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인식론적 구도는 독일 이념론자들의 형이상학적 구도로 전환된다. 세계를 "절대이성의 자기전개", ‘절대자의 자기반성"으로 보는 식의,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그래서 반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들의 사유는 이런 구도를 염두에 두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유한지성은 무한지성이 못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선은 없으며,
유한지성은 무한지성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면서 점차 스스로를 무한지성, ‘신의 관점‘, ‘예지적 직관‘의 차원으로 수렴시켜갈 수 있다. 이것은 곧 정신-속성이 주인공으로 등극한 스피노자주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 P510

의 주체/이성이 거의 극한으로 위대한 뉘앙스를 부여받고 있는 장면을 목도한다. - P511

피히테에게 객체는 주체(경험적 주체) 바깥에 있는것이 아니라 주객을 동시에 근거 짓고 있는 주체(선험적 주체) 안에 있다.

피히테는 자신이 도달한 이와 같은 자아, 즉 자기의식을 통한 자기반성의행위 -사행(事行/Tathandlung)를 통해 존립하는 자아를 자유로서의 자아로 파악했다.
이로써 곧 데카르트의 ‘코기토‘와칸트의 ‘선험적 주체‘는 피히테의 ‘자유로서의 자아‘ 또는 ‘사행으로서의, 나‘로 변형된다. 피히테는 이 ‘사행으로서의 나‘가 전통 학문의 토대인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며, 이 원리들을 정초해준다고 보았다. - P516

헤겔은 진리란 단지 실체일 뿐먼 아니라 주체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살아 있는 실체는, 오로지 그것이 스스로를 정립하는 운동인 한에서, 또는 타자화를 매개하는 가운데에서도 스스로임을 놓지 않는 존재인 한에서, 진정으로 주체인존재 또는 달리 말해 진정으로 현실적인/현동적인 존재이다. 주체로서의 실체는 순수하게 단적인 부정성이며, 바로 그렇기에 단순한/미분화된 것의 이분(分) 과정이자 대립자들을 낳는 이중화 과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기해서 서로 맞서는 다자(多者)는 다시금 부정된다. 살아 있는 실체는 근원적인 일자 자체 또는 매개되지 않은 일자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자기에로 복귀하는 동일자또는 타자에게서 스스로를 되비추어 - 봄이다. 그것은 자체로써의 생성이며, 자신의종점을 자신의 목표로 전제하고 그것(종점)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목적론적인) 원환이며, 따라서 오직 실현됨으로써만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는 목적에 의해서만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PG, 18) - P533

셸링은 말년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사변 자체에 회의를 느낀 듯하다. 그는 (헤겔을 겨냥해) 개념으로만 하는 철학, 거대한 체계 구축이 보여주는 건축미는 있을지언정 현실성이 결여된 철학을 ‘부정철학/소극철학‘이라 칭하고, 이에 대비적으로 ‘긍정철학/적극철학/실증철학‘을 제시한다. 셸링이
"negativ"에 대립시켜 제시한 이 "positiv"라는 개념/가치는 19세기 철학, 나아가 19세기 문명 전체를 특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위상을갖는다.145) 셸링은 독일 이념론에 의해 전개되어 온 사변철학을 경험론적정향으로 되돌리려 했으며, 적극철학을 통해 ‘실존‘과 ‘현실성‘을 사유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셸링이 추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때까지 행해온 형이상학적 사유를 경험론적 정향에 입각해 계속하는 것이지, 이전의경험주의나 유물론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P571

근대 서구 인식론은 동시대 동북아의 인식론보다 훨씬역동적이고 치밀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동북아의 경우 근대 학문은 인문과학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사물들과 문헌들을 탐구하는 경험주의적 학문이었다. 그리고 이 학문의 정초로서 새로운 근대적인 주체의 개념화가 있었고, 최한기에 이르러서는 이 주체를 신기를 내포한 형이상학적 주체로까지 고양했다. 이런 과정은 대체적으로 연속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수학적 물리학이라는 합리주의적 과학과 근대의 새로운 흐름으로 나타난 경험주의 사이에 인식론적 분열증이 있었다. 우리는 로크에게서 이런 분열증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다양한 갈래의 모색들을 거쳐 칸트에 의해 이 분열증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았다. 그리고 칸트 사유에 존재하는 다원성을 극복하려 한 일원성의 사유들이 이어졌다. 서구 철학은 이렇게 인식론적 분열증을 앓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P5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말 날이 좋은 계절이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는 외투를 걸치고 낮에는 외투를 벗고 돌아다녀도 되는 정도의 날씨!

