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재미나게 읽은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가 있다. 여느 오리들과 달리 생겨서, 그런 터에 가장 못난 오리 취급을 받던 그 오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 백조였다는 이야기. 스토리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 동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그 못난 오리가 태어날 때의 장면이다. 그러니까, 알에서 깨어나 눈을 딱 떴는데 눈앞에 있던 오리, 처음 본 그 오리를 당연하다는 듯 엄마라고 생각하는, 본능처럼 받아들이는 그 묘사 때문이었다.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 못난 오리가 처음 본 대상에 품었던 감정이 ‘각인’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인은 머릿속에 새겨 넣듯 깊이 기억되는 것 또는 그 기억을 말한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학습 양식의 하나이기도 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한정된 시기에 습득해 영속성을 지니는 행동을 뜻하기도 한다. 미운 오리, 실은 백조 새끼의 각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에게도 각인은 있다. 미운 오리의 그 “처음”처럼,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등등 대다수 인간은 ‘처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 의미의 ‘처음’ 말고도 인간은 어떤 경험의 ‘처음’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처음 글자를 읽었을 때, 첫걸음(정작 본인은 알지 못할), 처음 먹은 음식, 처음 자전거를 탄 날, 처음 흰 눈을 본 날, 첫 여행, 처음 마신 술…. 예술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도 좀처럼 잊기 어렵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왔기에 어떤 책이 처음 읽은 책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마도 동화책이리라. 처음 들은 음악? 글쎄 그것도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처음 미술관에서 본 그림만큼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나의 십 대를 떠올리면 바스키아의 이름이, 그의 그림이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학교 숙제 때문에 친구들과 미술관을 찾았던 것 같다.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친구들이 빨리 팸플릿이나 챙겨서 가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느 그림 앞에서 충격 비슷한 것을 느끼곤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런 낙서가 그림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강렬하잖아! 바스키아라는 이름이 각인되었고,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도,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것도, 게이라는 것도, 그라피티라는 장르도 모두가 내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바스키아는 지금도 내가 미술관을 거닐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이다. 그의 그림 한 장으로 인해 나는 종종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한 장으로 삶이 조금 달라지는 사람은 여기에도 있다. 그는 카라바조의 그림 한 장에 홀딱 반한다. 바스키아에 매료당한 나처럼 그 또한 십 대이다. 프랑스의 작가 야닉 에넬은 고등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카라바조의 그림 속 여성의 모습에 강렬히 매혹된다. 그가 반한 그림이 카라바조의 작품이라는 것도 모른 채, 게다가 그 그림이 실은 대형 그림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 그림에, 그림 속 소녀에게 빠져 들어간다. 여름 방학을 맞이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그는 소녀와 이별하기 싫어서 집에 가는 것이 반갑지 않다. 소녀의 그림이 실린 도록을 빌려가려고 하지만 도록은 대출이 금지되어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는 그래서 큰 결심을 한다. 어쩌면 생애 첫 비행(非行). 그녀를 훔치기로 마음먹는다. 도서관에서 도록을 펼치고 한참 주위를 살피던 그는 마침내 소녀의 얼굴이 담긴 페이지를 칼로 도려내서 자기의 품 안에 넣는 데 성공한다. 이 납치가 달갑지는 않은 것일까. 반쯤 찡그린 듯한 표정의 소녀, 그 소녀가 그의 품 안에 있다! 그녀를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듯한 소년. 생애 첫 비행(非行)은 비행(飛行)이 된다.
