 더하여 예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야와 발해의 역사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 고려 시대 궁궐과 사찰 중 보존된 것이 없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가야의 역사를 신라인이 기록을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발해의 역사를 고려가 챙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되는 것 같다. 고려 시대 궁궐과 사찰이 보존되지 못한 것은 몽골의 침입 때 피해가 컸던 것도 있겠지만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이유도 있을 것 같다.

고려시대 불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함에도 남아 있는 수가 극히 적으며 그마저도 일본에 가 있다. 다행히 승탑과 불상이 여럿 남아 있어 아쉬움을 덜게 한다. 승탑은 통일신라 시대 선종이 유행하면서 퍼져나간 것으로 고승의 사리를 모신 것이다. 팔각당의 몸체를 가졌던 승탑이 고려 시대에 오면 석등 모양(경주 불국사 사리탑), 사리호 모양(충주 정토사 홍법국사탑), 석종 모양(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등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불상은 현실적인 부처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로 지방적 특색을 담아 파격적인 양상을 보였다.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쪽 다리는 구부린 편안한 자세를 취한 윤왕좌 금동보살좌상이라던지 추상화 그림을 그린 듯한 이미지의 순금제보살좌상은 보고 있으면 재밌어서 한참을 봐도 지루하지가 않다.
원래 고려청자는 처음 중국에서 수입했었으나 5대10국 시대 때부터 수입길이 막히면서 자체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17세기 송과의 교역이 재개되면서 송인으로부터 노하우를 얻은 뒤 완벽한 비색 청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남아 있는 유물이 많아 조선 시대의 분량이 가장 많다. 그럼에도 조선 자기와 회화의 역사는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자기는 항아리나 병 등보다는 문방구에 눈길이 많이 갔다. 필통은 백자에 그림을 그린 것도 있지만 몸통 자체를 투각하여 무늬를 만든 것도 있는데 갖고 싶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갔다. 연적도 마찬가지, 모양도 다양하고 기법도 다양해서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백자는 금사리 사마 때 전성기인 달항아리가 만들어졌고 분원리 가마 시절 상업이 발달하고 공인의 수도 많아지면서 많은 양이 생산되었다. 사옹원에서 생산되던 백자가 근대 말 분원자기공소가 되면서 민영화가 시작되었고 번자회사, 분원자기주식회사로 바뀌었다가 1916년 결국 파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추기 산수화는 소살팔경도로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산수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시절 대표 화가는 안견과 안평대군이 있는데 안견의 작품은 의외로 몽유도원도만이 확실히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하도 그의 작품이라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많아서인 것 같다). 16세기가 되면 화원이 아닌 사람들의 그림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인간이 중심이 된 산수인물화가 그려지고 화원의 세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탄은 이정은 세종의 현손으로 대나무 그림에 특출났다. 조선 시대 3대 묵죽 화가라고 평가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묵죽은 필법이 굳셀 뿐만 아니라 한 화폭에서 농담을 달리 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가 되면 진경 산수화, 문인화가 그려지고 속화가 유행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압구정은 역시 압도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선과 친분이 있었던 인물로 관아재 조영석이 있었다. 정선이 산수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그는 인물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새참과 우유 짜기 그림은 너무나 사실적인 장면과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표암 강세황은 서양 화법을 도입한 선구자이자 남종화를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사이에 또 한 사람 고송 이인문이 있다.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내기로 절친한 사이로 궁중기록화에도 참여했으며 산수, 인물 모두 뛰어난 화가였다. 김홍도가 대상을 부각시키는 기법을 쓴다면 이인문은 풍경의 시야를 넓혀서 보는 기법을 썼다고 한다.
조선 말 추사 김정희 이후 완당 바람이 일었다. 근대 묵죽 화가하면 석파 이하응만 떠올렸는데 자하 신위(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 중 한 명)가 있었다. 그도 김정희처럼 시서화에 모두 능해해서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대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묵죽화를 보면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북산 김수철의 그림은 너무나 현대적인 그림으로 충격을 주었다. 지금 그렸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화가의 인품을 알수는 없지만 결코 범상치는 않은 분이었을 것 같다.
문자도, 책가도는 여러 번의 전시회를 통해 봐서인지 익숙했다. 문자도는 서체도 다르고 글자 안에 그림을 넣는 등 참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각 지방별로 특색이 있어 보는 맛이 있다. 책가도는 서가에 책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을 한 자리에 그린 그림이다. 궁궐과 양반사회에서 유행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밑줄을 치며 공부하지 않고 소파에서 편안히 기대어 독서하기를 희망하며 썼다. 강박감을 갖지 않고 이 책을 거듭 읽다 보면 한국 미술에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문화 유산을 만나러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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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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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책을 읽어봐야겠다 생각할 무렵 인문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서양 고전 중 대표작이라고 하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두 권의 고전과 관련 입문 책을 한동안 계속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재미가 없었지만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다 관련 인물들이 흥미로워서 읽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 책은 고전 일리아스를 기본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원전 일리아스는 잘 해석된 번역본이 존재하지만 너무 웅장(거창)해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 책은 소설인데다 문체도 부드러워 술술 읽혀서 좋았다.

