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그르니에의 <짧은 이야기 긴 사연>을 펼치면 책의 맨 앞장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삼인칭으로 말하고 싶다. 그 편이 더 어울리니까. A.O. 바르나부트’- 그 후에 펼쳐지는 13개의 단편들은 정말로 모두 3인칭이다. 베르나르 그라몽, 올리비에 마르키, 레오 루파크, 모리스 베르비에, 레오노르 등등의 이름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은퇴한 노인, 첼리스트, 기상학자, 왕년의 스타,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 서점원, 샌드위치맨, 치매환자 등등 그 직업이나 계층,
성, 연령도 참 다양하다. 그러나 로제 그르니에가 쓴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일생에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을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겪은 사연들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을 수는 있다. 물론 그와 반대로 더 극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이런 사건들을 통해 그들이 느꼈을 법한 온갖 감정들- 쓸쓸함, 외로움, 고독, 환희, 절망, 황망함, 유쾌함, 즐거움- 은
나 자신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바로 ‘공감’말이다.
프랑스의 ‘체호프’라고 불리는 로제 그르니에는 단편이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프랑스 문학계에서 90세가 넘도록, 현재까지 단편으로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동시에 받고 있는 작가이다. 짧지만
여운도 강하고 때로는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한 그의 단편들을 읽노라면 바로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단편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