이 정도가 개인적으로 딱 좋아서 좀 더 오래 유지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조금만 지나면 낮에도 스산한 바람이 불테니 지금을 즐겨보려고 한다.


필라테스는 어느덧 선생님과 6번의 수업을 했다

왜 매번 근육통은 생기는지... 나의 몸뚱이를 한탄한다.

처음에는 소심하고 민망해서 선생님과 잘 이야기못하다가 이제는 힘들기도 하고 아파서 엄살을 부렸더니 엄살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운동은 몇 번을 해도 힘들고 몇 년을 해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 아니겠는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귀찮아도 해야 하는 일 말이다.

1만큼을 투자했는데 10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빨리 얻으려 할수록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자신을 옭아매서는 안 되겠다. 



오랜만에 북펀드로 책을 주문했다. <그들도 있었다 - 한국 근현대 미술을 만든 여성들>(총 2권 시리즈) 이다.

막판까지 살까 말까 고민했지만 한국 근대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이름은 익숙해도 현대 시기는 많이 알지 못하므로 주문하기로 했다.

받아보니 도판을 실을 정도로 책 사이즈가 규모가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모르는 미술가들이 허다하다. 향후에는 참고용으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근데 책 제목은 이게 최선이었나? 좀 아쉽다. 좀 더 주목할 만한 책 제목이면 좋았지 않았을까.






<세계 끝의 버섯>은 도서관 상호대차로 신청해서 오늘 오전에 간만에 도서관에 가서 받아왔다. 

요새 심신이 많이 피곤하여 읽을까 고민했는데 오늘 1부를 읽어보고 읽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보편이라 자처하는 시선에서 계속 다르게 바라보려고 노력 중인데 그 선에 맞닿아 있는 책이다.

그동안 읽어왔던 많은 책들이 도움이 되었는데(도나 해러웨이, 발터 벤야민 등등...의 저작)... 적어도 개념이 이해가 안 되서 도움이 안 되는 일은 없었던 면에서 그렇다.

미국 오리건주의 송로버섯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 이상으로 재밌어서 놀랐다. 송로버섯은 교란된 숲에서만 산다고 한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야 하는 것에 익숙한, 개발과 진보에 목적을 두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점을 던질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불확정성을 견디지 못하는 내게도 개인적으로 많은 지침을 줄 듯하다.






그리고 며칠째 <세계철학사 3>을 읽고 있다. 근대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쉽지 않은 개념들로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시간 날때마다 조금씩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칸트 부분을 읽었다. 그의 도덕적 인식론은 그나마 이해가 될 만했는데(정언명령... 예전부터 많이 들어와서 그런 것인가) 감성, 오성, 사변이성을 다룬 원리를 이해하는 일은 너무 난해했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한강 작가였다.

어제 일로 정신이 없다가 소식을 접하고 서재와 북플에 들어와보니 온통 한강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국 현대 소설은 아직 많이 읽어보지 못한 데다가 한강 작가는 작년에서야 겨우 <소년이 온다>를 읽었을 뿐이다.

읽기는 어려웠지만 작품 자체가 좋아서 기억에 남았다. 역사적 배경이 있었고 아무래도 5.18은 여전히 한국 정치계에서 여전히 정치화시키려 하고 문제시화하여 바라보려는 시각이 있지 않나.

당분간 한강 작가 책을 종이책으로 사기는 어려울 것 같아 원서로 읽자 싶어 킨들로 <채식주의자>와 <희랍어 시간>을 샀다. 독해가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읽어보자 생각하고 있다.

이 기회에 한강 작가의 많은 작품이 읽히게 되었으니 기쁘게 생각한다.







