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언제 도약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이다.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갑자기 시작되었고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되었다. 어떤 경제는 돌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경제는 몇 차례나 도움닫기 과정이 필요했다. - P1745

19세기 중반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업화는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상업적 교류와 국제협약(자유무역을 포함하여)은 전체 유럽시장의 통합을 촉진했다. 유럽대륙의 문화적 동질성이 과학기술의 교류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 P1746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선도 업종의 전환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새로운 상황이 출현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에서 생산방식의 전반적인 기계화가 실현되어 공업화 이전의 소규모 공방‘ 이사라졌다. 자영 소기업주를 대체하여 고용된 직업적 경영자가 사회와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와 함께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한책임회사가 흥기하기 시작했고 민간기업의 관리가 관료화되면서 화이트칼라‘라는 직업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생산이 집중되고 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경쟁 메커니즘이 제약을 받게되었고, 다국적 콘체른이 등장했으며, 상표가 마케팅의 주도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각지의 협력자와 손잡고 만든 전지구적 판매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 P1748

아시아의 근대 초기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는 "왜 유럽인가?" 라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분석이 다 끝난 화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장점과 업적(로마법, 기독교, 인쇄술, 정확한 자연과학, 합리적인 경제관념, 경쟁적인 국제체제, ‘유럽인의 개인주의‘ 등)을 하나씩 열거한뒤 유럽 이외에는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두리뭉실한 결론을 내려서는 설득력이 없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아시아는 상호 접근이 늘어갈수록 그들 사이의 질적·양적 차이는 좁혀졌고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세계를 성공자와 실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은 더욱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다. - P1750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그 밖의 과학 분야도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갔다. - P1755

19세기의 공업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보다 효율적인 기술적 · 기계적 전환이 꾸준히 일어났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증기기관의 사용은 그 자체의 나선형 발전과정을 열었다. - P1758

에너지가 풍부한 유럽은 비서방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 P1764

수출주도형 경제의 거시경제적 성공 여부는첫째, 생산이 노동집약적 가족기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수출에서발생한 수익이 국내에 남아 사회 내부에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되는지, 둘째, 수출상품 생산의 주력 형태가 다량의 저임금노동으로 생산하고 소유권이 외국기업의 수중에 있는 플랜테이션 또는 광산이어서 대부분의 수익이 국외로 흘러나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형의 구조가 두 번째 유형의 구조보다 국민경제와사회 전체의 발전에 유리했다. 두 번째 유형의 구조에서도 경제성장은 일어났지만 고립된 지역에 국한되어서 다른 경제 영역에 자극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 법칙의 중요한 예외는 남아프리카뿐이었다. - P1769

1912-20년, 중국 공업의 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88) 1920년 무렵, 중국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발전 잠재력이 있는 공업화 경제의 기초를 갖추었다. 군벌의 혼전으로 인한 내정의 혼란,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할 강력한 정부의 부재,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은 중국 경제의 도약단계가 반세기나 늦춰진 주요 원인이었다.
1980년 이후 위대한 도약이 시작되었다. 그 전의 중국 공업화 역사의특징은 제국 말기의 정부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한 지체된 발전과정이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가 저지된 1920년대의 도약이었다. - P1773

‘낙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적용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어떤 시점에서는, 특히 19세기말에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은 분명히 인도나 중국의 비교적 발달한 지역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경제적 성취를 판정하는 잣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소수의 대형 성장 지역이었다. 인도에서는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민간 기업가의 결심의 결과로1910년 또는 1920년 무렵 몇몇 영역에서 대규모 공장생산이 등장했고, 이로부터 자기이익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공업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인도의 도시지역에서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공업화와 기타 발전과정이 나타났다.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인도 경제는 ‘좀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가? - P1776

