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카라바조
야닉 에넬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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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재미나게 읽은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가 있다. 여느 오리들과 달리 생겨서, 그런 터에 가장 못난 오리 취급을 받던 그 오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 백조였다는 이야기. 스토리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 동화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그 못난 오리가 태어날 때의 장면이다. 그러니까, 알에서 깨어나 눈을 딱 떴는데 눈앞에 있던 오리, 처음 본 그 오리를 당연하다는 듯 엄마라고 생각하는, 본능처럼 받아들이는 그 묘사 때문이었다. 좀 더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 못난 오리가 처음 본 대상에 품었던 감정이 ‘각인’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인은 머릿속에 새겨 넣듯 깊이 기억되는 것 또는 그 기억을 말한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학습 양식의 하나이기도 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한정된 시기에 습득해 영속성을 지니는 행동을 뜻하기도 한다. 미운 오리, 실은 백조 새끼의 각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에게도 각인은 있다. 미운 오리의 그 “처음”처럼,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등등 대다수 인간은 ‘처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 의미의 ‘처음’ 말고도 인간은 어떤 경험의 ‘처음’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처음 글자를 읽었을 때, 첫걸음(정작 본인은 알지 못할), 처음 먹은 음식, 처음 자전거를 탄 날, 처음 흰 눈을 본 날, 첫 여행, 처음 마신 술…. 예술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도 좀처럼 잊기 어렵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왔기에 어떤 책이 처음 읽은 책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마도 동화책이리라. 처음 들은 음악? 글쎄 그것도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처음 미술관에서 본 그림만큼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나의 십 대를 떠올리면 바스키아의 이름이, 그의 그림이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학교 숙제 때문에 친구들과 미술관을 찾았던 것 같다.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친구들이 빨리 팸플릿이나 챙겨서 가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느 그림 앞에서 충격 비슷한 것을 느끼곤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런 낙서가 그림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강렬하잖아! 바스키아라는 이름이 각인되었고,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도,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것도, 게이라는 것도, 그라피티라는 장르도 모두가 내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바스키아는 지금도 내가 미술관을 거닐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이다. 그의 그림 한 장으로 인해 나는 종종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한 장으로 삶이 조금 달라지는 사람은 여기에도 있다. 그는 카라바조의 그림 한 장에 홀딱 반한다. 바스키아에 매료당한 나처럼 그 또한 십 대이다. 프랑스의 작가 야닉 에넬은 고등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카라바조의 그림 속 여성의 모습에 강렬히 매혹된다. 그가 반한 그림이 카라바조의 작품이라는 것도 모른 채, 게다가 그 그림이 실은 대형 그림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 그림에, 그림 속 소녀에게 빠져 들어간다. 여름 방학을 맞이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그는 소녀와 이별하기 싫어서 집에 가는 것이 반갑지 않다. 소녀의 그림이 실린 도록을 빌려가려고 하지만 도록은 대출이 금지되어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는 그래서 큰 결심을 한다. 어쩌면 생애 첫 비행(非行). 그녀를 훔치기로 마음먹는다. 도서관에서 도록을 펼치고 한참 주위를 살피던 그는 마침내 소녀의 얼굴이 담긴 페이지를 칼로 도려내서 자기의 품 안에 넣는 데 성공한다. 이 납치가 달갑지는 않은 것일까. 반쯤 찡그린 듯한 표정의 소녀, 그 소녀가 그의 품 안에 있다! 그녀를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듯한 소년. 생애 첫 비행(非行)은 비행(飛行)이 된다.  

그 후 소년은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이미지와 함께 살아간다. 한 편의 세계를 쌓아가면서 성장한다. <고독한 카라바조>는 그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고 마침내 그 그림의 진실을 알기까지, 그 강렬한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라는 작가에게 다가가는 욕망과 열정의 기록이다. 검은 벨벳 커튼을 배경으로 서 있는 소녀. 그녀의 귀에 걸린 진주와 나비 리본, 부드러운 어깨선과 눈빛은 그에게 단지 그림 한 장이 아니다. 그림 속 소녀를 향한 욕망과 짝사랑은 15년이 지난 후 로마의 미술관에서 마침내 절정에 달한다. 소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의 바로 그 유디트였다. 한 남자의 목을 베고 있는 유디트. 찡그린 듯한 표정의 진실을 마침내 알게 되는 소년. 강렬해서 아름답지만 그만큼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소년, 아니 이제 청년이 된 야닉 에넬은 말을 잃는다. 자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랑했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그 욕망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 깨닫는 그. 에넬은 그 욕망의 강렬한 자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하고 그것은 하나의 문학으로 빚어진다. 

유디트를 향했던 맹목적인 사랑은 유디트를 창조한 카라바조로 확장된다. 에넬은 곳곳으로 여행 갈 때마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러 다닌다. 그럴 때마다 그의 그림에 대해 점점 더 잘 알아가는 것 같았고, 카라바조의 그림은 에넬의 삶에서 서서히 진실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에 몰두하면서 이 경이적인 검은색 배경에. 이 엄청난 폭력의 폭발에, 이 무의미한 포도송이에, 이 성인들의 몸짓에, 이 사랑에, 신을 향한 이 시선에, 범죄에, 성적 욕망에, 지각 가능한 죽음의 공간에”(p.97) 자신을 맡김으로서 그는 배운다. 그는 점차 카라바조의 열성적인 삶과 그 삶에 함께하는 고통스러운 전설에 조금씩 빠져들면서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궁극의 고독을 경험한 사람이었을 카라바조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나쁜 놈, 도망 다니는 범죄자, 억제되지 않은 성적 취향을 가진 방탕아로서 유난스러운 삶”을 살았던, “비용, 사드, 랭보를 섞어놓은 악마”라고 불리던 그 남자를 향한 사랑은 그칠 줄 모르고 카라바조의 인물들이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광채를 띠고 있어, 우리가 공유하는 그 어떤 삶보다도 더 팽팽하고 더 생생하고 더 아름다운”(p.66) 작품이라고 치켜세우게 된다. 

