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카버의 단편을 읽고서 '이게 뭐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대체 왜 '카버' '카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특별한 이야기도 없고, 느닷없이 시작해서, 느닷없이 끝나버리는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들. 왜
그에게 수많은 작가가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버의 여러 단편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숏컷>을 볼 때도 비슷했다. 지리멸렬했다. 스크린을 보는 내내 답답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대성당>을 차례로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예전에 왜 카버의 작품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숏컷>을
읽으면서 답답하고 무기력하고, 지리멸렬했는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에는 희망이 없다. 암울하다. 참담하다. 거의 모든 단편이
우울하고 희망 없는 일상의 나열이다. 알코올 중독자, 붕괴하는 가정, 왜 함께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부, 서로 각자의
이야기만 하는 가족,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르는 실업, 갑자기 다가온 사고나 병으로 그나마 지탱되던 일상이 붕괴하는 등 '살기 참
퍽퍽하다'는 느낌뿐이다.
이번에 카버의 작품을 읽으며 강력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여럿이 함께 있어도 고독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듯 보인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혹은 떠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이곳(다 떨치고 싶은 일상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삶의 희망은 찾아보기 힘들다. 카버의 작품 속
사람들과 똑 닮았다. 이런 일상을 그린 작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함께 있어도 고독하고 (Edward Hopper, Nighthawks, 1942)
아침에 눈을 떠도 여전히 무기력하고 (Edward Hopper, Morning Sun, 1952)
가장 가까울 것 같지만 가장 먼 사람들... (Edward Hopper, Excursion into Philosophy, 1959)
그런 짧은 순간,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상에서 그토록 심오하게 일관된 세계를 그려냈다는 것이 카버의
위대함일 것이다. 게다가 최대한 압축한 표현들이란! 평범한 작가라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으리라. 일반 독자는 물론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카버의 단편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이라면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고, 온갖 미사여구로
문장에 힘써야 할 것 같고… 이런 편견을 카버는 송두리째 깨뜨린다. 그래서 그의 작품 같은 글을 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단편집을 읽는 내내 고통스럽다가 <대성당>을 읽은 즈음 쿵, 하고 가슴에서 울림이
터졌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을 때였다. 이 작품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목욕'으로 실렸던 작품인데 <대성당>에는 조금 다르게(?) 각색되어 다시 나왔다. 희망 없던 카버의 작품에서 드디어
희망이랄까, 서로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대성당' 또한 그전의 작품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한때
카버에게도 봄이 찾아오긴 왔었나 보다. 이렇게 작품을 통해 작가 인생의 변화,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카버의 작품은 그의 삶과 무척 닮았다. 알코올 중독자, 해체 직전의 가족, 경제적 고통, 가난했던 삶…
그리고 말년에 잠깐 찾아온 행복(이 행복의 요소에는 그의 두 번째 부인도 포함될 것이다). 카버는 자신이 잘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는 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느끼는 점이 많다. 최근 나오는 소설 중엔 자신이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 쓰다 보니 온갖
참고자료가 나열되는 소설이 종종 있다. 읽고 나면 어쩐지 공허하다. 가까운 이에게 은밀하게 들은 타인의 비밀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것도 그렇다. 남의 인생을 훔쳐오는 것도 모자라 온 세상에 폭로한다. 그가 겪은 것, 그가 본 것, 관찰한 것으로 엮어낸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의 '특별한 이야기'인 카버의 작품은 그래서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