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코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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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라는 교도소에 갇힌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페러것’- 교도소에 감금된 남자의 이야기라? 어쩐지 뻔해 보인다. 물론 책을 읽는 사람은 분위기나 작품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죄를 짓게 된 동기, 감옥 안에서의 생활, 교도소에 있는 또 다른 죄수들과의 관계나 그들의 사연 등등. <팔코너>에는 이런 모든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교도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무대로 한 여느 작품들과 조금은 다르다. 무엇보다 <팔코너>를 매혹적인 작품으로 만든 데에는 존 치버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이 작품은 ‘페러것’이 ‘팔코너’에 수감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형을 살인한 죄로 구속됐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 직업은 ‘교수’였고 심한 마약중독자이다. F동 독방에 수감되는 페러것. 교도관의 말에 따르면 F동의 ‘F는 성교(fuck), 마약중독자(freak), 멍청이(fools), 동성애자(fruits), 초범(first-timers), 뚱뚱한 놈(fat asses), 망상(phantom), 뻔뻔함(funnies), 미친놈(fanatics), 저능아(feebies), 장물아비(fences), 등신(farts)의 머리글자’라고 한다. 이 분류대로라면 페러것은 아마도 마약중독자이자, 초범에 속할지 모르겠다.

심한 마약중독자인 페러것에게는 감옥 안에서도 하루 한 알의 메타돈이 허락된다. 메타돈을 복용하며 페러것은 환상을 만나기도 하고, 환각 상태 속에서 감옥에 들어오기 전 생활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속속 페러것이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급기야 형을 살해하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면회를 온 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삶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드러나는 ‘바깥 세계에서의 삶’을 보자면 딱히 감옥 안의 삶보다 더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자유가 허락된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랄까.

오히려 감옥 안의 삶이 덜 외로워 보일 정도로 ‘팔코너’에 들어오기 전 페러것의 삶은 고독 그 자체다. 결혼으로 그가 직접 꾸린 가정 생활도 위태위태하고, 그가 태어나 자란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어쩌면 가족이기 때문에 더) 고독하고 외로운 그를 보고 있노라면 F동 독방에 수감되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로지 마약을 통해서 그 안의 또 다른 그를 만날 때만 페러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때문에 어디에서도 소외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토록 마약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이 좀 더 흥미로웠던 이유는 페러것에게서 존 치버의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고, 심한 알콜 중독자였으며,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평생 동성애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동성 연인이 있었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페러것’에게서 드러난다. 때문에 ‘페러것’은 ‘존 치버’의 분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존 치버는 ‘페러것’을 통해 어쩌면 사변적인 소설로 그쳤을 수도 있을 이야기를 붕괴되어 가는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가 떠올랐다. 윌리엄 버로스의 자전적 이야기였던 <퀴어> 역시 마약과 동성애가 주된 소재다. 그런데 그 책은 읽는 내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그다지 긴 분량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웠다.  마약, 동성애,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등등 사람들이 듣고 싶지도,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소재로 이토록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팔코너>는 그래서 돋보이고 또 돋보인다. 책을 놓고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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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데케루 펭귄클래식 106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조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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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제도는 생각 할수록 참 이상하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성은 더더군다나 보장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을 법적으로 구속해 둔다는 것부터가 모순인데다가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래, 그렇게 해두고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한국에서  결혼해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 기절할 정도다.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요구들을 '가족도 아닌 가족'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할 수 있을까? 배우자야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왜 그 밖의 사람들까지, 그들의 요구까지 순응하면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테레즈 데케루>의 '테레즈'는 바로 그러한 불합리한 결혼 생활에 반기를 들고 속박된 삶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여인이다. 어쩌다 보니 또 다른 '피난처'를 찾아 결혼하는 대다수의 여자들처럼 테레즈 역시 어떤 안정적인 자리, 자신의 최종적인 지위를 찾고자 서둘러 결혼한다. 테레즈는 그렇게 '뭔지 모를 위험에 대항해 안정을 찾고자 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뿌리를 박고, 자기 자리를 잡았으며 관습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테레즈는 점차 결혼과 가족이라는 굴레가 주는 속박감에서 숨막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곳에서 개인의 자유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과의 의사소통도 점차 불가능해진다(어쩌면 애당초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딸을 갖게 되어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임신을 했을 때 남편의 지나친 관심이 역겹기만 하고 오히려 자신이 가문의 자손받이라는 생각에 비참해질 뿐이다.

'그는 내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배속의 아이를 걱정하는 거야. 그 끔찍한 어조로 계속 말하지. 퓨레 좀 더 먹어.... 생선은 먹지마....당신 오늘은 충분히 걸었어....모유 때문에 고용한 외국인 유모야... 그런 말에 감동할지 모르지만 난 전혀 감동스럽지 않아. 라 트라브 가족은 내 안의 신성한 꽃병에 경외심을 품은 거지. 난 그들의 자손받이야. 필요하다면 그들은 이 태아를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할 테지. 나라는 개인감정은 뒷전이야. 가족들의 눈에는 나는 기껏해야 포도나무일 뿐이야. 오로지 내 옆구리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열매만이 중요할 뿐….


