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정성껏 편지를 쓴 적이 언제였던가. 요즘은 묘하게도 자필 편지가 주로 뭔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이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의미로 변질하여 이용되고 있으나, 오래전 편지는, 그것도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는 누군가의 마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용도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작가들의 편지가 담긴 책들을 좋아한다. 죽은 이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들의 편지를 읽는 일은 역시 즐겁다. 《작가의 편지》는 나 같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이다. 소설가, 시인, 극작가, 에세이스트 등 작가 94명의 편지가 담겼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에 눈이 돌아간 것은 작가의 육필 편지가 그대로 스캔해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손 글씨를 직접 볼 수 있다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은 친구에게, 연인에게, 일과 관련한 동료에게 등등 편지 목적에 따라 모두 여덟 장으로 나뉘었다. 한쪽에는 해당 작가의 손 편지를 그대로(!) 스캔해서 올렸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활자화한 편지 내용과 그런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부에서는 작가들의 무명 시절 편지들이 실려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샬럿 브론테가 브뤼셀에 머물면서 남동생 브란웰에게 보낸 편지이다. <빌레트>의 배경이 된 벨기에 브뤼셀에서의 생활 모습이 짧게나마 적혀 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이 어찌나 지리멸렬한지가 솔직하게 담겨 있다. “나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아, 미움이란 건 너무 열렬한 감정일 거야. 이들은 스스로에게도 무감하고 아무도 흥분시키지 않아. [...] 인간관계에선 아주 가식적이야. 이들에게 우정은 낯설기 짝이 없는 바보짓이고 말이야.” 그런 중에도 “흑고니 에제 씨는 이 법칙에서 유일하게 예외이지만(항상 침착하고 곰곰이 따지는 에제 부인은 예외라고 할 수 없어)”라고 말한 부분에서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이 얼마나 솔직한 편지인가! 이어 “이제 에제 씨와 드물게 대화해.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서 에제 씨와 함께할 일이 거의 없거든.”이라는 글에서는 에제를 향한 브론테의 짝사랑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2부에서는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는데,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조르주 상드가 주고받은 편지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이토록 가까웠나 싶을 정도로 다정한 편지이다. 플로베르는 상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심 없는 분노에 쉽게 빠지며, 당신이 이를 어여삐 여겨 주시기에 당신을 더욱더 사랑합니다. 함께 지내지 못해 무척 슬픕니다. 스승님. 당신을 알기 전부터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당신의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처음 본 날부터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따뜻한 포옹을 보내며.” 플로베르가 이토록 애정을 담아 상드를 “스승님” 하고 부르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거기에 상드는 이렇게 답을 보낸다. “조르주 상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이 남자는 베리 지방에서 기승을 부리는 환상적인 겨울을 즐기고, 화초를 채집하고, 식물의 흥미로운 변화를 기록하고, 며느리가 입을 원피스나 망토, 그리고 꼭두각시 옷을 만들고 무엇보다 경이로운 손녀 오로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현역에서 은퇴한 이 늙은 음유시인보다 가정생활을 더 평온하고 행복하게 즐기는 남자는 없지요.” 자기 자신을 ‘남자’라고 지칭하고, ‘며느리’가 입을 원피스를 만든다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그러고 나서 상드는 편지를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현존하는 가장 상이한 작업자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서로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우리가 같은 시간에 서로를 생각하는 이유는 반대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때로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동화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지요.” 아, 벗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얼마나 삶이 충만하게 느껴질까.

플로베르가 상드에게 보낸 편지
쿨캣 님이 최근에 <제5도살장>을 읽고 리뷰를 쓰셨는데, 그 리뷰를 보다가 커트 보니것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커트 보니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44년 12월 독일이 최후의 대규모 반격을 펼친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로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 짧은 편지에서도 덤덤하지만 “구타를 당했다”와 “나는 살아 있다”가 거듭 반복된다. 마치 <제5도살장>의 그 유명한 “그렇게 가는 거지”처럼…. 전쟁이 끝나고 3주 뒤 커트 보니것은 프랑스 북서부 지역의 적십자 캠프에 있었는데, 반년 넘도록 소식이 끊겨 걱정하고 있을 가족에게 편지를 쓴다. 보니것은편지에서 “최근 들은 바로는, 제가 행방불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족이 모를 것이라더군요. 그렇다면 설명할 일이 많네요.”라며 운을 떼고는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서술하고,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담담히 기록해 나간다. “2월 14일에 미국 공군이, 뒤이어 영국 왕립 공군이 나타났어요. 이들의 합동 공습으로 24시간 만에 25만 명이 죽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 드레스덴이 통째로 파괴됐어요. 저는 죽지 않았어요.” “나는 죽지 않았다”는 말은 덤덤하기 짝이 없는데, 저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를 보노라면 눈시울이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커트 보니것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
4부에서는 연인에게 보낸 편지들이 실려 있는데, 기욤 아폴리네르의 편지는 단연코 후끈하다. E.M. 포스터가 자신의 은밀한 사랑에서 느낀 기쁨을 친구인 리턴 스트레이치에게 검열을 피해 암호처럼 전달하며 즐거워하는 모습도, 필립 라킨이 연인 모니카 존스에게 보낸 귀여운 편지도, 짝사랑 중인 아이리스 머독의 편지도 짧고 별 내용이 없는데도 그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니 손 편지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릴케마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내고 있으니, 이쯤하면 살로메 그녀는 정녕 얼마나 마성의 매력의 소유자인가 궁금해서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립 라킨이 연인에게 보낸 편지

