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무가 존재와 분리되어 존재 바깥을 감싸는 경우가 아니라 존재 사이사이에 분배될 때 생성이 성립한다. 정확히는 단지 사이사이에 분배될 뿐만 아니라 존재-무-존재-무⋯⋯를 경계 짓고 있는 선들이 계속 무너질 때 생성이 성립한다. 존재와 무는 절대 모순을 형성하며, 존재가 존재이고 무가 무일 때 생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는 무이므로(없으므로) 존재만이남는다. 무가 존재 사이사이에 분포하고 그 경계선들이 무너져갈 때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도래한다. 모든 생성은 차이생성이다. 그리고 이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성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 P23

경험론적 형이상학자들은 한편으로 ‘경험‘에 충실하되, 이런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나 경험의 심층을 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경험을 피상적인 것으로서 벗겨내고 그것과 불연속을 이루는 실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실재를 찾는 한 본질과 현상의 이율배반과그것과 맞물려 있는 신체와 정신의 이율배반)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어디까지나 경험과 연속되는 그것의 심층을 구체적으로 인식해 들어가려했다. 이렇게 경험과 연속적으로 파악된 실재는 곧 ‘생성‘이었다. 경험론적형이상학의 구도를 통해 새롭게 성립한 형이상학 즉 생성존재론은 현대 철학/탈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성취에 속한다. - P49

오늘날 생성존재론의 구도는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의 이행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생성‘으로부터 ‘동일성들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것이다. 뒤에서 (6장, 1절) 논할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은 이 과제에 답한각별히 정교한 시도에 속한다.
생성존재론의 또 하나의 의의는 이 존재론에 이르러 마침내 서구적 사유와 동북아적 사유가 서로 통(通)하게 된 점에 있다. 동북아의 형이상학은 처음부터 생성존재론의 형태를 띠었다. 이 전통은 ‘氣‘를 근본 실체로서 생각했고, 기는 반드시 ‘氣化‘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생성은 생성하지 않는 진실재의 ‘타락‘한 모습이었으나, 동북아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物‘의 고정된(고정된 듯이 보이는) 모습은 ‘氣‘의 흐름이 일정한 형태로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직관은 ‘易‘의 개념으로써도 표현되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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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태어나 그 생명을 축복받은 아이가 대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아이를 가지거나 지운 적은 없지만 주변을 보면, 스스로를 빛 쪽에 있다.
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이를 낳고, 스스로를 어둠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여자는 낙태를 한 것 같다. 여자는 경제적 사정에 이런 알파를 더해 애를 낳을지 말지 정한다. - P193

여자가 자연에 좀 더 가깝다고 보는 근거는 여자의 비생산적인 가치관, 사고방식이 문명이라는 것에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비생산성은 여자의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것에, 여자가 남자처럼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남자는 이론(말)으 - P205

로 총체성을 획득하려 하나,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총체성을 갖고 있다. - P206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1960년대의 투쟁은 비일상적인 정치 공간에서 나 스스로를 보편적으로 대상화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건 표면상 하는 말이다.
‘00일 투쟁하자!‘는 식으로 1년 365일 중 며칠 정도만 투쟁해서 자신의 비참한 일상성을 승화하려 한다.
우리가 투쟁에서 잘못 내디딘 첫 번째 걸음이 바로 이것이다. 애초에 총체적인 권력의 이러한 총체성이 일상에서 나타나는데도, 머리로만 억압을 밝히려고 하여 문제를 정치적 과제로 집약해서 정치권력을물리적으로 분쇄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얻고 해방을 향해 최단 거리로 질주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투쟁에서 멀어지고 벗어나 버린 것이다. 투쟁을 하면 언제나 투쟁을 담당한 주체가 품은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다. 정치권력으로 곧 귀결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떤 주체가 있어서 나온 것일까? 이런 주체는 대의를 위해 나를 버린다는 일본전통의 정신 풍토와 근대 합리주의 사고가 합쳐져 나온 것이다. - P228

혁명과 파시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둘은 양극으로 보이지만,
실은 둘 다 비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극한까지 그 생명의 가능성을 불태워다 쓰고 싶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 다 따분한 일상, 시시한 일상, 곧 오르가슴이 없는 일상이 있어야 한다. - P233