메이지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영경제를 건설할 생각이 없었다. 초기 단계의 자극을 제공한 후 정부는 점차로 대다수 공업 분야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정부의 예산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기업계의 선두주자들도 공업화를 전체 일본을 위한 애국사업으로 생각했다. 사업의 동기는 개인이익의 최대화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봉사였고 미국식의 놀라운 사치성 소비(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Veblen이 말한 과시성 소비)를 비난했다. 이런 국가관의 결과로 기업은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한 세계시장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사회로 전파했다. 관료와 자본가들은 다양한 공업구조를 구상하고 또 실현했다. 이로써 일본은 수입의존성을 최대한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고려한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메이지 과두체제는 물질적 발전의 약속과 실현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 어쨌든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질서를 파괴했다 을 개선하고 넓히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민간 기업인들도 충분했다. - P1780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공업화의빠른 속도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되며 미국 공업화의장기 연속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미국의 공업화는 주로 자본주의 시장역량의 자유로운 발전이란 법칙을 따랐지만 그것이 성공요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1862-1913년 사이의 (중간에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를 제외한) 공화당 집권기에 연방정부는 공업화를 정책적 사업으로서 추진하면서 전국 시장의 통합, 보호관세, 금본위 화폐제도 등 중요한 제도를 실시했다.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공업화는 -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ㅡ 역사적으로 예외에속한다. 서방의 자유주의 공업화와 동방의 국가계획 공업화란 양대모형이 선명하게 대립한 상황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 P1781

1913년 무렵에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전 지구적 범위에서 활동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했다. 공업화,구체적으로 말해 현지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발전한 기계화된 생산은 모든 사례가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발전과정이었다. 반면에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역적 기업 활동을 전 지구적 범위의활동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한 활동이자 경제제도였다. - P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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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 - P1624

영국의 법치개념은 제국이란 통로를 통해 모든 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비유럽인의 시각에서는 영국의 법치제도는 식민주의의 색채가 강하기는 했지만 현지인 통치자가 통치하는 이웃나라의 법치 상황보다 못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의 범위는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왔다. 유권자범위의 확대는 부분적으로는 혁명투쟁의 전리품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위로부터의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 P1635

‘잭슨 민주주의‘와 함께 미국은 1776년 이후로 다시 한번 세계 역사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들어섰다.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전에 유럽 어디에서도 이처럼 경쟁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자유로운 논조가 가득한 ‘대중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 여러 차례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보편적 남성 투표권이 실현된 후에도각 주의 지사가 지니고 있던 권력이 아직 약화되지 않은 프랑스에도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없었다. - P1639

정치운동과 시민조직은 신분에 대한 고려에 얽매이지 않는 내부기능을 통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흔히 사람들이 평등하게 모이는 소집단, 단체, 조직을 통해 표출되며 상호 제약 없는 소통을 통해 실현된다. 더 큰 규모의, 충돌이 빈번한 정치무대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남김없이 표현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그것과 연관된 풀뿌리 운동의 핵심이다. 예컨대, 많은 증거가 증명하고 있듯이초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연합된 운동이었다. - P1642

19세기의 마지막 1/3시기 이후로 민간경제 부분에서 점차로 국가관료제도를 대규모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관료제도는 프로이센과나폴레옹시대 프랑스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유럽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유럽 이외에 중국, 오스만제국, 일본에도 관료제도의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들의 관료제도는 ‘전근대적‘ 이라거나 ‘세습적‘ 이었다고 서둘러 평가절하해서도 안 된다.
19세기에 이들의 전통은 서방의 영향과 충돌하면서 다양한 결과를낳았다. - P1649

영국의 (인도) 식민지 관료제도는 국가기없는 정치지평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르지 않았다. 무굴제국과그것을 계승한 역대 정부의 핵심은 중국과 베트남 같은 관료조직이아니었다. 그들은 문관의 다양한 위계와 성숙한 문서제도를 갖추고있었지만 엄격하고 세밀한 공무원 관리체계를 갖지 못했다. 인도문관제도(ICS)는 그러므로 당시에 존재하던 기반 위에서 제한적으로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문관제도는 동인도회사의 관리체계를직접 이어받았다. 동인도회사는 18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조직구조 가운데 하나였지만 여러 면에서 현대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직위의 분배는 객관적인 업적평가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후견제도(Patronage)를 지키고 있었다. - P1651

중국(또한 베트남)의 관료제도는 완전히 ‘전현대적‘ 이지는 않았다. 중국의 관료제도는 두 가지 측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하나의 측면은 가족관계 또는 후견관계를 초월한 비인격적 원칙을 지킴으로써 고도의능력위주 인재선발방식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는 더 나아가 이런 원칙과 세습귀족의 지속적인 고위 행정직 점거 현상이 상호 용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P1655

