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도서관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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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책은 읽는 의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읽기라는 행위조차 왜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종종 드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수록 그래도 감이라는 게 생겨서 그런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어졌는데, <수영장 도서관>은 아주 오랜만에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하는 회의감에 여러 차례 부딪혀야만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것은 이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전작, 2004년 부커상 수상작인 <아름다움의 선>을 꽤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앨런 홀링허스트의 작품은 애초부터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지나치리만큼 세밀한 묘사 때문에 좀 읽다 보면 지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작품도 꽤 길다. <아름다움의 선>은 빽빽한 글씨로 600쪽을 훌쩍 넘고, <수영장 도서관>도 500쪽이 넘는다. 섬세하고 우아한 문장, 진저리날 만큼 세밀한 묘사 등등 어떤 의미에서는 요즘 작가의 책을 읽는 것 같지 않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 <수영장 도서관>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때는 그런 탓이려니 했는데, 실은 게이 섹스에 대한 과한 묘사가 몇 번이나 책을 덮게 만들었다.

그래도 또 읽었나갔다. 작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스물다섯의 예쁘장한 게이 청년 ‘윌리엄’은 남부러울 것 없는 처지다. 성소수자라고 하면 어쩐지 차별도 많이 받을 것 같고, 박해도 받을 것 같고, 사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에게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국의 잘 나가는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유명한 사립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를 나왔고, 할아버지는 또 엄청난 부자라서 그에게 럭셔리한 아파트를 척하니 사주셨고, 그는 그런 아파트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한량처럼 지낸다. 아니 그가 하는 일이라곤 고급 신사클럽인 ‘코리’에 가서, 수영을 신나게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몸을 탐색하고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것도 부족해서 공중 화장실에서 급만남을 꾀하기도 하는데, 어느 날은 자신처럼 공중 화장실에서 파트너를 찾아 전전하던 한 노인이 심장 발작이 와서 쓰러진다. 멍청하게 서 있는 다른 남자들을 헤치고 윌리엄은 그 노인을 심폐소생술로 구해주는데, 그는 알고 보니 같은 코리 회원인, 여든 넘은 ‘찰스’이다.

스물다섯 게이 ‘윌리엄’과 여든 넘은 게이 ‘찰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고급 신사 클럽 코리의 회원이라는 것 외에 둘 다 귀족 출신에 명문 사립학교를 거쳐 그 학교에서 게이로서의 정체성과 성(性)에 눈을 떴고 옥스퍼드를 나온, 어떤 면에서는 영국 사회에서 주류이면서도 그들의 성 정체성 때문에 비주류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찰스는 윌리엄에게 자신의 회고록을 써보지 않겠느냐면서 십대 때부터 적어 나간 일기를 건네는데, 윌리엄은 그 일기를 읽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 <수영장 도서관>은 이렇게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태어난 ‘찰스’라는 인물과 1950년대 후반 태생인 ‘윌리엄’이라는 인물의 삶을 겹쳐 보여주면서 1900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영국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다뤄나간다.

이 작품의 거의 절반을 넘어가기까지는 윌리엄, 그리고 찰스의 화려한 남성편력기가 그려져서 대체 작가는 이런 설정으로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궁금해진다. 물론 찰스에 비해 1980년대에 20대를 보내고 있는 윌리엄의 생활은 한결 자유롭고 편해 보인다. 파트너를 찾기도 쉽고 어떤 사회적 제재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 태생인 찰스는 그의 성적 지향성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고 징역을 산다. 동성애에 관한 차별적 법이 어느 정도 느슨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윌리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게다가 찰스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그를 처벌함으로서 모종의 이익을 얻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윌리엄의 할아버지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초반부터 그토록 자유로운 윌리엄의 성생활을 노골적으로 그려낸 것은 1980년대 영국은 과거에 비해서는 동성애에 대해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얼마쯤은 자유로워졌음을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물론 그 이후 대처 집권 시기에는 동성애 마녀사냥법이 부활해서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도 퇴색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이전 시기까지만 그리고 있다).