이보다 더 완벽한 사랑이 있을까. 한 장의 이미지에서 시작된 격렬한 욕망이 삶 전체를 뒤흔드는 일…. 야닉 에넬은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림은 영혼들이 서로 만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장소라는 것”(p.188)이라고. “한 여자를 생각하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그는 그 한 장의 그림과 카라바조를 향한 사랑을 아름다운 언어로 옮긴다. 카라바조의 빛, 그림 속 살의 떨림, 침묵 속에서 도약하는 손의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은 언어로 옮겨져 새로운 현실을 빚어낸다. <고독한 카라바조>는 홀로 있는 시간, 무언가에 압도당했던 순간, 말할 수 없던 감정을 따라가며 생겨난 문장들로 이루어진다. 예술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고, 그 흔들림이 어떻게 글로 되살아나 다른 이들의 마음에서 또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때문에 홀로 무언가에 압도당해 각인된 경험을 가진 모든 이들이게 에넬의 이 사랑은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간다. 

에넬은 이 아름다운 열정의 기록이 끝나갈 즈음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계속해서 카라바조와 함께 살고 싶다고. 1년 동안 그랬듯이 온종일 전문 서적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계속 보고, 그림의 디테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다고. 마치 유디트가 자신의 귀걸이를 풀어 내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놓아주기라도 한 듯이 내게 맡겨진 것 같은 그 인물들에게 마음을 열고 싶다고…. 그림 한 장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하나의 예술 작품 또는 그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하나 같이 우리가 사랑하고 욕망하는 그것 안에서 계속 살고 싶게 한다. 그럼에도 언제고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로마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창문을 열고 언덕까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세 번 그 이름을 외친다고 한다. 에넬은 이 책을 이렇게 끝맺는다. “카라바조! 카라바조! 카라바조!” 과연 나에게, 또 당신에게 세 번 부를 그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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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5-06-17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음악이라고 얘기를 하니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있던 도이치 그라모폰 60개 테이프 세트가 생각나요.
클래식에서 유명한 몇개 곡들을 편집해 놓은 테이프 세트였는데, 강원도 살면서 없는 살림에 아버지가 굳이 무리해서 산 것이었겠죠. 저는 어렸을 때도 뭔가 듣는 걸 좋아해서 낮에 혼자 당시 유행하던 심형래 캐롤 테이프, 국민서관에서 나온 동화 테이프 등을 마르고 닳도록 듣다가 너무 지겨워지면 결국 뭔지도 모르는 그 도이치 그라모폰 테이프 중 하나를 아무거나 골라 플레이어에 넣고 들었거든요. 그러다 어떤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를 했는데 너무 너무 무서운 곡이 흘러 나오는 거예요. 방에 혼자 있었는데. 그래서 다급히 정지 버튼을 눌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곡은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였답니다.
너무 강렬한 기억은 절대 절대 안 사라지나봐요.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는 아직도 무서워서 잘 못들음 ㅋㅋㅋ )
바스키아는 저도 정말 좋아했어요. 요즘 연예인 겸 화가라고 칭하는 자들의 추구미가 결국 바스키아인 것 같아서 그들의 그림을 볼때마다 이상하게 불쾌해지곤 합니다.ㅋㅋㅋ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카라바조의 그림은 의외로(?)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이예요. 소년이 너무 잘생기고 표정이 너무 섹슈얼하고 분위기도 좋고 하여튼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 한때 제 전자책 표지였어요.
저희 사무실 에어컨은 드디어 교체되서 너무 너무 시원하네요. 새삼 에어컨을 발명해주신 캐리어님에게 감사하는 요즘입니다.
건강하세요. 잠자냥님!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5-06-17 14:17   좋아요 1 | URL
<도이치 그라모폰 60개 테이프 세트>! 전 이거 CD세트로 있어요. 같은 구성일지 모르겠는데 비슷하겠지요(심형래 캐롤 테이프에서 빵 터집니다). 저도 듣는 걸 좋아한 어린이였는지 글씨 깨우치기 전에는 한국전래동화테이프 많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 최초의 책은 오디오북이었군요?! ㅋㅋㅋㅋㅋㅋ 너무 너무 무서운 곡이라고 하셔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도입부인가 싶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벨리우스였군요.

케이님도 바스키아 좋아했군요! 전 바스키아는 그 이후로 보면 아련해지는 화가입니다. 왜 아련한지 원 ㅋㅋㅋ

<과일 바구니 든 소년> 좋아하시는구나. 이 책에서도 그 작품하고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을 섹슈얼리티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동성애 성향까지 짚으면서. 저는 의외로(?) 카라바조가 그린 프란체스코 그림 좋아해요. <묵상하는 성 프란체스코>(특히 해골 든 손)도 그렇고 <황홀경에 빠진 프란체스코>도 그렇고... 아 이 그림도 뭔가 에로틱하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무실 시원해져서 다행이에요. 건강 유의하시고 여름 내내 시원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다락방 2025-06-17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너무나 부럽습니다. 저는 바스키아 그림을 봤지만 어떤 인상도 받지 못했기에 바스키아 그림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그로 인해 미술관에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는 잠자냥 님이, 그런 경험을 가진 잠자냥 님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글쎄요, 그림이라.. 저는 그림을 보고 좋아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고 감탄한 적도 있지만, 이렇게 생애를 뒤흔들만큼의 강한 기억은 가진게 없네요. 저는 카라바조에 대해 딱히 호감을 품기 보다는 카라바조를 이렇게 만든 주변 사람들과 그 환경은 어떤 것이었을까가 더 궁금한 사람이긴 하지만, 잠자냥 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한 화가에 대해(그게 음악가나 작가여도) 이렇게까지 애정하고 내내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런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갖는 감정은 아닐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5-06-17 15:03   좋아요 0 | URL
바스키아가 근육질 남자로 그렸으면 어땠을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님도 잘 생각해보면 그런 게 있을 것 같은데요,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으음.

아무튼...

다락방! 다락방! 다락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6-1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스토리가 소설인 줄 알았는데 에세이군요! 아니, 그,,, 적장 모가지 자르는 그 유디트 그림,, 얼굴부분만 보고 반한 건가요? ㅋㅋㅋㅋㅋ 아 정말 충격이었을 듯!