오스만제국에서 (유럽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동안 통용되었던 후견관습이 하루아침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따르는 인사정책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두 가지 조류와 관념은 충돌하면서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1839년 이후의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은 새로운 관료계층을 제국의 핵심적인 엘리트계층으로 만들어 놓았다.
1890년, 이 직업 공무원 집단의 숫자는 최소 3만 5,000명이었다. 백
년 전에 수천 명의 필사원은 모두 수도 이스탄불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1890년이 되자 이스탄불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소수의 신식 고급관원뿐이었다. 오스만 관료체제의 지방화는 19세기 후반에야 중국이 수백 년 전에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 P1656

일본은 독특한 관료제도의 현대적 형식을 찾아냈다. 그러나그것은 절반의 현대성이었다. 메이지시대의 정치질서에서 개인의자유와 인민주권은 낮선 사상이었다. 일본에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계약관계라는 유럽적 관념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군주가부장제는 합리적 관료체제의 시대에도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의1889년 헌법은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이며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통치권을 독점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유럽 모형을 이탈했다. - P1658

19세기와 20세기에 각양각색의 경찰제도가 전파되면서 세계적인 범위에서 경찰력이 확대되었다. 경찰제도는 종주국의 수도에서 식민지로, 때로는 샴과 일본 같은 국가의 도입에 의해, 나아가 각 제국 내부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 P1672

역설적이게도 (파가론 연구에서 이론화가 부족했던) 권력의 집적이 다른 영역 —— 민족주의 강령 —— 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다. 아무리 반동적인 군주라도 이제는 ‘짐이 곧 국가‘라고 말 할 수는 없었지만 국가가 곧 민족이란 관념은 널리 퍼졌다. 국가에 유익한 것이라면 민족에게도 유용했다. 이렇게 국가권력 합법성의 기반 개념이 바뀌었다. 민족국가는자기 고유의 존재이유를 갖게 되었다. 그 존재이유는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왕조의 합법성이나 정치적 실체로서의 유기적 조화가 아니라 ‘민족이익‘ 이었다. 누가 민족의 이익을 정의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 P1691

달리 말하자면 국가의 강성은 결코 인류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적 재배치의 불균형한 결과였다. 다른 국가 보다 약하거나 낙후한국가는 쉽게 공격을 받았다. 약한 국가는 잠식당하거나 정복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근대 초기 유럽인의 상상 속에서 ‘동방‘국가는 모두 백성을 지푸라기로 아는 ‘폭정‘의 국가였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방대한 관료기구를 가진 중국도 그렇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19세기에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유럽 민족국가가 강력한 관료기구와중앙집권제를 건설한 방식을 빌려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 P1692

제도 설계의 기본 의도는 정치 메커니즘의 단순화였다. 영국의 계몽사상가이자 공리주의 (功利主義) 학설의 창시자 제레미 벤덤(JeremyBentham)은 민주주의 이념에 관해 말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책임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간권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가장 명쾌하면서 모든 민주정치의 강령이되는 기본 사상이다. 인민과 통치자는 가능한 한 중간 고리를 줄이고 직접 대면해야 한다. 그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의제도라야 한다. 대의제도는 선거와 대표 파견의 과정일 수도 있고, ‘신비한 연합‘ (unio mystica) — 군주 또는 독재자가 국가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때 ‘인민‘이 박수를 치든지아니면 ‘사실상의‘ 의사표시를 통해 지지를 보내는 방식을 통해구현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민족국가의 정치제도는 민족적 동질성과 헌법구조의 단순성을 기반으로 한다. - P1694

최소한의 기대치는 있었다. 모범시민은 개인이익의 추구와 민족 전체를 위한 희생 사이에서 훌륭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많은 국가의 공적영역에서 사람들이 생각한 문제는 시대와 함께 나아가는 문제였다. - P1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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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타이가의 시간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다 - 모스크바에서 바이칼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여행자 K 지음 / 시대의창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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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중 여행에세이를 좋아한다.

겁이 많고 소심한 내가 대리만족할 수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

헌데 생각보다 책에 대한 평이 너무 없어 놀랐다.

그리고 그마저도 평이 별로다.

음. 너무 기대가 커서였을까.


하지만 나는 읽어보니 이 분의 성정이 느껴졌고 잘 읽혔다.

내 스타일이었나보다.

두고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여행기는 어차피 그 당시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고

언제나 최신으로 갈아치워지므로 별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내 꿈이었다.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가기가 그렇지만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더라도 옆지기를 설득하는 일이 우선일 것 같다.