찰스의 일기를 통해 맞닥뜨린 엄청난 진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성적 방종이 어찌 보면 높은 지위와 신분, 부(富)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며 그 바탕은 다른 동성애자를 탄압한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모순을 마주한 윌리엄은 당연히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기의 자유로운 생활의 모순을 마주한다. 게다가 스킨헤드족으로부터 뜻밖의 린치도 당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동성 섹스 파트너를 공공연한 장소에서 찾으려다 경찰의 함정 수사에 걸리는 일도 곁에서 지켜보게 된다. 예쁘장한 부잣집 게이 도련님의 생활은 이런 균열을 겪으면서 그 자신이 완벽하게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성(城)이 자신의 성(性) 정체성 때문에 언제고 흔들릴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친구를 위해서도 무언가 행동할 것임을 은연중 암시하고, 실제로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또 아무리 찰스가 자기 할아버지로부터 박해받은 피해자임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그의 개인적 한계(포르노 제작 등)를 알고 난 뒤에는 그의 회고록 쓰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윌리엄의 각성은 그다지 센세이셔널하지는 않다. 그 또한 찰스처럼 미성년자인 10대 소년을 늘 자기 파트너로 점찍지 않는가. 게다가 그 청년들은 둘 다 유색인이거나 노동자 계층 출신이다. 그는 그런 소년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라도 하는 듯이 대한다. 식민지 관리로서 유색인을 대해왔던 찰스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게다가 제아무리 윌리엄은 각성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은 결국 또 다른 아름다운 미소년에게 눈길을 주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윌리엄 분명 전과 달리 자신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언제고 무너질 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또 다른 쾌락을 좇기를 멈추지 못한다.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결코 미완성인 성장. 어쩌면 인간의 성장이 다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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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9 10: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스토리 시작하기 전까지 읽었습니다. 배려해주셔서 흑흑,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6-29 10:56   좋아요 4 | URL
잘하셨습니다. 스토리는 그래도 재미납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1-06-29 12: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리뷰보고 어, 왜 또 올리셨지? 했는데 ㅋ 지난번 댓글에 줄거리요약을 리뷰로 또 착각을 했었네요.
레삭님도 섬세한 묘사 칭찬하셨는데 ‘진저리날만큼‘세밀한 묘사가 인상적이군요. 우아한 문장 참 좋은데요~^^작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딱 부잣집 좋은 교육받고 자란 그런 외모더라구요.
<아름다움의 선>은 점점 더 읽고 싶어집니다.

잠자냥 2021-06-29 13:05   좋아요 6 | URL
ㅋㅋㅋㅋㅋ 그러게요, 계속 이 책 이야기 하고 있어요. 별로였다면서!? ㅋㅋㅋㅋ 이러다 수영장 도서관 마니아 되겠어요. ㅋㅋ

작가 사진 저도 궁금해서 책 읽다 말고 찾아봤어요. 전 다른 호기심 때문에 ㅋㅋㅋㅋㅋㅋ (진짜 남자한테 인기 많았나 싶은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6-29 13:11   좋아요 5 | URL
ㅋㅋㅋ 당연히 마니아시죠.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 작가 사진보고 모스크바 신사 작가 에이모 토울스도 떠오르더라구요. 역시 부잣집 멀끔한 백인 남자. 그 분도 문체가 우아했던걸로. 기억하는데요.

잠자냥 2021-06-29 13:16   좋아요 5 | URL
아 맞아요! 에이모 토울스하고 좀 비슷하죠. 부잣집 도련님 상 ㅋㅋ

아니 저 이러다 BL마니아 되는 거 아니에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1-06-29 13:34   좋아요 4 | URL
저는 잠자냥님이 리뷰를 두번 쓰신 걸 보고 평점과는 별개로 이 책에 애착이 있다고 느꼈어요 ^^

잠자냥 2021-06-29 14:11   좋아요 3 | URL
새파랑 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6-30 09:3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의도와는 다르게 수영장의 최고 독자가 되셨어요.

잠자냥 2021-06-30 09:34   좋아요 1 | URL
이거 본문 시작 전에 ‘스포일러‘ 표시를 했는데도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셨어요. 아마 책 안 읽고 그냥 리뷰만 읽겠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분들을 위해 그 적나라하게 야한 부분 한 장 찍어서 올려줄 걸 그랬나봐요. ㅋㅋㅋㅋㅋㅋ 저 아래 쇼님 같은 분을 위햌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6-30 09:38   좋아요 1 | URL
오오~부탁드립니다 🙈🙈🙈

잠자냥 2021-06-30 09:4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6-30 15:30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수영장 도서관 마니아 만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리뷰… 가만 있어봐 ㅋㅋ 마니아 알고리즘에 파티원이 다섯명이라고 했는데 ㅋㅋㅋ

잠자냥 2021-06-30 15:39   좋아요 1 | URL
아이고, 쟝쟝 이 사람아, 알았어~ 오늘 집에 가서 내가 야한 부분 찍어 올려볼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6-29 13: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지 못하지만, 작가에게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
들이 접점을 이루지 못했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맹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해 불가 영역에 있는 이야기들
이 쏟아지니 제가 감당을 하지 못
한 게 아닌가... 뭐 그랬다고 합니다.