맞벌이. 이것은 여자가 휴일인 일요일에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해야 할 이유이고, 직장 퇴근 후 백화점이 문 닫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 들어가야 할 이유이다. 또 콘돔을 사용하는 이유이고, 여자가경제력을 갖게끔 하는 이유이다.
맞벌이 여자에게 맞벌이란 실은 일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샅샅이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어떤가? 여자가 "맞벌이하는데 신랑이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답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P240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18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 P241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태어났다. - P242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오늘 내가 느낀 비참함을 그대로 두고 ‘내일 만약에‘로 바꾸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파시즘이 싹튼다. - P259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
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문제는 ‘내 생각과 좀 다른데‘ 싶을 때나 놀랐을 때, 그걸 그대로 솔직하게 밖으로 표출할지 말지이다. 말을 가진 여자는 말을 삼키는 여자이기도 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창피하다고 여기며 본심을 감춘다. 인텔리는 어찌 됐건 자신이 엉망이 되는 상태를 잘피하며, 잘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방법만 해도 사람이 열 명이면 설거지법도 열 가지다. 각자 예전부터 해온 방식에 각자의 과거가 녹아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할 때 그건 암묵적으로 나 자신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상대가 놀랄 때도 일상다반사로 있다. 둥글게 살자, 사람들한테 맞추자 하고 마음을 먹고서 내 뜻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리 길게 가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은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일상적인 일로는 그러지 못하는 법이다. - P286

인간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있고 나서 남이 있는 것이고, 만사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멋스럽게 이야기를 해 본다 한들, 애초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집스럽게 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마치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개 같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자기 꼬리를 물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 자신의 약점, 되풀이하는 실수에 혀를 차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헛도는 모습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 왔다. - P290

공동체 생활의 마음가짐은 어쩌면 내일 내가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지금 이 시간, 이 만남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 P297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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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사

생명의 가능성이란 나 자신과 남이 제대로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자가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방식은 남자처럼 바다로 나아가며 자아를 찾아가는 방식에 있지 않다. 나 자신 속에 바다를 품고 내 속의 바다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방식에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
-> 이 방식에 나는 의문이 있다. 여자는 왜 바다로 나아가면 안 되는가?

일본에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도 유럽이나 미국인한테는 한없이 관용적이면서도(그렇다고 해도 반전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아시아인들한테는 마치 자기가 생사여탈권이라도 가진 것마냥 군다. 출입국관리법에는 낡아빠진 소위 ‘신국 일본’의 행태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 P136~137
-> 근대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를 따르고 동양의 평화를 운운하며 리더임을 표방하고 다른 동양의 민족을 억눌렀다.

당시 나는 내가 끝까지 못 싸운다는 것, 그러니까 각목을 들지 못하는 자신을 아주 창피하게 여긴 것 같다. - P138
-> 시위, 데모를 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이 아닐까. 어떤 의도에서 시작되었든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몸 담았다면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아무리 머리로 제국주의와 싸우는 피억압 인민들이 있다고 확실히 알고 있다 한들,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한쪽 다리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것이지, 논리로는 잃어버린 자기 다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아픈 사람은 항상 미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시적 대상황과 미시적 소상황을 합쳐 문제시해야 한다. - P124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어디에 있든 완벽히 사회에서 자립한 주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각자가 가진 노예의 역사성, 교태를 부리며 살아온 역사성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 P133

남자들은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운동을 하지 않는 여자랑 할 테야."라고 거리낌이 없이 큰소리쳤다. 그런 남자들을 위해 조그맣게 움츠러들어 바리케이드 시위에서조차 밥을 짓고 변소를 청소하는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여자’라는 이름의 암컷들이었다.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창녀의 교태를 두루 갖추고 남자들의 혁명 지도부를 떠받쳐 온 ‘엉클 톰’ 같은 여자들. ‘만일 혁명이 된다면’ 하고서 그 환상을 위해 자신을 바친 신좌익 내부의 신데렐라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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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연옥.천국 귀스타브 도레 삽화 수록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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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꾸면서 무엇인가 보는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각인된 인상만 남고 나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바로 그러하였으니, 나의 환상은 완전히 끝났으나 거기서 나온 달콤함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데, 마치 햇살에 눈이 녹는듯하고 바람결에 가벼운 나뭇잎에 적힌 시빌라의 응답이 흩어지는 듯하였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 (특히) 중세 작품을 읽을 때, 신곡은 필독서이자 교양서처럼 되어 있다. 사실 중세의 역사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매번 공부할 때면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또는 현대 작품에서도 신곡이 수시로 언급되곤 해서 언젠가 제대로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신곡을 읽으면서 예전에 한 번 읽었던지 ‘지옥’ 중간까지는 좀 익숙했다. 아마도 직접 읽었지만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었거나 알음알음 들은 내용이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에 읽을 때는 부디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읽어내자 생각하며 읽었다. 신자의 입장이라면 더 익숙했겠지만 무신론자인 나도 일상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지옥’편에서 만난 이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이때부터 내가 보았던 것은 언어를 초월했으니, 그 광경에는 언어도 굴복하고, 그 엄청남에는 기억도 굴복해야 하리라.


