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세계의 경우 자연철학이 기저를 이루었고 때문에 인문 현상들도 ‘지스‘로 환원해서 설명코자했다면 (그 극한은 원자론이다), 동북아세계의 경우 인문학이 기저를 이루었기 때문에 자연 현상들도 그 의미에 기반을 두고서 해석되었다. 그런 만큼이 문명에서 자연(天地)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의미로서의 자연이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이면에서 어떤 본질을읽어내려 했고, 이 본질은 ‘실재‘였다. 반면 동북아의 ‘무‘ 등은 자연 현상에서 인간적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읽어내려 한 것이다. 전자의경우 자연 현상 저편으로 넘어가 실재를 찾았고, 후자의 경우 자연 현상이편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려 했다. - P33

지중해세계와 지리적 구조는 전혀 달랐지만, 고대 동북아세계 역시 무수한 이민족들이 명멸한 공간이었다. ‘중국‘의 역사가 마치 어떤 공동의 틀 내에서 성씨들만 교체되어간 역사라고 보는 것은 훗날 중원 대륙을 차지한 사람들이 사후적으로 구성한 역사일 뿐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ㅡ를 정립하고 하·은·주 삼대에 연속성을 부여했다. 아울러염제와 치우 등을 악역으로 배치함으로써 동북아의 역사를 일종의 선/악의 구도로, 정통/이단의 구도로 정립했다. 이렇게 본래 극히 이질적이고 역동적이었던 역사를 추후에 매끄럽게 재단하고, 또 선/악, 정통/이단의 구도로 구성해냄으로써 비로소 "중국"이라는 하나의 동일성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바로 『서경』이 이미 이러한 재구성의 원형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상고 시대를 논할 때, 우리는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동일성 아래로 내려가 다채롭고 역동적인 차이생성을, 실제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동북아 ‘중원‘의 역사를 말할 수는 있어도 ‘중국‘이라는특정한 나라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중원의 역사는 다양한종족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만들어낸 역사일 뿐이다. - P54

그리스 자연철학과 동북아 역학의 차이는 다음 인용문에 특히종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성인이 ‘괘‘를 긋고 ‘상‘을 관찰해 ‘사‘를 걺으로써 길함과 흉함을 밝히려 했다. 강함과 유함이 서로 밀어 (剛柔相推) 변화가 생겨나니, 그로써 길함과 흉함은 얻고 잃음의 상이요, 후회와 부끄러움(悔)은 안타까움과 짓눌림 (憂)의 상이요, 변함과 화함은 나아감과 물러남의 상이요, 강함과 유함은 낮과 밤의 상이다. 6효의 변화가 하늘·땅· 사람의 길(三極之道)을 세운다.
하여 군자는 ‘역‘의 배열에 입각해 편안히 안거할 수 있으며, 효사를 읽음으로써 즐 - P127

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군자가 거할 때는 ‘상‘을 보고 ‘사‘를 즐기지만 동할 때에는 ‘변‘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그를 도우니 이롭지 않음이 있겠는가"라 한 것이다.(「사전 상」, 2장) - P128

동북아의 세계는 ‘작(作)‘의 세계가 아니라 ‘생(生)‘의 세계이다. 따라서 조물주 개념은 탈각된다. 역학에도 기학에도 조물주의 개념은 없다. 동북아에도 ‘신‘들은 있지만, 이들은 세계에 내재적 - P186

이다. 또, 이 ‘생‘의 사유에서 설계도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기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서만이 인정된다. 이 때문에 기에 구현되는 선험적 질서로서의 이데아 개념 또한 없다. 다만 기 안에 잠재해 있고 기가 특정한 물(物)로서 개별화될 때 비로소 확인되는 내재적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기의세계는 코라의 세계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경우 코라의 의미는 현저하게바뀐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물질성, 생명성, 정신성을 내함(含)하고 있는 유일의 실체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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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8-05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멋져요!! 거리의화가님 완전 신세계 펼쳐집니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근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8-05 16:18   좋아요 1 | URL
동양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니 역시 ‘주역‘을 알지 않고서는 어렵더군요. 이 책 주역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4-08-11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주역 읽고 공부하려고 시도하다가 금세 포기했는데 거리의화가 님, 화이팅 입니다. 빠샤!!