잠자냥 2021-06-29 13:09   좋아요 4 | URL
저는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ㅋㅋㅋ 아 근데 넘사벽도 있습디다. 폴스타프 님은 어떨지 기다려 봅시다. ㅋㅋㅋㅋ

물감 2021-06-29 13: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저는 퀴어문학에 약한 것 같아요....출판사에서 서평요청이 왔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ㅋㅋㅋ
저라면 절대 좋은 평을 하지 않았을거라 다른 분들께 미안해질테니 그냥 안읽어야겠어요 하하핳

잠자냥 2021-06-29 13:28   좋아요 5 | URL
아니 이거 서평 요청 거절하신 거 맞죠? 책 이미 받으셨고, 써야 했다면 지옥문 열린 겁니다. ㅋㅋㅋㅋㅋ
존 치버 <팔코너>는 이 책에 비하면 아가 수준... ㅎㅎㅎㅎㅎㅎㅎ
(근데 서평 요청 받고 리뷰 쓰신 분들 평도 그닥 좋지는 않더라고요. 무쟈게들 힘드셨나 봅니다. ㅋㅋㅋㅋ)

syo 2021-06-29 14: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퀴어문학 엄청 좋아하는데, 왜 이 글을 읽고 나니까 역뽐뿌를 받는 걸까요 ㅋㅋㅋㅋㅠㅠㅠㅠ

잠자냥 2021-06-29 15:4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쇼 님은 읽어보세요~ 김봉곤하고 박상영 책도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건 거의....우아..... 말잇못. ㅋ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29 2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왜 읽지 하면서 500페이지를 다 읽고도 모자라 리뷰까지. 잠자냥 끝내주심. 저는 동성애자들도 계급에 따라 보는 시선들이 다르다고 느껴요. 부와 지위를 못 가진 동성애자들은 더 천대받는. ㅠ

잠자냥 2021-06-29 23:57   좋아요 2 | URL
네, 어느 사회나 부에 따라 계급이 나눠진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mini74 2021-06-30 15: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영장과 게이 하니까 괜히 숨그네가 연상되네요. 수영장이 은근히 그런 장소인가봐요.

잠자냥 2021-06-30 15:26   좋아요 0 | URL
어머나... 저 숨그네 읽었는데 내용이 어쩜 이렇게 하나도 기억 안 나죠?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30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후감 올리고 드디어 본문을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 많이 비슷하고 조금 달라서 뭐랄까, 위안도 되고 안심도 되는 묘한 기분이네요.
별점은 몇 개를 줄까 잠깐 생각하다가 만일 <아름다움의 선>보다 먼저 읽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서 네 개로 했습니다.
역시 잠자냥 님 리뷰가 오호, 정말 좋습니다. 또 한 수 배웁니다. @.@

잠자냥 2021-07-30 09: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많이 비슷하고 조금 다른 그 무엇을 발견하는 재미가 또 다른 이의 리뷰를 읽는 묘미겠지요. 이 책은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정치소설 맞습니다. 성 정치,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 비판이 담긴 정치소설이랄까요? ㅎㅎ

전 <아름다움의 선>이 아무래도 더 좋았어요. ㅎㅎㅎ
암튼 <수영장 도서관> 다 읽고 나서는 이 작가 책이 또 번역된다면 읽을까..... 싶었는데 읽을 것 같습니다.

 
몽마르트르 유서 움직씨 퀴어 문학선 2
구묘진 지음, 방철환 옮김 / 움직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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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의 삶을 다룬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을 읽은 다음 곧바로 레즈비언의 삶을 그린 구묘진의 <몽마르트르 유서>를 읽었다. 책을 덮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같은 성소수자, LGBT의 삶을 담고 있어도 그 안에서도 더 약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영장 도서관>의 게이 ‘윌리엄’과 ‘찰스’는 영국의 백인 남성이다. 둘 다 귀족 집안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았고 옥스퍼드를 나와 한 사람, 특히 윌리엄은 거의 한량처럼 지내며 섹스에만 탐닉하고 있다. 물론 그런 와중에 스킨헤드족으로부터 린치를 당하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동성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와중에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는 등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겪을 일이 없는 사건을 겪으며 자기가 속한 세계의 모순을 깨닫고 어떤 변화를 겪지만 그 변화는 그렇게까지 혁명적이지 않다. 그는 전보다는 성장하지만 그래도 소설의 결말은 그가 다시 눈부신 매력을 뽐내는 어린 청년에게 눈길을 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는 아무리 린치를 당하고, 자신의 조부가 동성애자를 학대하는 일에 앞장섰고 그로 인해 큰 이익을 얻었던 사람임에도 귀족 출신이며, 옥스퍼드를 나온 여유로운 집안의 백인 남성으로서의 지위는 변함없이 확고하게 그의 배경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에 비해 <몽마르트르 유서>의 레즈비언 ‘조에’의 삶을 보자면 첫 장부터 그리 녹록치 않다. 우선 <수영장 도서관>이라는 다소 발랄한 제목에 비해 ‘유서’라는 비극적인 단어가 들어간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몽마르트르 유서>의 레즈비언 ‘조에’는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몰아갔을까. 이 작품의 대부분은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조에는 백인 남성은커녕 백인 여성도 아닌, 동양 여성으로 타이베이 출신이다. 유학생 신분의 그녀는 3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연인 ‘솜’으로부터 결별당한 채 그들 사이의 자식과도 같았던 반려 동물 ‘토토’마저 잃고 철저히 고독과 외로움에 휩싸인, 파리에서의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몽마르트르 유서>는 그런 처지의 조에가 헤어진 연인 솜을 그리워하며 절절히 써 내려간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글에서 조에는 때로는 솜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하며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책 끝부분에 실린 솜의 편지들을 읽노라면 솜 또한 조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왜 조에와 헤어져야만 했을까? 조에의 편지를 통해 솜은 조에보다는 레즈비언으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삶을 버거워 했음을, 특히 가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압박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둘의 사랑은 물론 결별에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 누가 솜의 배신을 배신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선택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여느 이성애 커플과 똑같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에 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다시 <수영장 도서관>의 ‘윌리엄’이 떠오른다. 옥스퍼드를 나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아파트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파트너가 있음에도 그의 눈을 피해 일회성 만남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그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그저 쾌락만 좇는 삶,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위협도 없는 너무나 안온하기 짝이 없는 세계로 보인다. 늙은 게이 ‘찰스’의 삶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사는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다. 심지어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겠다고 윌리엄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백인 남성의 게이 섹스라이프는 회고록으로도 남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에, 이 동양인인 데다가 레즈비언 여성은 유학생 신분으로 ‘나는 예술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탁월한 예술을 완성하는 일이다’(76쪽) 말하며 글로써 자신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여러 번 다짐하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세상의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그 모순을 견디다 못해 결국 삶을 스스로 마감하게 된다. 고작 스물 몇을 넘긴 나이에……. ‘조에’와 ‘솜’은 왜 ‘윌리엄’이나 ‘찰스’처럼, 그 백인 남성들처럼 끝까지 살아남아, 그들처럼 여전히 당당하게 사랑을, 쾌락을 좆으며 살아갈 수 없었을까.