그 후 소년은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이미지와 함께 살아간다. 한 편의 세계를 쌓아가면서 성장한다. <고독한 카라바조>는 그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마침내 그 그림의 진실을 알기까지, 그 강렬한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라는 작가에게 다가가는 욕망과 열정의 기록이다. 검은 벨벳 커튼을 배경으로 서 있는 소녀. 그녀의 귀에 걸린 진주와 나비 리본, 부드러운 어깨선과 눈빛은 그에게 단지 그림 한 장이 아니다. 그림 속 소녀를 향한 욕망과 짝사랑은 15년이 지난 후 로마의 미술관에서 마침내 절정에 달한다. 소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의 바로 그 유디트였다. 한 남자의 목을 베고 있는 유디트. 찡그린 듯한 표정의 진실을 마침내 알게 되는 소년. 강렬해서 아름답지만 그만큼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소년, 아니 이제 청년이 된 야닉 에넬은 말을 잃는다. 자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랑했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그 욕망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 깨닫는 그. 에넬은 그 욕망의 강렬한 자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하고 그것은 하나의 문학으로 빚어진다.
유디트를 향했던 맹목적인 사랑은 유디트를 창조한 카라바조로 확장된다. 에넬은 곳곳으로 여행 갈 때마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러 다닌다. 그럴 때마다 그의 그림에 대해 점점 더 잘 알아가는 것 같았고, 카라바조의 그림은 에넬의 삶에서 서서히 진실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에 몰두하면서 이 경이적인 검은색 배경에. 이 엄청난 폭력의 폭발에, 이 무의미한 포도송이에, 이 성인들의 몸짓에, 이 사랑에, 신을 향한 이 시선에, 범죄에, 성적 욕망에, 지각 가능한 죽음의 공간에”(p.97) 자신을 맡김으로서 그는 배운다. 그는 점차 카라바조의 열성적인 삶과 그 삶에 함께하는 고통스러운 전설에 조금씩 빠져들면서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궁극의 고독을 경험한 사람이었을 카라바조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나쁜 놈, 도망 다니는 범죄자, 억제되지 않은 성적 취향을 가진 방탕아로서 유난스러운 삶”을 살았던, “비용, 사드, 랭보를 섞어놓은 악마”라고 불리던 그 남자를 향한 사랑은 그칠 줄 모르고 카라바조의 인물들이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광채를 띠고 있어, 우리가 공유하는 그 어떤 삶보다도 더 팽팽하고 더 생생하고 더 아름다운”(p.66) 작품이라고 치켜세우게 된다.
이보다 더 완벽한 사랑이 있을까. 한 장의 이미지에서 시작된 격렬한 욕망이 삶 전체를 뒤흔드는 일…. 야닉 에넬은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림은 영혼들이 서로 만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장소라는 것”(p.188)이라고. “한 여자를 생각하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그는 그 한 장의 그림과 카라바조를 향한 사랑을 아름다운 언어로 옮긴다. 카라바조의 빛, 그림 속 살의 떨림, 침묵 속에서 도약하는 손의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은 언어로 옮겨져 새로운 현실을 빚어낸다. <고독한 카라바조>는 홀로 있는 시간, 무언가에 압도당했던 순간, 말할 수 없던 감정을 따라가며 생겨난 문장들로 이루어진다. 예술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고, 그 흔들림이 어떻게 글로 되살아나 다른 이들의 마음에서 또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때문에 홀로 무언가에 압도당해 각인된 경험을 가진 모든 이들이게 에넬의 이 사랑은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간다.
에넬은 이 아름다운 열정의 기록이 끝나갈 즈음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계속해서 카라바조와 함께 살고 싶다고. 1년 동안 그랬듯이 온종일 전문 서적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계속 보고, 그림의 디테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다고. 마치 유디트가 자신의 귀걸이를 풀어 내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놓아주기라도 한 듯이 내게 맡겨진 것 같은 그 인물들에게 마음을 열고 싶다고…. 그림 한 장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하나의 예술 작품 또는 그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하나 같이 우리가 사랑하고 욕망하는 그것 안에서 계속 살고 싶게 한다. 그럼에도 언제고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로마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창문을 열고 언덕까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세 번 그 이름을 외친다고 한다. 에넬은 이 책을 이렇게 끝맺는다. “카라바조! 카라바조! 카라바조!” 과연 나에게, 또 당신에게 세 번 부를 그 이름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