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재에서 <벤야멘타 하인학교>와 <필경사 바틀비> 리뷰를 잇달아 읽었다. 모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야콥 폰 군텐도, 필경사 바틀비도 모두 ‘하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 문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독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하인학교’라는 제목부터가 강렬하다. 하인 양성 학교라니! 놀랍기 짝이 없다. 모두가 갑(甲)이 되어 마음껏 갑질하는 게 목표인 것 같은 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하인처럼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기꺼이 선택하고, 그런 학교로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귀족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어디 정신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야콥’은 발전을 거부한, 오히려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바란 반(反) 영웅적 인물로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하인 ‘학교’에 들어간 소년의 이야기이니, 성장 소설인가 싶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작품에서 성장은 없다. 성장, 발전, 진보, 앞으로 나아감, 변화 이런 단어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야콥만 성장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 자체의 변화도 거의 없다. 스토리 자체가 멈춰있다. 다음 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 질 거야, 뭔가 변화가 있을 거야, 믿고 넘겨보지만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야콥도 제자리, 이야기도 제자리. 야콥 주변인물,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아이들도 제자리다. 이 학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저 인내하고 참는 법, 견디는 법을 배울 뿐이다. 그래야만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하인으로 나갔을 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실감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며, 세상에 대한 어떤 의문도 제기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저 제한된 어떤 시스템 안에서 복종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 견디는 일만이 허락될 뿐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야콥’은 작가인 로베르트 발저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인데, 그는 또 다른 작품인 <타너가의 남매들>에서도 야콥과 같은 인물을 창조한다. 그의 이름은 ‘지몬’으로 “여태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당당히 말하는 인물이다. 부모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받았는데, 방금 막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써버렸고, 일할 필요도, 뭘 배울 의지도 없다. 그는 ‘일을 함으로써 낮의 성스러움을 모독할 만큼 무모하기엔 낮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낄 뿐이다. 지몬은 나날의 노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지는지 알고 있으며, 학문을 터득하느라 태양과 저녁달 없이 지내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겐 그저 “저녁 풍경을 감상”하는 데 몇 시간이나 필요할 뿐이다.
물론 그도 때때로 일을 하긴 한다. 그러나 그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노동만을 할 뿐이고, 그 일의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일을 통한 성장이나 진보, 발전 따위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의 젊음을 사무실에서 묵히는 게 싫어 언제나 금세 떠난다. 쫓겨난 적은 결코 없다. 늘 어느 순간이 되면 제 발로 걸어 나온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근면, 충실, 시간 엄수, 눈치, 냉정, 겸손, 절제와 목표 의식’ 등등 오만가지에 그는 치를 떤다. 절반의 자유를 갖기 싫어서 아무것도 안 가진 쪽을 택하겠다는 지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적어도 제 영혼은 제 것이거든요.” (<타너가의 남매들>, 15~16쪽)
“저는 출세하고픈 욕망도 전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인 게 저한테는 최소한입니다. 저는 출세라는 걸 맹세코 대단하게 여길 수가 없거든요. 이런 거에 뭐 굉장할 게 있나요. 너무 쬐그만 책상 앞에 서 있느라 일찌감치 굽은 등, 쭈글쭈글 주름 많은 손, 창백한 얼굴, 망가진 평일 바지. 후들거리는 다리, 뚱뚱한 배, 상한 위장, 탈모로 맨숭맨숭한 머리, 핏기 없고 열정 없는 눈, 의무에 충실한 바보였다는 의식에. 사양합니다! 저는 차라리 가난하지만 건강한 채로 있겠어요. 저는 물론 딱 한 사람한테서만 존중받고 있기는 합니다. 즉 저 자신한테서요. 하지만 그 사람한테서 존중받는 게 저로선 가장 중요한 그런 한 사람이죠. 누가 ‘평생직장’이라는 낱말이나 이 낱말에 내포된 터무니없는 요구를 갖고 저를 대하면 저는 광분해요. 저는 인간으로 남아 있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위험한 것, 신비스러운 것, 어슴푸레한 것, 통제 불가능한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타너가의 남매들>, 322쪽)
때때로 일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출세나 신분 상승, 돈을 벌고, 부를 쌓는 등의 경제적 성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지몬.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연을 벗 삼는 일이다. 황홀한 전망이 눈앞에 펼쳐지고 오감이 자연스레 휴식하며 생각은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연 속의 산책. 일하면서 휴가를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는 사람에게 지몬은 말한다. 개한테 던져 주듯 그렇게 주어지는 자유는 증오한다고.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삶과 겨룰 생각이라고. 지몬의 이 내밀한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의문이 든다. 정말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성장이나 발전, 진보 같은 개념들이 언제나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정말 그게 최선일까?
