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부패예요. 부끄럼 모르는 부패. 대개 형편없는 지도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이 수치심을 느낍니다. 지금은 인종과 상관없이 트럼프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충분치 않아요. 아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자는 매 순간 거짓말을 해요. 모든 게 거짓말이죠. (<토니 모리슨의 말>, 194쪽)
공교로웠다. <토니 모리슨의 말>을 읽다가 다른 구절도 아닌 이 문장에서 그토록 공감하게 될 줄이야. 문제의 저 구절을 읽던 때는 윤 씨에 대한 두 번째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둔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대개 형편없는 지도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이 수치심을 느낀다.”는 말에 무척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 당사자는 부끄러움은커녕 후안무치 자체인데, 수치스러움은 그런 자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 국민의 몫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그자는 탄핵당했다. 그러나 아직은 과정 중일 뿐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끄러움과 수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책으로 돌아와 생각해 본다. 토니 모리슨은 다행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가 그토록 부끄럽게 여긴 인물이 또다시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걸 보지 않고 저세상으로 갔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은.
저 구절은 토니 모리슨이 타계하기 몇 해 전에 이루어진 마지막 인터뷰에서 따왔다. <토니 모리슨의 말>은 그녀가 랜덤하우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의 생애 첫 인터뷰부터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남긴 마지막 인터뷰까지 모두 여덟 편의 대화를 담고 있다. 1973년부터 2012년까지 4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이혼 후 편집자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운 싱글맘으로서의 삶,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어떤 작품들을 어떠한 생각으로 썼는지, 작가로서의 삶, 현재의 토니 모리슨이 존재하기까지 할머니, 엄마 등 그녀를 만들어준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흑인이자, 여성이자, 어머니이자, 딸이자, 소설가로서 토니 모리슨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토니 모리슨이 쓴 작품들을 사랑하기에 작가로서 그녀의 생각과 삶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그런 중 “토니 모리슨은 사랑이 얼음을 깨어가며 찾아든 장소들에 대해서 쓴다.”는 평론가 존 레너드John Leonard의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나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읽고서 “사랑이 너무 짙어서”라는 제목의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던 구절이다. 그러니까 작중 인물인 ‘폴 디’는 ‘세서’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사랑은 너무 진하다.”라고. <빌러비드>에서 그려진 그 사건은 사랑이 너무 짙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평론가는 그녀의 작품을 일컬어 “사랑이 얼음을 깨어가며 찾아든 장소들에 대해서 쓴다”라고 말한다. 인터뷰어는 토니 모리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사랑이 은유라고 했다, 당신의 소설에서 사랑은 아주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나타나고, 당신의 소설 속 여성은 사랑을 위해 대부분 엄청난 일들을 한다고. 예컨대 보험금을 타서 집을 사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쓰려고 스스로 다리를 절단하는 할머니이거나 노예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엄마이거나 등등. 이것은 과연 어떤 사랑이냐고.
