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마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영화가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그렇다. 이 영화를 볼 때면 언제는 내가 ‘츠네오’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조제’가 되기도 한다. 장애를 가진 조제와 그런 조제를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그 장애가 버거워서 조제를 떠나버리고 마는, 그러고는 시도 때도 없이 조제를 생각나게 하는 물건만 보면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츠네오. 어떤 이들은 츠네오가 비겁하다고 하지만 글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이 세상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이야기한 그 영화는 비단 장애/비장애뿐만 아니라 정상인과 이른바 비정상인(퀴어)의 사랑으로도 읽힌다. 그렇기에 더 슬프게 다가온다. 몇 번을 봐도.
<우는 나와 우는 우는>, 그래서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장애를 가진 연인을 오랜 시간 만난 후 결국 헤어지게 된 비장애인이 덤덤히 써 내려간 글. 근육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연인의 이름은 ‘우’, 그러니까 조제에 견줄만한 그의 이름은 ‘우’이고, 츠네오에 견줄만한 이가 이 책을 쓴 작가 ‘은빈’이다. 말이 통하고, 한없이 웃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래서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되지만, 장애의 문턱은 아무리 그 사랑의 크기가 크다 해도 ‘빈’ 혼자 넘기에는 너무나 높다. 가족들의 비난과 반대,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에 비해 어쩐지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 아무리 간절하고 절실해도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 둘만의 공간, 섣불리 계획할 수 없는 미래, 근육이 계속 소실되어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어느 날 잠든 채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늘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와 함께 하는 삶에서 문득 문득 느껴지는 버거움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그래서 고개를 쳐드는 죄스러움과 미안함도, 헤어지고 난 후의 자책감도, 내가, 그가, 우리의 사랑이 남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가 결국에는 가늘게 뜨고 쳐다보게 만드는 그런 사랑인가, 그렇게 이상한가? 늘 되묻게 하는 세상의 시선도 그 시선이 힘겨운 나날도, 모두 공감이 간다.
여전히 걷고 싶어?
응.
비장애인이 되는 걸 자주 상상해?
그렇지는 않아.
선택할 수 있으면 근육병이 없는 인생을 선택할 거야?
당연하지.
근육병을 없애면 나를 못 만날지도 몰라.
안 되는데.
근육병에 대한 우의 입장은 늘 복잡하고 알쏭달쏭해서 나를 헷갈리게 했다. (<우는 나와 우는 우는>, p.61)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한다. 그 희박한 확률 속에서 만난 ‘은빈’과 ‘우’, ‘우’에게 장애가 있었기에 그들이 만났을까? 그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까? 확실한 것은 우는 근육병이 없다면 빈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머뭇거린다는 점이다. “안 되는데.” 자기를 죽이는 근육병과 자기를 살게 하는 사랑…. 장애와 비장애를 선택할 수 있다면, 또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정상적인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장애 없는 삶을 당연히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특수한 환경 때문에 만날 수 있었고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만날 수도 없고, 사랑하게 될 수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선택의 문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평범한 삶보다 한결 버거운 삶을 살더라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생을 선택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언제까지 순탄하고 순조로울 수 있을까. 정상성만을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들은 쉽게 배제된다. 이른바 선남선녀라는 ‘정상/이성애 커플’의 사랑이 아니면 배제와 모욕과 혐오와 차별은 공기처럼 따라다닌다. 차별금지법조차 여전히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 세상에서 빈과 우처럼 이른바 정상성을 벗어난 커플은 빈이 말했듯이 “서로를 잃어버릴 예정”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순간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었고 불화와 모욕이 곳곳에 널려 있었으며 기어코 사랑에 실패하게”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일상은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층위에서부터 아주 미묘하고 애매한 층위까지 다른 이들의 일상과 어긋나 있었다. 다른 이들이 나날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말하자면 정상(頂上)을 향해 세상의 절벽을 오르고 또 오르는 동안, 우리는 그들에겐 지극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니까 정상(正常)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더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p.92)
‘빈’과 ‘우’는 지쳐간다. 우는 자신의 병에, 빈은 장애를 지닌 사람을 연인으로 두고 그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그리고 세상의 차별에. 그들은 “집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항상 같은 내용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메시지를 받”는다. “세상에 너희를 허하는 자리 같은 것은 없으며 언제나 어디에서나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들은 “그 말에 단련되어 있었고 동시에 지쳐”있다. “그건 끝없이 받아치고 맞서야 하는 말, 이성을, 인내심을, 친밀함을 야금야금 쪼개고 파먹고 약탈해가는 말”이다. 이따금씩 그들은 “그 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때로는 가만히 읽어보기도” 한다. “세상에 우리를 허하는 자리는 없으며 우리는 언제건 어디에서건 아무것도 아니구나.”(p.189)
인상 깊은 구절들이 여럿 있지만 “관계, 종속, 책임”이라는 단어들이 뇌리에 남는다. 나와 너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면 서로 간에 얼마쯤의 종속성이 생기고 책임도 따른다. 그런데 그 종속과 책임이 어느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 같다면 어떨까. 어떤 면에서 우를 돌보는 빈의 모습은 연인의 그것을 넘어서서 부모와 자식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빈은 “연인들은 고통 속에서 서로를 낳기에 연인인 것이 아닌가?”(p.212) 되묻기도 하지만 나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을 늘 우선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나를 좀먹는 일이다. 그렇기에 빈의 친구들이, 가족들이, 지인들이 “일상은 물론 욕망과 상상력, 가능성까지도 근본적으로 제한”(p.158)하는 빈의 삶을 부당하다고 항변해 준 것은 아니었을까. 관계와 종속과 책임이 자신의 어깨에서 떨어져나간 때를 상상하면서 그런 삶이 얼마나 달콤할지, 사랑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가지지 않기에 더 이상 “궁색해질 일도, 옹졸해질 일도 없을” 그 삶을 상상하며 홀가분해하다가도 그런 자신이 죄를 짓는 듯해 우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빈.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 뿐이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조제와 헤어진 후 츠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자꾸만 버거워지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츠네오처럼. 어떤 사랑에선 내가 조제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랑에선 내가 츠네오이기도 하다. 언젠가 내게 네가 가버리면 나는 조제처럼 동굴 안에 깊숙이 갇혀버릴 거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다. 정말로 그럴 것만 같아서 츠네오처럼 엉엉 울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때 그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 결국 조제처럼 혼자 1인분의 생선을 굽고, 혼자 거리로 나서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츠네오를 만날 것이라고…. 그럴 것이다. 동굴 안에 조개처럼 갇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관계에서 남겨진 조제의 외로움도, 떠난 츠네오의 죄책감과 미안함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희미해지기는 하겠지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이 세상에는. 그럴 때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한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여느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랑인데도, 어디에나 굴러다니고 노상 발에 체이곤 하는 그토록 흔해빠진 사랑인데도 왜 이렇게 힘이 들고 무거운 것인지 알 수 없"(p.39)게, 그 사랑을 버겁게 만드는 세상이 문제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