거리의화가 2024-08-11 17:05   좋아요 0 | URL
주역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더라구요. 저도 예전에 중국철학서 읽을 때 주역이 나왔었는데 너무 어려웠었거든요. 주역은 해석서가 꼭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7 - 1990년대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주의적 각성 한국 여성문학 선집 7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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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시리즈 읽고 쓰기, 드디어 마지막 권까지 왔다. 1990년대의 시간은 내게도 기억이 비교적 뚜렷한지라 작품의 배경이 익숙한 것이 많았다. 당시 좋았던 시간도 있고 힘들고 아팠던 시간도 있었으나 어쨌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읽으며 뭉클했는데 추억 거리가 이제는 실물로 만날 수 없는,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는 안타까움이 일어서가 아닐까 싶다. 


1990년대 여성문학은 여성을 고립과 침묵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여성의 말해지지 않은 욕망과 가치를 복원함으로써 광장과 방의 부당한 분리에 맞서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작업은 한편에서는 1980년대 운동권 문학을 여성주의적 개입과 성찰을 통해 바라보며 성 평등이 병행되지 않은 민주화는 여성을 주변화시키는 가부장적 기획의 연장이라는 점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금기와 제도적 억압에 가로막힌 여성들의 욕망과 열정을 드러내어 여성의 자유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 P17


1990년대는 군부 독재가 사라지고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억눌렸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폭발하듯 분출하기 시작한 시기다. X세대, 오렌지족 등이 등장해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인다.’를 표방하며 과거와는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1980년대 강렬했던 민중 분노에 의한 서사와 문학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로 나뉘어져 있던 세계에서 한 축이 무너지면서 동력을 일부 상실했다. 1980년대 노동 현장이나 집회에 뛰어든 여성들은 남성 노동자를 비롯한 활동가와 함께 연대하며 평등을 꿈꾸었지만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90년대 들어오면 자유주의 체제 하에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되며 집단의 힘은 무너지고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악조건에 부딪치게 된다. 이 때 ‘여성들의 자유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가 이 시기 문학의 주안점이 되겠다.


1990년대 초까지는 1980년대의 민중 운동에 대한 성찰과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에서 쓰여진 글들이 여전히 많이 발표되었다. 


최윤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어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소설을 통해 역사적 비극과 고통을 재현한다. 

5.18 때 엄마를 잃은 딸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엄마는 오빠가 사망한 뒤 정신줄을 놓은 것이다. 역사적 비극 앞에 한 가정은 이리 쉽게 무너진다. 선택할 수 없는 비극이 인간을 더 비극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지… 기억은 쉽게 잊힐지 모르지만 글 속에 재현된 장은 이를 다시 생생한 사건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한다. 


마침내 나는 엄마 손목을 양손으로 꼭 쥐고 놓지 않았지. 그리고 엄마는 미친 학처럼 춤추러 갔어. 사람들의, 함성의, 냄새의 홍수에 실려 그 물살에 뼈가 녹을 때까지 나도 물살에 섞였지. 점점 더 물살이 높아졌어. 사방에 소리와 높은 벽이 앞으로 앞으로 나를 운반했어. 엄마는 내 손을 으스러지게 움켜잡고 내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가는 밀물처럼 밀려오곤 했어. … 내 머리 뒤에서 합창하는 수많은 얼굴들.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들. - P134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혹독하게 생생한 사건이 된다. 죽음은 대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완성되어야 할 것의 미완성이기 때문에. - P139


최영미는 1980년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1994년 발표했다. 여성이 노동 운동에 뛰어든 경우 운동은 운동대로 하지만 집안일과 돌봄은 이어졌을 것이다. 운동가나 투쟁가의 남편을 둔 여성이었다면 그를 위한 뒷바라지가 필요했을 테고 말이다. 투쟁가 뒤에는 여성들이 있는데 이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한다. 늘 한 편에는 여성의 전폭적인 노력이 숨어 있음을.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채익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P413


1990년대 여성 문학에는 가부장 가족제도에 도전하고 홀로 길을 떠난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다. 


