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엄마는 자몽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난데없이 자몽의 생김새를 말해야 했던 나는 약간 당혹스럽기는 했으나 엄마의 질문이 진지했기에 설명을 하기는 했다. “오렌지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생겼잖아.” 그러다 문득 엄마가 자몽을 먹어봤는데 왜 모르지 싶어서 “자몽 어떻게 생겼는지 진짜 몰라?” 하고 반문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친구들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 비슷한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 엄마는 “아니 글쎄.... 누가 설명을 해달라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전화해봤어. 알았어.” 그러고는 끊긴 전화.
그때 나는 약간의 열패감 같은 게 느껴졌다. 갑자기 엄마는 자몽도 못 먹어본 사람이 되어 버린, 우리 집은 그런 집이 되어버린 것인데, 친구들이 만일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면, 친구들 중 누군가가 전화를 끊고 나서 “자몽? 엄마가 자몽을 모르셔?”하고 의아하게 되묻지 않았다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었다. 나는 자존심이 센 편이라 내 집안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사귀던 사람에게조차 부모의 이혼 사실을 말하지 않고 여전히 아빠가 함께 사는 척했던 적이 있으니 말다했지 뭐. 아무튼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렇게 뭐랄까 감춘 것도 아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집안 생활 풍경이 나도 모르게 ‘밝혀질’ 때면 열패감에 휩싸일 때가 가끔 있다. 친구도 많지 않지만 그나마 이 나이 되도록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의 집안이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부유하거나 알고 보니 다들 학자 집안 출신이라 어린 시절부터 해외 유학 경험이 풍부하고 부모의 가방끈도 길고 교수이거나 대개가 이렇더라.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 앞에서 졸지에 자몽도 모르는 엄마를 둔 내가 느낀 그 미묘한 열패감. 타인과 나 자신을 잘 비교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문득 나고 자란 환경의 다름- 계급의 다름을 인지하고는 씁쓸해질 때가 있다. 아니 에르노는 그걸 “부끄러움”이라고 했던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에서는 계급횡단자들- 그러니까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개천에서 용 난 자들, 그래서 자신이 나고 자란 환경을 벗어나 그 환경을, 계급을, 재생산하지 않은 ‘비-재생산’자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아니 에르노와 피에르 부르디외, 디디에 에리봉 같은 사람이 언급된다. 문학 작품도 다양하게 소개되는데 <적과 흑>의 ‘쥘리앵 소렐’, <마틴 에덴>의 마틴도 자주 인용된다. 나는 내가 에르노나 부르디외, 에리봉처럼 계급횡단자이거나 비-재생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여전히 내 삶이 비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대단한 지식을 쌓은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가 알 정도로 내 분야에서 성공해 이름을 알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돈도 명성도 지식도 아무것도 없다. 계급은 이런 것들로 달라지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나는, 아니 내 형제들은 모두 엄마 기준에서는 자기 인생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은 비-재생산들에 속할 것이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결국 ‘배움’이다. 한때 우리 집 거실 벽은 자식 넷의 대학 졸업 사진, 그러니까 학사모 사진 네 개가 걸려 있었다. 엄마는 내 건 두 개를 걸어야 한다고 해서 뜯어 말리느라 곤혹스럽기도 했는데,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종종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당신 스스로 ‘내가 딸 넷 다 대학 보냈다!’ 자랑스러워하는 엄마를 보면 복잡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그게 뭐라고…. 그런 엄마는 이제 대학생인 손주들 자랑에 정신이 없다. 내 조카들은 한국의 부모라면 자기 자식을 다 집어넣고 싶어 하는 학교를 갔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애들을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녀석들도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나의 ‘자몽’ 같은 일로 당혹해하는 일이, 열패감을 느끼는 있을 텐데....... 대학생이 된 큰조카가 우울증을 앓는 것을 보고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묻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안의 계급횡단 혹은 비-재생산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조카들 대(代)에서 괄목할 만한 비-재생산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애들이 나고 자란 환경은 어쨌든 또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이나 열패감 같은 것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불쑥불쑥.