오, 탐욕이여, 너는 인간들을 네 밑에 잠기게 하여, 누구도 네 물결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구나!


질투와 탐욕, 수시로 찾아오는 분노를 참으며 매 순간을 살아내는 나는 어쩌면 이성과 감정의 충동 사이에서 타협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다. 책에서 신자의 최고봉에 자리한 수도사조차도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해 부패의 길로 나아가는 걸 보니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 약한 것이기에 지상에서는 시작이 좋아도 참나무가 싹터서 도토리를 맺을 때까지 지속되지 못하지요. 


<신곡>이 계속 읽히는 이유는 첫 번째로, 나 같은 무신론자라도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어떠한 방면에서든 읽힐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인간의 고민이 얽힌 명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물 이면에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것이든 확답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답을 구하는 명제란 한정적이고 질문을 품은 명제는 오래 걸려도 답을 구할 수 없음을 인간은 살아갈수록 느끼고 ‘그러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고뇌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는 누구나 겪는 본질적인 고민이자 실존적인 명제다.


단테는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 여행을 시작한다. 지옥의 여러 단계를 거치며 고통에 빠진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회고하고 뉘우치는 과정을 거친다. 연옥을 거쳐 단테는 사랑하던 베아트리체를 천국에서 만나 계속 여행을 한다. 여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와 과거를 만나며 그는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신곡이 읽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지의 탐색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잡힐 수 없었다고 생각한 우주는 중세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시작했다. 우주의 중심은 ‘나’, ‘우리’에서 시작하여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지동설이 탄생할 때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야 했다. 나는 어디로 향할까,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근대, 현대를 거쳐 지금의 우주 과학 이론과 실천이 뒤따랐다. <신곡>의 지옥, 연옥, 천국 장소의 위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양한 물리 이론을 비롯한 흥미로운 이론과 지각이 뒤따른다. 


그렇다고 해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리라. 지옥 > 연옥 > 천국 편으로 읽을 만했음을. 천국 편의 서두에는 이런 글귀가 자리하고 있다.


단테는 철학이나 신학의 교양이 부족한 독자에게는 천국이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 잘못하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으므로 미리 돌아가라고 권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나는 천국 편을 읽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았다. 읽는 내내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고 피곤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하는 말이 머릿 속에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이유, 베아트리체가 천국에서 단테를 이끈 이유가 무엇일까 ‘천국’ 편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어서 소득이 있었다.


그를 돌이키려고 꿈이나 다른 방법으로 

영감에 호소하는 것도 소용없었으니,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오!


너무나도 아래로 떨어졌기에, 그에게는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 외에

어떤 수단도 구원에 미치지 못했지요.


그 때문에 나는 죽은 자들의 입구를

방문했고, 그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었던 

사람에게 울면서 부탁했던 것입니다.


베아트리체는 하얀 올리브 가지를 두르고 영롱한 불꽃 같은 모습으로 단테 앞에 나타난다. 그녀를 그리워한 단테는 연신 놀라움에 떠는데 마치 예수 앞에 엎드린 신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가 신비로운 영력을 지닌 거대한 신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가 크게 병을 앓으시고 나서 기독교 신자가 되셨고, 집안에 늘 풍파를 일으키던 아버지도 열렬한 신자가 되셨다. 자식이 당신 곁을 떠나고 더 이상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병마에 시달리면 무언가를 잡고 싶은 것인가 곱씹어 보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게 종종 믿음을 권유하시지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일을 반복한다. 나는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고 언제든 나를 지켜 주는 이들이 떠난다는 것을 연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여전히 회의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생각과 실천은 다르다. 인간은 냐약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라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해는 한다. 