공지영은 학생 운동 및 구로공단에서 활동가로 생활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현장 경력을 쌓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자신과 비슷한) 운동권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가부장 제도에 얽매이자 진보적 기치와는 다르게 불합리한 현실에 처하게 되는 위태로운 상황을 담은 소설이다. 모성을 강요당하고 가정 주부 역할을 (판타지를) 강요받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넌 결국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 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에 불과했던 거야.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었다면 그 누군가가 다가오기 전에 스스로 행복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재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모욕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녀 자신의 말대로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아야 했다. - P525~526


공선옥은 5.18 때 민주화를 경험했다. 이후 전남대에 들어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퇴하고 20대 초반에 시민군이었던 남자와 결혼했다 이혼을 했다고. 아이들과 함께 상경해 미싱사로 일하다가 원고료가 좀 더 높아 소설을 쓰게 되었단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경험이 그의 소설의 재료들이 되었다. 


<목마른 계절>에는 영구 임대 아파트를 배경으로 이웃 사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은 몇 대 없고 화물차들이 가득하여 새벽마다 발차하는 소리로 소음 전쟁이 벌어진다. (‘나는 나는 저팔계. 왜 나를 싫어하냐아~’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그 때 만화 본다고 부모님 눈치를 봤던 기억도 나고.) 

아파트 공터를 비롯한 놀이터에는 하교 후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온다. 어릴 때 아파트에 두 차례 살았는데 한 번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나고 다른 한 번은 아파트 공터에서 아이들과 고무줄 놀이, 땅따먹기 등을 하던 기억 때문인지 그 장면만 스냅샷처럼 남아 있다. 

비록 아파트였지만 지금의 아파트 문화와 달리 이웃 사촌이라는 개념이 그 때만 해도 존재했던 것 같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카페 장사를 하는 이웃 사촌의 아이를 대신 맡아서 돌보아 주는 ‘나’가 있다. 한 사람은 소설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카페 주인인데 둘 다 이혼녀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고,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나온다. 모두 다 그 시절 이야기인 것 같지만 여전히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을 이야기다. 


목이 말랐다. 속쓰림과 동시에 갈증이 한꺼번에 덮쳐 와 죽을 것만 같았다. … 물 주전자를 기세도 좋게 기울였다. 냉장고에도 물은 없었다. 끓인 물은 아무 데도 없어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이상했다. 수도꼭지에 힘이 없다. 가르륵가르륵, 수도꼭지 속에서 가래 끓는 소리만 난다. … 제한 급수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가뭄이라 하였다. 수원지의 물이 모자라서 격일제 급수를 하는데… - P501

“옘병. 죽을 각오로 살자 그거여. 누구 좋으라고 죽냐 죽기를.” - P513


전경린은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작가로 등단했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필명은 전혜린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염소를 모는 여자>에는 여러 명의 친구들이 나온다. 나는 3달 전부터 어떤 남자가 염소를 4일 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건 남자는 염소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마치 영혼의 단짝처럼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염소가 어떻게 될 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변에는 그런 그를 정신병이 있다 이야기하지만. 권태와 냉담 속에 결혼 생활을 하던 나는 남편이 이웃 사무실 여자와 노닥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애써 무시해왔다.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 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리고 하나씩 둘씩 아이를 낳고 남자는 처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해 하면서 툴툴거리고, 그 닭장 안에서 멀쩡한 여자 하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오 년씩 십 년씩 매달리고…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깨어나 보면 발이 뻣뻣하게 굳어 영영 걸어 나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 P431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아름다움은 형태가 아니라 본질에 있다. 당신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비로소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벗어날 용기를 얻는다. 수영을 배울 때 물을 먹는 것을 결심해야 하는 것처럼 변하기 위해서는 한 발을 내딛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소설은 <바리-길 위에서>다. 소설을 쓴 작가는 송경아인데 전산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국문학과 대학원을 가셨다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전산학과를 나오셨다는 부분에서 이미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는데 실제로 쓴 작품들이 SF, 판타지, 장르문학 쪽이 많다. 2000년대에는 진보계 쪽에서 정치 활동도 하셨다고 해서 참 다양한 활동을 하셨구나 싶었다. 지금보다 SF라는 장르가 훨씬 낯설었을 1990년대에 이미 그런 글을 쓰기 시작하여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 드는 다양한 글을 써 오셨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바리야. 세계가 멸망하는 원인에 나는 나름대로 두 가지 가설을 세워 봤어. 이 세계, 이 시스템에 어쩌면 레지스탕스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그 하나지. 그 레지스탕스들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연산에 오류를 범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야. … 또 하나는 이 세계, 이 우주, 이 시스템, 네가 무어라고 불러도 좋은데, 하여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이곳이 처음부터 잘못된 프로그램이었다는 거야. 혼란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고 혼란의 정도가 점점 가중되도록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 P701~702

