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데도 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어제, 문득 집사2가 글쓰기를 배우러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써! 너 저기 스터디룸 들어가서 써. 뭘 배우러 다녀. 글쓰기 같은 거 배우러 다니지 마!” 내가 너무 버럭 성질을 내니까 집사2가 깜짝 놀라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알았다고 하면서 얼마 전 만난 예술 분야 쪽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냥 쓰세요, 배우러 다니지 말고 써야 늘어요.” 집사2가 뭔가 새로운 걸 배우러 다닌다고 하거나 기타 등등 뭔가를 한다고 할 때 나는 말리는 적이 없다. 단 한 가지, 글쓰기를 배우러 다니겠다는 것만 빼고. 문예창작이든, 시 창작이든, 비평이든 기타 등등 뭔가를 쓰고자 제도권 교육을 받으러 가겠다는 것은 다 말려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뭔가를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는데도 글쓰기를 배우러 아카데믹한 곳에 간다는 것은 말리는 게 이상한지 집사2가 언젠가 물은 적이 있다. “아주 예전에는 나 사람들 못 만나게 하려는 건가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그건 아닌 거 같고 왜 그러는 거야?” “너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글 썼어??????” “.........” “쓰지 않는데 어떻게 늘고, 먹지 않는데 어떻게 싸니? 그런 데 배우러 다니느니 그냥 집에서 읽어. 읽고 써. 진짜 요즘 사람들 이상해- 다들 글 쓰겠다고 영화하겠다고 연기하겠다고 음악하겠다고 그러면서 읽지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무턱대고 창작만 한대. 먹지 않는데 똥이 나오냐? 제발 좀 그냥 읽고 써.” 그런 곳에서 기교는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생각은 혼자 하는 것이다. 창작도 혼자 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혼자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글쓰기 강좌를 다니면 자신의 글이 는다고 착각할까.
이런 나조차도 딱 한 번 소설 창작 강좌를 들으러 다닌 적이 있다. 30대에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한국 현대 소설을 읽으면, 아니, 이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라고?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예: 한재호, <부코스키가 간다>) 야심차게 노트북을 열고 타타타타닥 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니 근데 부코스키가 어떤 사람인데? 하고 부코스키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예: <우체국>,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여자들>) 좌절한다. 젠장,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왜케 잘 써. 통찰이 있어.... 젠장 난 안 되겠다..... 그러니까 한국 현대 소설을 읽으면 이 정도쯤이야 나도! 하면서 야심차게 불타올랐다가, 서양 고전을 읽으면 아....... 죄송합니다. 저 따위가 무슨 소설을 쓴다고 깝칠까요 겸허&겸손해지면서 소설 쓰기를 포기하던 나날이 반복되며 이어지던 중 그래도 한국의 현대 작가 중 이 사람 작품은 좀 괜찮다 싶었던 사람, 그 작가가 마침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 강좌를 수강 신청했던 적이 있다. 나와 나이가 같아서 자극 좀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컸다. 저 사람은 이십대에 데뷔해서 벌써 작품이 몇 개냐.....
창작 첫 시간.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교실에 모였다. 본격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 작가는 수강생들에게 어떻게 이 강좌를 신청하게 되었는지, 왜 소설이 쓰고 싶은지, 글쓰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이렇게 말했던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서.” 나는 이 말이 무척 놀라웠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오잉?! 그런 상태가 있어? 와 다들 대단하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는데, 그런 상태가 무엇일까?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상태라.... 아 역시 나는 작가는 안 되겠다! 어차피 돈 낸 거 강의나 열심히 들어보자.