일리아스의 역사적 배경이 된 트로이 전쟁은 과거만 해도 실제 있었던 전쟁이냐를 놓고 진위 여부가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트로이 전쟁은 실제 하는 사건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2004)>가 있다. 전쟁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히 다루어서 나도 원전을 읽으면서 그 영화를 보았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지만 나는 그의 서사보다 오히려 헥토르와 헥토르의 가족 이야기에 공감이 더 갔었다. 특히 헥토르가 사망한 뒤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간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일리아스를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결국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닐까.
아킬레우스를 분노하게 한 것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에 참여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도를 넘은 행위에 화가 나서 더는 전쟁을 가담하지 않겠다 선언했다. 오디세이아 등이 가서 설득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고... 꿈쩍 않는 아킬레우스 대신 파트로클로스가 대리 참전을 했고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아킬레우스에게는 파트로클로스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음을 방증한다. 이 책에서는 연인 설정으로 나오는데 굳이 연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주 깊은 관계였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보통 영웅시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책에서는 영웅적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그려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누구나 여러 선택에서 고민을 하는데 아킬레우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책에서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간의 전투 장면은 문장 하나가 전부다(그만큼 아킬레우스의 전투력보다는 그 외에 것에 비중을 훨씬 두었다).
물론 그는 신분상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서 특별히 존귀한 취급을 받는것으로 보인다(어머니인 테티스도 신의 아들임을 강조한다). 아킬레우스 삶의 전환점마다 테티스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소설화하니 모자 관계가 왠지 더욱 두드러지는 느낌이어서 흥미로웠다.
결국 아킬레우스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데이다메이아란 여인도 있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네오프톨레모스(피로스)가 전쟁을 마무리짓게 되는 것도 왠지 운명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케이론의 역할이 가장 좋았다. 그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에게 의술 및 여러 인생의 가르침을 훈육한 스승이다. 나는 그가 지식 뿐만 아니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는 그런 모습이 있어서 좋았다. 이런 것이 현명함과 지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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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영학을 전공하던 대학시절, 유학파 여교수가 서양문학을 맛깔스럽게 강의한다고 소문이 나서 이 강의를 도강하러 갔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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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라도 자신이 어떤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주변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을 공간적 배경으로 중일전쟁 이후 무렵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일본인 어린이들과 조선인 어린이들의 시선을 살펴봄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처한 상황과 주변 인식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양국 어린이들이 남긴 작품을 따로 구분해 놓지 않고 실었는데 그렇게 해야 양국 간 차이점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한다고 여겨서였다고 한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1938년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를 시작으로 1944년까지 대회를 연다. 그것은 조선의 아동 문학이 더욱 탈정치화하고 개인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적 행보를 시작한 일제가 문학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어린이다움을 강조하려했다는 것은 시사할 점이 있다. 물론 그들은 표방한 것일 뿐 어린이들의 삶이 당시의 환경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음은 아이들의 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앞선 식민지 시기에도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 정치를 표방하며 식민지 조선에 통로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기만 정치였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 해도 양국 어린이들은 그들 간 경계로 인해 입장 차와 온도가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 읽었던 <제국의 소녀들>이란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식민지로 건너가 식민자로서 그곳에서 생활한 여성이나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식민자 2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식민자들의 관점에서 식민지가 어떠했는지 개인의 경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장하는 이들은 식민지 시기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로 대부분 조부모나 부모를 따라 경성에 들어왔다. 그 책을 통해서도 느꼈었지만 식민자 2세의 어린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식민지 관리이거나 자영업으로 성공한 경우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재조일본인 가정에는 조선인 고용인이 있었고 고용인이 그곳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그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책은 식민자의 입장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 책은 양국 간 교차 상황을 확인할 수 있어 훨씬 도움이 된다. 