잠자냥 2025-06-18 09:43   좋아요 0 | URL
미술 관련 에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굴 부분, 정확히는 저 책 표지의 저 부분만 보고 반한 거랍니다. 반할만한가요? ㅋㅋㅋ
근데 문제는 심지어 저 여자 닮은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하필이면 저 전체 그림을 보러 간 그곳에 그 여자 친구랑 같이 가서 그 그림을 발견............. ㅋㅋㅋㅋㅋㅋㅋㅋ 여친 얼굴 썩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6-18 14:09   좋아요 0 | URL
아 저 이 댓글 달 때 표지 그림이 아니라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으로 착각했네요 ㅋㅋ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
릴리 킹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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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고 있다. 이 여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피었다가 질까. 그 여름 한때에 그칠 사랑도 있겠고, 여러 번의 여름을 함께 보내는 사랑도 있으리라. 다른 모든 계절에 피었다 지는 사랑도 있겠지만 어쩐지 여름에 더 많은 사랑이 피어날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릴리 킹의 단편 모음집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을 읽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은 ‘겨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여름을 떠올리는 것일까.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의 속성이 사랑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뜨겁지만 결국 어느 지점에는 서늘한 가을에 자리를 물려주는 것까지도….

릴리 킹 또한 그런 사랑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지 이 책에는 여름 한때 맹렬히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사랑이 여럿 그려진다. 첫 번째 작품인 <괴물>이 그 뜨거운 여름에 가장 어울린다. 열네 살 소녀 ‘캐럴’은 여름 방학을 맞이해 어느 대저택에서 상주 베이비시터로 근무하게 된다. 부모와 떨어져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캐럴. 이 대저택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다. 이 노부부에게 베이비시터가 필요할까 싶은데, 알고 보니 파이크 부부의 장성한 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 차 놀러와 있다. 캐럴은 아이들을 돌보는 틈틈이 여가 시간을 내 자기 방에서 <제인 에어>를 읽으며 일기를, 때로는 소설 같은 일기를 써내려 간다. 이런 등장인물들만으로는 아무리 봐도 캐럴에게 여름의 사랑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럴 리가. 이윽고 파이크 부부의 아들 ‘휴’가 이 집안에 나타난다. 캐럴은 이렇게 쓴다. 그가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캐럴의 일기장에는 휴의 이름이, 휴를 묘사한 문장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사랑의 감정은 공정하게 흐르지 않는다. 캐럴의 사랑 또한 그렇다. 열네 살 소녀가 마음을 키우기에 휴는 너무 나이가 많다. 이미 이십대를 훌쩍 넘긴 성인이다. 심지어 그는 유부남. 와이프와 트러블이 생기자 집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터이다. 파이크 집안의 어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으며 이런 사실을 다 알게 되었으면서도 캐럴은 휴를 향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그를 향한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집안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의 장난기, 유머러스함, 농담, 짓궂음, 웃는 방식, 길고 가느다란 몸…. 그의 모든 면이 이 소녀를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휴는 어떨까? 휴에게 이 꼬마 숙녀는 단지 자기의 조카들을 돌보는 베이비시터에 불과했다. 관심조차 가지 않았던 이 소녀에게 휴가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일기장 때문이다. 아, 저 꼬마가 나를 좋아한단 말이지? 갑자기 다른 눈길로 캐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성년이고 유부남인 데다가 고용주의 아들이다. 그러나 캐럴은 미성년에 피고용인. 이 공정하지 못한 사랑은 어떻게 될까. 캐럴은 이 사랑이, 열병이 지나간 뒤, 이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또 다른 여름의 소년도 있다(<도르도뉴에 가면>). 소년은 부모님이 여행을 떠난 사이 자신을 돌봐주러 온 대학생 ‘에드’, ‘그랜트’와 자유분방한 시간을 보낸다. 그야말로 꿈같은 나날이다. <괴물>의 캐럴이 베이비시터로 여름 한때 일하면서 어른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 소년은 베이비시터들의 돌봄을 받으면서 어른의 사랑을 엿보게 된다. 엄숙한 부모 아래에서는 해볼 수 없던 것들-냉동식품을 먹으며 일상의 규칙에서 벗어난 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소년. 이 소년의 눈에 한없이 자유로운 에드와 그랜드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중 ‘에드’가 더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 어찌 아니하랴. 그랜트 또한 에드를 남몰래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면서 훔쳐보던 여름의 기억은 이들에게 어떤 빛깔로 남게 될까. 확실한 것은 에드와 그랜트의 사랑의 크기, 아니 애정의 크기와 방향은 너무도 달랐기에 그 기억의 빛깔이 똑같은 색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두운 갈색 또는 암적색에 가깝지 않았을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에 품고 살다가 더 큰 상처를 얻게 되는 이는 여기 또 있다. <시애틀 호텔>의 ‘나’는 대학 시절 짝사랑을 앓는다. 고백이라도 시원하게 해보고 거절당하면 그나마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고백은커녕 짝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서 생기는 고민을 일일이 들어주기에 바쁘다. 좋아하지 않는 척, 관심 없는 척, 아무렇지 않는 척척척..... 그럴 수밖에. 하필 그 짝사랑의 대상이 동성 친구 ‘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을 숨기고 친구처럼 함께 지내던 ‘나’는 폴이 결혼할 즈음에야 자신이 게이라고 털어놓는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돌아온 싸늘한 반응에 ‘나’는 폴과 그렇게 멀어진다. 이 한 번의 상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폴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여전히 약해지는 ‘나’- 중년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폴의 이름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고, 그런 폴에게서 그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연락이 온다. 시애틀의 한 호텔에서 만나자는 폴의 제안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재회를 기대하며 나가는 ‘나’. 이 만남은 과연 ‘나’의 바람대로 흐를까.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에 그려지는 사랑의 모습은 대개가 이렇게 어긋난 형태이다, 때문에 상처와 고통, 씁쓸함을 남기고 사라진다. 어른을 사랑하거나 동경하는 소녀/소년이 등장하기도 하고(<괴물>, <도르도뉴에 가면>), 성정체성이나 성적 기호가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절망하기도 한다(<시애틀 호텔>, <도르도뉴에 가면>), 이미 짝이 있는 사람을, 그런 줄 알면서도 욕망하게 되어 상처를 한 가득 받기도 하고(<괴물>, <타임라인>), 금기와도 같은 관계이기에 더욱 욕망에 불붙는 사랑도 있다(<망사르드>). 사춘기의 열병 같은 사랑을 그리거나 주인공이 10대인 경우도 많은데(<괴물>, <도르도뉴에 가면>, <북해>), 작가 자신의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을 10대 시절의 반영이기도 하겠지만, 도저히 이성(理性)으로는 아닌 줄 알면서도 번번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나락에 떨어질지언정 결국 회복하고 한 뼘쯤은 자라는, 성장통 같은 사랑의 속성을 그리기에는 10대를 화자로 삼는 것이 어울렸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짝사랑하던 대상으로부터 환대와 응답을 받는, 보기 드물게 행복한 경우도 있지만(<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 이 단편집에서 그려진 여러 형태의 사랑을 지켜보고, 또 그런, 그와 비슷한 사랑을 해본 이들은 안다. ‘미첼’에게 그가 그토록 원하던 ‘버섯 수프’를 사다 준 ‘케이트’의 그 다정한 마음조차 언젠가는 식어버릴 것임을….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함께 버섯 수프를 나눠 먹으며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에 도취하는 순간도 있지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따뜻한 수프도 언젠가는 식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 여름을 기다릴 것이고, 누군가를 위한 버섯 수프를 기꺼이 마련할 것이다. 사랑이, 외로운 사람이 또 다른 외로운 마음을 찾아가듯이.