토니 모리슨은 그 질문에 그건 매우 격렬한 사랑이라고, 강력하고 심지어 왜곡된 사랑이라고 답한다. 그들이 너무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토니 모리슨은 그 자신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여기 있고 떠나기 전에 존중받을 만한 일, 남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누군가를 돌보는 일, 타인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일은 아주 흥미롭고 까다로우며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무척 힘든 일입니다.”(<토니 모리슨의 말>, 45쪽)
내 의지로 여기 있다고? 그 의미를 여러 번 곱씹어본다.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선택권이 있었다면 태어나지 않는 쪽을 골랐을 거라고 늘 생각하던 나에게 토니 모리슨의 이 말은 조금 충격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토니 모리슨 그녀 자신은 물론 그가 그리는 세계의 인물들-대개 흑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부류, 아니 어쩌면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으리라 생각하기 쉬운 부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빌러비드>의 ‘세서’는 자식에게까지 노예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제 손으로 딸을 죽이고 마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인물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을 창조한 사람이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여기 있다.”고 말하다니 나 같은 염세주의자는 한방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어지는 토니 모리슨의 대답에서 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처럼 강한 사람이기에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구나 수긍하게 된다. 인터뷰어는 “사랑이 너무 진해졌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고 묻는다. 토니 모리슨은 사랑이 “넘칠 때는 언제이고 부족할 때는 언제”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곧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문제이므로 사랑하기를 시도해봐야 한다고 답한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빈곤해진다고, 마음이 빈곤해진다고.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은 재미도 없고 위험도 없다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삶이라고. 사랑은 살고 싶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삶을 당당한 것, 당당한 사건으로 만들어준다고. “사람들은 상처받기 싫어하죠. 남겨지고 싶어 하지 않아요. 버려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꼭 남에게 주는 선물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실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데 말입니다.”(같은 책, 49쪽)
그러니까 토니 모리슨이 흑인 여성의 범주 안에서-그녀는 결코 자신이 흑인 여성 작가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 범주 안에서 누구보다 철저하게 흑인의 이야기를 쓴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그 정도 실력이면 이제 보편적인 이야기, 그러니까 흑인의 범주를 벗어난 이야기를 쓰라고도 말했다지만 그녀는 그러기를 거부한다. 이렇게 일축한다. “보편적인 예술이 더 훌륭하다는 은근히 인종차별적인 주장은 철저히 꾸며낸 것.”(같은 책, 30쪽)이라고- 자기 인종의 이야기를 때로는 치부를 드러내 보이면서까지 줄기차게 쓴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블랙, 그러니까 흑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짙고 깊은 사랑이 돌고 돌아와 그녀 자신에게 선물이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랑은 흑인을 무조건 영웅적으로 그리거나 아름답게 그리려는 그 시절의 풍조마저 거부하고 가장 진실한 방식으로 가장 눈에 보이지 않는 흑인의 이야기를 쓰는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리라.
이를테면 단지 가장 푸른 눈동자를 갖고 싶어 한 흑인 소녀의 이야기인 <가장 푸른 눈>이 그렇다. 그녀의 첫 작품인 <가장 푸른 눈>의 주인공은 흑인 소녀이다. 토니 모리슨이 보기에 연민의 감정으로든 멸시의 감정으로든 예술적 검토 대상이 된 모든 인물 가운데 특히 부재가 두드러진 이들은 취약한 흑인 소녀였다. 그들은 문학 작품에 등장해도 그저 웃음거리, 동정의 대상, 이해의 노력이 결여된 동정의 대상으로만 그려졌다. 그런 소외된 자들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이를 문학적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런 존재에 대한 짙은 애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빌러비드>의 ‘세서’,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인 그녀는 실존 인물인 ‘마거릿 가너’에서 따온 인물이다. 흑인 노예 여성이었던 마거릿 가너는 1856년 스스로 자신의 두 살배기 딸을 살해한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의 역사를 깊이 탐구하면서도 영웅이거나 자랑할 만한, 본보기 삼을 만한 인물을 내세우기보다는 언제나 보통 사람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더 관심을 보였고 그들의 삶을 문학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깜둥이’, ‘노예’, ‘흑인’이라 불리며 “모든 음침한 상징”이거나 “유령의 출몰”과 같은 사건이거나 “무질서, 붕괴, 성적 일탈”의 표상으로서만 그려지곤 하던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고 그들도 피와 살을 지닌 존재이며 그렇기에 감정이 있고 가족이 있으며 삶이 있고, 그런 삶의 맥락 속에 자기들만의 이야기가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이 모두 짙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이런 세상을 꿈꾼다. ‘아이. 새로운 삶, 악이나 병에 면역이 된, 납치, 구타, 강간, 인종차별, 모욕, 상처, 자기혐오, 방기로부터 보호받는, 오류가 없는, 오직 선(善) 뿐인, 노여움은 빠진’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237쪽)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부디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241쪽)라고 끝맺는다. 이 또한 이제는 그 짙은 사랑에서 비롯된 소망이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 앞에는 아직 읽지 않은 토니 모리슨의 책이 몇 권 놓여 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책으로 <빌러비드>를 꼽았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최고의 작품은 그게 아니란다. 그 작품부터 읽어볼까? 그 깊고 짙은 사랑을 느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