덧) 

아버지를 걱정해주신 많은 친구 분들 감사합니다. 어제까지 3차 항암 치료가 끝났고 회복 중이세요. 다행히 수치가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마음 써주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4-10-13 08: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아버님 잘 회복 중이시라니 다행입니다!! 가족분들도 많이 힘드셨을텐데..최근 주변에 항암소식이 많지만 그래도 치료가 잘 되더라고요. 참 다행입니다.
필라테스 하시는군요. 자기와의 싸움 응원합니다 ㅎㅎ 무쇠소녀단 보면 운동하고 싶어져요!

거리의화가 2024-10-15 11:11   좋아요 1 | URL
괭 님 마음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암이 치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재발했다고 해서 속상함이 컸는데 이제는 덤덤해졌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들이 안절부절이었죠^^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운동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이왕 돈을 투자했으니 운동에 습관이 붙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무쇠인간이 되는 그날까지!ㅋㅋ

새파랑 2024-10-13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님께서 항암치료 중이시군요 완쾌를 기원합니다. 한강작가님 정말 대단한것 같습니다. 전 <희랍어시간> 1픽!

예전에 <작별하지 않는다> 읽고 이게 뭐지? 했던 저를 반성합니다 ㅜㅜ

거리의화가 2024-10-15 11:16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 얼마만입니까^^ 무척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네요. 아버지의 쾌유를 빌어주신 점도 감사합니다.
한강 작가 소식 듣고 저도 굉장히 기분이 좋더라구요. 아시아 여성 작가로 첫 수상이라니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일을 이루셨습니다. <희랍어 시간>은 프롤로그 내용을 보고 이거 괜찮다 싶어 저도 찜해놨어요. 사실 <소년이 온다>는 읽어야만 할 이유가 있어서 읽었는데 나머지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감이 안 왔었거든요. <작별하지 않는다>도 시간이 되면 읽어보려구요. 저는 일단 <채식주의자>와 <희랍어 시간>부터 읽게 될 것 같습니다.

희선 2024-10-16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월 왔을 때는 좀 춥기도 했는데, 며칠만 그랬네요 다행이죠 낮엔 조금 더운 날도 있어요 여름하고는 다르지만... 걸어서 더운 걸지도 모르겠네요

운동 앞으로 하시면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조금씩 천천히 하시기 바랍니다 아버님 항암 치료 끝나셨군요 앞으로도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10-16 08:41   좋아요 1 | URL
희선 님 이번주 지나고 나면 기온이 많이 떨어지더군요. 이후에는 낮에도 선선해질 것 같습니다.
운동은 한다고는 하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집에 오면 퍼져 있고 복습도 잘 안하고ㅜㅜ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지만 계속 꾸준히 해보려고 합니다.
희선 님 여전히 걸으시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걷는 시간이 도움이 되어서요. 희선 님께도 그 시간이 비움이자 충전의 시간이 되길 소망할게요^^
 
그들도 있었다 1~2 세트 - 전2권 - 한국 근현대 미술을 만든 여성들 그들도 있었다
윤난지 외 지음, 현대미술포럼 기획 / 나무연필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근대 시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국 여성 미술가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만날 수 있어 선택했다. 이제는 이름이 제법 알려진 몇몇 미술가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생소해서 무척 기대된다. 각 미술가의 미술 세계에 대한 설명과 작품 도판이 들어 있어 참고용으로도 유용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외는 생활공간의 얽힘을 배제한다. 소외시키려는 [자본주의의] 꿈은 단 하나의 독립형 자산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풍경을 변화시킨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잡초나 쓰레기가 된다. 이런 곳에서 생활공간의 얽힘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비효율적이고, 어쩌면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단일 자산을 더 생산하지 못하면 그 장소는 버려진다. 나무는 베인다. 석유는 고갈된다. 작물은 - P29

플랜테이션 농장 토양에서 더는 자라지 않는다. 자산을 탐색하는일이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소외가 이루어지면서경은 단순화되고, 단순화된 풍경은 자산 생산 후 유기된 공간, 즉폐허로 변한다.
오늘날 전 지구적 풍경은 온통 이 같은 폐허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생명이 다했다고 여겨지는 이런 장소들도 여전히 생기 넘치는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버려진 자산 들판asset fields은 종종 새로운 다종과 다문화의 삶을 생산한다. 전 지구적으로 불안정성이 나타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러한 폐허에서 생명을찾는 일밖에 없다. - P30