넌 다른 개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 있어. 호기심과 지적 욕구지. 호기심과 지적 욕구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라. 호기심은 어떤 사건, 우연히 일어나는 어떤 사고들에 대한 관심이지. … 지적 욕구를 가진 개체들은 자기 자신을 확장할 줄 알아. 그들은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물 뒤에 있는 의미를 바라볼 줄 알아. 바라보려고 노력해. … 한 사람이 자신의 왕국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도 몰라. ... 난 네가 그런 경지에 도달했으면 좋겠어. - P703


바리를 비롯한 7명의 자매가 있다. 불라국은 잉여, 부족도 아닌 아름다운 곳이라 바리는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언니들은 불라국이 병에 걸렸다 생각한다. 서천 서역국은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는 곳이라는데. 나는 성선설보다 성악설을 믿는 지라 인간은 원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선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세계도 원래부터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작가님의 SF 세계는 지금 보면 전혀 가상 세계 같지 않다. 초기 SF작이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 Data-flow, 서브루틴, 테스터, 포인터, dummy, 변수/상수, 프로그램, 에러, 시스템, garbage, 패킷, 부동소수, 프레임, 패리티 검사, 매개 변수 등 내가 평소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소설에 등장하여 읽을 때마다 반갑기도 하고 피식거리기도 하면서 읽었다. 자매들은 계속해서 모험을 떠날 것이다. 


근 3주 정도의 시간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읽으면서 올 여름의 일부를 의미 있게 보냈다. 선집을 통해서 많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소중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종종 꺼내어 읽어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심 가는 작가는 나중에 깊게 파 들어가기도 하고 말이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에 독자로서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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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8-05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다… 화가님.. 멋져요 😭

거리의화가 2024-08-05 16:20   좋아요 1 | URL
쟝 님 오셨군요^^ 이 시리즈 쟝 님도 반할 만한 컨텐츠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유튜브 컨텐츠 다시 올려주셔서 넘 좋아요. 저 어제 솔닛 부분 듣고 녹아내리는줄요!ㅎㅎ 무더운 여름이지만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공쟝쟝 2024-08-06 11:12   좋아요 1 | URL
... 제가 반한 것은 화가님의 독서력입니다....!!.....
읽기로 한 걸 읽어버리시는 이 능력이........... 넘 부럽지 말입니다.......... 3주만에.... ㅜㅜ 아..... 저는 사놓고 뜯지도 않고 있습니다... ㅜㅜ 읽게 되면 다시 글 읽으러 올게여 ㅋㅋ
허... 제가 인용해 오신 공선옥 작가를 좋아한답니다...!?! (나 아는 작가 한명 나옴ㅋㅋㅋ)

유튜브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본 소득은 너무 먼 일이라 노동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동 수익화를 만들수 있는 유명(과연?)인이 되서 한가한 독자로 활약하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8-08 08:42   좋아요 1 | URL
펀딩 100자평을 안 읽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에는 읽고 쓰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사두고 안 읽으면 결국 시간이 지나가서 흐지부지되는 것도 있고^^;
덕분에 저도 전체적으로 한국 여성 문학을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쟝님 유튜브는 점점 번창하리라 믿습니다. 컨텐츠 양도 그렇지만 컨텐츠를 질적으로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도 중요하더라고요.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

자목련 2024-08-08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멋지고 멋진 화가 님!!
이번에는 아는 작가가 나와서 더 반갑고요 ㅎ
덕분에 저도 이 시리즈를 읽은(?)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 2024-08-08 08:37   좋아요 0 | URL
90년대라 역시 친숙한 작가들이 많죠^^ 저와 무관하지 않은 시대라 배경도 익숙해서 더 읽기 편한 것도 있었고요.
ㅎㅎ 계속 열심히 읽여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지난 한달은 장마와 함께 수증기가 밀려와 빨래를 해도 도무지 마르지 않는 나날이었다(건조기를 쓰지 않는데 이제는 정말 사야 하나 싶다ㅜㅜ). 


