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랑글라드 지방에서 할아버지와 살아가는 청년 일루와방 로슈페르는 지역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취향을 지니고 있다. 지역 사람들이 라벤더 재배로 향유를 생산하는 데 비해 그는 유독 대방어 키우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가 반해버린 색채 대방어의 그 찬란한 은빛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삶의 색이 방어의 색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삶이란 신기한 은빛 대방어였다. 어느 날 은빛 비늘의 대방어 한 마리가 그의 손에 살포시 앉았다 헤엄쳐갔는데 손바닥에 남은 비늘이 은가루처럼 보이며 생명선을 가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은을 꿈꾸었고 방어 키우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데다 어느 날 죽은 대방어의 은빛 비늘이 안타까워 비늘을 쓰다듬다 우연히 맛보게 된 그 살점의 맛에 넋을 잃어버린 일루와방은 방어에서 부(富)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품게 된다. 그렇다, 이 아름다운 은빛 방어, 그것의 연분홍과 붉은기가 도는 살점은 더욱 황홀하구나! 그러니 방어를 키워서 부자가 되리라! 일루와방은 양식을 통해 방어를 키울 꿈에 부풀지만 그것은 어느 날 양식장의 화재로 인해 처절하게도 좌절되고 만다.
이렇게 그의 꿈은 무너지는가 싶은데,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대방어 회가 한참 인기인 한국과 관련한 책을 읽은 그는 그곳으로 떠나 진정한 자신이 찾고자하는 ‘인생의 은’을 찾으러 여행을 나선다. 고향에는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데도 일루와방 곁에서 늘 깔짝대는 처녀 폴린이 있다. 일루와방은 폴린에게 작별을 고한다.
“은을 찾으러 가.”
“은은 여기에도 있어.”
“네 앞에도 은은 있는데 네가 못 볼 뿐이야.”
일루와방은 폴린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며 말한다. “네게 편지를 썼어. 내 딴엔 사랑의 편지야. 언약의 편지이기도 해. 괜찮다면 내가 떠난 후에 읽어봤으면 해.” 시크하게, 그러나 폴린의 마음을 뒤흔드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일루와방-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지나 지중해와 홍해를 건너는 힘겨운 여행을 이어가던 중 그는, 배에서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은 ‘유코 아키타’- 한국인인가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일본인이다. 그래도 동양인이니 잔뜩 기대를 품고 일루와방은 유코에게 대방어 회의 장인을 아느냐 묻는다. 유코는 일본 벳푸의 간바치 장인은 안다면서 그의 횟집을 소개해준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나간 사연을 털어놓는다.
시인을 꿈꾸었고 유독 일곱이라는 숫자를 숭배해 1년 중 겨울에만 일흔일곱 편의 하이쿠를 쓴다는 유코에게는 한때 오로지 백색의 아름다움만을 담으려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궁정시인은 “시에 채색하는 법”을 배우라며 충고했고, 유코는 채색법을 배우기 위해 이리저리 헤메다 하필이면 프랑스의 외줄타기 곡예사 여인 네에주(Neige 불어로 ‘눈’)를 만나 마침내 색채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들 곁에서는 검은 바이올린을 아주 소중한 듯이 움켜쥐고 독주를 음미하며 장기에 몰두한 한 노인이 유코와 일루와방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한마디 툭 던진다. “인생에서 단 한 번 행복한 것보다 비참한 것은 없네.” 노인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 똑같은 목소리의 검은 바이올린을 만들다 그 여인을 잃고만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다.
이들과 헤어져 고생 끝에 마침내 당도한 한국의 제주도, 고향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혹한에 난방비가 폭등했다며 가는 곳마다 가스난방을 끊어 거의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루와방의 눈앞에 정방폭포와 함께 은빛 여인이 나타난다. 은빛 여인은 다 죽어가던 일루와방에게 갑자기 꿀처럼 달콤하고 기름진 방어 기름을 그의 입술에 떨어뜨려 일단 온기를 되살려준다. 그러고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이 엄동설한에 가스난방도 하지 않은 방에서 스스로 훌러덩 옷을 벗고 생면부지의 프랑스 남자에게 자신의 온몸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준다. 방어 여인과의 육덕진 하룻밤 만리장성을 거하게 쌓아올린 일루와방은 자신이 마침대 그토록 찾아 헤맨 은빛 방어가 바로 이 여인이었음을, 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긴 여행 끝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일루와방은 여전히 자신을 반겨주는 폴린과 재회하고, 문득 그토록 멀리 떠돌며 찾던 은빛은 늘 자기 곁에 있었음을, 파랑새 아니 은빛 방어는 폴린이었음을 깨닫고 만족스럽게 인생을 살아간다. 물론 그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대방어 여인이 알려준 삶의진실- 방어는 겨울이 제철로, 무게가 5kg 이상인 대방어가 특히 인기가 있으며 회로 먹다가 조금 느끼하면 묵은지나 와사비를 곁들이라는 충고를 마음에 깊이 새기며 다시 방어 양식에 도전한다.......
폴린은 와사비병을 손에 쥐었다. 뚜껑을 열고 쌉싸름한 액체에 적신 후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맛보았다.
“이 방어를 수확한 것이, 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같아.”
그녀는 다시 한번 방어를 와사비에 담갔다. 그리고 천천히 기뻐하며 방어를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삶의 은.”
-막상스 페르민의 색채 3부작 <꿀벌 키우는 사람>, <눈>, <검은 바이올린>의 패러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