사랑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파멸로 몰아가기도 한다. 잘못된 상대를 선택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어찌할 수 없음, 바로 그 불가항력이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사람에게 어김없이 찾아오고 머물다가 또 그렇게 제자리를 떠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흐르고 다시 또 봄, 여름이 찾아오듯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뜨겁던 여름은 1994년의 여름이다. 그런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세계는 나날이 더 뜨거워지고 있다. 사랑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한 사랑이 저물었을 때 그런 사랑은 또 없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단지 형태만 다를 뿐 그보다 더 깊고 뜨거운 사랑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랑을 잃고, 다른 여름을 기다릴 당신에게도, 당신의 사랑도 부디 그렇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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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5-15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도우의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보면요, 거기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이 무사하니까.‘

그 구절이 생각나는 리뷰의 마지막이네요. 이 책 아주 좋을 것 같아서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어제 잠자냥 님께 땡투하고 책 산 사람이었다가 오늘 잠자냥 님께 땡투하고 책 산 사람 될 예정입니다. 이만 총총.

잠자냥 2025-05-15 10:31   좋아요 0 | URL
아니 갑자가 땡투 적립금이 우수수... 늘어났더라니... 이 인간, 못 말려!
그나저나 다락방아... <달리기의 기쁨 - 온몸으로 불안을 깨부수며 나아가는 해방에 대하여> 이런 책 나왔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5-15 12:05   좋아요 0 | URL
저 요즘에 달리기 너무 하기 싫고 또 너무 못해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ㅋㅋ 그렇지만 책은 어쨌든 담아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만 담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5-15 12:51   좋아요 0 | URL
오 다락방님 이도우 읽으셨군요!
책 정리 하셨다더니, 정리할 게 끝나지 않을 예감 ㅋㅋㅋ

잠자냥 2025-05-15 13:14   좋아요 0 | URL
엥? 안 달리고 있다고...?! 놀라운데...?!

다락방 2025-05-15 14:51   좋아요 1 | URL
아뇨 어제도 달리긴 했는데 영 안달려진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몸이 무거워서겠죠.. (먼 산)

Forgettable. 2025-05-15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에 어떤 여름을 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ㅎㅎ 사랑이야기라 주저되지만 이 책도 담아 갑니다.

잠자냥 2025-05-15 13:1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달랑 선풍기 두 대 달린 교실에서 여름방학 보충 수업받는 중이었습니다.......-_-;;
심지어 교실은 4층이라... 너무 더웠....

독서괭 2025-05-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폴 만나러 가는 “나” 엄청 상처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ㅠㅠ
언젠가 식어버릴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겠죠?

잠자냥 2025-05-15 13:16   좋아요 1 | URL
말해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닌 폴 그놈이 그럴 줄이야..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5-15 16:27   좋아요 0 | URL
진짜 말해줄 건가요? ㅋㅋㅋ

잠자냥 2025-05-15 16:29   좋아요 0 | URL
진짜...? 원한다면 비댓으로 알려줌. ㅋㅋㅋㅋㅋㅋㅋㅋ

2025-05-15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15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5-05-15 17:06   좋아요 0 | URL
머야 이야기 듣고 기절한 거냥 괭?!ㅋㅋㅋㅋ

2025-05-15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5-05-15 17:09   좋아요 1 | URL
사실 알려달라고 하면 잠자냥님이 “안 알려주지롱 메롱” 직접 읽어보아라 하실 줄 알았는데 진짜 알려줘서 놀라고
내용에 또한번 놀람요 ㅋㅋ

케이 2025-05-1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4년의 여름 맞은편 동에 살던 친구 집에 가서 여름방학 동안 밀린 일기를 쓰던 기억이 나요. 제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땀띠가 났던 여름이었죠. 전 더운 걸 좋아하고 심지어 더위를 즐기는 사람이었는데요. 작년 여름을 겪은 후로 여름을 너무 너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크흑 다가오는 여름이 두렵군요 ㅜㅜㅜㅜ (아이들은 아무리 더워도 하원 후에 30분 이상 놀이터에서 놀아야만 하거든요.)

이 책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끝을 하나도 말씀해주지 않으시니 궁금해서라도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해피엔딩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변해버릴 사랑이라도 제대로 받아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죠...
솔직히 전 이제 그런 사랑을 준다고 해도 싫습니다. ㅋㅋㅋㅋ 닥친 다른 일 하기도 너무 벅참요.

