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에세이 2011-2023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연립서가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경식 선생님이 타계한지 어느덧 1년하고도 수개월이 지났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책에 이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2011년부터 2023년까지 칼럼의 내용을 엮어서 모아 놓은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려니 어쩐지 안타까움과 함께 씁쓸함이 몰려왔다(사실 눈물을 좀 훔치기도). 2차례의 큰 세계 전쟁을 거친 후 최소한의 선의와 도덕, 양심에 기반한 정책들이 후퇴하고 전 세계적인 반동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타자에 대한 선의와 양심을 가진 지식인은 세상을 뜨고 있고 자기 자신만 알고 잘못된 혀와 지식을 놀리는 인간은 배를 두드리는 형국이라니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다.
책에 플래그를 붙여나가다가 포기했다. 공감가는 말들이 대부분이라 어느 순간에 플래그를 더 이상 붙이지 않고 계속 읽었다.

서두에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늙음을 마주한다. 갑작스런 사망이 아니라면 자연스레 누구나 노인이 되기 마련인데 우리는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곱씹어야 한다. 우리는 노인을 더 이상 생산력이 존재하지 않는 무용한 존재이자 짐짝처럼 취급하려하지 않는가 말이다. 저자는 그런 압력에 반기를 들며 결코 생산력이나 이윤으로 잴 수 없는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 후 다가올 나의 노년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볼 질문이다.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온 저자에게 ‘디아스포라’는 저자의 삶에 응축된 단어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을 차지한 것도 디아스포라, 경계를 넘나든 지식과 이를 설파한 사람들의 향연이었다.

악몽의 시대 예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여겨진다. 예술마저 권력에 빌붙은채 눈치를 본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숨구멍을 찾을 것인가.
허가를 받아야 하는 예술. 예술가는 그런 허가에 눈치를 보게 되는 현실. 그러나 예술가는 허가가 있든 진실을 발굴하고 이야기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종말‘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P151)
이 책에서는 많은 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다루지만 그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윤이상이다. 그는 동베를린 사건(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 사건.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 활동을 펼쳤다)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서독 정부 등의 항의로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2024년 7월 대법원 결정에 따라 윤이상에 대한 재심이 확정되었다).
어느 예술가가 ˝꿈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꿈을 모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실로 윤이상의 생애는 이 꿈처럼 절대적인 해방의 환희에 겨우 4분의 1음을 남기고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또 그것은 그 개인적 좌절의 역사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경험을 상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4분의 1음이라는 미세한 공극이 만들어 내는 음의 울림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美)‘을 낳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P206~207)
그의 생애는 너무나 안타깝다. 한반도의 분단 이후 지나치리만큼 매몰된 이념 사회로 그는 남한을 결국 끝끝내 방문할 수 없었다(남한은 끝끝내 자신들의 입장을 윤이상에게 강요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그는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영상>(1968)을 작업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에 간 것이었을텐데 정말 많은 용기를 갖고 떠난 것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사고가 난 이후 여러 차례 주변 지역을 방문해서 기록을 남겼다. 후쿠시마에 갈 때마다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현실만이 지니는 비현실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미 결정적으로 손상당했고 지금도 계속 위협에 노출된 환경.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얼핏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것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방사능 재난의 특질이 아닐까. 요컨대 방사능 재난은 우리의 감각이나 상상력의 원근법에 도전한다.(P227)
후쿠시마의 일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괜찮겠지, 거기서 많이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으니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말이다. 저자는 그것을 ‘동심원의 패러독스’라고 명명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갇혀서는 더 나아진 환경을 만들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이 요구된다는 저자의 일침에 자극을 받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나치 수용소의 만행에 대한 증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타자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과 존중 의식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나 증언의 불가능성을 깨고 용기를 내주었기에 그의 말이 계속 살아남아 유효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상화는 1922년 간토 대지진을 목격하고 돌아와 조선의 식민 지배 수탈을 확인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를 지어 조선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동시에 재일조선인의 마음을 노래하였다. 그 무렵 재일조선인의 1세대가 일본에 형성되었다. 조선의 환경이 악화되어 떠밀려 일본에 정착한 이들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말과 글, 이상화의 시와 후쿠시마를 관련 짓는 일은 동심원의 패러독스를 뛰어넘는 하나의 행위가 되었다.

