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원리는 보다 인간적인 관계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에게는 성을 불문하고성취 욕구와 정서적 욕구가 있으며 이를 적절히 충족시킬 수 있도록 짜여진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인식 아래 새로운 가족상이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그 가족은 첫째로 가족 성원 중 어느 누구도 집단의 복지라는 이름 아래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는 민주적 관계를 기초로 하며, 둘째 가정이 사회의 일방적인 통제를 받지 않도록 공공/가정간의 유기적 연결을 도모해가는 집단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가족 집단의 성격이 제도적이고 규범적인 집단에서 인격적 유대가 강조되는 집단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지나치게 확대된 공식 영역의 지배로 인간과 가정이 도구화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은 곧 남녀간의 성역할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고 과도하게 사회화된 남성을 가정화하고 과도하게 가정화된 여성을 사회화시키는 작업과 연결된다. - P217

한국의 가족 제도와 가족 관계의 변화는 이러한 상황적인 요소와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가치 지향성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내에서 이루어지며 양자간의 불균형은 많은 갈등을 낳고 있다. - P222

국민 소득의 분배와 사회 복지에 관한정책이 경제 성장을 위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아동 양육과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가족에게 맡겨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경제적 여유가 있어 교육적으로 안정된 환경을 마련해줄 수 있고 전적으로 관심과 시간을 자녀 교육에 쏟을 수 있는 전문적 육아인이 있는 계층에 속한 아동이 학력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 P234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은 자신의 직업을 임시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경제력이있는 남성과 결혼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을 뿐 경제·사회적 자립인으로 새로운 부부 관계를 이루어갈 생각은 않고 있다.
반면에 남편들은 아내를 돈벌이에 내보냈다는 자격지심에서, 그리고 흔들거리는 가장의 권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더욱 가부장적인태도를 굳혀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들은 항상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지못한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가정 주부상이 여성의 이상적 존재 양태로 인정되는 한 변화되기 힘들며, 노동 계층 여성의 계급적 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의식은 매우 복잡 미묘한 양상을 보여왔다(조형, 1986) - P245

여성은 구조화된 억압적 관계를 피하여야 하며 부부는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협력자가 되는 데 동의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 전원은 아내 또는 어머니의 취업이라는새로운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며, 특히육아와 가사 노동을 합리적으로 나누어가기 위한 훈련을 쌓아가야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주부가 자신의 남편과 자녀들에게 일을떠맡길 수 있는 결단이다. - P252

비취업 가정 주부의 위치의 근원적 취약성은 궁극적으로인간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과 가사일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극복될 길이 없다. - P258

아내의 성적 욕구를 부담스럽게 느끼고 이를 회피하려는 부르주아남편의 경험은 전통적인 정절 의식과 어우러져 여성 성욕의 수동성에 대한 진단을 낳은 것이다. 이는 여성이 느끼는 성적 쾌감은 클리토리스의 접촉 clitoral orgasm 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기를 질에삽입, 즉 남성과의 성교를 통해서만 vaginal orgasm 온전히 얻어질 수있다는 이론으로 구체화되었다. 1966년 실험을 통하여 이 구분의리학적 근거는 부정되었으나 이러한 근거 없는 개념은 여전히 일상적 남녀 관계를 지배해오고 있다(Bouchier, 1986: 79).
이러한 여성에 대한 문화적 횡포에 의해 많은 현대 여성들은 자아분열을 경험하여야 했다. 문화적 표현을 빌리면 여성은 ‘미치거나mad‘ ‘바보 dull‘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V. Wolf), ‘인형 doll‘ 이거나무작정 남자를 밀어붙여 파괴하는 ‘황소 같은 존재 bully‘ 가 될 수밖에 없었다(Lawrence, 1932). 여성은 여전히 ‘대화의 상대‘와 ‘잠자기상대‘로, 또는 어머니와 창녀로 이분화된 채 대상화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정확한 파악을 통하여 비로소자신들의 진정한 소리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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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7-16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많이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 님! 저는 이제 막 2장 들어갔습니다!!
 