어김 없이 지난 달 읽은 책들을 정리해본다. 




일단 <한국 여성문학 선집> 시리즈(총 7권)가 있다. 어제까지 마지막 권 읽고 시리즈 완독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리뷰가 계속 밀려 있어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래도 며칠 안에는 읽고 마무리가 될 것 같다.

한국 여성 문학의 역사는 근현대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획 덕분에 개인적으로 새롭게 알게 된 작가들이 많아져서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수록된 작품들이 문학 중 소설 장르에만 치우치지 않고 시, 희곡 등도 담겨 있다. 게다가 문학 만이 아닌 연설문이나 비평문, 좌담회 발췌 등도 실려 있다. 문학은 간접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드러낸다면, 비문학은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서 다른 맛이 있다. 독자가 어느 장르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골라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선집의 묘미가 아닐런지.

기억에 남는 작가들이 있다면 근대 시기에는 김일엽, 지하련, 박화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현대 시기는 최정희, 김자림, 박완서, 박경리, 정복근, 김승희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추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다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만 한국 역사를 재구성하는 보충재로서도 톡톡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마드>는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 고대부터 현재까지 유목 생활을 하던 이들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책이었다. 특정 지역을 오간 역사를 기술하되 고대 같은 경우 신화를 풀어 놓아 흥미를 돋우고 중세 이후에는 여행자들의 기록이나 역사서 등 관련 책을 기술하여 입체적인 역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농경과 정주가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관점에서 어느새 유목 등 '이동'도 다르거나 비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책들이 과거보다 확연히 많아졌다. 기준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일은 이제 더는 유효하지도 않다. 다르게 볼 수 있는 감각을 역사서를 통해서도 이제는 경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12.12>은 재판본이다. 초판본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을 받을 무렵 나왔다. 이번 재판본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12.12의 배경과 결과 후의 역사까지 담아 놓았기 때문에 관련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사전-사후 지식까지 채울 수 있는 선물 같은 기획이 아닌가 싶다. 나 같은 경우도 12.12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나 경과 과정을 잘은 몰랐기에 많은 도움을 얻었다. 책을 보고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더니 화룡점정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책을 보아도 정리하는 측면에서 좋을 것 같다.



<인생>은 위화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장편 소설로는 첫 작품으로 알고 있다. '푸구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중국 근현대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전쟁, 가난으로 힘겨웠던 푸구이의 삶에서 가족이란 자신을 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존재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든 홀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가족을 선택할 수 없어서 때론 맞지 않아 힘들고 삶에 부딪쳐서 힘들기도 하지만 가족 때문에 행복하고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담담하게 울리는 문장을 얻는 것은 덤이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한국의 여성주의와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 사례 등이 쏙쏙 이해되어서 참 좋았다. 뒷 부분의 제주도의 사례가 특히 좋았는데 이런 책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임을 알고는 있으나 앞으로 여성주의를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나와주었으면 한다. 해외의 페미니즘 이론이나 대중서의 경우 번역을 해서 들어오기는 하지만 사례 등이 아무래도 외국 것이라 잘 와닿지 않아서 읽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으니.  


권 수로 따지니 11권이라 많아진 느낌인데 개인적으로는 쉬어 가는 한달 간의 책 읽기였다^^ 


지난 달부터 시작한 함달달 책 <Holes>는 읽고는 있는데 잘 감기지가 않아서 결국 완독을 못했다. 함달달 책으로 그나마 영어 공부를 진행하는데 뭐가 문제일까. 아무튼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성정상 아니라서 완독은 해보려고 한다. 