잠자냥 2025-05-15 14:47   좋아요 1 | URL
밀린 일기 ㅋㅋㅋㅋㅋ 최근에 읽은 책에서 독일에서 살다 온 아이가 한국 학교에서 일기 검사하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강남순, <질문 빈곤 사회>) ㅋㅋㅋ 그 아이가 한국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숙제니까 하는 거지! 이랬더라는데 ㅋㅋㅋㅋㅋㅋ 암튼 밀린 일기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 더운 날;; ㅋㅋ
그해 정말 더웠죠. 좀만 덜 더웠어도.. 제 수능 점수가 10점은 올라갔을 텐데... (라고 주장해봅니다)

ㅋㅋㅋ 닥친 일 버거워서 사랑하기 싫다는 말에 빵 터졌습니다.
이 책 재미나요. 나중에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5-05-1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땡투 ㅋ 잠자냥님 리뷰보니 딱 제 취향이네요~!! 여름이었다 ㅋㅋ

잠자냥 2025-05-16 16:59   좋아요 1 | URL
땡투 고맙게 받아서 테니스 치고 맥주 사마실 때 보탤게요!
재미나게 읽으세요. 주말마다 비가 내려서 테니스 망했네요. 책 많이 읽는 주말 보내세요~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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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우리는 민주주의와 함께 다수결의 원리를 배웠다. 물론 이때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 어린 시절에 우리는 승패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또 어린 시절에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자랄수록 이 세계가 이런 가르침들이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니 이 상식이 나날이 무너져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노라면 내가 사는 이곳이나 ‘자유’라는 영역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미국이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배워온 이 상식이 무너져 가고 있음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대한민국과 미국만 그러한가.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선진국임을 자부하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조차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단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각국의 정당 및 정치인들은 그 극단 세력을 끊어내기는커녕 교묘히 연합해 자기 잇속을 채우고 세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에 인권이나 자유, 평등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퇴색하다 못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세계는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에 이 책을 펼쳤다.

 ‘극단적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시행되는데, 어떻게 소수의 다수 지배가 가능한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이 미국, 그것도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를 배경으로 쓰였음을 이해한다면 소수의 백인-엘리트 집단이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시민들의 자유 및 인권을 억압하는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유권자가 직접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 아닌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이런 방식 때문에 표를 행사하는 다수의 의지와는 어긋나는 인물이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때문에 민주당 출신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에서 패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게다가 소수의 거부권(필리버스터)을 유지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대법원 판사의 종신제 또한 권력을 소수의 엘리트들이 차지하고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형태로 흘러가기 쉽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건 우리와는 정치체제가 다른 미국의 상황이지 않은가? 우리는 국민 개개인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완벽하게 다수의 원리가 작동하는 나라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극단적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는,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진단은 이곳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 책에서는 극단 세력 때문에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이 처음 몇 쪽부터 그려진다. 그런데 이 모습은 지난해 12월 3일, 이 땅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 이후 벌어진 반민주적인 작태들과 너무나 흡사해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저자는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무늬만 민주주의자를 구분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앞서 말했던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그러니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를 존중하며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 또는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그들에게 군사 쿠데타나 폭동,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거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무늬만 민주주의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도리어 이런 반민주 세력과 손을 잡는다.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보호하거나 옹호한다. 나아가 이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면서 마이크를 쥐어주기까지 한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극단 세력이 외면당한다. 이런 세력과 결탁하는 것은 자신들의 평판에 좋지 않기 때문에 언론은 물론 정치인, 기업가, 제도권 인사들이 당연히 이들과의 접촉을 꺼린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이런 세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손을 잡고 이용할 때 극단적인 이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면서 민주주의 지형은 달라진다. 계엄 후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 및 그들을 변호해주던 집권 여당, 계엄을 옹호하는 국회의원이 나서서 반공청년단과 백골단을 자처하는 단체를 국회까지 데리고 온 일 등등이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게다가 그들은 부정선거음모론을 펼치며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모습을 줄곧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파면당한 전 대통령은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 기술적 차원에서 합법적인 형태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이 모든 행태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답은 없는가?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도리어 소수의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도구는 극단주의자나 반민주적인 몇몇의 손에 들어갈 때 특히 위험해진다. 사회가 이런 위험에 놓였을 때는 정부의 권한과 법률을 적극적으로 활용, 반민주 세력을 축출해서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보와 보수의 연정으로 반민주세력을 봉쇄하는 정책도 효과적이다. 그러나 봉쇄는 단기적 전략으로 쓰여야 하며 장기적 연합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봉쇄와 배제는 제한적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며 투표를 더 쉽게 하고 (미국의 경우) 선거인단 제도를 보통 선거로 하거나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더 쉽게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투표- 궁극적으로 유권자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서 내내 민주주의 파괴자로 묘사된 그 트럼프가 유권자의 선택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 어떤 시스템도 인간의 선택이 상식을 벗어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모든 제도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법이 극단주의자와 엘리트들의 잇속을 차리는 데 이용되듯이, 또 헌법이 독재자나 파시스트 정당에 교묘히 이용되듯이, 유권자 모두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것 같지만 투표 시간이나 장소 등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보통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듯이. 그렇기에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개혁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p.365)이라는,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는 뜻”(p.369)이라는, 결국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더 많은 민주주의”뿐이라는 제인 애덤스의 말은 지금 이 땅에서 꼭 필요한 상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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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2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이 책 안읽어서 리뷰대회 언제까지인가 확인해보니 5월 1일까지더라고요? 아 언제 읽고 언제 쓰죠? 또 모텔 잡고 읽고 써야 하나... 하하하하하

저는 어제 트윗에서 <문재인입니다> 의 부분 영상을 보았는데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문재인 전대통령 집 근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를 욕하더라고요. 왜 정상적으로 퇴임하고 이제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있으려는 사람에게 그런 폭력을 저지르는 걸까요? 왜 시간과 에너지를 그런 식으로 쓸까요? 하여간 저는 이번 대선에서 당연히, 언제나 그랬듯이, 꼭 투표하겠습니다. 저는 유권자입니다!!