12.12 - 정승화, 장태완 등 관련자 100인의 증언과 사진으로 재구성한 12·12 그날의 진실
이계성 지음 / 폴리티쿠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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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매스컴 사진 및 영상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죄수복을 입은 두 사람, 전두환과 노태우다. 어릴 때라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음에도 뇌리에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 때는 그저 그들이 부패한 죄로 사법대에 올랐다고만 생각했다. 정치는 무관심이었고 그저 노래 듣고 부르기 좋아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 책은 30 년전 5.18 진상 조사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법 심판대에 올랐을 때쯤 출간되어 나왔다가 올해 5.18 무렵 수정되어 다시 나왔다. 작가가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당시 상황을 궁금해 하는 젊은 층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12.12 쿠데타 전후 사정을 실고 각주 등을 보충하는 등 작업을 추가했다고. 12.12를 잘 모르거나, 타이틀만 알고 있거나, 안다 해도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책이다. 작가가 기자라 그런지 글이 마치 르포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장감이 넘쳐서 쉴 틈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를 왜 일으켰는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가? 궁금증을 위해서는 그 배경을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체로 10.26 이후 전두환 및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준비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꼭 쿠데타여야 했는가.'를 답하기 쉽지 않다. 책에서도 살펴보듯 군 내부, 정부 부처 인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씨앗임을 알아야 비로소 사건의 본질에 가 닿을 수가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윤필용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윤필용 사건은 1972년 유신 마무리 후 1973년 유신의 주역이었던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박종규는 경호실장, 강창성은 보안사령관이었고 윤필용은 수도경비사령관이었는데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과 윤필용 간에 밀착이 이루어지자 박종규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윤필용이 유신 자축 모임에서 이후락에게 한 '각하(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다음은 이후락(형님) 차례' 발언을 꼬투리 삼아 그를 끌어내리고자했다. 발언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사건을 조사하라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군 세력이 경상도 출신으로 걸러지게 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세력에게는 기회가 된 셈이다.   


책을 읽으며 12.12와 관련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던 여러 순간들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질문이 생겨나더라. 


먼저, 안타까웠던 순간들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놀랐던 것은 정승화 총장이 쿠데타 당일 오후 전두환을 불러 미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 전두환의 숨은 의중을 파악했어야 하는데... 


2. 정승화 총장 납치를 위해 온 보안사 인력과 방어 세력 간의 충돌로 총격전이 벌어지자 순찰 중이던 경비대는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공관경비대장인 황인주 소령과, 반일부 준위는 반대편 방향에서 몰려오는 육본 헌병 병력(33헌병대 소속 병력)과 마주쳐 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육본 병력은 정승화 총장 연행 때 문제가 될까봐 합수부에서 파견한 인력들이었다. 이들이 약간의 시간차로 부딪치지 않았다면 납치되던 정승화 총장의 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3. 전두환은 반란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 갔다.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의 동의를 얻어 오라며 재가를 거부하며 버텼으나 결국은 막판에 전두환의 손을 들어줬다. 최규하가 끝까지 재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꽤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4. 윤성민 참모차장은 사태를 확인하고 반란군을 단호히 진압하기로 결심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휘하 병력을 확실히 장악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국방장관에게 계속 연락을 취했으나 실패하자 총리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로부터 통화를 거부당하고 말았다. 대통령과 참모 차장이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다면?


5. 육본 지휘부 세력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쿠데타 대응에 철저히 실패했다. 리더가 부재했다고는 하나 신군부의 쿠데타임을 인지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식으로 전두환 측에 대응했다면? 


6.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사태 마지막까지 본분을 지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 진압 작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가 최소한 자리를 지켜 지휘권을 행사했다면 어땠을까? (본인의 소임을 다 했다면)


7. 신군부는 1공수여단을 서울로 진입시켰다. 이에 장태완 수경 사령관은 30사단 박희모 소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병력을 동원하여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막아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박 사단장은 육본과 합수부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 결국 합수부 측의 지시를 따라 서울 주요 통로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가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지시를 따랐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이 떠오르거나 인상 깊은 장면도 많았다.


1. 전방에 있던 9사단과 제2기갑여단을 서울로 불러들인 합수부 측은 과연 국가를 위한 선택이라 말할 수 있나?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반격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과정에 의한 수단이 아니었나.


2. 쿠데타 당일 밤 육본 참모회의가 열렸다. 전방 사단 병력들은 장관 없이 병력 동원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상황에서 윤성민 참모차장은 참석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태완 소장은 명령부터 내려야 한다고 단언했고 이 의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군수 참모부장인 안종훈 소장 뿐이었다.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쿠데타군에 손을 들자는 거요?"(P299) 그의 말은 백번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종훈 소장은 5.17 전국 계엄 확대 회의 때도 소신 발언을 했다는 것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중심을 지키는 군인들은 내쳐지고 권력 맛을 아는 인간들만 승승장구를 했으니 참...


3. 전두환은 쿠데타 이전부터 군 개편을 구상했고 정승화 총장의 혐의가 없음을 알면서도 박정희 시해 동조자로 몰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선배 장성들을 모으면 정승화를 연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생각한 그 자신감이 소름끼친다.