“어떤 사람이 책상 일을 하는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일이 있기도 해. 그렇게 되면 그는 50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다’는 걸로 무슨 득을 본 걸까? 그는 50년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문을 드나들었고, 골 천 번 업무 편지들에서 같은 관용 표현을 썼고, 양복 몇 벌 바꿨고 자신이 구두를 한 해 동안 얼마나 조금 소비하는가에 대해 한 번씩 놀라곤 했지. 우리는 그가 살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수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타너가의 남매들>, 41~42쪽)
지몬의 이런 고백을 지켜보노라면 필경사 바틀비가 떠오른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는 그 유명한 말로 야콥이나 지몬보다 더 널리 알려진 反성장주의자이다.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문서를 필사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바틀비는 자기 신념과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단호히 거부하는 인물이다. 바틀비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니퍼 Nipper’와 ‘칠면조Turkey’ ‘생강과자 Ginger Nut’처럼 특이한 별명을 가진 직원들이 있다.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이런 별명으로 부른다기보다는 어차피 그는 곧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기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이 고용된 바틀비는 처음에는 문제없이 일을 잘 수행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말하고는 점점 일하지 않게 된다. 창밖을 보며 그저 뭔가를 꿈꿀 뿐이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차츰 사무실에서 퇴근조차 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를 피해 변호사가 오히려 사무실을 옮기는 사태에 이른다. 그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무언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무조건 하라, 하라, 하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사람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자기가 속한 시스템에 발을 담고 정신없이 움직인다. 그런 세계에서 하지 않기를 선택한 바틀비는 어쩌면 가장 용감하면서도 숭고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反성장을 떠나서 움직임 자체를 멈춰버린 인물도 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오블로모프>의 ‘오블로모프’가 그런 인물이다. 문학 인물 가운데 가장 게으른 인간을 꼽으라고 하면 오블로모프 즉,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가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그가 침대에 눕는 것은 환자나 졸린 사람들처럼 필연적인 것도, 그렇다고 피곤한 사람들처럼 우연한 것도 아니다. 게으름뱅이들의 향락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일 년 내내 잠옷을 입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기를 가장 좋아하는 그, 하인이 양말까지 신겨줘야 한다. 그런데 이 남자, 교양도 넘치고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지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그가 최고로 꼽는 덕목은 ‘양심’이며, 그는 그것을 여전히 잘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그는 천성적으로 악한 짓을 도무지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귀족 신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오블로모프’ 즉 잉여 인간이라 불리는 그. 그런데 이런 그가 꼭 게으르다고 비난받아야만 할까?
그는 바쁘게 사는 사람을 동정한다. ‘그것도 삶인가’ ‘그런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의아하기만 하다. 바쁘게 일하면서 출세를 꿈꾸는 친구를 보며 혀를 찬다. “세상일에는 문외한이 되어버렸어! 그래도 출세는 하는 모양이지? 조만간 국정을 쥐고 흔드는 고위고관이 되겠지. 세상에서는 그런 걸 출세라고 하니까. 출세에는 인간성은 필요 없겠지. 지성이나 의지, 감정 따윈 그에게 도움이 안 돼. 그런 건 지나친 사치일 뿐이지. 한 인간이 짧은 생애 동안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평생 살아야 하다니, 언급할 가치도 없어. 그런 상태로 8시부터 12시까지 집에서, 12시부터 5시까지 관청에서 일하다니, 정말 가엾은 사람이야!” 말한다. 자신에게는 그런 쓸데없는 바람이 없으니 그렇게 악착같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누워서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더없는 만족한다. 작가인 곤차로프는 이런 오블로모프의 모습에서 움직임 없는, 정적(靜的)인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시스템에 적응하면서 꾸역꾸역 살다가 어느 낡 갑자기 탈출해 버리는 인물도 있다.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는 스스로 지도 안에서 사라져 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평범한 회사에서 과장 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남자의 부인은 6개월 동안 그를 찾다 못해 흥신소에 의뢰를 한다. 흥신소 직원 ‘나’는 이 남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나’도 사회에서 일탈한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그 또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아내와도 이혼하고 구린 일을 한다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흥신소에서 남의 뒷조사나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 ‘남자’를 찾으면서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실종된 남자와 얽힌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 남자는 대체 왜 사라진 것일까?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이 탐정 ‘나’에게서 종종 실종된 남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는 추적을 할수록 이 실종된 남자를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아베 고보는 <불타버린 지도>를 통해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지도 안에서 사라져버린 사람. 스스로 지도를 불태우고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과연 이곳이 당신의 자리이니까, 사회 시스템 안으로 돌아오라고 강제로 끌어다 놔야할 권리가 다른 인간에게 과연 있을까?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인간은 마땅히 제 역할을 하며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그걸 잘 해나가야만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 패배자, 잉여인간이라고 한다. 사람의 가치는 오직 ‘쓸모’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과 발전을 스스로 거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성장’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닳고 닳도록 말하는 ‘발전’ ‘진보’ ‘변화’ ‘혁신’ ‘미래’ ‘나아감’ 이런 것들이 대체 무엇인지, 꼭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발전해야 하고, 성장해야만 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야콥이나 지몬, 바틀비, 오블로모프, 그리고 불타버린 지도의 그 남자처럼 자기가 속한 시스템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살아간다면 괜찮지 않을까? 차라리 가난하지만 건강한 채로 있겠다고, 자기 자신한테서 존중받기를 선택하겠다고,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존중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지몬의 말이 참으로 울림 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