잠자냥 2025-04-24 11:58   좋아요 0 | URL
5월 1일 노동절에 모텔 가는 다락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텔 가지 말고;; 깨끗하고 볕 잘드는 호텔로 가자....100만원 받을 건데 그쯤은 투자해! ㅋㅋㅋㅋ

그나저나 아니 아직도 문재인 전 대통령 집 앞 가서 그러고 있어요??
극우들 윤석열 탄핵 반대 시위 장소로 다 몰려가서 안 하는 줄 알았더니.. 밥줄 끊어지니까 또 거기로 갔군요... 그거 보면서 코인 쏘는 사람들이 더 문제 같습니다... 아니다 방송하는 놈들이나 보면서 코인 쏘는 놈들이나 다 문제.. -_-

사전 투표하고 6월 3일은 달리기도 하고 맛난 거 먹으면서 노는 겁니다~!!

잠자냥 2025-04-28 12:24   좋아요 0 | URL
락방아~ 응모기간 5월 6일까지로 늘어났어!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4-28 14:02   좋아요 1 | URL
앗 뭐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4-2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은 정치만해도 불합리한 제도들이 참 많아 보이는데 그걸 또 고치기도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나마 우리는 이번에 탄핵한게 조금은 나은점이라고 느껴요🙄 이번에 트럼프 반대 시위에 태극기 등장했더라고요ㅋㅋㅋㅋ그건 좀 웃겼어요

잠자냥 2025-04-24 14:35   좋아요 1 | URL
네, 미국은 헌법 고치기가 정말 어려운 구조 같더라고요. 아이고야.... 이 책에서는 우리의 탄핵(박근혜) 사례도 소개되고 있어요. 민주주의를 지킨 사례로요. 근데 이 책 저자도 자기네 나라에서 트럼프가 또 당선될 줄은, 대한민국에서 또 대통령이 탄핵당할 줄은 몰랐을 거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태극기라니 ㅋㅋㅋㅋ

관찰자 2025-04-24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새 ‘냉장고 파먹기‘를 책읽기에도 실천하고 있어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읽지 않은 책이나 읽었는데도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 책을 다시 읽기 하고 있는데요. 잠자냥님 이 리뷰 보니까 또 이 책, 사서 읽고 싶어지네요.ㅠㅠ. 읽고서 동참하고 싶다~. 근데 이건 딴 얘기인데, 잠자냥님은 읽은 책이 다 기억 나세요?? 저는 어쩔 때, 누워서 책꽂이를 바라보고 보고 있으면, ‘저게 무슨 내용이었더라?‘ 하는 책이 엄청 많아요. 그럼 또 새 책처럼 다시 읽어요~ ㅋㅋ >.<

잠자냥 2025-04-24 15:19   좋아요 0 | URL
저도.... 책꽂이에 읽는 책부터 읽자! 해놓고는 허구한 날 알라딘 접속해서 책 사고 그것도 부족해서;;
동네 도서관 가서 또 잔뜩 가져올 계획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은... 제가 산 책보다 덜 관심 있는 책인데도 반납 기한이 있으니까 또 그걸 먼저 읽고.. 그것참;; 무슨 욕심인지......?

읽은 책... 기억은......... 다 납니다. 안 나세요?!

뻥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읽어도 기억 희미한 책투성이에요. 아예 새 책 같기도 한 책도 있고..?
그래도 뭐 어딘가에 피와 살이 되었을리라 믿으며 또 읽습니다... ㅋㅋㅋㅋ

독서괭 2025-04-2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울❤️❤️❤️❤️❤️

관찰자 2025-04-2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책을 안사려고 했지만...... 샀습니다. 샀어요.ㅜㅜ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는 지 궁금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고, 다른 사람이 읽은 책 이야기를 읽는 것이 또 즐겁고, 그러다보면 또 책을 사게되고.... 아는 순간, 행동과 변화가 뒤따르는 것이 비단 책 사는 일에만 국한 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고로, 저는, 읽습니다.!

잠자냥 2025-04-29 10:12   좋아요 1 | URL
아하~! 알라딘에 접속하시는 한 무한반복이 될 것입니다. ㅋㅋㅋㅋ
관찰자 님도 리뷰 대회 응모하세요~!

독서괭 2025-05-01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을 부릅뜨고 투표도 열심히 해야죠.. ㅠㅜ 지금 트럼프는 ACLU인가..? 변호사단체가 열심히 나서서 막는 것 같긴 하던데,, 계엄때 행동력 보면 우리 국민들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제 5월이네요~ 잠자냥 5월도 냥냥해요~~
 
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안건우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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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크게 놀란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좀 많이 받았고요.” 법정에서는 듣기 어려운 표현인 데다가 저런 문학적인 표현을 할 법한 사람이 아닌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생경하고 어이없어 K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저런 표현을 저 사람이 어디서 주워들은 것일까. “그대 저어오오 내 마음은 호수요.” 또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런 시 구절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K는 그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더욱 놀란다. “이번 그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 지시했니, 지시를 받았니.” 뻔뻔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를 쫓는다.... 이런 말을 믿으란 말인가?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K는 또 한 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궤변을 믿는 자들이 그토록 많구나!

K는 어느 날 카뮈의 <계엄령>을 읽다가 크게 놀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작품 속 인물들 중 여럿이 실제로 그 말을 믿기에 K의 눈동자는 더 커져갔다. 호수 위의 달그림자를 쫓았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운은 202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흘러나온 말이요, 혜성이 나타났고 페스트가 창궐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운운은 1948년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 카디스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그리고 그 두 곳에서는 공교롭게도 계엄령이 선포된다.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점성술사: 물론, 아가씨, 확실하지! 하지만 조심해! 오늘 아침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거야. 잘 알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내 점괘를 뒤엎을 수도 있어. 나로서는 그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니까 말이야! (p.40)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 카디스에 불길한 혜성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카디스에 저주가 내릴 것이라 공포에 휩싸인다. 이윽고 독재자인 ‘페스트’(‘페스트’의 은유이자 실제 독재자의 이름이다)가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난다. 그는 계엄령을 내린다. 포고령은 쉽게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쓰였고 카디스 주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당연하다.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바이기 때문이다. “민중이 애매모호한 것에 길들여지도록 하기 위한 거예요. 이해를 못 하면 못 할수록 더 말을 잘 들으니까”(p.63) 카디스의 총독은 마을을 새로 나타난 독재자 ‘페스트’와 비서에게 넘기고 달아난 지 오래. 총독뿐만 아니라, 종교인, 정치인, 법률가 등등 이른바 지도자라고 추앙받던 자들은 저마다 제 살길 찾기에 바쁘다. 판사만 하더라도 제 집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 걱정은 하지 말고 집안일이나 돌보시오. 가능하면 최대한 식량을 비축해 놔. 최대한 긁어모아. 최대한 지금은 긁어모을 때!”(p.53)