4. 신군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12.12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인 위컴은 전방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킨 것에 특히 분노했다. 군 핵심 전방 부대를 쿠데타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12.12 사태를 10.26 사건 수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신군부는 이후 정치에 가담하지 않을 거란 약속을 하며 빠져나갔다.


1980년 3월 5일 정승화 총장은 내란방조죄 혐의를 받아 재판부에 넘겨졌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범인임을 알고도 나라의 실권자가 될 것으로 판단해 그의 내란 행위를 도왔다.'고 공소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정승화 변호인 측은 내란 행위 여부가 논란인 상황에서 공판은 대법원 판결 후로 연기해야 한다며 공판 기일 변경 신청을 했으나 재판부는 그 요청을 기각해버렸다. 군검찰은 내란방조죄를 적용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물증이 아닌 심증만으로 불충분함이 발견되어 확인 과정에서 7년형으로 확정됐다.  


같은 해 4월 14일 전두환은 기존 보안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직하게 되면서 막강한 권력자의 지위에 오른다. 바깥은 개혁의 바람으로 일명 '서울의 봄'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권력의 정점에 오르며 국가를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착착 해 나가고 있었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겸직 요구를 관철하려할 때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최광수 비서실장을 압박하는 등 여러 사정이 있었다는데 과연 최규하 대통령은 이 때 전두환을 올리는 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12.12 쿠데타 사건을 책을 통해 복기하면서 노재현 국방 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의 진심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고 사망한 두 사람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영화 <서울의 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완독하고 이제서야 보았다. 영화는 빠른 전개로 쉴틈없이 몰아치지만 아무래도 등장 인물이 가명을 사용하고 사건을 아무래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보충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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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 유형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이효재 · 조형,
1976: 김애실, 1981: 주경란, 1983)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현대 교육의 보급률에 비하여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1970년대의 급격한 국민 경제 규모의확장에 따라 여성 인력의 현저한 양적 증가가 기록되었으나 질적인면에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음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 P137

여성을 위한 조직의 경우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조직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조직은 민주적인 운영을 해나갈 잠재력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 인간 관계에 대한 관심이 필요 이상으로 작용하여 업무상 능률이 낮아지고 (2) 여전히 특수주의적 원리가 지배적이며, 직업 및 가족에 관한 의식면에서 나타나는 큰 차이를 줄일 효과적 기제를 아직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시어머니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현재의 여성 주도적 조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소수 엘리트층 여성들의 사고방식과 이 조직이 강자 집단을 모방해야 하는약자 집단의 조직이라는 특성과 관련하여 앞으로 더 깊이 파악되어야 할 문제로 보인다.
남성 주도적 조직에 여성이 진출하는 경우에는 채용시부터 남성보다 더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실력 외에 결혼 여부·가정 배경 등의 조건이 고려되며 ‘팔방미인‘ 적 여성, ‘분위기‘를맞출 수 있으며 공격적이지 않은 성격이 선호된다. - P179

전문직 여성들은 직장내에서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는 남녀관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 여전히 작용하여 능력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한편, 여성의 모성적 역할의 강조가 직장에서도 똑같이 요구되어 자신의 의사와는무관하게 양보의 미덕을 또는 중재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남녀 유별의 전통 때문에 직업 동료로서의 남녀 관계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못하며 이에 따른 혼란과 갈등 역시 무시 못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둘째로, 조직체에서의 진출 양상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경영 방식 - P187

에 있어서 연줄을 통한 비공식적 관계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으므로 보편적 기준에 의한 고용이 어려우며, 일 처리에 있어서도뒷거래가 성행하여 다수의 여성은 불리한 위치에 있다. - P188

직업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지속해나갈 수 있는 여성은 현재로서 선택된 집단에 국한되어 있다. - P196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집단 활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조직 생활을 위한 훈련이 거의 되지 않은 채 성장한다. 한편 기회가 부여된 경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조직의 이방인. 주변인으로서 자신의 전문적 역할 외에 여성이라는 신분에 따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동시에 ‘통계적 불평등‘ 때문에 갖는 ‘고립‘과 ‘눈에 뜨이지 않으려는‘ 방어적 처신으로 조직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큰 조직체내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여성들이 기업의 중심 계열에 들기보다 고문이라든가 스탭이라는 주변적 위치에서 활동하기를 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권력, 기회 구조, 그리고 숫자의 문제와 관련된다. - P200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선택들, 바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진로, 그리고 지불해야 할 대가와 얻게 될 보상에 대하여 냉철하게 따져보면서 개인적 적응과 성장을, 그리고 조직체의 구조 개선을 도모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 있어 여성들간의 유대와 협력은 필수적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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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한국의 가부장제에 관한 해석적 분석

1. 조선의 가부장제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강한 생활력, 적극적 지탱자로서 여성의 역할의 폭이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경제활동이 없는 남성들을 대신하여 여성의 활동이 넓어졌다는 분석이 흥미로웠다. 단, 정치적 활동이 아닌 경제적 활동 위주였다.