냉전은 끝났으나 그 후 분단이 고정화되면서 세계는 오히려 극우화되어가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전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더욱 사태는 심각해졌다고 느낀다.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악마화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여기에 미국과 유럽, 중동의 책임도 무관하지 않다). 남북한의 대립과 끊임없는 위기, 미국과 유럽의 이민 배척의 심화(이는 한국도 마찬가지), 일본의 평화헌법 폐기와 군사국가 행보, 장기 집권하는 푸틴에 빌붙어 권력을 30년 이상 놓지 않고 있는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여전히 진행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등.
피에르 비달-나케는 기억을 부정하려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저술을 남겼다. 기억을 살해하는 것은 언어를 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 인상깊다. 일본이 패전을 종전이라 표현하고 전멸을 옥쇄라 명령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까. 일본의 전후 지식인인 가토 슈이치는 <언어와 탱크>에서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환경을 파괴시킬 수 있지만 탱크라는 존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의 역사는... 언제 끝을 고할까. 애당초 그것이 ‘끝날‘ 수는 있을까.(P272)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왜 인간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지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나를 냉소주의로 점점 몰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안되. 그래봤자 안되. 이전에도 똑같았잖아.’ 이런 생각들 말이다. 이상이 없으므로 힘과 돈만을 진실로 여기는 시대, 국가주의가 횡행하고 이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국가주의를 앞장서 추종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상마저 포기한다면 결국 돈과 권력 같은 욕망에 정복당해 파멸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대‘다.(P43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5-06-0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 형제의 삶이 마음 아팠었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발을 디딜까도 생각했었습니다.
문제의식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이산민을 머물게 해주는 곳이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6-03 20:34   좋아요 1 | URL
형님의 복권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이 참 많더라구요. 재일조선인의 위치에서 늘 자신이 경계에 있다 생각하셨고 그래서 난민, 소수자 등 타자에 눈과 귀를 기울이셨던 것 같습니다. 부디 영면하시길... 그리고 오늘 투표 결과에도 귀를 기울이고 계실거란 생각도 했네요.
 

길을 지나다닐 때면 느낀다. ‘이제 정말 이어폰 안 끼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구나.’ 게다가 유선 이어폰이 아닌 무선 이어폰이다. 시대가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하긴 나도 산책을 할 때면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어폰을 착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 퇴근길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내릴 때가 되었는데 귀를 좀 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어폰을 가방에 넣고 내렸다. 공기를 느끼면서 길을 걸었고 주변을 살피니 사람들의 표정이 들어왔다. 아이를 데리고 귀가하는 학부모, 학원을 가기 위해 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아이, 지팡이를 짚고 지나가는 어르신 등등… 그러나 한 어르신이 핸드폰에 스피커가 켜져 있는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폰으로 들으시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 이런 류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어쩐지 무안해지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뉴스인 것일까, 아니면 라디오인가, 역시 유튜브의 컨텐츠일까 씁쓸하기도 하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연세 정도 되는 분이셔서 그런지 몰라도 불현듯 아버지 생각이 났다. 평소 정말 자주 안하는 전화를 그것도 매번 용건만 간단히 하는 나다. 사실 전화를 걸어도 늘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식사 하셨어요? 아프신 곳은 좀 어떠신가요?” 그럼 아버지의 대답은 “괜찮다. 고맙다.” 이게 끝이다. 참 단조로운 대화가 아닐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버지께 전화 좀 자주 하라고 다그치신다(어머니께도 전화 자주 안하는 것은 마찬가지기는한데…). 아무튼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이전의 대화와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고 전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어르신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 이어폰을 낀 채 같은 자리를 걸어갔다면 그때 아버지께 전화를 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속으로 어르신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부디 내가 과민반응한 것이기를 하고 바라면서… 어르신이 인생무상이 모토라서 그저 가볍게 들은 컨텐츠였다고 말이다. 



(봐도 또 봐도 좋은 장미)