우리 괴로움은 단 한번이 아니라

이 둘레를 돌고 나면 새로워지는데,

괴로움이 아니라 위안이라 해야겠지.


<신곡>이 대단한 저작으로 평가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단테의 지식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당시 최신이라고 언급될 수 있었던 (우주) 과학 지식이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이어져온 이야기의 소재와 관련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대체 이 사람은 이 많은 정보를 얻고 정리하고 자신만의 문학에 얼개로 짜 맞추어 넣기까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더 놀라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다. 


법은 있지만 누가 그걸 지키게 합니까?

아무도 없고 따라서 인도하는 목자는

되새길 수 있지만 갈라진 발굽이 없지요.

사람들은 자기 안내자가 그런 선에만

탐내어 기우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것만 먹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아요.

이 세상을 사악하게 만들었던 원인은

그대들에게서 타락한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통치임을 잘 알 수 있으리다.


미래가 없을 것만 같은 현실의 정치를 보면서 한숨을 짓다가 이런 구절들을 만나면 그 시절에도 이런 고민을 했구나 여기게 되면서 ‘그렇지!’ 탄성을 부르짖는다. 


살아 있는 그대들은 온갖 이유를 저 위 하늘로 돌리지요. 마치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필연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과거는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는 충분히 바꾸어나갈 수 있다고 긍정하고 싶다. ‘하늘’로 돌린다는 말은 ‘남’ 탓을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이미 주어진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내 몫이다. 


신곡에서 다룬 여러 명제들 중 내가 얻은 최소한의 정보이다. 너무 부족하지만 어찌되었든 완독해냈는데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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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18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볼수록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는 책인듯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11-18 22:01   좋아요 1 | URL
재독을 넘어 N독을 할수록 더 깊어지는 책들이 있죠. 고전이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님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4-11-18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님!! 벌써부터 천국 부분 읽기가 두려워지네요. 아직 지옥 의 첫부분인데 말입니다.
저도 인간은 고독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신앙을 가지진 않았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신앙은 당연히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우리는 각자가 믿는 부분이 있을거고요. 이를테면 제 경우, 주말에 산을 다녀오면서 돌들로 탑을 이룬 곳에 서서 저 역시 돌을 하나 올리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런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편입니다. 여행갔다가 성당이나 교회가 나오면 들어가서 기도도 하는 편이고요.

다시한번 신곡 완독 축하드립니다. 저도 어서 완독 하고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4-11-18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신자인 분들을 보면서 그들에겐 신이 믿음의 영역이구나 이제는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에게 고독은 필연이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찾는 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순간 찾아오는 불안과 공포 등에서 버틸 동아줄 같은 역할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종교가 없더라도 누구나 어떤 소망을 바라잖아요. 그것이 이뤄지길 바란다기보다는 그 행위 의식 속에서 마음을 다잡거나 또는 위안(위로)의 보듬는 형식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락방 님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완독 응원드립니다^^

자목련 2024-11-1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자체로 대단하십니다.

거리의화가 2024-11-18 22:06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감사드려요^^*

희선 2024-11-27 0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신곡》을 끝까지 만나셨군요 몇 해 전에 오에 겐자부로 책 《읽는 인간》을 보고 ‘신곡’ 한번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직도 못 봤네요 많은 게 담긴 듯하네요 오랫동안 이 책을 썼다는 말을 본 것 같습니다 신을 믿지 않아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게 좋겠지요 그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보다는 덜 나쁘게 살려고 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11-28 07:59   좋아요 0 | URL
신곡을 읽으면 이 사람이 오래 연구한 결과물임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더군요.
희선 님 말씀처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믿을 주체를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든 그것이 다른 형태든 말이죠^^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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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어제 같기도 하고, 그제 같기도 하고, 오늘 같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저쪽 세계에 있던 마지막 날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보았다.


텅 빈 사방은 끝없이 펼쳐진 허공이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뿐이었다. 우리는 나무도 보지 못하고 강물의 흐름도 보지 못하며, 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발걸음 소리도 듣지 못했다.


"왜 죽은 뒤에 안식의 땅으로 가야 합니까?"


주인공인 양페이와 아버지인 양진뱌오, 양페이가 사랑했던 리칭.

슈메이와 남자친구인 우차오.

...