’자궁 가족‘은 번역한 용어가 와 닿지는 않았다.

2. 근현대 가부장제
근대 초기 여성의 권한은 높아졌으나 중심 가치는 신분 의식, 가부장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졌다.
현대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정착되며 여성의 나약화, 한편으로는 자립화가 이어졌다.

남아선호가 일방적으로 여성이 강요받았던 측면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성이 자발적으로 유리함에 의해 선택했다는 측면은 약간 놀랍기는 했다. 하긴 예전에는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고 나조차도 그런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내 어머니조차도 할머니께서 아들을 둘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남성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당연히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공식적인 부자 관계에 대비된 가족적 모자 관계 내지 ‘자궁 가족‘을 통해 여성은 상당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유교 윤리의 실천이 사회적 지위 상승에 중요한 변수로 부각됨에 따라, 여성은 적극적 행위자로서 ‘열녀‘ ‘효녀‘ 등의 공적 인정을 받을 기회가 생겼으며, 또한 ‘선비상‘을 이상으로 하는 사회에서 ‘세정‘을 모르는 남성의 보완자로서 경제 생산적 활동을 포함하여 일상 생활을 꾸려가는데 있어서 여성 역할의 비중은 매우 컸다. 여성은 어려운 단절적인시집살이를 이겨나가야 했던만큼 성취적이고 강한 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성만의 안채 문화는 그들 나름의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기능을 수행하여왔다.
궁극적으로 혈통을 극도로 중시한 당시의 체제에서는 대가족내의연장자이자 혈통 계승자의 어머니로서 여성의 지위와 활동에 상당한권한을 부여한 셈이며 여성들은 이 여자를 십분 활용하여 가부장제의 유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왔던 것이다. 여성이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만 인정되었다는 점과 여성 자신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붕괴하여가는 체제를 강한 생활력으로 보완하며 적극적인 지탱자가 되어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현대적 변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P100

한국 사회에서의 가부장제 극복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매우 분명해진다. 첫째는 조선 시대로부터 사회 구성의 이념적 기본이 되어온 엄격한 공공/가정 그리고공/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인식을 토대로 형성되고 재형성되어온 사회적 관계 구조, 특히 성과 부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새롭게 확대되고 있는 산업 자본주의적 여성 통제의 기제즉, 미시적으로는 낭만적 사랑에 근거한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거시적으로는 국가 및 기업 등 조직의 확대에 따라 더욱 강화되는 인간의도구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가 문제가 된다. - P127

울프 Wolf(1972)는 중국 여성의 삶에 성취적· 획득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궁 가족 uterine family‘ 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남편의 집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여성은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이 집안에 더해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구축해간다. 자궁 가족내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며느리가 포함되며 남편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가족은 먼 조상까지를 포함하여 연속성이 중시되는 남성들의 가문과는 별 관계가없는 사적인 가족으로 어떤 뚜렷한 이데올로기나 형식적인 구조도갖고 있지 않다. 가족 유대는 주로 감성과 충성심에 기초한 것이나, 주목할 점은 그것이 구성원에게 공식적 가족 못지않은 구속성을는다는 점이다. 울프(1972: 37~38)는 여성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으로 보이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있었던 근거는 바로 자궁 가족과 공식적 가족의 목표가 다행스럽게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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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車駕가 궁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執金吾 寇恂에게 이르기를"
潁川지방은 京師(洛陽)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오직 만이 평정할 수 있으니 九卿으로부터 다시 外職으로 나가서國事에 매진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恂이 대답하기를 "潁川의 도적들이 폐하께서 隴과 蜀을 정벌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친 자들이 틈을 타고서 서로 속이고 그르친 것일 뿐이니, 굳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아도 만일 乘輿가 남쪽을 향해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도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를 것이니, 신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庚申日에 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潁川의 도적이 모두 항복하였다. 寇恂이 끝내 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폐하로부터 寇君을 다시 1년 동안 빌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寇恂을 長에 남겨 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鎭撫하게 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받아들이게 하였다.

東郡과 濟陰에도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李通과 王常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耿純이 일찍이 東郡守가 되어 위엄과 신의가衛지역(東郡)에 드러났다 해서 使를 보내어 耿純을 太中大夫로 임명하여 軍과 東郡에서 만나게 하였다. 東郡에서는 耿純이 경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耿純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大軍이 싸우지 않고돌아오자 親書를 내려 다시 耿純을 東郡守로 임명하였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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