주말에 운동 복습을 하자 생각했는데 어느덧 일요일 늦은 오후가 되어가고 있었다. 체육관을 나가는 것까지가 왜 이리 힘든 것인지… 산책은 그리 쉽게 하면서 아무튼! 굳은 결심을 하고 체육관을 나갔다. 아직 해는 지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비가 오려는지 날이 후텁지근했다. 얼마 후면 PT 선생님이 바뀌게 되는데 새로운 선생님이 내 코어 상태에 대해 궁금하셨는지 선생님께 물어보셨다고 한다. 나는 “코어 근육 거의 없다고 해주세요.”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체육관에 도착했고 스트레칭 후 집에서는 하지 못하는 기구를 상하체 골고루 하고 유산소까지 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바를 이용한 팔굽혀펴기를 하는데 허리가 꺾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시티드 레그 익스텐션할 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낮에는 청계천을 걸었다. 요즘 외근이 잦아서 4월부터 이 부근을 몇 차례나 오는 중인데 오늘도 그랬던 것이다. 비가 애매하게 내려서 우산을 쓰다 말다를 반복하며 걸었다. 관광하시는 분들도 많고 직장인들도 점심 먹고 나와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걷다 보니 어딘가에서 촬영을 나왔는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부근을 사람들이 둘러싸듯 구경중이었으나 나는 건너뛰었다. 비가 많이 내렸다면 잠겨서 청계천을 산책할 수 없었을텐데 이렇게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 작은 행복이었다. 


(오늘 먹은 판모밀&돈까스 정식, 맛있었다!)


이번 주는 짧게나마 옆지기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대선 투표하고 마음이 가벼워질지 무거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이 일단락될 수는 있겠지.



- 4,5월에 읽은 책들

cjd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5-06-04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선 이어폰을 딸이 사 줬는데도 유선 이어폰을 사용해요. 무선은 충전해야 한다는 게 불편하고 이어폰 집에 넣어야 한다는 게 불편해서요. 저는 유선이 훨씬 편한데 아마 습관의 힘이겠지요.
대작가 서머싯 몸도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소설에 썼지요. 의미 부여는 각자 개인이 하는 걸로... 그냥 선하게 행복하게 산다면 되지 않을까 해요.

거리의화가 2025-06-09 16:20   좋아요 0 | URL
저도 충전이 번거로워서 유선 이어폰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어르신의 입장과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보이는 대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확대해석했을 거라고 생각하려구요. 그러면서 그 어르신의 삶이 행복하기를 조용히 응원했습니다^^;

희선 2025-06-10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들으시는 분을 봐서 아버님한테 전화하셨군요 그런 일이 있어서 괜찮았을 것 같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6-11 15: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분이 아니었으면 전화조차 안했을 거에요^^; 전화하고 나니 왠지 죄책감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마음이 개운했어요. 계속 연락한다는게 미뤄지고 있었거든요.
 
새로운 학문 대우고전총서 50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 / 아카넷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 내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지 않았다면 ‘비코’를 모르고 살았거나 뒤늦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철학사를 훑어 읽은지 이제 얼마 안 된 새내기라 지식이 너무나 얕은 탓이다. 특히나 서양 철학 지식은 아직 너무 많이 부족하다. 아무튼 비코를 만나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은 <오리엔탈리즘> 덕분이었다.

‘새로운 학문’이라… 우선 책의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과거의 학문은 잘못되었으니 새로운 방식의 학문을 제시하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서양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데카르트는 명백하게 판단된 사실만이 진리라고 여겼다. 대표적인 학문인 수학, 과학은 수치로 평가하고 측정할 수 있어 이후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기억에 의존한 과거를 다루는 역사학은 낮게 평가됐다.
비코는 그런 데카르트에 반기를 들었고, 인간 사회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이야기라며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했다. 비코가 살던 당시만 해도 그의 철학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세를 거르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비코의 철학은 여러 모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환경의 중요성, 인간 정신의 파괴로 인한 윤리적 물음이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비코는 1723년 나폴리 대학 법과대학 교수직에 응모했다 탈락했다. 원래 그는 수사학 교수였는데 법과대학 교수는 6배의 봉급을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자격을 갖추었지만 소위 인사 로비를 잘하지 못하여 탈락해버리고 말았던 충격으로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학문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짐작하겠지만 당시에는 그 책이 별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책과 사상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였던 미슐레, 20세기 역사가인 베네데토 크로체, 소설가인 제임스 조이스, 에리히 아우어바흐, 에드워드 사이드 등등 근현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자처하고 그의 사상을 언급했던 것이다. 1944년 비코의 자서전이 나온 뒤 1948년 <새로운 학문>의 영역본(비코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이다. 당연히 이탈리아본이 원본)이 나오면서 그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코는 중세 말, 근대 초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세계에 신의 섭리는 중요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살았던 철학(사상)가들의 바탕에는 신의 관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는 비코의 철학을 압축한 그림이다.