몇 차례나 꼬드겨봤지만 꿈쩍을 하지 않았다.

혼자 간다고 하니 위험해서 안된다고 하고.(어쩌라는 거냐)


참! 여행기 중 러시아 혁명기를 거쳐간 조선인들의 이름이 종종 나오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문장이 좀 뻔하다는 것~?^^;

그래도 여행의 설레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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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30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베리아횡단열차 타보고싶어요. 부산에서 북한 찍고 시베리아 넘어 유럽까지 가는 날이 오길 ㅎㅎ 저희 옆지기도 집나가면 고생이란 주의랍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31 21:12   좋아요 1 | URL
너무 타보고 싶습니다ㅜㅜ 언제나 타볼지. 죽기 전에 북한은 가볼 수 있겠죠.
옆지기가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큰일이에요. 점점 더 안 움직이려고 하니...ㅋㅋ
 
알라딘 블렌드 다이어리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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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내 취향의 원두다. 바디감이 무겁지 않으면서 개운하고 깔끔하다. 종종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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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일상적이고 삶에 묶이는 일을 요구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던 여성들이었다.
남성됨의 정치는 삶이 평범하다고 보았고 이를 넘어선 차원에서 번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디 브라운은 이 카리스마적 영웅은 시대착오적이며 오늘날의 정치는 이익의 정치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정치도 진정한 남성됨도 죽어 있다는 소리다.

그동안 여성들은 인류와 정치에 속할 자격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여성들은 남성됨을 쫓기 위해 남성과 그들이 주장하는 정치를 대체로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남성이 배제하고 거부하고 탄압하고 부정한 것을 가져와 통합해야 한다.
남성성은 문제가 없다. 제도화된 남성됨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소외된 남성의 정치가 문제라는 것이다.
육체와 이성이 분리되어 있는 현재와 제도화된 정치는 반쪽 짜리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할 정치 형태는 남성적 가치를 여성적 가치로 교체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다.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방식의 이분법은 너무나 단순하고 조야하다.
현재 잘못 깔린 판 위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반목과 전쟁을 피하고 새롭게 판을 깔고 형성된 정치 조직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판을 바꾼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용기를 내야 한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권력이 생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권력 위에 있었던 적은 없지 않나.
우리의 목소리는 무시되기 일쑤였고 제도권 안에서 박탈되고 격리된 채 살아왔다.
여성은 이제부터라도 정치권력의 경험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웬디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철저히 무시되고 배제된 형태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베버를 통해서 그들의 정치 이상의 한계를 엿보았다.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편가르지 말고 단순한 통합도 아닌 새로운 정치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깊었다.

현실의 정치는 썩어 있고 대립과 반목의 극한으로 피로하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정치판에서 그저 싸움의 도구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니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하고 정치적 용기를 내야 한다.


피에쓰) 관련 도서들이다. 

어렵지 않은 입문 또는 개론서들을 골랐고 막스 베버는 언젠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근대 역사를 보다 보면 종종 그의 이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렌트도 마찬가지!!!




 





남성됨은 삶, 단순한 생존, 필멸성, 일상, 리듬, 자연과 필요의 개입 등을 초월함으로써 실현된다. 또한 끈질긴 불멸 추구를 통해, 특히 삶과 비교되거나 대조되는 이상과 제도의 건설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 욕구 필멸성을 초월하기 위해 분투하고 이런 것들 너머의 행동 범위에서, 즉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영역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때로는 소란스럽고 때로는 미묘한 이 노력의 잔향은 자신을 위해 고안한 기획과 그 자신이 거부하고 억압하고 탄압한 ‘삶’, 이 모두에 들어 있다. 이 ‘삶’이 저열함만으로 환원되는 사이, 이 기획은 ‘삶의 저열함’에서 멀어진다.

서구의 정치적 인간은 육체에 덫, 무기, 도구, 기반, 정신에 대한 저주 등 다양한 이미지를 덧씌운 뒤 그것을 인식해 왔다. 그리고 육체에 대한 이 가치 평가를 자신이 건설하는 정치로 가져다가 제도화한다. 인간의 개별 육체, 육체의 관리 영역, 정체 등은 모두 잘 해 봐야 도구나 기반일 뿐이며, 보통 인간과 인간의 정치 기획에 짐이 되는 것, 자극물, 위협으로 여겨졌다.