그 수업은 창작을 했어야 했다. 단편 소설을 하나씩 써서 내야했고, 강의 중반 이후로는 단편을 써낸 사람들의 작품을 합평하는 위주로 수업이 흘렀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업에 참여하는 수강생들이 점차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즈음에는 절반가량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고, 단편을 끝까지 써 낸 사람도 드물었다. 시시했다. 뭐야,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면서 단편 하나 써내지도 못하고 수업 시간 하나 제때 챙겨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다들 사라져버리네. 정말 시시했다. 그때부터일까 글쓰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글쓰기 자체가 자기 삶에서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좀 우스워 보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실눈 뜨고 보게 된다. “진짜? 정말? 그래서 오늘 몇 줄이나 쓰셨나요?”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그 수업을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다. 단편도 쓰라고 한 날짜까지 써서 냈다. 그 작가로부터도 그리고 다른 수강생들로부터도 작품에 대해 칭찬도 받았다. 쓸 동기를 더 북돋는 계기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의아하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던 그 사람들은 왜 사라졌을까? 약속한 수업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과제를 낼 정도의 성의도 없다면 그 사람의 글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틀림없다.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작업이다. 성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는다. 늘지 않는 구간도 분명히 있다. 테니스를 하다보면 테니스에서도 도무지 늘지 않는 구간이 있다. 그게 뭐라고, 진짜 속 터져서 라켓을 부숴버리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프로 선수가 될 것도 아니고 단지 취미인데도 더 잘 치고 싶은데 늘지 않아 속상한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이제는 소설 쓰기에 대한 욕구는 많이 줄었다. 그래도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여전히 있는데 어느 날 늘지 않으면 한숨이 푹푹- 내 글이 쓰레기 같아 속이 터진다. 작가가 될 것도 아니고 단지 취미(?)인데도 더 잘 쓰고 싶은데 늘지 않아 속상하다. 아니 잠깐 그런데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이지? 글을 쓰면 뭐가 좋다고? 지금도 이걸 끼적이고 있지? 길긴 또 오지게 길어.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사람들의 글쓰기를 향한 욕망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1.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작가의 이런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층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성이다. 사람들 절대 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3.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292~294쪽)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읽고 쓰는 것은 내 삶이었다. 동화책을 읽다 보니 직접 써보고 싶어져서 처음 썼던 게 희곡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는데 일기장에 썼던 것인지 의무가 아닌, 내가 쓰고 싶어서 그냥 썼던 최초의 창작 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담임선생님이 우연히 발견하고는 너무 재미있다면서 친구들한테 직접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어오셨다. 극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아이였던 나는 크게 당황해서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선생님은 내 그런 성정을 잘 알고 이해하고 예뻐해 주셨던 분이라 나를 다독이면서 잘할 수 있다고, 한번 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앞으로 나가 내가 쓴 글을 아이들 앞에서 최초로 낭독.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만든 이야기에 빠져들어 이런저런 동물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낭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마법이 일어났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산만하던 아이들이 어느 틈엔가 다들 몰입해 있는, 그리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순간의 마법.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박수를 쳐주고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담쓰담- 나는 조금 자신감이 생기고 아주 많이 뿌듯해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글쓰기는 내게 조지 오웰의 평대로라면 1번과 2번에 가깝다. ‘순전한 이기심’과 ‘미학적 열정’이 겹친 유형인데, 그 순전한 이기심 속에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있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조지 오웰의 그 구절을 읽을 때 빵 터지면서 크게 공감한 기억이 난다. 맞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허위다. 남에게 내 글이, 또는 내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가 없다면(인정욕구) 왜 글을 써서 어딘가에 공개하겠는가? 그냥 끼적이고 서랍에 처박아 놓든가, 아니면 일기장에 쓰든가 아니면 방문자 한 명도 없는 아무도 모르는 블로그에 비공개글로 쓰고 말지. 안 그런가? 그렇지만 나는 글을 써서 어딘가에 공개한다. 비공개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개글로 온라인에 올린다. 이렇게 살아온 지 거의 이십 년이 넘는다. 아니, 십대 시절에도 모듬일기장에 쓴 내 글에 아이들이 반응하는 걸 보면서 약간 변태적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으니 거의 평생 나는 그렇게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글쓰기가 왜 그토록 나를 사로잡지? 존 파울즈는 글쓰기를 일컬어 ‘자아 사랑의 과정’(존 파울즈, <나의 마지막 장편 소설> 1권, 579쪽)이라 말했고, 또 바르트는 ‘글쓰기가 욕망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글쓰기는 쾌락, 행복, 기쁨을 주는 관능의 규범 아래 있다’고 말했다(장석주, <만보객 책속을 거닐다>, 232쪽). 그리고 무려 미셸 우엘벡은 이 인생에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두 개로 ‘사랑’과 ‘글쓰기’를 꼽았다. 나 또한 이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글쓰기는 사랑과 더불어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해볼 만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다. 그것이 어떤 글이든 계속 쓴다면 어느 날 글을 쓰면서 뭔가 달라지는, 달라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니까 좀 웃기지만...
