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만으로도 이 사람의 작품은 앞으로 늘 찾아 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작가가 있다. 제임스 설터도 나에게는 그런 이 중
하나다. 단편 모음집인 <어젯밤> 이후 나는 그의 작품이 남김없이 국내에 소개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나올 때마다 흥분과 기대, 고마운 마음으로 읽어댔다. 이제까지 마음산책에서 총 4권이 소개되었던가? 두 번째로 소개되었던 <가벼운 나날>은 <어젯밤>과 달리
장편으로 짜임새나 분량, 내용을 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인데 생각보다 오래 읽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직접 보면 알리라. 그럼에도 그냥 간단히 그 이유를 말해 보자면 바로 설터가 빚어내는 ‘문장’ 때문이다. 인물이나 배경, 공간,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는 방식 등을 읽고 또 읽게 된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절들이 이 작품에는
빼곡하다. 물론 이렇게 문장에 주목하면서 읽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평소 문장에 관심이 많거나
소설이나 드라마 대본, 영화 시나리오 등을 쓰고 싶어 하는 작가 지망생이나 혹은 이미 작가이거나 등등 대체로 글 쓰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제임스 설터는
대중들 보다는 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더 자주 회자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여러 작가들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나 역시도 문장이나 묘사하는 방식 등에 관심이 많아 그의 문장 여러 부분에 찬탄을 하며,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었다.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싶은 구절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 설터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 뛰어나다.
특별하지 않은 단어, 별 것 아닌 특징을 잡아서 나열했을 뿐인데 그 짧은 문장 안에 한 인물의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그녀는 입이 컸다. 여배우의
입이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환한 웃음을 짓는. 겨드랑이에 얼룩이 있었고 입에선 민트 향이 났다. 그녀는 천성이 사치스러웠다.
충동적으로 물건을 샀다. 벤델 백화점에 가기를 친구 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한 번에 대여섯 벌씩 드레스를 샀고, 탈의실에 들어갈
때는 커튼을 꼼꼼하게 닫지도 않아서 그녀가 옷 벗는 모습이, 가느다란 팔과 몸통, 그리고 비키니 팬티가 보였다. 그렇다. 그녀는
바닥을 닦고 빨랫감을 모은다. 그녀는 스물여덟이다. 꿈이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을, 몸을 장식해 줄 나이다. (30쪽,
‘네드라’를 설명하는 부분)
그는 유태인이었다. 가장 우아하고 가장 로맨틱한 유태인.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서렸고, 이지적인 분위기는 모두가 부러워했고,
머리카락은 건조했다. 옷은 야릇하게 낡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은 매무새였는데, 이를테면 단추가 하나
떨어졌거나 소매 끝이 더럽거나 했고, 그의 입에서는 몸이 안 좋아진 삼촌의 입에서 나는 종류의 약간 나쁜 냄새가 났다. 그는 키가
작았다. 손은 부드러웠고, 금전 감각은 없었다. 전혀 없다시피 해서, 그 방면에서는 알비노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기형. 돈
없는 유태인은 이빨 없는 개와 같다. (38쪽, ‘비리’를 설명하는 부분)
그의 아내는 젊음의 막바지에 있었다. 그녀는 밤새 밖에 내놓은, 아름다운 만찬과 같았다. 화려했지만 손님은 돌아가고 없었다. 걸을 때 얼굴의 살이 떨리기 시작한 나이였다. (94쪽)
그녀 삶의 모든 것은 하다가 만 상태였다. 답장을 안 쓴 편지들, 마루에 흩어져 있는 고지서들, 밤새 밖에 놓아둔 버터. (143쪽)
비단 인물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문장도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렇기에 작가들이 그의 문장에 그토록 감탄하는
것은 아닐까. 글, 즉 문장에 대한 감탄의 읽기- 조금은 특수한 읽기 방식이 아닌, 조금 더 보편타당한 읽기 방식으로 살펴봐도
<가벼운 나날>은 무척 빼어나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작품의 서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남들에게는 감춰져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비리’와 ‘네드라’ 부부. 그들은 예쁜 두 딸이
있고 교외에 사는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중산층 부부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문화적 수준은 물론 교양도 쳐지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교외의 이 평온한 집으로 때때로 찾아오는 또 다른 중산층 커플들이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풍요롭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커플이다.
그러나 언제나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그들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균열’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어찌 보면 이것은 회복하기 불가능한 성질의 심각한 균열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상적인 부부’의 역할 또는 연기를 오랜 세월 꾸준하게 해 나간다. 삶이 그들에게 주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므로.
그런 역할 속에 아이들은 자라나고 주변에서 때로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월은, 시간은 흘러간다. ‘네드라’는 ‘비리’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진실하게 살면서 행복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충실하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낫지 않아? 그렇지 않아?” (274쪽)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어떻게 사는 삶이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인지 생각하게끔 하지만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325쪽)’
처럼 꿈꾼 대로 삶이 흐르지 않는다는 아프지만, 진실인 깨달음이다. 때문에 ‘네드라’와 ‘비리’ 이 부부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먼, 과거의 어떤 부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에 대한 질문 같기도 하여 때로는 서걱서걱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꿈꾼 대로 살 수 없기에 그 안에서 그래도 하나쯤 열망하는 것, 열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때로는 사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윤리나 도덕을 거스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그렇게 얻은
것들조차 시간이 지나 희미해지고 빛이 바래진다면…. 다른 반짝이지 않는 것들과 똑같이 빛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 가고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시간은 그렇게 순환하며 인생은 흘러간다. 우리의 ‘가벼운 나날’들은 그렇게
흘러가서 ‘하나의 삶’이 된다. 그 삶은 어느 순간 빛이 바래지더라도 ‘삶’ 자체로써 의미가 있음을 <가벼운
나날>에서는 조용히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