인간은 형상 부여자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상정하고, 형상 부여를 통해 정치를 구축하고, 정치를 인간의 목적이라고 부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형상을 부여할 권리를 타고났다고 상상한다. 형상을 부여하면서 점점 더 큰 삶의 공간을 통제하고 지휘하고 정복하는 힘이 인간의 존재 이유이며 남성됨 정치의 국가적 이유다.

정치는 (조직적 약탈, 노략질, 강간 등) ‘무의미한 폭력’, 즉 육체와 육체노동의 열매를 전유하고 철저히 파괴하려는 남성적 유대에서 나온다. 이런 의미 없는 폭력은 자신을 인간 존재의 목적으로 해석하길 멈추고, 내적 지배와 외적 공격의 제도로 발전해 나아간다.

마키아벨리와 그리스인에게 정치의 ‘특별한’ 본성은 비르투와 아레테로 상징되는 정치 영웅의 특성으로 구현된다. 베버도 진정한 정치가를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베버식 정치의 특별한 차원은 그가 진정한 정치가와 카리스마적 지도자 사이에 구축한 정체성에서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카리스마는 ‘평범함을 넘어선’ 차원에서만 번성하고, 일상적이고 삶에 묶이는 일이 요구될 때는 빠르게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이다.

베버의 카리스마적 영웅은 시대착오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거대 정치는 사라졌으며, 이익의 정치와 육체적 사회적 존재의 정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정치는 시시하고 하찮고 썩었다.

자유주의 국가의 형식상 정치권력은 ‘국익’, 즉 시민의 특정 이익 및 일반적 안녕과 병치는 ‘명분’을 주장할 때 표현된다.

역사는 인간 존재와 행위를 거의 모든 차원에서 남녀로 나눠 왔기에 여성을 더욱 ‘충실하게 인간적인’ 젠더라고 볼 순 없다. 남녀의 구축 과정 모두 편파적이며, 편파적인 내부에서 인간의 경험은 모두 젠더화된다. 오직 남녀의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자유, 즉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우리 존재를 위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발명을 가능케 하는 자유는 우리라는 존재,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해야만 하는 것, 필요의 길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정복하기를 그칠 때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단적이고 탈중심화된 생산의 소유권과 통제라는 기본적 민주사회주의 계율과 재생산 노동의 집단 책임이라는 기본적 급진 페미니즘의 계율이 실현될 것이다. 이와 함께 훨씬 많은 것들이 뒤따를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쾌락적이고 시적인 움직임은 물론이고 고통, 폭력, 질병까지 한데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자연과 육체에 투항하자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부적절하다.

‘육체’라는 딱지가 붙은 여성은 서구 문명에서 필요와 섹슈얼리티 양쪽 항목을 주로 담당했다. 그 결과, 서구 문명 속 여성은 자기 일에서는 비하되고 고립되고 억압당했고, 성적으로는 대상화되고 침해받았다.

사실 필요와 욕망은 모두 창의적 가능성의 장일 수 있으며, 그 어느 쪽도 태생적으로 우리를 결정짓거나 노예화하지 않는다.

인간의 열정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지의 영역이며, 주요 영역은 미개척 상태로 남아 있다. 게다가 인간의 열정은 소위 말하는 ‘생각’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존재를 통해 구체화되고 미뤄지면서도 튼튼해지고 사고의 반대편에 놓이게 된다.

어떤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내며 책임을 지기보다 통제된 조건하에서 살아가는 편이 쉽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권력을 취하거나 강해지기보다 권력 밑에서 살아가기가 더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안락함과 편안함은 자유가 약속하는 보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살아가는 것 이상을 원한다. 단순히 오래 살기보다 세상과 창의적 적극적으로 마주하며 살기를, 심지어 세계가 움직이는 항로 가운데 어떤 것을 결정지으며 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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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30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읽은 책의 내용이 정리되는 것 같아요. 저는 책을 읽을 때 전체적 윤곽을 잡지 못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정리해둔 걸 보니 참 좋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1-30 20:07   좋아요 0 | URL
도움을 받으셨다니 기쁩니다^^ 다락방님도 철학자들 이론 읽어내느라 고생하셨어요. 다음 달 책은 아직 사지를 못했네요. 지금 주문해봤자 설 지나서 올 것 같아서 다음주에 주문하려구요. 다음달 책은 이것보단 쉬울거라 믿으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