샹탈 자케의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은 이처럼 계급횡단자들의 존재의 불안이나 소외 고독을 통해 계급 문제를 성찰한다. 에르노나 부르디외는 그들의 출신 성분과 달리 그들이 이룬 업적으로 워낙 유명해졌고 또 그에 관한 책을 많이 써냈기에 그렇게까지 센세이션하지는 않았으나(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디디에 에리봉은 이 책을 읽고 나니 사두고 여태 안 읽은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올해는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케에 따르면 “계급횡단자는 서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기까지 한 두 환경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에리봉의 경우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덧붙여진다. 바로 그의 성정체성이다. 계급횡단자들이 태어난 우물을 벗어나려면 어떤 욕망, 그러니까 그 세계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 자케는 그중 하나로 야심인, 모방의 욕구를 꼽는다. “모든 야심은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것이든 허구의 것이든 한 개인이 달성하고자 욕망하는 어떤 모델의 표상이 조건으로 주어져 있어야 한다.” 즉 요컨대 모방 없는 야심이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비-재생산은 일종의 재생산의 형식을 가진다. 다만 자신의 출신 계급에서 지배적인 모델과는 다른 모델을 모방하여 재생산할 뿐이다.
쥘리앵 소렐의 야심은 나폴레옹이라는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아니 에르노는 L선생님이 그런 모델이었다. 샹탈 자케가 보기에 L선생님은 에르노가 욕망할 수 있는 탁월성과 완전성의 모델을 그녀에게 심어줌으로써 에르노가 자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 물론 L선생님은 사랑의 욕망을 불러일으킬만한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경우 선생님이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에르노의 주변에는 그 선생님 정도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L선생님으로부터 에르노는 어머니와 이모들, 가게에 들르는 손님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한 여성의 형상을 발견한다. 요컨대 L선생님은 에르노의 여성적 환경에 어떤 타자성의 형상을 도입한 것이다. 그녀의 교양과 엄격함은 당시 어렸던 에르노가 상인의 딸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에리봉의 경우 그 모방(욕망)의 대상이 사랑하는 한 소년이었다. 에리봉은 “위대한 음악”이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것이며 혹시 어쩌다가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당장 라디오를 꺼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던 집에서 자랐다. 그런데 어느 음악 시간에 클래식에 귀를 기울이다 그 음악을 듣고는 그게 어떤 곡인지 곧바로 정답을 맞히는 소년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에리봉은 자신이 혐오하던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 소년에게 매혹되고 에리봉 안에는 이 소년의 마음에 들고 싶고 또 그를 닮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에리봉은 그 소년처럼 글을 쓰고자 시도했으며 그 소년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으면서 반항아를 벗어나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디디에 에리봉에게 이 우정은 닫혀 있던 그의 계급적 아비투스와 거부감을 느끼게 했던 교양의 세계를 개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모든 문화 충격이 그런 것처럼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우정 혹은 사랑의 만남은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싶고 또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타자성을 향한 열림을 통한 정체성의 재주조를 동반한다. 이러한 타자성을 향한 모험은 동요와 저항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계급적 코드에 대한 무지가 불러오는 오해와 상처는 결코 쉽게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란 서로 다른 사회적 역사를 체현하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 공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라는 우정에 대한 디디에 에리봉의 아름다운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정의 역량은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사랑 역시 그러한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랑은 분명히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지만 가끔씩은 우리의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꿔 주기도 한다. (p.105)
사랑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지만 때때로 우리의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주기도 한다는 말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타자성을 향한 열림을 통한 정체성의 재주조”라는 말 또한 그렇다. 디디에 에리봉이 그 증거이다. 어느 날 한 여성에게 반하고 그 여성을 갖고자 예술과 문학을 향한 사랑에 빠져 작가가 된 거칠고 무식한 바닷사람, 마틴 에덴의 이야기도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사랑의 힘은 그 사랑의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주체의 변신을 보조해 주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비-재생산에서 동력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케는 사랑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한다. 사랑이 비-재생산에 특권적인 감정이라거나 이 감정이 마치 계급투쟁의 병폐를 치료하는 해독제로 쓰일 수 있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사랑은 일시적으로나마 분명한 효력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만병통치약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매력이 넘치는 지배자가 되기를 꿈꾸거나 아름답고 유복한 상속녀를 차지하겠다는 꿈이 우리에게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더라도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이며 그러한 상상은 혁명을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러한 상상은 사람들을 신분 상승에 대한 헛된 기대를 꿈꾸게 하는 보수주의 속에 가둠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안정화시킬 뿐”이라고.