하나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여러 생물종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서로를 방해하고 (혹은 먹고) 어떤 것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또 어떤 것은 자신들이 같은 장소에 있음을 이제 막 우연히 알게 됐다.
배치는 열린 모임 gathering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편견 없이 공동의영향에 대해 물을 수 있고, 형성 중인 잠재적 역사를 볼 수 있다. - P56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오염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에 따라 마주침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오염을 통해 세계-만들기 프로젝트가변화하면 상호적인 세계와 새로운 방향이 창발할 수도 있다. - P63

불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는 것은, 확장성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풍경과 사회를 변형시켜온 방식을 이해함과동시에 한편으로는 확장성이 실패하는 지점, 그리고 확장성 없는생태적, 경제적 관계가 분출하는 지점을 응시해야 한다는 점에서도전적인 일이다. 확장성과 비확장성 양쪽 모두가 이뤄놓은 결과에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확장성은 나쁘고 비확장성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확장성 없는 프로젝트도 확장성있는 프로젝트만큼이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규제받지 않고 일하는 벌목꾼들은 과학적인 산림감독관보다 더욱 빠르게 숲을 파괴한다. 확장성 있는 프로젝트와 확장성 없는 프로젝트를 가 - P89

르는 주요한 특징은 윤리적 행동 여하가 아니다. 확장성 없는 프로젝트는 팽창할 채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다채로운 양상을띠지만, 그것 역시 무해한 것부터 끔찍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범위에 걸쳐 있다. - P90

송이버섯은 심하게 교란된 숲에서만 자란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일본 중부에서 짝을 이루며 서식하는데, 둘 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행해진 곳에서만 자란다. 정말이지 전 세계적으로 봐도 송이버섯은 가장 많이 교란된유형의 숲과 관련이 있다. 빙하, 화산, 모래언덕또는 인간의 행위ㅡ때문에 다른 나무와 심지어는 유기질 토양까지 없어져버린 장소 말이다. 내가 거닐었던 오리건주 중부의 부석 지대는 한편으로는 송이버섯이 잘 서식하는 전형적인 땅이자 대부분의 식물과 여타 곰팡이는 자랄 수 없는 땅이다. 마주침의 불확정성은 이렇게빈곤한 풍경에서 어렴풋이 나타난다. - P1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북아 사회에 다양한 형태의 변화가 몰아치고 ‘有‘의 새로운 방식들이도래했을 때, ‘‘가 그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폭주하기 시작했을 때, 성리학은 리로써 그것을 통어할 수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기 자체를 사유하고 기자체에 시대의 도를 내장시키는 작업이었다. 동북아의 근대는 서경덕, 왕부지, 대진, 최한기 등으로 이어지는 기학의 시대였다. 기의 결정적인 성격은그것이 유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무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는도에 대해서는 유이지만 ‘物‘에 대해서는 무이다. 기학은 성리학에 대해서는 ‘‘의 학문이지만, 사실은 ‘物‘에 대해서는 ‘허‘의 학문인 것이다.

이 점은 주체론에 관련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을 주체로 보고, 주체의 의지, 선택, 책임을 강조했던 정약용의 사유는 끊임없이 비울 것을 역설했던 기존의 허의 사유가 아니라 근대적인 실의 사유이다. 그러나 그는 실의 학문, 통어되지 않는 기의 학문이 띨 수 있는 위험을 정확히 감지했다.
그 때문에 동물의 기와 인간의 기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인간의 기에 도의새로운 뉘앙스에서의 ‘도‘을 내장케 한 것이다. - P397