테레즈는 한 침대에서 잠드는 남편을 '침대 밖으로 영원히 어둠속으로 그를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게 되고, 결국 그 소망을 현실로 이루고자 실행에 옮기게 된다. 남편을 서서히 독살할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것이다. 테레즈의 이 계략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테레즈는 남편과 가족 없이 혼자 지내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여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가족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쉽게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테레즈의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이 제도가 얼마나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제도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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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다 -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 이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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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자신의 일기가 이렇게 온 세상에 공개될 것을 알았을까? 만약 알았다면 이토록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녀가 죽기 전 누군가가 손택에게 일기를 공개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면 그녀는 허락을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오를 정도로 손택의 일기 모음인 <다시 태어나다>솔직’ ‘진솔그 자체다. 그렇기에 수전 손택을 좋아하고 존경하던 팬의 입장으로 그녀의 내밀한 사적 기록을 훔쳐(?) 읽는 일은 은밀한 쾌감과 즐거움이 따른다. 그러나 작가 사후 작가의 동의없이 일기가 출간되는 것을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여전히 궁금하기는 하다.


손택의 일기를 읽으며 그녀에 대해 몰랐던 부분(물론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고, 어렴풋이 짐작으로 알았던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잘 알게 되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다: 1947~1963>는 그녀가 14세 때부터 30세까지 쓴 일기로 구성된다(손택은 2004년 죽기까지 백 여권의 일기를 썼으며 그녀의 일기는 앞으로 더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젊은 손택은 어떤 면에서는 예상대로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점에서는 뜻밖이기도 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17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아들도 하나 두었던 그녀는 양성애자로 알려 졌지만 이 일기를 보면 스스로 자신이 동성애자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당시 그녀가 살았던 시대나 주변 분위기, 환경 등의 영향으로 양성애자로라도 살아 보려고 애썼던 듯하다. 동성애 성향에 대해 죄의식을 갖기도 했으며(내가 동성애자라는 죄책감이 얼마나 큰지 이제야 실감하기 시작했다. H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H 탓이라고, 그녀가 내 악의 근원이라고, 그녀만 없으면 난 동성애자가 아닐 거라고, 아니 적어도 대체로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게 했다P. 286) 고민하는 모습에서는 그토록 자유분방해 보이던 사람조차도 내면에서는 이런 고뇌를 안고 살았구나 싶어서 안타깝기도 했다.


게다가 더 안쓰러운 것은 어쩐지 자존심도 세고 도도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으나(‘H’아이린처럼 동성 연인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손택이라니! 그것도 자신을 막 대하는데!!) 그럼에도 만족할 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어쩌면 관계를 맺고 잘 유지하는 법에 서툴렀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인과의 관계에서 힘들어 했다. 역시 타인의 일기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또 하나 재미있던 부분은 손택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는 점이다.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매년 일기마다 말을 적게 하자는 결심을 적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단추 달기(입에 단추 채우기)’. 게다가 씻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했나 보다. 씻기를 결심하는 부분도 일기에 자주 그려진다. 이를 테면 이렇다. 매일 목욕하고 열흘에 한번씩 머리 감기(헐 열흘에 한 번씩이라니!!!!). 그뿐만 아니라 책을 훔치다 서점에서 붙잡히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은 아마도 일기가 아니었다면 알 수 없지 않았을까?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사람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본 것 같아 낄낄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살아왔기에 오늘날의 수전 손택이 존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치열하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공부한 흔적이 일기에 담겨 있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영화, 오페라, 연극 등 문화적 자극에 대한 열의가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던 그녀. 수전 손택의 ‘지적인 것에 대한 갈망은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에 대한 갈망으로 그녀의 삶 전체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토록 뜨겁게 매 순간 읽고 보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며 살았기에 오늘날의 그녀가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수전 손택이 자신의 일기가 공개되기를 바랐는지 어땠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그녀의 글과 날카로운 지성, 올곧게 살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아플 정도로 진솔한 일기가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할 것이라 여겨진다. 바로 내가 그런 것처럼…. 일기를 덮을 즈음엔 좀 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그녀의 날카로운 글들이 다시금 읽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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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3-14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내 일기를 사후에 읽는다면.. 생각만 해도 지금 당장 불태우고 재는 물에 개어 하수구에 버리고, 파일은 삭제하고 디스크를 몇번이고 완전 포맷해서 복구를 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ㅋㅋㅋㅋ (지은 죄가 워낙 많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손택은 진솔하고 치열하게 살았고 그 삶을 일기로 복기하면서 성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자냥님의 페이퍼를 역순으로 하나씩 읽으며 지금의 잠자냥님의 필력은 끊임없이 읽고 쓰고 보고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복기하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잠자냥 2023-03-15 10:18   좋아요 0 | URL
하하, 저의 지나간 글을 읽어보고 계시다니 당장 불태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고 싶어지는 부끄러움? ㅎㅎㅎ
저는 그래서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 라고 하고 보니 알라딘 서재나 투비 같은 공간이 일기나 마찬가지네요.... 음 ㅎㅎㅎㅎ