독재자의 충실한 비서는 그의 명에 따라 마을 주민들을 선별해 가슴에 표식을 달기 시작한다.  마치 나치가 유대인들에 그러했듯이..... 표식은 페스트 감염을 의미한다. 하나는 페스트 의심자, 둘은 페스트 감염자, 셋은 죽어야 할 자이다. 모두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접촉 불가. 이곳에서 사랑은 이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 되어 버린다. 마을 사람들은 페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가운데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빅토리아’는 사랑하는 사이로 페스트 창궐 전에 판사인 빅토리아 아버지로부터 결혼 허락까지 받은 상태이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독재자의 비서에게 말했다가 디에고는 겨드랑이 밑에 표식을 받기까지 한다. 사랑을 말해서도 함께해서도 접촉해서도 안 되는 디에고와 빅토리아는 그들의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까. 



계염렁은 선포되었다. 그러니 명심해, 내가 도착하는 순간 감동적인 것은 더 이상 없다. 그따위 감동은 금지된다. 그 밖의 몇 가지 쓸데없는 것들, 예컨대 행복을 원하는 우습기만 한 초조함, 사랑에 빠진 이들의 얼빠진 얼굴, 풍광에 취하는 이기적인 작태, 불경한 풍자 행위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의 빈자리에 나는 조직을 이식한다. 처음에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끝에 가서는 탁월한 조직이 너절한 감동따위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75)


빅토리아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와중에도 디애고에게 ‘사랑’을 말하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이런 시국에도 여자는 로맨스 타령만 하는가?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카뮈는 내내 사랑을, 인간 감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계엄 포고령에서도 독재자가 가장 먼저 금지하는 것은 ‘감동’이다. 행복이라든가, 사랑에 빠진 얼굴이라든가, 풍광처럼 아름다움에 취할 줄 아는 것이라든가 풍자나 조롱 같은 해학의 감정 등등. 왜 그들은 사랑이나 분노, 두려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에 해답이 있다. 사랑이나 거기에서 비롯한 연대와 같은 인간적인 것이야말로 독재를, 페스트를, 파시스트를, 파시즘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넘어설 그 무엇이 된다고. 2025년 한국의 독재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연대’였음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카뮈가 역설한 그 사랑의 힘이 이 땅에서도 빛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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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11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리뷰 좋다.
역시 이 책을 사야겠습니다.
독재자는 깨어있는 시민을 싫어하고 남자들은 깨어있는 여자를 싫어하고.. 다들 등신들 같아요.

잠자냥 2025-04-11 12:28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손글씨가 더욱 빛을 발해.....

다락방 2025-04-11 15:05   좋아요 0 | URL
근데 우매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요? 너무 자기 바보 인증같아요. 으..

독서괭 2025-04-11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리뷰 좋다.
다락방님 손글씨도 참 멋지고요. 글내용도 멋지고요.
어쩜 시국에 딱 맞는 책이네요. K를 크게 놀라게 한 그대여…

잠자냥 2025-04-12 11:51   좋아요 1 | URL
실망이다 괭!! 저 아래 우리 괭들 사진 올렸는데!!!!

독서괭 2025-04-12 12:10   좋아요 0 | URL
엥!? 언제 올렸대?? 역시 사퇴할 때가 되었는가…

잠자냥 2025-04-14 09:40   좋아요 0 | URL
회장 독서괭을 파면한다!

독서괭 2025-04-14 09:57   좋아요 0 | URL
😱😱😱😱😱

독서괭 2025-05-09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다옹
 
우는 나와 우는 우는 - 장애와 사랑, 실패와 후회에 관한 끝말잇기
하은빈 지음 / 동녘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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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영화가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그렇다. 이 영화를 볼 때면 언제는 내가 ‘츠네오’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조제’가 되기도 한다. 장애를 가진 조제와 그런 조제를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그 장애가 버거워서 조제를 떠나버리고 마는, 그러고는 시도 때도 없이 조제를 생각나게 하는 물건만 보면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츠네오. 어떤 이들은 츠네오가 비겁하다고 하지만 글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이 세상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이야기한 그 영화는 비단 장애/비장애뿐만 아니라 정상인과 이른바 비정상인(퀴어)의 사랑으로도 읽힌다. 그렇기에 더 슬프게 다가온다. 몇 번을 봐도.

<우는 나와 우는 우는>, 그래서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장애를 가진 연인을 오랜 시간 만난 후 결국 헤어지게 된 비장애인이 덤덤히 써 내려간 글. 근육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연인의 이름은 ‘우’, 그러니까 조제에 견줄만한 그의 이름은 ‘우’이고, 츠네오에 견줄만한 이가 이 책을 쓴 작가 ‘은빈’이다. 말이 통하고, 한없이 웃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래서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되지만, 장애의 문턱은 아무리 그 사랑의 크기가 크다 해도 ‘빈’ 혼자 넘기에는 너무나 높다. 가족들의 비난과 반대,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에 비해 어쩐지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 아무리 간절하고 절실해도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 둘만의 공간, 섣불리 계획할 수 없는 미래, 근육이 계속 소실되어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어느 날 잠든 채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늘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와 함께 하는 삶에서 문득 문득 느껴지는 버거움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그래서 고개를 쳐드는 죄스러움과 미안함도, 헤어지고 난 후의 자책감도, 내가, 그가, 우리의 사랑이 남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가 결국에는 가늘게 뜨고 쳐다보게 만드는 그런 사랑인가, 그렇게 이상한가? 늘 되묻게 하는 세상의 시선도 그 시선이 힘겨운 나날도, 모두 공감이 간다.