로크의 사유는 그 초점을 경험에 맞추고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상세하게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붓다의 철학함과 통한다. 정밀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온(五蘊) 즉 색(色)・수(受)・상(想). 행(行)・식()은각각 대상(object), 지각(perception), 감응(affection), 행동(action), 마음(mind)에해당한다. 분석의 구도는 곧 색/대상과 식/마음을 양극에 세우고 그 사이에서 수/지각, 상/감응, 행/행동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구도는 로크와 붓다에 국한되지 않는, 철학사를 관류하는 일반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붓다 사유의 목적이 오온이 결국 공이라는 것(五蘊皆空)을 깨달아 해탈하는 데 있었다면, 로크의 사유는 ‘마음‘이라는 우주의 구조와 기능을 탐색하고(인식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한 토대 (정치철학)를 놓는 것, 궁극적으로는 근대적 인간상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붓다의 사유가 불교를 낳았다면, 로크의 사유는 경험주의 인식론·인성론과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낳았다. - P401

흄의 사유가 가져온 가장 심오한 결과는 인간의 삶은 어떤 형이상학적 진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에 입각해서 영위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 데 있다. 이 점에서 흄은 근대적인 ‘주체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진수한 인물이다. 그는 이론적 탐구를 통해 세계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진리"의 인식을 왜 포기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진리"에 잔뜩 들어간 힘을 왜 빼야 하는지를 역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써 그는 사유의 무게중심을 자연철학/형이상학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이해즉 인성론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흄의 이런 경험주의 정신은 인성론 자체 내에서도 다시 한 번 발휘된다. 흄은 사유의 무게중심을 인간 그 자신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해 자체를 실체론적 인간관에서 관계론적 인간관으로 옮긴 것이다. - P426

위대한 자연이 인간에게 준 두 가지 보물이 있다. 자기에 대한 사랑즉자기애(amour de soi)와 타자에 대한 사랑즉 자애심(慈心) 맹자가 역설한
‘人心‘이다. 생명/삶에 대한 사랑이 자연이 인간에게 준 원초적은총이다. 루소는 ‘원죄‘ 개념을 거부하면서, 삶의 근저에 자기애를 놓는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점차 변한다. 자기애는 이기심(amour propre)으로, 자애심은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삶은점차 경쟁과 질시의 도가니로 화한다. 루소는 이 과정을 한 인간에게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 전체에서도 확인한다. 때문에 그는 자연과 문명을강렬하게 대비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 P439

주체는 사물들과 타인들을, 세계 전체를 객관적 상황으로 해서 그것을 겪어나간다. 즉, ‘經驗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객관이 주체에 그대로 새겨지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주체의 경험은 일정한 선험적 조건을 전제하는 경험이다. 이 선험적 조건에 주안점을 두어 이해한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경험적 주체와 선험적 주체는 구분되며, 이런 관계는 특히 영국 경험론자들과 칸트사이의 차이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P447

칸트의 인식론과 윤리학은 결국 ‘이성‘에 대한 새로운 음미에 기초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식론과의 관계에서 볼 때, 칸트가 행한 이성 비판은 과학적 사유의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정립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당대까지 이루어진 과학적 사유를 정초하려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그 너머의 여지를 마련하려는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한편으로 이성에 무제한의 권리를 부여했던 전기계몽주의자들과도 다르고, 이성을 단적으로 비판했던 사람들 신앙을주장하려는 속셈을 품고서 이성을 비판했던 사람들(하만, 야코비 등) 그리고도덕적 차원의 수립을 목적하지 않으면서 단적인 이성 비판을 진행하려 했던 회의주의자들과도 달랐다. - P491

칸트 사유는 중요한 문제를 남기게 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남긴 문제와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인식론과 도덕형이상학,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기계론의 세계와 목적론의 세계, 오성과 사변이성, 현상계와 본체계의 이원론은 ‘두 세계‘ 사이의 심각한 간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
‘기 때문이다. - P493

칸트는 매개자를 둠으로써 양자를 연결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인식능력과 소망능력 사이에 쾌/불쾌의 능력(감정)을, 인식론과 도덕형이상학 사이에 생명철학과 미학)을, 물질과 정신 사이에 생명과미)을,
자연과 자유 사이에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을, 오성과 사변이성 사이 ‘판단력‘을,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에 양자를 이어주는 역사의 차원을 설정해 자신의 사유체계에 통일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 P4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