요즘 덥지만 먹기는 또 잘 먹는데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양이 줄어드니 살만 찌고 있다ㅎㅎㅎ 어제는 편육에 막걸리를 먹었다(왜 이리 맛있는지ㅠㅠ). 계속 흐린 날이 많아 사진을 한동안 찍지 않았다. 그러다 반짝 해가 나면 그때만 찍곤 한다. 더워도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이 역시 좋다^^








8월도 잘 살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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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8-02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의 꾸준한 읽기, 대단합니다.
더위를 핑계로 저는 게으른 여름입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의 리뷰 잘 읽고 있어요. 마지막 7권은 익숙한 작가가 보여 더욱 궁금합니다.
8월에도 건강하고 즐거운 날들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4-08-02 10:17   좋아요 2 | URL
자목련 님 무척 더운 여름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아무래도 쉽지 않은 책 읽기 계절입니다ㅋㅋ 선집 리뷰 잘 봐주고 계신다니 감사하고요.
무더위란 핑계로 계곡이나 바다로 가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뒹굴거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최소 열흘 정도는 폭염이 지속된다고 하는데 수분 섭취 잘하시고 건강 유의하시길 바라요^^

페크pek0501 2024-08-02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중 <인생>밖에 읽은 게 없도다...ㅋㅋ
다음달에 읽으신 책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지 기대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8-02 14:59   좋아요 2 | URL
ㅎㅎ 페크 님 인생 저도 계속 미루다 이번에 읽어봤어요^^ 위화 이후 작품도 계속 읽어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8월도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단발머리 2024-08-02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더운 날씨에 많이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님!
<한국 여성 문학 선집> 너무 부럽습니다. 저는 7권에 기가 팍 죽어서 ㅋㅋㅋㅋㅋ 시작도 못 하고 있어요.
겹치는 그 한 권, 매우 반갑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8-02 16:37   좋아요 1 | URL
이번 여름처럼 어디 잘 안 돌아다니고 집콕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름 휴가도 집에서 보내려고 생각 중이라... 7권이라 많아 보입니다만 막상 읽으면 잘 읽혀서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가더라고요^^
<한국의 여성과 남성> 얼마 전 올리신 글 봤습니다. 늘 좋은 귀감이 되어 주셔서 저도 보고 배우네요. 이번 달도 행복한 책 읽기 되시기를!

stella.K 2024-08-02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딴청인데 냉면 양이 너무 적은 것 같습니다.
냉면 값이 많이 비싸다던데 비싼만큼 양이라도 많으면.

저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읽고 싶긴한데 과연 읽을 수 있을지...ㅠ

거리의화가 2024-08-04 12:0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요새 냉면 양이 작더라고요? 도심에서 11,000원의 가격이면 싸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코다리 냉면이라 쫀득한 식감도 즐길 수 있었답니다.

스텔라 님 한 번에 읽기 힘드시면 특정 시기를 잡아서 한 권씩 독파해보시는 방법도 좋을 듯 하네요. 더운 여름 건강하게 나시길 기원합니다^^

다락방 2024-08-11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성정상 아니라서‘ 라니, ㅋ ㅑ -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성정인 것입니다!!

거리의화가 2024-08-11 17:06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ㅠㅠ 여행 다녀오시자마자 아프셔서 어째요. 얼른 건강 회복하세요!
ㅎㅎ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6 - 1980년대 운동으로서의 글쓰기 한국 여성문학 선집 6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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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광장에 선 주체로서의 여성이 역사의 증언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다. 1970년대 서서히 시작된 페미니즘적 시각이 주류 담론과 갈등 및 분열을 일으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정도까지가 ‘민족’이라는 의미가 가능했던 때가 아니었나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더 이상 ‘민족’이라는 명칭을 쓰기에는 낡은 개념이 되어 버린다. 

1980년대 여성들은 노동자, 민중적 주체로 많은 활동을 했다. 아무래도 5.18과 87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사건인 만큼 문학의 소재로 다양하게 쓰였다. 특히 5.18은 국가가 국민을 탄압한데다 많은 사상자를 낸 만큼 특히 많은 글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민중 문학이 활발했는데 여성 작가들이 어떤 특별함을 부여했는지 그것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당연히 이전 시기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여성의 시각을 드러낸 주제의 문학도 존재한다. 한국 문화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홍희담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광주 민주여성 단체인 송백회 활동을 하는 등 활동가적인 면모도 있다. 특히 <깃발>은 5.18 때 도청을 사수한 여공들의 활약을 담은 중편 소설이라는데 정작 분량 때문인지 담겨져 있지 않아 아쉬웠다. 