소설 속 인물인 ‘조에’와 ‘윌리엄’이 완전히 소설 속 인물로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몽마르트르 유서>의 ‘조에’는 작가 자신 그러니까 ‘구묘진’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묘진은 스물다섯 살이었던 1994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여성학을 전공하며 예술가로서의 꿈을 꾸며 살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유작인 <몽마르트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자살은 소설 속 ‘조에’의 삶이 그러하듯이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던 인습과 차별, 억압으로 가득한 세계와의 싸움에서 결국 패배하고 만, 아니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것이다. <수영장 도서관>의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 역시 성소수자, 게이이다. 백인 남성으로 ‘윌리엄’처럼 옥스퍼드대를 나왔고 게이의 삶을 다룬 소설 <아름다움의 선>으로 2004년에는 맨부커상을 받으며 작가로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성소수자로서의 삶이 소설의 재료가 되어 그가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데, 왜 같은 성소수자인데도 한 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저 대만 퀴어문학의 전설과도 같은 별로 남아야만 했을까. 전설과도 같은 별이 아니라, 지금도 태양처럼 빛나며 작품 활동을 할 수는 없었을까. 차별 속의 차별, 억압 속의 억압이라는 말이 <몽마르트르 유서>를 읽고 난 뒤 내내 떠나지 않는다. 구묘진, 아니 ‘조에’가 만일 동양인 여성이 아니라 백인 남성이었다면 아무리 연인을 잃었다 한들 스스로 세상을 등졌을까. 어쩌면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연인을 잃어버리는 일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에의 죽음을 지켜보며 모든 차별 속의 차별들, 억압 속의 억압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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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6-28 12: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것처럼 같은 퀴어문학인데 제목부터 확 갈리네요. 왜이렇게 화가나죠? 저는 도서관은 패쓰할거지만 유서는 보관함에 담겠습니다.

잠자냥 2021-06-28 12:11   좋아요 4 | URL
휴, 그러게요. 제 느낌으론 같은 성소수자라고 해도 남성과 여성이 처한 위치는 또 다른 것 같아요. 암튼 이 지구는 백인 남성에겐 천국인 느낌.... -_-

새파랑 2021-06-28 12: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구묘진˝ 장편소설이라길래 우리나라 작품인줄 알았어요 ㅎㅎ 이러한 연관된 독서읽기 좋네요~!! 전 단순히 <버지니아 울프를 누가 두려위하랴>를 읽고, 아무 상관없는 ˝버지니아 울프˝ 책 읽고있는데 ㅡㅡ
이런 장르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차별없는 사랑에는 공감이 듭니다^^

잠자냥 2021-06-28 12:12   좋아요 3 | URL
네, 대만의 전설적인 퀴어 문학가라고 합니다. 짧은 생애라서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책은 다른 책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또 부지런한 독서가는 그 길을 잘 따라가지요. 그럴 때 독서의 세계는 아주 풍부해지는 것 같은데, 새파랑 님은 참 그걸 잘 하시는 것 같아요. ㅎㅎ

레삭매냐 2021-06-28 1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금 엄하지만 <수영장 도서관>
리뷰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젭알.

잠자냥 2021-06-28 14:16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매냐 님이 잘 쓰셔놓군 ㅋㅋㅋㅋㅋ
알겠습니다요-

coolcat329 2021-06-28 1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묘진...대만 작가군요.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 거기다 결말까지 같아 작가가 참 가엾고 불쌍하네요. 이 작품이 그녀의 유서같습니다. 이렇게 비교해서 멋진 리뷰를 남기셨으니 수영장을 힘들게 읽은 보람이 있겠습니다.