아이리스 머독이 레몽 크노에게 보낸 편지
5부에서 7부까지는 작가로서의 ‘일’과 그에 따른 고뇌를 엿볼 수 있는 편지들이 수록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생계수단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 같아 “다음 몇 달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시름에 빠져 있다”고 털어놓고, 발자크는 “병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한 탓에 돈이 궁해져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의 고단함을 토로한다. 한편 토머스 하디는 자신의 작품 <테스>를 혹평한 비평가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웃음이 절로 나기도 한다. “이 작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 이자와 악수를 나누고 싶군요.” 등등. 최근 읽은 <케이크와 맥주>의 토머스 하디를 모델로 했다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모습이 떠올라 더 웃음이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편지들을 훔쳐보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다가 마지막 8부에 이르러 나는 쿵, 마음이 내려앉는 듯했다. 8부는 작가들의 작별인사가 실려 있는데, 죽음을 앞두고 가까운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들의 편지에는 기어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랭보는 오른쪽 무릎 윤활막염으로 다리 절단술을 받았다. 절단한 다리에 염증이 생겨서 애써 주문 제작한 의족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결혼도 안녕, 가족도 안녕, 미래도 안녕! 내 인생은 끝났어.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아.” 말한다. 이 처절한 편지에 누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그러나 랭보의 이 편지보다도 ‘여러분 모두에게’ 보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서’는 한동안 그 페이지에서 멈춰 다음 장을 넘길 수 없게 한다. 츠바이크의 ‘유서’는 전에 다른 곳에서 읽기는 했으나, 이번에 다시 보니 또 울컥한다. 아무래도 그의 손 글씨와 나란히 보아서 그런 것일까.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가 보낸 이 세상 마지막 편지
여러분 모두에게
나의 죽음에 대해서 누구도 탓하지 말고, 수군거리지도 마십시오. 죽은 사람은 뒷말을 싫어한답니다.
어머니, 누나, 동무, 저를 용서하십시오.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다른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릴리, 나를 사랑해줘요.
정부 동무, 제 가족은 릴리 브릭, 어머니, 누이동생, 그리고 베로니카 폴론스카야입니다.
가능하다면 이들이 괜찮은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
사랑의 배가/ 일상에 부딪혀 좌초했구나/ 나는 인생에 빚진 게 없으며/ 서로에게 안긴 상처와/ 피해와/ 모욕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구나.
여러분 모두에게 행운을 빕니다!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작가의 편지>, 203쪽)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서
유서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의무를 다해야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 브라질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 날을 거듭할수록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쓰는 언어의 세계가 내게서 붕괴되고 내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한 이후에 내 인생을 완전히 새로 재건하기 위해 브라질이 아닌 다른 곳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60세가 지나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데는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고향 없이 떠돌며 여러 해를 보내느라 내 힘은 바닥났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작업을 가장 순수한 기쁨으로 여겼으며 개인의 자유를 지상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태도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친구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떠오르는 여명을 보기를 바랍니다! 성급한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떠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작가의 편지>, 213쪽)
여기서 퀴즈. 다음 편지들은 누구의 편지일까요?
난이도 1

힌트: 느끼는 대로 바로 떠올린 그 이름이 맞소이다! 쉽지 않아요?
난이도 2

힌트: 아버지
난이도 3

힌트: 잠자냥이 평소 좋아하지 않는 작가로 이 편지를 보고 잠자냥은 “쳇 글씨도 잘난체 한바가지네.”했다는.
정답을 다 맞힌 분께는(동점자가 있을 경우 댓글 빠른 순서대로) 잠자냥 증정 선물이 있습니다! ㅋㅋㅋㅋ
정답은 비밀 댓글로 제출!
*정답 (마우스를 긁어보세요) - 뭐여 북플에선 그냥 다 보이네요;;
1. 헤르만 헤세
2. 프란츠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로 '왜 제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쓰고 있습니다)
3. 괴테 (이건 평소 제 페이퍼 및 리뷰를 잘 보신 분들은 쉬웠을 겁니다요. 편지 끝머리에 'g'라는 서명도 보이네요)
아무튼, 정답자는 두 분 나왔습니다. 1등 vita 님, 뒤늦게 달았지만 무려 한 번에! 정답을 써낸 뒤메질 천재 다락방 님 두 분께 선물을 증정했습니다. 피곤한 월요일부터 저에게 큰 웃음을 주신 여러분들게 모두 선물을 드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점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그럼 전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