이 그림 전체는 여러 민족의 인간 정신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격상되는 세 가지 세계의 순서를 표현한다. 땅 위에 보이는 모든 상형문자는 인류가 가장 먼저 몰두했던 여러 민족의 세계를 뜻한다. 가운데에 있는 지구의는 이후 물리학자들이 관찰한 자연의 세계를 나타낸다. 위에 있는 상형문자는 정신의 세계와 형이상학자들이 마침내 관조하게 되는 신의 세계를 의미한다.(P66)
그는 신성한 것과 세계를 구분했고 세계를 물질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신의 섭리가 (문헌학적) 정의와 준거를 바탕으로 형이상학을 이끈다. 그 준거가 되는 것은 ‘시적 지혜’인 만큼 비코는 시인을 중요시 여겼다.
비코는 민족의 자만심과 학자의 자만심이 인간 본성과 지성을 타락시킴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서는 ‘본연의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진리란 종교, 혼례, 매장이라는 공통 원리다. 이는 세계에서 나아가 학문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까지 나아간 것이 특징이다.
인간은 낯선 대상(물질)을 만날 때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대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는 시의 은유성, 비유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인간 사회의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적 지혜’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시적 지혜의 시작인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모든 학문들은 시적으로 피어난다.
인간의 활동은 궤적이 되어 역사가 된다. 비코는 역사적 시대를 총 세 시대로 구분하는데 이는 신의 시대, 인간의 시대, 영웅의 시대이다. 민족마다 다양한 양상을 띠면서도 세 시대를 거쳐온 것은 보편성을 띤다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관습이 출현하며, 관습으로부터 법 체계가 등장하고, 법의 결과 사회 또는 국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언어나 문자가 개발되었다는 이유도 합리적이다. 민족의 역사 중 대표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옮긴 이의 박사 논문이 비코와 관련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이 책의 번역에 적임자라 여겨진다. 영역본이 나왔다지만 번역을 하는데 이탈리아 원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결코 쉽지 않은 책인데 작업을 결심해준 저자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5-06-0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코 관심 있으시면 <비코 자서전> 추천이요!

거리의화가 2025-06-02 11:42   좋아요 0 | URL
정보 감사합니다. 참고할게요^^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늘 그랬던 것처럼 고유한 것이나 속성/소유/-
고유성의 가치들 전체, 주체의 가치 및 따라서 책임을 지는 주체,
법의 주체 및 도덕의 주체, 법이나 도덕적 인격, 지향성의 주체의가치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모든 것의 가치의 역설들을동요시키고 복잡하게 만들거나 환기시킨다.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다. - P21

어떤 결정이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만약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적어도 그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긍정과 확증 속에서 이를 재발명할 수 있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파괴적이거나 판단 중지적이어야 한다. 매 경우가 각각 다른 것인만큼, 각각의 결정은 상이할 뿐 아니라, 기존의 법전화된 어떤 규칙도 절대적으로 보증할 수 없고 보증해서도 안 되는, 절대적으로특유한 해석을 요구한다. - P64

결정 불가능한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어 있고 깃들여 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사실은 결정의 사건 자체를 우리에게 보증하는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전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도대체 누가 어떤 결정이 그 자체로 발생했다고 보증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누가 어떤 규칙의 적용이나비적용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이 지각할 수 없는 판단 중지 없이도,
그러한 결정이 이러저러한 우회를 따라 어떤 원인, 어떤 계산, 어떤 규칙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P53

정의는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기다리지 않는다.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간략하게 하기 위해,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고 말하기로 하자. 이것은 자신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조건들이나 규칙들내지는 가언 명령들에 대한 무한한 정보, 한정 없는 지식을 스스로부여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정당한 결정이 이를 보유할 수 있다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이렇게 할 시간, 이 주제에 필요한 모든 시간과 모든 지식을 얻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결정의 순간, 정당해야만 하는 이 순간 자체는 항상 긴급하고 촉박한 유한한 순간으로남아 있어야 한다. - P56

거대한 지정학적 차원에서 오늘날 식별될 수 있는 이 사법화·정치화의 영토들을 넘어서, 모든 이해타산적인 노선 변경과 일탈을 넘어서, 국제법에 대한 특수하게 규정된 모든 재전유를 넘어서, 처음에는 부차적이거나 주변적인 지대들과 비슷해 보일 수 있는 또 다른 지대들이 지속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변성은 또한[중심적인 문제 영역들에 의한) 하나의 폭력 및 심지어 테러리즘을의미하며, 따라서 또 다른 형태의 인질극"이 진행 중인 셈이다. - P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 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의 생각
심귀연 지음 / 날(도서출판)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대부분의 학문(이론 또는 사상)은 홀로 서지 못한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넘어서 다양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 100~200년은 어떠했는가.