근데 ㅠ 그렇게 글을 잘쓰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아 글을 쓰면서 이겨내보지 참 안타깝습니다...

잠자냥 2021-06-28 17:53   좋아요 4 | URL
네, 그냥 소설로 읽기엔 너무 작가의 삶과 겹쳐져서 참 여러 모로 안타깝더군요. 에휴.

붕붕툐툐 2021-06-28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별 속의 차별, 억압 속의 억압 사라지는 세상 함께 꿈꿔봅니다~🙏

독서괭 2021-06-29 0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품이 있었군요!! 퀴어소설 좀 읽어보려 하다가 <콜미바이유어네임>이랑 <딸에 대하여>을 읽었는데 이 소설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6-29 09:25   좋아요 1 | URL
네, 구묘진 작가 책이 두 권 번역되어 있던데 둘다 퀴어 문학으로 알고 있습니다!
 
랭보 서한집 상응 3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위효정 옮김 / 읻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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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천재적 면모랄까 그의 내면을 엿보기엔 내용들이 빈약해서 안타깝게도 무리였다. 다만 편지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던 시 몇 편이 실려 있는 것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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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도서관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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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한 묘사와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의 섬세한 문체, 월리엄과 찰스 두 게이의 삶을 통해 영국 사회 소수자 문제를 다룬 방식 등 잘쓴 소설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왜 이걸 읽고 있지 현타가 올 만큼 노골적인 섹스 묘사는 결코 이 작품을 좋아할 수 없게 한다. 너무 긴 게이 포르노를 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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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27 01:4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끝까지 읽는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으윽….

- 2021-06-27 01:56   좋아요 4 | URL
박수…… 짝짜자자작짝!!!

- 2021-06-27 01: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 긴 게이포르노…를 보셨다는 말씀이겠죠? (게이포르노 안봐본 사람)

잠자냥 2021-06-27 09:21   좋아요 4 | URL
이렇게 묻는 사람 있을 줄 알았어!!! ㅋㅋㅋㅋ 전 태어나 여태까지 LGBT는 물론이요 이성애 포르노조차 본 적 없는 사람입니닷! ㅎㅎ 그런 느낌이라는 거죠. ㅠㅠ

- 2021-06-27 09:43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뻔했다 ㅋㅋㅋ (오늘치 드립은 실패닷🌝)

유부만두 2021-06-27 0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 때문에 은근 신경 쓰였어요. 책에는 습기가 안 좋은데, 수영장에 도서관이라니;;;

잠자냥 2021-06-27 09:25   좋아요 6 | URL
ㅋㅋㅋㅋㅋ 수영장 도서관은 저 주인공이 어릴 때 다닌 사립학교에서는 학생회 간부를 ‘사서’라고 불렀는데요. 맡은 임무에 따라 예배실 사서, 크리켓 사서, 정원 사서 등등으로 부른 거예요. 근데 주인공 윌은 수영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고 수영장 사서가 된 셈인데, 그의 아버지가 수영장 사서가 된 걸 축하하면서 “수영장 도서관에는 어떤 책이 있는지 말해주렴” 뭐 이런 말을 해요. ㅎㅎ 아무튼 1차적으로는 저런 의미가 있지만 주인공은 그 수영장에서 성적으로 눈 뜨게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고급 신사 클럽의 수영장에서 마음껏 섹스 대상을 만나고 고르고 뭐 그러니까 그에겐 일종의 도서관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지요. 걱정하신 것처럼 수영장에서 책은 나오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6-27 14:01   좋아요 2 | URL
수영장 사서는 그러니까 책 대신 사람을 관리한…. 셈인가요?;;;

잠자냥 2021-06-27 20:1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수영장 관리하란 거겠죠. 근데 아무래도 수영장이 탈의실도 있고… 샤워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새파랑 2021-06-27 1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는 재미는 있으나 왜 읽어야 하냐는 생각이 드는 책이군요. 저같았으면 중간에 내려놨을거 같은데 ㅎㅎ고생하셨네요 ㅜㅜ

잠자냥 2021-06-27 12:11   좋아요 4 | URL
ㅎㅎ 뭔가 다른 이야기할 게 있을 것이다 하면서 읽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뒷부분에 몰려 있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coolcat329 2021-06-27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고생하셨네요. 왜 그렇게 과도하게 그 묘사를 했을까...싶네요. 이유가 분명 있을거도 같은데요...
잠자냥님 덕분에 왜 수영장 도서관인지, 대략적인 줄거리까지 알게되서 감사하네요~~^^

잠자냥 2021-06-27 20:20   좋아요 3 | URL
이유는 분명 있습니다. 그래도 과한 느낌. ㅎㅎ 줄거리는 제가 말한 건 1%에 지나지 않습니다. 막판에 사건 사고가 다 몰려있어요. ㅎㅎㅎ

