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2월, 작가 로맹 가리는 배우인 아내 진 세버그를 따라 프랑스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잠시 거주지를 옮긴다. 아내가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키우던 고양이와 개 등 여러 마리의 애완동물도 함께였다. 덩치 큰 누렁개
샌디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나 종적을 감추었다. 어느 암컷 개에게 홀딱 빠져서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앤젤레스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로맹 가리는 샌디를 걱정한다. 혹시라도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을까…
샌디는 진흙을 잔뜩 뒤집어 써 초콜릿 색 개가 된 채 집에 돌아왔다. 그가 샌디를 보고 반가워할 새도 잠시. 샌디 옆에는 또 다른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로맹 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빛 셰퍼드였다. 똑똑하고 강한 인상을 풍기는 녀석은 혈통 좋은
개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목걸이를 하지 않았다. 샌디를 집 안으로 들여보낸 후에도 셰퍼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샌디 조차
뭐랄까 ‘이 친구를 집으로 좀 초대하고 싶은데요.’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로맹 가리는 그 셰퍼드를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보호하기로 한다. 폭우 속에서 샌디를 구해준 녀석이 이 셰퍼드가 아닐까 그는 짐작한다. 로맹 가리는 이 개에게
‘바트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와 ‘바트카’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로스앤젤레스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바트카는 무시무시한 외모를 갖고 있음에도 성격은 매우 온순해서 그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사람들 또한 이내 이 개와 잘 지내게 되었다. 로맹 가리의 친구들 사이에서 바트카는 인기가 좋았다.
온순하고 충직하고 똑똑하고 상냥하며 사람들에게 애교도 부릴 줄 아는 덩치 큰 셰퍼드 바트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글을 쓰고 있던 로맹 가리의 귀에 바트카의 성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던 그는
놀라 문제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제대로 훈련된 경비견의 폭발음은 대단했다. 누군가 침입자가 있는가? 놀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영장을 청소하러 일꾼이었다. 바트카는 몹시 흥분하여 그 일꾼을 향해 미친 듯이 짖어댔다. 개는 입에 거품까지 물고, 문에
달려들었고 이런 모습을 본 수영장 청소부는 겁에 질려 얼어버렸다. 온순한 샌디 조차 낑낑대며 침대 밑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로맹 가리는 짐승의 살인적인 폭력성을 마주하고 잠시 절망한다. 바트카는 그가 말려도 기를 쓰고 그 일꾼을 향해 돌진하려고 애를
썼다. 수영장 청소부는 그날 일을 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튿날, 웨스턴유니언 직원이 전보를 가져왔을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오후에 로맹 가리 친구들이 집에 들렀을 때 바트카는 전과 다름없이 사람들과 상냥하게 잘 지내는 게
아닌가. 그때 로맹 가리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백인이라는 점, 그리고 수영장 청소부와 웨스턴유니언 직원은
둘 다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이 의심은 바트카가 급기야 슈퍼마켓 배달꾼의 목을 물 뻔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명확해진다. 그
배달꾼 역시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로맹 가리는 개를 데리고 그가 잘 알고 지내던
동물 조련사가 있는 ‘노아의 목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바트카는 흑인을 공격하도록 특별히
훈련 받은 개였다. 이른바 ‘흰 개’였다. 남부에서 온 개. 그곳에서는 경찰이 흑인을 체포하는 걸 돕도록 훈련한 개들을 ‘흰
개’라고 불렀다. 바트카가 바로 그런 개였다.
예전에는 달아난 노예들을 뒤쫓기 위해, 그리고 현재는 시위자들을
쫓기 위해 훈련 된 ‘흰 개’- 조련사 ‘잭’은 바트카는 나이가 일곱 살이나 되어 다시 훈련시키기 어렵다며 답은 안락사뿐이라는
조언을 할 뿐이다. 한 번 더 깊게 절망하는 로맹 가리. 그런 그에게 이 동물원의 또 다른 조련사인 ‘키스’가 다가온다. 흑인
조련사인 그는 바트카를 자신이 ‘교정’하겠다며 발 벗고 나선다. 로맹 가리는 반신반의하며 그에게 바트카를 맡기게 된다. 과연
‘바트카’가 흑인 조련사의 손길에서 ‘흑인’만 물도록 훈련된 습성을 고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이다. 진 세버그도 그렇고 배경이나 사건 등이 모두 실화다. ‘흑인’만 물도록 훈련된 개 ‘바트카’의 이야기면서도 그 개와
끊임없이 자신을 동일시하며 미국의(혹은 전 세계의)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로맹 가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톱
배우라는 후광을 얻고 흑인들을 위해 인권 운동을 하지만 실상은 진정성을 의심받은 채 그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아내 진 세버그와의
갈등과 그녀에 대한 연민도 이 작품에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베트남
반전 시위가 한창이었고,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면서 인종 갈등이 고조된 극도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 혼란을 바라보는 로맹
가리의 시선은 거침없다. 이런 혼란의 시기를 통해 로맹 가리가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흑백 갈등만은 아니다. 백인을
향한 흑인의 분노, 증오, 폭력에 대항하기위해 자행되는 또 다른 폭력, 인권운동을 한다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지식인들의 이중성,
백인의 죄의식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흑인, 죄의식 때문에 무조건 흑인을 옹호하는 백인, 핍박 받은 세월에 대한 보상인지 흑인의
모든 폭력 행위를 영웅적 행위로 간주하는 흑인 등등 이성과 양심, 도덕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개짓거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바트카’는 그런 인간의 ‘개짓거리’가 만들어낸 가련한 희생물이다.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 채 ‘흑인’만
물도록 훈련 받은 그 개는 흑인을 물 때 마다 백인 주인에게 달려와 칭찬 받기를 바라며 해맑게 웃는다. 살랑살랑 꼬리를 친다.
이런 개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바트카’는 인간의 ‘개짓거리’에 또 한 번 희생당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정말 충격적이다,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이 또 있을까 싶어 참담한 심정이 절로 든다. 인간의 뿌리 깊은 ‘증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종 갈등은 물론 이 세계의 모든 차별이 사라질 수는 없으리라는 절망감까지 든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짐승을 사랑한다는 건 꽤나 끔찍한 일이다. 개 안에서 인간을 본 사람은 인간 안에서 개를 보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272쪽)’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