시각은 달랐지만 다른 세계로 간 사람들이다. 


양페이는 양진뱌오의 양자로 22년 간을 살아왔다. 이웃집 부부인 하오 아저씨와 리웨전 아주머니도 그를 든든이 돌봐준 사람이다.

양진뱌오는 양페이를 거두고 나서 한 여자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양페이를 놓으려 했으나 놓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양페이를 두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양진뱌오 자신의 결정이었다. 과연 그를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양페이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처럼 여겼던 리웨전 아주머니도 갑작스레 사라진 세상에서 헛헛한 마음을 느낀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슈메이는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남자 친구를 만나 호감을 갖고 연인이 되었다. 두 사람의 애정은 뜨거웠지만 가혹한 현실은 애정만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구직을 위해 계속 여기 저기를 떠돌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불화가 생겼다. 결국 오해 속에 두 사람은 영원한 갈림길에 들어선다. 이를 보면서 사람 간의 관계는 어떠한 작은 오해든 작은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 그때 풀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이 감정의 응어리가 되어 서로를 겨누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을테다.


등장 인물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다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뒤늦게 소식으로만 전해 듣는다. 아니면 영영 전해들을 수 없는 채 마무리가 되기도 한다. 이는 현실 세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 정말 아주 먼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진눈깨비가 날리는 하늘 아래 양페이는 사랑했던 리칭과 재회했다. 오래 기다려 만났기 때문에 이 말에 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간의 거리는 정신적으로도 만들어지지만 이렇게 물리적으로도 만들어진다. 


헤어짐도 그렇지만 사람은 우연히 만나는 법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수없이 반복하며 떠올렸던 하나의 명제는 하필 한국 땅에 태어나 내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다른 부모였다면 나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세계를 접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득해진다. 


양진뱌오는 양페이를 끔찍하게 아끼며 살았다. 덕분에 양페이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갖고 평생을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불평에도 미소를 짓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어렴풋이 아버지의 불평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아득하고, 너무도 친근하게, 멀리 있는 빌딩처럼 층층이 겹겹이 귓가에 쌓여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주인공은 생부와 생모와 강제적으로 분리된 채 양아버지 아래 자랐기 때문에 가장 먼저 물리적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다행히 그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이 부러웠다.  


<제7일>의 핵심 주제는 계급의 위계와 불평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앞선 두 작품(인생, 허삼관 매혈기)보다는 최근의 이야기인데다가 (중국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은 위화 작가의 도입작으로 가장 무난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소득의 격차에 따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복권이나 로또 당첨을 꿈꾸지만 확률은 말도 없이 낮을 뿐더러 그 당첨금은 오늘날의 물가에 비하면 크지 않은 금액이다(그럼에도 너도 나도 매달리지만...). 

지역에 따라, 아파트 등급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 짓는 행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여기와 같을까, 다른 모습일까. 이 작품을 보면서 작가는 여전히 이 세계에도 돈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슬렁거렸다. 눈은 환하고 비는 어두컴컴해 아침과 저녁을 동시에 걷는 느낌이었다.

대기실 한 쪽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다. 짐작할 수 있듯 플라스틱 의자가 있는 쪽은 대기자들이 넘쳐나지만 소파가 있는 쪽은 소수의 대기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소파에 앉은 이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한껏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있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이들은 긴장한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다. 현실에서도 익숙한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소파에 앉은 이들은 값비싼 수의를 입고 자신의 유골함의 소재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인다. 그러나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이들은 낡고 저렴한 수의를 입고 유골함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배부르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사실 나는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저자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비슷한 구조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회의론자라 그런 것 같다.


돈은 권력을 쫓고 권력은 계급을 부여하는 구조 앞에서 개인은 무너지고 관계는 끈끈해지기 어렵게 만든다. 


무덤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어.

무덤이 없는 자들은 여기서도 가진 것이 없다. 이제는 부족한 땅 때문에, 또 가치관의 변화로 유골화되어 납골당에 가는 형태가 많아졌지만 장례 비용도 그렇고 죽기 전까지, 죽어서도 참 쉽지가 않다.


오해 속에, 갑작스레 헤어졌던 사람들이 재회하여 지난 사정을 비로소 이해하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만나던 순간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함께 있는 순간이 소중함을 말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곁에서 서로를 지킬 수 있을 때 서로의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면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 앞에 후회가 찾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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