붕붕툐툐 2021-06-2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판만 떼어 읽을 순 없겠죠?ㅎㅎ

잠자냥 2021-06-27 23:18   좋아요 2 | URL
ㅋㅋㅋ그래도 첨부터 읽어야 아는.. ㅋㅋ

coolcat329 2021-06-28 06:44   좋아요 3 | URL
하하 저랑 같은 생각을...😆😆

레삭매냐 2021-06-28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 동안 그리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문학적으로 뛰어났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잠자냥 2021-06-28 14:17   좋아요 2 | URL
네, 잘쓴 작품이긴 합니다. ㅎㅎㅎ

독서괭 2021-06-28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참.. 잘 쓴 소설은 맞는데 읽기 힘든… 궁금하긴 한데 다른 책 밀어놓고 읽기는 그러네요ㅋ

잠자냥 2021-06-28 15:11   좋아요 2 | URL
국내 출간된 이 작가의 작품 중에선 이 책보다는 <아름다움의 선>을 추천합니다. ㅎㅎ

blanca 2021-07-06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잠자냥님의 촌철살인. 이 책 읽으려다 안 읽기로 결심했어요. 최근 샐리 루니 단편 읽고 받은 느낌과 비슷해요.

잠자냥 2021-07-06 22:40   좋아요 0 | URL
ㅎㅎ 굳이 읽으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아요. ㅎㅎㄹ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꼭 걷는다. 30분 남짓.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엎어져서 자거나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했는데, 허리가 안 좋아지면서 그 시간엔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든 덥든 걷는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회사는 코로나 이전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던 동네에 있다. 호텔도 많고 그 호텔 앞마다 공항버스 정류장이 촘촘하게 새워져 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는 그 호텔들도 하나둘 사라지거나 생활치료 센터와 같이 변경된 용도로 쓰이더니, 정류장도 방치된 채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아니, 그 또한 다른 기능이 생겼다고나 해야 할까.

공항버스 버스정류장에는 지붕도 있고 기다란 벤치도 있다. 어느 날이었나, 점심때 산책을 하는 중에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날아와 주위를 둘러봤다. 그 버스정류장에는 노숙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때가 잔뜩 낀 커다란 짐 보따리가 있었고 마시고 버린 빈 술병, 맥주 페트병이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행의 기쁨으로 들떠서 거쳐 갈 공항 버스정류장, 여행이 멈춰버린 후로는 어느 노숙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 이후로 점심때마다 그곳을 지날 때면 그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늘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거기 있었다. 내가 그를 보는 시간은 오후 1시에서 2시 그 사이이므로, 그가 다른 시간에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그 시간엔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이 삶이라는 현실에 발목이 붙잡힌 모습으로 그렇게 늘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그의 성별도 가늠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나는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를 발견한 이후로는 이상하게도 회사 근처에서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내가 보지 못했던 노숙자들의 모습이 속속 눈에 들어왔고, 참 이상하게도 남자보다는 여성 노숙자가 더 많았다. 그들은 대개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의 그 사람처럼 옆에 술병을 놓아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정말로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멍한 시선으로 그저 먼 곳을 응시하는 이도 있었다. 밤에는 자기 안전을 지키려고 내내 걷거나 깨어 있고 낮 동안 그렇게 도심 속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잠들기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다. 씻지 못해서 뿐만이 아니라 오랜 길 생활로 검게 탄 것이다. 그들을 보고 나면 이 안온한 삶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들도 지금의 내 나이에는 삶이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안국동 근처 서머셋 팰리스 1층에 스타벅스가 있던 시절,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다. 광화문 교보에서 책을 사고 들러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 오기 좋은 그런 장소였다. 그때, 그날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풍겨오는 악취에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참 묘한 광경을 보았다. 노숙자임이 틀림없는,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가 커피를 사서는 창가에 앉아 영자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좋지 않은 냄새가 나니까 점원들도 난감했을 터인데 돈을 내고 커피를 사니까 거부할 수도 없어서 주문을 받았고, 그 할머니는 당당하게 자리에 앉아 신문을, 그것도 영자신문을 읽고 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구나, 하는 생각부터 커피를 마실 돈이 있으면 배를 채우시지 하는 생각, 정말 저 영자신문을 읽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그 이후로도 나는 그 할머니를 그 근처, 종로 또는 광화문 스타벅스에서 종종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했다. 노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내 주변에 나 말고도 이 할머니를 본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 중 누군가도 그랬고, 지금의 내 연인도 이 할머니를 직접 본 일이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꽤 유명한, 심지어 방송에도 나온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꽤 고등교육을 받았고, 외무부에서 근무한 적도 있는 여성이었다. 인천공항에도 유명한 노숙인 할머니가 있다. 나는 공항에서도 직접 그를 본 적 있고, 그가 종종 공항철도를 타고 “공짜로 영화 보러” 간다던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 또한 유명한 대학을 나왔고, 몇 개 국어가 가능해 외국인과 대화를 즐기는 여성이었다.  