근대론은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많은 위기와 폐단을 불러왔다. 우리는 한때 어느 한쪽 편에 서야만 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차별과 배제, 인종주의를 비롯한 극단주의에 매몰되게 만들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경쟁하듯 쫓았다. 인간 중심의 사고, 개발 중심의 정책이 현재의 기후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사유 능력임을 믿었던 근대론자(대부분의 근현대인)들은 세계를 인간의 정신, 그 외에는 물질(몸)의 구성요소로 보았다. 이때 물질은 기계(어떤 동력이 있어야 움직이는 물체)로 취급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은 살아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유물론은 죽은 물질을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신유물론자들은 물질이 내재적인 힘에 의해서 활력을 띤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가 품고 있는 운동 에너지로 스스로 변화하고, 새로운 힘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리좀Rhizome이라고 했다.


이 책은 신유물론이 어떤 배경에서 등장했는지, 그 개념은 무엇인지, 그리고 신유물론을 주장하는 다양한 철학가(사상가)를 소개한다. 브뤼노 라투르를 비롯한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가 그 주인공이다. 

브뤼노 라투르가 신유물론의 맨 꼭지를 담당하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라투르는 누구보다도 이분법을 허물고자 한 사상가였다. 라투르의 행위자들에는 인간만이 있지 않다. 그래서 행위자망(행위자 간의 연결망)에는 여행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여행 가방, 지도 등이 함께 들어있다. 그는 자연이 스스로 자기 존재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았던 최초의 생태학자였다. 그가 살았던 때보다 현재에 그의 이름이 계속해서 거론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유물론’이라는 용어를 처음 언급한 사람에 로지 브라이도티가 있다. 1999년 출간한 <들뢰즈와 페미니즘 이론>에서 공저자와 함께였다. 브라이도티는 ‘차이’에 주목하며 개별성을 보편성에 억지로 담으려하는 동일성 철학에 반대한다. 나는 무엇보다 ‘인간은 유목하는 주체’임을 언급한 부분에 주목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끊임없이 변화하며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존재를 개념화했다는 면에서 놀라움이 있다. 인간은 집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다. 머물던 곳에서 언제든 박차고 나와 타인을 만나고 세상을 만난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는 다 다르다는 말이 참 좋았다.

베넷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변형시켜 생동하는 유물론을 만들어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조건이자 가치로 여겨 물질과 인간(의 노동)을 엄연히 분리하는 이원론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베넷은 물질도 인간처럼 스스로 활력을 가지고 있고 능동성을 가지므로 일원론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질은 변화하고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움직인다. 인간은 그저 다양한 물질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동물, 사물도 정치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았다는 면에서 라투르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이어져 있다.

도나 해러웨이하면 혼종성을 떠올린다. 종과 종이 만나고 함께 섞이고 얽힌다. 종은 ‘보다, 응시하다’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반려종은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식사를 나누는 관계’를 뜻한다고. 관계는 관심(사랑)이 이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기계와 유기체의 결합인 사이보그도 해러웨이는 관계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인상적이다.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 사람, 안경을 쓴 사람, 마이크를 들고 강의하는 교수 등… 우리는 기계와 떨어져서 몸만으로 살 수 없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문화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자연문화’라는 용어로 정의했다. 둘은 얽혀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강조한다. 해러웨이의 철학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관계’로 이어진 인간, 그리고 그 세계가 아닐까.

카렌 바라드는 타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응답함으로써 책임과 윤리 의식을 강조한다. 물질도 느끼고 대화를 나누며 겪고 욕망하며 기억한다.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서로 얽혀 있는 내부 작용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생성된다. 거미불가사리가 포식자 앞에서 자신의 몸 일부를 절단하는 행위적 절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얽힘은 사물들이 그저 엉켜 있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부족하지만 연결되어(의존하고) 있다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극심한 가뭄, 더위, 홍수, 잦은 태풍, 전염병 등 자연은 이제 인간의 통제 범위를 한참 벗어난 상태다. 신유물론자의 이론에 목소리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페미니즘이 종래의 이분법적 사고를 깨뜨리려는 시도였다면 신유물론도 그와 결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신유물론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신유물론을 가능한 쉽게 설명한 책이다. 어려운 개념을 최대한 풀어 설명하고 적절한 예시를 제시해 이해를 도운다. 개인적으로도 앞으로의 독서 행보에 힌트를 얻었다. 얇지만 알찬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