DYDADDY 2023-03-15 10:23   좋아요 0 | URL
브런치를 읽지 않아도 된다 하셔서 전에 쓰셨던 글을 읽어보고 있었어요. ㅋㅋㅋㅋ 일기가 굳이 그날의 일상을 적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서재도 일기와 다름아니다라고 생각해요. 손택처럼 진솔한 글쓰기를 하시는 잠자냥님이 부럽습니다. 그 글이 쌓여 지금의 잠자냥님이 있으신 것이니 부끄러워 마시길 바라요.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세계문학의 숲 40
카슨 매컬러스 지음, 서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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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이 있다. 벙어리 두 사람. 그 둘은 늘 함께였다. 두 사람은 매우 달랐다. 한 사람은 덩치가 크고 뚱뚱했으며 언제나 화려한 색의 옷을 아무렇게나 입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비해 마르고 키가 컸으며 항상 단정하고 차분한 옷차림이었다.

뚱뚱보의 이름은 ‘안토나풀로스’. 단정하고 마른 이의 이름은 ‘존 싱어’. 싱어와 안토나풀로스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마치 이 세상에 서로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싱어가 절대적으로 안토나풀로스에게 의지해 살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토나풀로스가 어느날 정신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을 때 싱어는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듯 했다. 그는 공허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없이 외롭고 슬펐다. 싱어는 이제 혼자 걸었고 집에 와서도 혼자였다. 안토나풀로스가 없는 집을 견디지 못하고 싱어는 소도시의 외곽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벙어리 싱어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감지한다. 싱어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로 들어준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듣고 또 듣는다. 아이, 어른, 남자, 여자, 흑인, 백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용히 웃어준다.

사람들은 그런 싱어를 이내 좋아하게 되고 그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소녀 ‘믹’, 자본주의에 물든 미국 사회를 뜯어고쳐 보고 싶은 사회운동가 ‘제임스’,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온 흑인 의사 ‘코플랜드’ 박사 등등. 모두가 이 벙어리 싱어를 찾아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 받고자 한다.

싱어 같은 사람. 벙어리 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나도 싱어를 찾아가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위로 받고 싶을까? 싱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혹은 어떤 고통이나 절망 외로움을 느끼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싱어에게 나만의 외로움, 고독, 슬픔, 고통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털어놓음으로써 ‘위로’ 받은 기분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을까?
 
조용히 항상 미소 지으며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의 속내는 과연 어떨까? 싱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싱어를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가난한 사람, 억압받고 차별 받는 흑인, 너무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회에 상처받기만하는 사회부적응자 등등. 모두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싱어를 찾아와 그들은 잠시나마 삶의 고통이라든지 외로움을 잊고 간다. 그들이 만들어낸 싱어의 이미지 속에 진짜 싱어는 과연 존재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싱어를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실 그 어떤 이미지도 싱어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담지는 못한다.
 