그들이 젊었던 시절에는 자신들이 탄 삶이라는 버스가 어디로 자신을 이끌지 알 수 없었겠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24시간 오픈하는 맥도날드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밤을 지새우거나, 24시간 불이 켜진 공항을 떠돌며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떠날 곳이 없는 그런 노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삶은 무섭다. 대학 교육 이상을 받았고 지금 이렇게 시원한 곳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글을 끼적이고, 오늘도 점심때면 새하얀 얼굴로 그 검게 그을린 얼굴을 또 지나칠 테지만 혼자 살아갈 것이 틀림없는 내 앞날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류장에서 어디로도 떠날 수 없고 떠날 곳도 없는 그처럼 인생의 덫에 붙잡힐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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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6-24 11: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맥도날드 할머니 저도 방송으로 본 기억이 있어요! 고학력에 그리 된것도 들여다보면 각자 또 사연이 있어서...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맞네요.😔

잠자냥 2021-06-24 11:18   좋아요 6 | URL
전 나이 들수록 문득 그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 할머니가 방송 출연한 것도 몇 년 전에야 알았어요. 2013년인가 돌아가셨더라고요.

오늘 다락방 님 페이퍼 읽다 보니 덴마크였다면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다락방 2021-06-24 11:18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바로 그 지점에서 미래가 불안하기도 한 것 같아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란 만화에 보면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잖아요. 바로 그 이유로 저는 제 삶에 대한 기대가 크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진행될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긍정적이기만 한 건 아닐텐데,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도 그리고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겠지요. 제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도 세상의 어떤 일들이 저를 후려쳐서 넘어뜨릴지 모르잖아요.

점심후의 산책은 저도 요즘 계속 하다가 족저근막염 때문에 쉬고 있어요. 족저근막염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제가 그걸 앓고 있습니다. 인생 뭘까요..

잠자냥 2021-06-24 11:22   좋아요 6 | URL
그러게요. 이 글 쓰고 나서 다락방 님 페이퍼 보러 갔는데, 덴마크가 정말 더 여러 의미로 천국처럼 느껴지네요. 싱글 여성들이 노년에도 불안하지 않을 나라라고나 할까... 휴 :(

족저근막염 저도 지금 검색해 봤어요. 아이코야 통증도 그렇고 답답하겠어요. 얼른 낫기를!

레삭매냐 2021-06-24 11:4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려서는 마냥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참...

어쩌니 저쩌니 해도 자본주의
쏘사이어티에서는 돈이 쵝오지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참, 스타벅스에서는 음료 주문
하지 않아도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하네요. 전세계 공통 룰이
라고 하네요.

잠자냥 2021-06-24 12:11   좋아요 5 | URL
그러게요, 젊음이 좋은 건 마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는 게 아닐까 싶네요.
스타벅스에선 그렇군요.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커피를 참 좋아하셨나 봅니다.

새파랑 2021-06-24 12: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산책을 하다가 많은걸 떠올리셨군요. 미래는 알수 없는게 맞는거 같아요 ㅜㅜ 근데 잠자냥님 점심먹고 30분을 산책하시는게 놀랍네요. 왠지 책 읽으실거 같은데...언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으시는지!

잠자냥 2021-06-24 12:31   좋아요 5 | URL
점심때라도 눈 쉬게 하려고요. ㅎㅎ 저녁때도 30분 이상은 산책합니다.
그러게요 책은 언제 읽을까요? 꿈에서? ㅎㅎㅎ
그나저나 새파랑 님이야말로 정말 책 많이, 빨리 읽으시잖아요!

새파랑 2021-06-24 12:36   좋아요 5 | URL
다른분도 아닌 잠자냥님이 저보고 많이 읽는다고 하시는건 좀 ㅎㅎ 하긴 그동안 읽으신 책이 엄청나게 많으실거 같아요 👍
전 점심때 읽어요. 걷는건 저녁에만 ^^

coolcat329 2021-06-24 13:2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글 읽으며 이 분 맥도날드 할머닌데 했는데 역시 그 분이었군요.
젊음이 좋은건 시간을 마냥 보내도 되기때문이라는 말 정말 동감입니다.
저는 제 삶이 너무 평탄하면 정말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런 평안이 오래갈 수가 없을거라는 생각에요. 반대로 안좋은 일이 생기면 이게 삶이고 미래도 이런식으로 다가오겠지라는 생각에 또 불안해지고요. 이러나 저러나 현대인은 불안감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나봅니다.

근데 잠자냥님 게임하시는게 또 의외네요. 책 읽으실거같은데요 ㅎㅎ

잠자냥 2021-06-24 14:21   좋아요 5 | URL
맥도날드 할머니 역시 유명한 분이었군요. 이 서재에서도 많이들 알고 계시네요.
불안이 영혼을 좀먹는다고 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어요.