김채원은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되는 경험을 겪었고 자신은 남한에서 지내다 1975년 이후에는 미국,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아버지를 전쟁 때 잃은 경험은 상실과 고통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찍부터 가장이 되어 살아야 했던 만큼 주체적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을 것 같기도 하다. 화가이기도 한 김채원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내면화하여 표현한다.

<거울의 환>에서는 김치, 된장찌개, 동치미 등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먹던 음식이 등장한다. 묘사를 보고 있자니 마치 밥상 위에 앉아 있는 등 침샘을 자극할 정도였다. 주인공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던 중 길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데, 헤어진 이후 연락을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 거주지에 남고 남은 식구들은 피난길에 오르기도 한다. 어머니와 딸은 갈등 끝에 화해한다. 어머니와 딸은 갈등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던 딸이 어머니의 나이가 되면 과거의 그녀를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갑갑하게 살았을지 모를 어머니를 이제는 이해하는 세대가 되었다. 


역사는 구르고 사람들은 그 역사라는 것을 피를 흘리면서도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 P229


나이 들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 아니라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으로, 저의 성을 찾아 여기에 서는 일은 이리도 힘이 든 일입니다. - P248


앞선 시기 최초의 희곡 작가인 김자림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정복근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1976년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 작가로 등단하여 많은 희곡을 발표했고 여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대중적으로도 작품이 성공하여 그는 한국 연극계에 이름을 단단히 남겼다. 1980년대가 민중이 글의 주체로 등장하는 만큼 그의 희곡에도 민중적 서사를 담았으나 여기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추가시켰다는 것이 포인트다. 

<덫에 걸린 집>에서는 시대는 바뀌었어도 여전히 권력에 취하고 싶어 기생을 찾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절도와 강간 피해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안 망신이라며 숨기기 급급한 사람들의 심리도 엿볼 수 있는데 읽는 것만으로 생생함이 느껴져 절망스러웠다. 오늘날에는 발전된 디지털 체계로 여성의 성은 더욱 난도질당하기 쉬운 환경에 들어서게 되버렸다. 어떤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정파괴범이란 건 대체 누가 붙인 책임 회피적인 이름이지요? 그런 녀석들은 단지 용서 못 할 파렴치범에 불과해요. 집안이 그런 하찮은 범죄 때문에 깨어지는 줄 아세요? 비루한 인습 때문에 깨어지고 배신 때문에 깨어져요. 남편은 아내를 배신하고, 가족은 피해자를 배신하고, 피해자도 자신을 배신해요. (가방 들고 나가며) 난 이제 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 P318


강석경은 1985년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상업주의 문학을 배격하는 모임인 ‘작가’ 동인에 합류해 창작 활동을 했다. 산업 사회에서 글을 쓰면서 상업주의 문학을 배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싶은데 실제로 그의 글의 소재는 이와 관련하여 먹고 살기 위해 문학적 순수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실존적 고뇌를 다룬다. 

<밤의 요람>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데 그녀들이 일상적으로 받는 차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선희와 마크, 애니와 톰슨, 미라 등이 등장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신산한 삶과 피부색, 돈으로 평가되는 개인의 희비극이 그려진다. 

술병이 뒹구는 거리도 어린아이처럼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자부심을 지닌 백인과 그 빛의 어둠인 흑인, 거대한 체구의 아메리칸에게 달러와 사랑을 뺏는 여자들, 그들 모두가 밤의 요람에 잠들어 있었다. 발 딛고 내릴 제 땅을 찾지 못하고 욕망의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색색의 인종들이, … - P370


1980년대는 여성 작가 단체, 잡지 등이 등장하기도 했던 때다. 여성평우회, 또 하나의 문화, 여성, 여성운동과 문학 등이 그 주인공이다. 


여성평우회는 한국 여성의 억압이 가부장제 산업화 분단 등에 의해 구조화되었음을 정면으로 응시한, 분단 이후 최초의 단체였다. 여성평우회는 기관지를 펴내고 배움에 대한 나눔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방면의 사업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다른 여성 단체와 연대하여 여성 문제를 사회정치적 의제로 내세웠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특히 여성 문화 큰 잔치는 마당극에 여성주의적 시각을 덧붙여 내놓은 문화 컨텐츠라고 볼 수 있다. 막을 내린 후에도 한국여성노동자회의 문화 운동으로 계승되어 명맥을 이었다. 