싱어는 자신과 똑같이 말 못하는 벙어리였던 안토나풀로스를 돌보고 그와 말이 아닌 ‘수화’를 나누며 ‘소통’했을 때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직 안토나풀로스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그에게는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 그 전부였다. 나머지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어딘가에서 찾기 마련이다. 음악가를 꿈꾸는 소녀 믹은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의 방을 만들어 놓았으며, 제임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회변혁을 하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자리한다. 코플랜드 박사는 흑인 운동에 대한 열정의 방. 이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방’들이 항상 꿈꿔온 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 또 다른 ‘마음의 방’을 찾아와 위로해주고 상처받고 좌절한 그 ‘마음의 방’을 보듬어 줄만한 존재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존 싱어가 그런 존재였다. 싱어에게는 그 두 개의 마음의 방을 모두 안토나풀로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안토나풀로스 외에는 그 누구도 싱어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안토나풀로스가 없는 싱어의 마음은 언제나 외로운 사냥꾼일 수밖에 없고 또 그런 싱어를 잃어버린 나머지 사람들은 또 다른 마음의 외로운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너를 보고 싶은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곧 다시 갈게. 그래야만 해.
    너 없이 혼자 있을 수가 없어. 너는 나를 이해하니까. (267쪽)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나 트루먼 카포티의 <풀잎하프> 혹은 남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여러 단편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몹시도 외롭고 슬프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이 몹시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때문에 이해받지 못한 마음은 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은 아닐까? 게다가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하던 한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은 ‘이해’이고 ‘이해 받음’은 곧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 기나긴 인생에서, 삶을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벙어리 정신병자로 보인 뚱뚱보 안토나풀로스. 그는 싱어에게 유일하게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말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아주 작은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함께 걷던 ‘안토나풀로스’와 ‘싱어’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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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과디아 - 1920년대 한 진보적 정치인의 행적
하워드 진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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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과디아 - 1920년대 진보적 정치가의 행적>은 하워드 진의 최초 저작으로 1959년 그의 박사 논문이기도 하다. ‘라과디아’라는 인물에 대해 딱히 크게 아는 바가 없음에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워드 진의 ‘최초’ 저작이면서 ‘박사 논문’이었다는 점. 석사나 박사 논문은 굳이 꼭 다 읽어보지 않더라도 어떤 주제와 소재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그 연구자의 주요 관심사를 알 수 있고 앞으로의 학문 방향까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워드 진이 ‘피오렐로 라과디아’를 박사 논문 주제로 삼은 것은 참 ‘그 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과디아는 1934년에서 1945년 동안 공화당의원으로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했던 사람이지만 이탈리아계로 미국에서는 소수 인종에 속했고, 뉴욕시장을 하기 이전에 긴 세월을 하원 의원으로 보냈으며,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 소수 인종, 노동자들을 위한 입법 정책을 활발히 했던 ‘20년대의 진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하워드 진은 역사는 역사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힘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되어왔다며 ‘민중의 힘’을 항상 역설해 왔다. 때문에 하워드 진이 서술한 역사서를 보면 주류 역사관과는 많이 다르다. ‘민중의 힘’, 보이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변화의 힘과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온 그의 관점은 ‘피오렐로 라과디아’를 박사 논문 주제로 선택했을 때부터 예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라과디아가 하원 의원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 미국은 ‘번영의 시기’라 하여 부가 넘쳐났고 사회는 흥청망청이었다. 피츠제럴드가 그의 소설에서 묘사한 ‘재즈시대’가 바로 이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이때를 다룬 자신의 작품에서 넘쳐나지만 공허한 사람들을 그렸고, 실제로 자신의 주변에서 이유 없이 삶을 포기하거나 망가져 버린 사람들을 언급했듯, 화려한 1920년대의 이면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도 있었다.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나아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부가 소수로 집중하면서 화려한 성장의 뒤편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더욱 궁핍하고 어려워졌다.


라과디아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하워드 진은 라과디아의 의회 활동을 꼼꼼하게 찾아내어 기록하며, 그 의미와 한계 등을 되짚는다. 라과디아는 전기와 석탄과 같은 산업이 소수 기업에게 독점되는 행태를 막고자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줄기차게 주장했고, 노동자의 파업권을 보장하라고 싸웠으며, 누진세제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외쳤다. 어떻게 보면 공화당과는 전혀 반대되는 정책을 내세웠다고도 볼 수 있다(공화당에서는 소수인종에게 인기가 좋았던 라과디아가 필요했기에 그를 쉽게 내치지 못했고, 라과디아에게 있어 당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워드 진은 라과디아의 이런 입법 활동들이 ‘뉴딜’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를 한다. 누구나 다 뉴딜하면 루즈벨트를 떠올린다. 역사도 루즈벨트 = 뉴딜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뉴딜의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 ‘라과디아’를 지목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소수의 사람, 민중의 힘에 더 주목한 하워드 진의 시선답다. 물론 라과디아를 ‘보이지 않는’, ‘민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역사에서 자주 다루는 인물들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라과디아>는 하워드 진의 학문 및 정치 세계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기도 하지만 ‘라과디아’라는 인물과 그가 살았던 1920~30년대 미국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라과디아는 약자를 위해 줄기차게 싸운 사람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정치인’이다. 그러나 ‘정치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계로 느껴지는 부분도 종종 있다. 1차 대전에 참가하며 전쟁을 옹호하기도 했으며, 이탈리아계 표를 잃지 않기 위해 무솔리니에 대한 비판도 하지 못했다. 또한 때로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맞대결하는 상대방을 저열하게 깎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이자 정치인이었던 ‘라과디아’가 이런 한계가 있었음에도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그가 결국 그런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나갔기 때문이다. 전쟁을 옹호했던 자신도, 무솔리니를 비판하지 못했던 자신도 부끄러웠는지 훗날의 그는 변모한다. ‘진보’란 이런 게 아닐까. 서로 말과 글로 진짜 진보니, 가짜 진보니 ‘진보 싸움’에 여념이 없는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라과디아’를 권하고 싶다. 진짜 진보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 자본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그 자본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사람, 인간이기에 오류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그 오류를 인정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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