양국 어린이들 간 경계가 드러나는 지점은 여럿 있다. 


가장 먼저 일본인 어린이와 조선인 어린이 간 교육 차이가 크다. 일본은 1905년 통감부 설치 후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위한 교육 지원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 문부성은 '거류민단법 재외지정학교제도'라는 법령을 통해 교원을 뽑고 재정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1909년이 되면 학교조합령이 발포되어 문부성이 하던 일을 조선총독부가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본인과 차등을 두어 진행되었다. 이는 소학교 뿐 아니라 중등학교,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교원이 되기 위해 수업을 받는 경성사범학교가 있고, 그 뒤의 붉은색 건물에는 일본인 초등교육기관인 경성사범학교 부속 제1소학교가 있었다. 흰 건물은 조선인 어린이가 다니는 경성사범학교 부속 제2소학교였다. 그리고 수영장 근처에는 일본 가옥 같은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은 일본인 상류층 고위 자제들이 학년에 상관없이 다같이 모여  수업을 받는 '단큐'라는 곳이었다. 일장기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흰색 건물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같은 길로 통학하며 언제나 마주쳤지만, 시비가 붙지도 않고 교류를 하는 일도 없었다. - P191


일본인, 조선인 어린이의 수신(윤리) 교과서 내용도 서로 달랐다. 일본인 어린이 교과서에서는 주체성을 강조한 반면 조선인 어린이 교과서에서는 청결을 강조하고 조선의 발전에 감사하라는 내용과 외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자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고. 


그리고 경제적 이유도 크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조선의 쌀이 싼값에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농업의 비중이 컸던 조선 농가의 피해가 컸다. 땅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름으로 국가의 소유가 되거나 아니면 일본인 거부나 친일파 지주의 땅이 되었다. 땅을 잃은 이들은 새 땅을 찾아 만주로 가거나 일자리를 찾으러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과 만주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조선 내 대도시로 향했다. 그러나 아직 산업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조선 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용직이나 잡부 정도에 불과했고 결국 그들 중 많은 수는 도시의 궁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집안에 최소한의 살림이 유지되지 않으니 조선인 어린이들은 스스로를 돌볼 여력이 없어 집안 일을 도와야 하는 일이 잦았다(그래서 일찍 철이 든 느낌). 반면 일본인 어린이들은 여유가 있어서인지 게으름이나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인 어린이들의 생활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어서인지 생활의 터전이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벼를 키워야 해서 가문 하늘에 비를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다. 일본인 어린이들의 글에는 감정과 상황 자체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예를 들면 아버지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1940년 정도가 되면 일본 본국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도 상황적으로 전쟁과 뗄 수 없는 근대 교육이 이루어진다. '너희들은 미래를 짊어질 일꾼'이라는 내용을 주입시키고 군대식 훈련을 통해 충성을 강요하며 은연중에 전쟁적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등이다. 1937년 이후 예비 일본인들을 양성시키기 위한 기획으로 황국신민맹세가 제정되었고 전쟁으로 나가는 군인을 위해 여성들이 흰 천에 빨간 실을 수놓아 전달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아이들의 글을 보면 천황의 사진을 (마치 진짜 천황처럼 여기고) 소중히 여기거나 강한 일본 정신을 기르면 훌륭한 황국 신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 어린이 모습이 보인다. 또 신사 설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기도 하고 군가를 부르는 일을 눈물나게 기쁘다고 여기는 글도 있다. 조선인 지원병에 대한 글을 통해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전쟁놀이를 신나해하거나 중일전쟁의 경과에 따라 일본의 승리의 발자국이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글을 볼 때는 진짜 좀 섬뜩했다.


전쟁 때문이 아니더라도 근대 일본의 교육은 국가의 요구에 충성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교육 체계는 식민지 조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전쟁이 마무리되자 재조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귀환한 일본인들과 원래부터 본국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마치 이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처럼 경계가 있었다(원래 본국에 있었던 이들이 귀환한 일본인들을 차별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런지 자못 궁금하다. 


스쳐 지나갔지만 막상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좋은 이웃분 덕분에 이 책을 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희망도서로 받았으니 여러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은 널리 읽혀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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