책에는 1984년 10월에 펼쳐진 여성문화 큰잔치 연희마당을 실어 놓았는데 노동자 및 여성의 현실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마당 놀이 답게 다양한 컨텐츠가 눈에 띈다. 고사문, 민요 함께 부르기, 이야기마당, 연희마당에는 영화, 사례극, 굿 등의 형식을 빌어 현실을 대차게 깐다. 


시어머니 갓마흔에 아들 낳아

잡색 갓마흔에 아들 낳아

시어머니 어서어서 키워 내어

잡색 어서어서 키워 내어

시어머니 판검사를 만들어서

잡색 판검사를 만들어서

시어머니 농부 신세 면해 보세

잡색 농부 신세 면해 보세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가요 가요 나는 가요 돈 벌러 가요

부모 형제 멀리 떠나 공장에 가요 ( 두 번 반복함) - P598


뭐? 노동자의 인권? 인권 같은 소리 하네. 야, 돈 버는 데 인권이 어디 있고 인정이 어디 있고 양심이 어디 있냐?

뭐? 배가 아프다고? 생리휴가를 달라고? 웃기시네. 야, 생리 안하는 여자 봤어? 아픈 배 움켜쥐고 죽어라고 일해서 이만큼이나 사는 거고 국가도 튼튼해진 거야. 알어? 

이 따위로 일해서 어떻게 작업량을 채우나? 매수 더 뽑아! 불량 내지 말고 정신 차려!(졸고 있는 노동자들 어이없는 듯 쳐다보다가 발길질을 하며)

이게 진짜….. - P600


우리 정부에서는 부강 한국을 위해서 여성 인력 20만을 풀가동시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 만세! 애국 다찌 만세! (목소리를 낮추며) 니뽄이노, 노동자노, 청소부노 여러분. 논개 정신, 정신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후예들이 환락의 고장, 서울에서 여러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므니다. … - P601


우리 재산, 공동 명의로 합시다. - P608


매맞던 부인, 잡색들의 응원으로 남편을 물고 꼬집고 대든다. 그러나 역부족인 미세스 폭력, 심하게 걷어차이며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폭력 남편, 한 발을 아내 위에 올리고 승리의 표시를 한다. - P611


어이 시집이나 가지.

여자는 결혼이 최고야.

아들이나 낳지.

… - P615


<여성>은 1985년 창비가 간행한 무크지로 출발했다. 진보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여성 지식인들이 편집인과 필진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여성 문학을 비판하고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과 민주 운동이 결합하면서 겪는 과정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박완서, 박경리 작품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여성 해방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은 불철저한 세계관과 연결될 뿐 아니라 인간 해방을 위해 가장 철저히 싸워 나갈 수 있는 집단을 무시한 어떤 해방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인간 해방을 위한 총체적 이념의 정립과 여성운동의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 - <여성> 1호, P676


교묘하게도 1987년 체제가 막을 내릴 때쯤 여성문학 단체의 활동이 막을 내린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또 하나의 문화>의 실험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여성주의 무크로 발행된 잡지다. 필진이 조한혜정, 김은실, 조옥라 등 여성학 전공자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띈다. 다른 여성주의 단체와 달리 1987년 출판사가 설립되어 2003년까지 갔다. 여성의 글쓰기와 표현 양식의 중요함을 알리고 출판 활동에 주안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우리의 우선적인 대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로 현재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되겠죠. … 또 하나는 고등교육을 통해 남녀는 평등하다는 의식은 깨우쳤으면서도 구체적 현실의 장애에 부딪쳐서 제대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식층 여성이나, 소수의 좀 더 풍성한 삶을 살고자 하는 남성들이겠지요. 그들이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구체적 현실의 장에서 서로 용기를 북돋우면서 발전적 대안을 찾도록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도록 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좌담 ‘또 하나의 문화’를 펴내며,  P667


어느덧 한국 여성문학 선집 마지막 권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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