일단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만 하루 24시간을 돌아보자. 진실로 ‘생각’이라는 것을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독서를 할 때 생각한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독서는 대부분 어떤 생각의 주입 과정이다. 이 주입된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끝난다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들은 곧 휘발되기 쉽다. 책을 읽고 또는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끼적여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르다. 알라딘 서재에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텐데 리뷰를 남긴 책과 읽고 별점 정도만 남긴 책에 대한 기억은 몇 년이 지난 후에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카프카는 죽기 전 자신의 벗에게 자기의 작품을 다 불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마음이 100% 진심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자기 생각의 기록, 내 기록의 역사, 즉 자신의 역사를 불태워버리고 그대로 소멸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면 기록이 남는다. 물론 그 흔적이 싫을 수도 있다. 창피하고 부끄러울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수치스러워서 다 밀어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밀어버리지(지워버리지) 말고 비공개로 돌려놓으면 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소소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내 역사 따위 남기고 싶지 않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인간은 대개 나르시시스트 면모가 있기에 100%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자기만의 역사를 쌓아갈 때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언젠가 다락방과 잠자냥이 10년 전, 15년 전 글을 뒤적여서 꺼내오는 걸 보고 은오와 독서괭이 “저분들처럼 15년 전 글 가지고 와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저도 그거 진짜 부럽더라고요. 아니 내가 10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하는 거”라고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10년 전, 15년 전 기록을 꺼내서 아니,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 이런 글을 썼어?! 돌아보려면 일단 써야 한다.
그리고 글은 무엇보다 카타르시스를 준다. 서재 활동을 하는 이들이라면, 글쓰기가 위로가 되는 순간을 한두 번이라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면 욕을 하기보다 그 감정을 글로 써보자. 그러면 그 분노나 속상함이 쓰고 나기 전 후로 크게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고통이나 외로움도 마찬가지다. 쓰다보면 치유가 된다. 어딘가에 공개하지 않아도 쓰는 과정에서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회사에서 조금 스트레스 받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주로 트위터 창을 열고 막 갈기다가... 갈기는 중에 해소가 되어서 트윗하지 않고 창을 닫을 때가 종종 있다. 진짜 열이 받아서 트윗했다가도 그러고 나면 기분이 해소되어서 바로 지우기도 한다. 쓴다는 것은 뭔가 이런 마법의 기능을 갖고 있다. 오늘은 숙취로 인해 기분이 우울했는데 역시 이렇게 쓰고 나니 뭔가 상쾌해.........
게다가 인간은 모두가 어느 정도 인정욕구를 지니고 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심리. 알라딘에서 글을 쓰고 남기는 이들은 대게 글쓰기를 통해 그런 인정욕구를 채우는 편이 아닐까. 나는 확실히 그렇다. 독자가 많지 않아도 반응(좋아요)이 많지 않아도 몇몇 사람이 진심으로 읽어주고 응원한다는 것을 알면 쓸 동기가 생기고 쓰고 났을 때의 기쁨이 남는다. 더 나아가서는 소통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서 혼자서 살 수는 없다. 제아무리 침대에서 24시간 누워 지내는 오블로모프에게도 하인 자하르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24시간 지내는 왼다리 오른다리 근육량 9%의 은바오에게도 소통 창구인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은바오가 주로 소통하는 사람들은 여기 알라딘에서 은오 글 보고 반한 언니들이 아니었던가? 나 또한 은오가 만약 그런 빛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거 같은데. 그러니 은오는 “쓸데없는 인정욕구 때문에 불안할 때마다” <불안>을 꺼내지 말고 글을 쓰시오. 삼행시도 기가 막히게 잘 쓰던데...... 아차, 그런데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던데, 나는 이 말도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오가 요즘 글을 안 쓰는구나....... 에휴.
그래도 우엘벡 마니아 은바오에게 우엘벡이 말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어쨌든 청소년 시절 이후로 기억하는 한, 인생에 있어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은 딱 두 개였습니다. 세 개도, 네 개도 아니고, 딱 두 개 말입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랑, 여자를 사랑한다는 의미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글쓰기’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작업대에서 언어를 반죽하고, 그것에 형식을 부여하고, 작은 기호들의 기둥들을 세우면서 수많은 말을 지새우고 낮을 보내고, 또 많은 밤을 지새우는 것을 말하죠.
이 두 가지 열정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국 같은 것이니까요. 같은 종류의 에너지, 같은 종류의 충동, 같은 종류의 강압, 억제되었다가 한꺼번에 해소되는 같은 종류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같은 종류의 관능과 고통의 결합, 갑작스러움과 참을성의 결합, 같은 종류의 암중모색과 분명함의 결합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왜 글을 씁니까? 하루 종일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사랑을 합니까? 온종일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당신은 글쓰기를 그만 둘 수 있습니까? 아마도 다른 정열, 다른 열기가 소진되었다는 징후가 있을 때일 겁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미셸 우엘벡, <공공의 적들>, 299쪽)
문장은 머리카락과 같아서 빗을수록 빛이 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중에서)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쓰는 것뿐이다.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