여전히 걷고 싶어?
응.
비장애인이 되는 걸 자주 상상해?
그렇지는 않아.
선택할 수 있으면 근육병이 없는 인생을 선택할 거야?
당연하지.
근육병을 없애면 나를 못 만날지도 몰라.
안 되는데.

근육병에 대한 우의 입장은 늘 복잡하고 알쏭달쏭해서 나를 헷갈리게 했다. (<우는 나와 우는 우는>, p.61)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한다. 그 희박한 확률 속에서 만난 ‘은빈’과 ‘우’, ‘우’에게 장애가 있었기에 그들이 만났을까? 그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까? 확실한 것은 우는 근육병이 없다면 빈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머뭇거린다는 점이다. “안 되는데.” 자기를 죽이는 근육병과 자기를 살게 하는 사랑…. 장애와 비장애를 선택할 수 있다면, 또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정상적인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장애 없는 삶을 당연히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특수한 환경 때문에 만날 수 있었고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만날 수도 없고, 사랑하게 될 수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선택의 문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평범한 삶보다 한결 버거운 삶을 살더라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생을 선택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언제까지 순탄하고 순조로울 수 있을까. 정상성만을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들은 쉽게 배제된다. 이른바 선남선녀라는 ‘정상/이성애 커플’의 사랑이 아니면 배제와 모욕과 혐오와 차별은 공기처럼 따라다닌다. 차별금지법조차 여전히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 세상에서 빈과 우처럼 이른바 정상성을 벗어난 커플은 빈이 말했듯이 “서로를 잃어버릴 예정”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순간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었고 불화와 모욕이 곳곳에 널려 있었으며 기어코 사랑에 실패하게”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일상은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층위에서부터 아주 미묘하고 애매한 층위까지 다른 이들의 일상과 어긋나 있었다. 다른 이들이 나날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말하자면 정상(頂上)을 향해 세상의 절벽을 오르고 또 오르는 동안, 우리는 그들에겐 지극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니까 정상(正常)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더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p.92)


‘빈’과 ‘우’는 지쳐간다. 우는 자신의 병에, 빈은 장애를 지닌 사람을 연인으로 두고 그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그리고 세상의 차별에. 그들은 “집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항상 같은 내용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메시지를 받”는다. “세상에 너희를 허하는 자리 같은 것은 없으며 언제나 어디에서나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들은 “그 말에 단련되어 있었고 동시에 지쳐”있다. “그건 끝없이 받아치고 맞서야 하는 말, 이성을, 인내심을, 친밀함을 야금야금 쪼개고 파먹고 약탈해가는 말”이다. 이따금씩 그들은 “그 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때로는 가만히 읽어보기도” 한다. “세상에 우리를 허하는 자리는 없으며 우리는 언제건 어디에서건 아무것도 아니구나.”(p.189)

인상 깊은 구절들이 여럿 있지만 “관계, 종속, 책임”이라는 단어들이 뇌리에 남는다. 나와 너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면 서로 간에 얼마쯤의 종속성이 생기고 책임도 따른다. 그런데 그 종속과 책임이 어느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 같다면 어떨까. 어떤 면에서 우를 돌보는 빈의 모습은 연인의 그것을 넘어서서 부모와 자식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빈은 “연인들은 고통 속에서 서로를 낳기에 연인인 것이 아닌가?”(p.212) 되묻기도 하지만 나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을 늘 우선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나를 좀먹는 일이다. 그렇기에 빈의 친구들이, 가족들이, 지인들이 “일상은 물론 욕망과 상상력, 가능성까지도 근본적으로 제한”(p.158)하는 빈의 삶을 부당하다고 항변해 준 것은 아니었을까. 관계와 종속과 책임이 자신의 어깨에서 떨어져나간 때를 상상하면서 그런 삶이 얼마나 달콤할지, 사랑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가지지 않기에 더 이상 “궁색해질 일도, 옹졸해질 일도 없을” 그 삶을 상상하며 홀가분해하다가도 그런 자신이 죄를 짓는 듯해 우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빈.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 뿐이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조제와 헤어진 후 츠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자꾸만 버거워지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츠네오처럼. 어떤 사랑에선 내가 조제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랑에선 내가 츠네오이기도 하다. 언젠가 내게 네가 가버리면 나는 조제처럼 동굴 안에 깊숙이 갇혀버릴 거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다. 정말로 그럴 것만 같아서 츠네오처럼 엉엉 울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때 그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 결국 조제처럼 혼자 1인분의 생선을 굽고, 혼자 거리로 나서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츠네오를 만날 것이라고…. 그럴 것이다. 동굴 안에 조개처럼 갇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관계에서 남겨진 조제의 외로움도, 떠난 츠네오의 죄책감과 미안함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희미해지기는 하겠지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이 세상에는. 그럴 때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한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여느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랑인데도, 어디에나 굴러다니고 노상 발에 체이곤 하는 그토록 흔해빠진 사랑인데도 왜 이렇게 힘이 들고 무거운 것인지 알 수 없"(p.39)게, 그 사랑을 버겁게 만드는 세상이 문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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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5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5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5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5-04-03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감성 촉촉하게 만드는 글이다...
잠자냥님 글 너무 잘쓴다...
이 책 작가님도 글을 잘 쓰시는군요.
조제,호랑이,물고기들 옛날에 봤는데 어렴풋하게만 기억이 나네요.
사랑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 같아요. 세상이 문제라는 말에도 공감!

잠자냥 2025-04-03 10:18   좋아요 1 | URL
에엥! ㅋㅋㅋㅋ
괭의 촉촉함을 저 메마른 산자락에 다 뿌려주고 싶네요! 😹😹😹

그레이스 2025-04-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제가 씽크대 높은 의자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던(뛰어 내리던) 장면이 뇌리에 박혀있습니다.
다시 높여놓은 싱크대가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오더군요.

잠자냥 2025-04-03 10:56   좋아요 0 | URL
네 그 장면 참 마음 아프죠!
쿵- 떨어지는 장면...

그레이스 2025-04-03 10:36   좋아요 0 | URL
왜 비밀 댓글로 올라갔을까요?
제가 잘못 눌렀나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