비-재생산은 사랑처럼 단 하나의 감정에만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원한, 증오 그리고 굴욕에서 탄생한 분노와 같은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이 기쁨의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수치심도 그런 동력 중의 하나이다. 에리봉은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스스로 자신과 타인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차별화하기 위해 철학자나 예술가 혹은 지식인 등의 모습에 근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지배적 모델에 대한 성적인 비-재생산은 사회적 비-재생산의 결정적 요인이자 그 기원이 되기도 한다. 에리봉은 이미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의 학업적 궤적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그것을 일종의 ‘기적’처럼 기술했다. 적어도 나와 관련한 한에서 이 ‘기적’의 동력은 동성애였을 것이다.” 샹탈 자케는 성적 수치심이 게이 프라이드로 전환할 경우 이 감정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증기기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디디에 에리봉에게서 수치심은 비-재생산의 과정에서 여러 방식으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먼저 성적 수치심은 디디에 에리봉이 동성애 혐오가 만연한 노동자들의 환경과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회적 수치심은 게이 프라이드를 통해 가려진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수치심은 다른 수치심을 감출 수 있었으며 게이 프라이드는 다른 사회적 출신 성분을 가려 주는 방어막이자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었다. (p.125)
수치심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출신에 대한 부정의 극단적 형태’가 가장 흔하다. 생략을 통한 거짓말은 계급횡단자가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흔한 수법이다. 그럼에도 출신 성분을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도록 만든다. 넬라 라슨의 <패싱>에서 ‘클레어’는 자신의 인종을 부인하고 백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끝없는 거짓말이 들통 나고 고발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전에 나는 <패싱>을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인물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이면서도 이성애자로 패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읽혀 더 흥미롭게 읽었다, 샹탈 자케는 디디에 에리봉과 넬라 라슨의 <패싱>을 들어 계급횡단자의 “밀항자(clandestin)”로서의 성격을 분석한다. “계급횡단자는 그의 가족을 보기 위해서 혹은 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연약하고 위협받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감춘다. 따라서 출신에 대한 수치심과 출신이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진심을 이리저리 짜깁기하여 아예 한 편의 소설을 발명하거나 거짓말로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고통의 감정도 큰 동기가 된다. 계급횡단자에게는 배신자, 위장자라고 비난하는 집단 검열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주변의 검열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환경으로부터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평준화의 효과를 산출하고 이를 통해 기성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검열에도 도저히 대안적 모델을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주변 환경이 강압적이고, 숨 막힐 정도로 목을 조르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환경이라면, 그러한 환경이 키워 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끝내려고 아예 그 환경을 떠나고자 하는 참을 수 없는 욕망 같은 강력한 동기들을 제공하게 된다. “욕망한다는 것은 달을 따오겠다는 말처럼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며, 산개하는 고통을 찬란한 미래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에 긍정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고통은 우리의 숨을 조이는, 우리를 둘러싼 갑갑하고 나쁜 존재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숨 쉬게 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존의 방식을 찾아내도록 우리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지닌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고통은 비-재생산의 본질적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고통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더 나은 다른 삶으로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더 나은 삶을 욕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p.117)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속했던 세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취향의 결여에 대한 부끄러움을 일찍이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들을 은밀하게 부인하고 있다는 감정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녀의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자신과 자신의 것을 구원하기 위해 저 악덕들을 낱말로 옮기게 만드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탄생”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재생산은 고통의 승화와 구원의 형태로부터 그리고 고통을 창조적인 동원력으로 변형시키는 것으로부터 귀결”(p.113)되기도 한다. 자케는 에르노의 작업을 수치심과 죄책감을 문학작품으로 전환시킨 결과라고 평한다. 에르노 자신은 이를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죄책감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 감정이 제 글쓰기의 기저에 있다고 한다면 그와 동시에 글쓰기가 저를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열정>의 말미에 등장한 ‘되돌려주는 선물’(don reverse)의 이미지는 제가 쓴 모든 글에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어 버린 저의 상황에서 글쓰기는 정치적 행동이자 ‘선물로서’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p.281~283)
사랑(욕망)이나 수치심, 고통 등 한 개인의 감정이 계급횡단자를 어떻게 이끄는지를 위주로 살펴보았지만 이 책은 그런 한 사람의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가족, 개인적 원인을 분석하며 계급횡단자의 기질을 살펴보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런 중에도 자케는 계급 이동은 한 사람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며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그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수성가의 신화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간다. “타자성을 향한 열림을 통한 정체성의 재주조”- 에르노나 부르디외, 그리고 에리봉 같은 이들은 비-재생산에 성공했으나 어떻게 보면 여전히 경계인으로서의 위치성을 갖고 있다. 나는 그 경계인으로서의 위치성을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이 사고 싶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독특한 것을 사유하려는 노력, 도리어 정상성의 용어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는 이 경계인들, 이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 ‘검은 양’들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것이 무엇이든 ‘횡단’을 더 자유롭게, 가능하게 만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