게임..; 네 아주 구닥다리 게임을 수 년... 거의 10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다 합하면 책 한 권은 쓰고도 남았을 거예요;; ㅋㅋㅋ 어제도 <수영장 도서관> 읽다가 12시에 책 덮고 1시간이나 게임하다 잤어요;

<수영장 도서관> 너무 진도가 안 나가요; 너무 야해서 -_-

독서괭 2021-06-24 15:08   좋아요 3 | URL
오.. 저도 잠자냥님 게임하시는 게 참 의외네요. 회사도 다니고 책도 많이 읽고 리뷰도 페이퍼도 많이 쓰시는데.. 다락방님에 이어 잠자냥님의 하루도 24시간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ㅋㅋ / 근데 너무 야해서 진도가 안 나가는 건 무엇이죠??

다락방 2021-06-24 15:30   좋아요 2 | URL
수영장 도서관 관심 1도 없었는데 진도가 안나갈 정도로 야하다고요?? @.@

잠자냥 2021-06-24 15:42   좋아요 3 | URL
이렇게 낚일 분들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요-

네, 너어어어무 야해요. 그런데 여러분, <수영장 도서관>에 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 주인공 누나가 잠깐 전화 통화하는 걸로만 나와요.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약 250쪽 돌파). 게이 섹스가 너무 적나라해서 자꾸 현타가 옵니다. 내가 왜 이걸 읽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러기만 할 것이냐? 좀만 더 읽으면 다른 거 나올 거지? 이런 심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ㅠ_ㅠ

독서괭 2021-06-24 16:01   좋아요 2 | URL
어엇 그렇군요. 전 지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읽고 있는데 요것도 좀 야한 퀴어소설인데 이보다 훨씬 적나라한가 봅니다.

잠자냥 2021-06-24 16:06   좋아요 3 | URL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전 영화로만 봤는데요, 책은 어떨지 모르지만 암튼 그 영화하고 <수영장 도서관>을 비교하자면, <콜 미..>는 그냥 초딩 관람가입니다.... ;

Falstaff 2021-06-24 16:08   좋아요 4 | URL
아휴.... 사 놓았는데.
게이 섹스는 일종의 선이 있는 거 같아요. 그걸 넘으면 좀 피곤합니다. <아름다움의 선>에서도 가끔 가다가 그어놓은 줄을 넘어가 불편하고는 했는데, 에효.....
넘 야해서 진도 안 나가는 거... 너무 야해서 과하게 불편해지는 현상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ㅠㅠ

잠자냥 2021-06-24 16:19   좋아요 4 | URL
네,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일종의 선이 있는데.... (제 기준은 그리고 그 선에 대해 나름 넓다고 생각하는데도..) 이 소설은 좀 그 선을 지나치게 넘어서 정신적으로 좀 피곤하네요. 괴로워서 진도를 팍팍 못 나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선>은 이거에 비하면 양반 수준... <수영장 도서관>이 작가 데뷔작이라 센세이션 일으키고 싶었나 보다 뭐 그런 생각도 듭니다.

다락방 2021-06-24 16:25   좋아요 4 | URL
아 저는 역시 수영장 도서관 패쓰하겠습니다.
저 김봉곤 단편 읽다가도 너무 섹스얘기만 나와서 이사람은 사랑이 그냥 섹스인가? 이 생각 했어가지고, 으, 그 피로함 싫습니다. 저는 패쓰.

coolcat329 2021-06-24 19:00   좋아요 2 | URL
저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도 조금 충격이었는데, 이건 굉장하군요. <아름다움의 선>도 표지가 좀 부담스럽더라구요.
그래도 고수님들 리뷰는 기대됩니다.🤭

잠자냥 2021-06-25 09:29   좋아요 1 | URL
박상영이나 김봉곤의 작품은 안 읽어봐서 제가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수영장 도서관>이 아마 훨씬 더 할 겁니다. 저도 이 책 읽다 보니까 게이들의 사랑은 결국 섹스인가? 이런 편견이 생길 지경입니다;;; ㅎㅎㅎ 암튼 이제 책이 뭔가 의미가 있을 법한 부분에 접어들었으니 리뷰는 꼭 남기겠습니다.

독서괭 2021-06-24 15: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많이 읽기 위해서라도 운동 열심히 해야 합니다ㅠㅠ 저도 달리기 시작했어요. 노년의 삶이 어찌될 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네요. 한치 앞도 모르는데...

잠자냥 2021-06-24 15:42   좋아요 3 | URL
맞아요. 책 읽는 것도 그리고 뭔가 이렇게 기록하고 남기는 것도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달리기 라이프 응원합니다!

mini74 2021-06-24 1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서 이런 글을 읽으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는게 있어요. 남일같지 않다 ㅎㅎ 나이가 들수록 소박하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삶에는 참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돈도 중요하지만 건강, 그리고 삶이 허무해지는 순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정신력 ㅎㅎ

잠자냥 2021-06-25 09: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이 들수록 소박하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참 많은 것이 필요하단 생각, 저도 정말 격하게 공감합니다. 건강+돈+정신력! 대공감입니다.

- 2021-06-24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까닭은 모르겠지만 저는 이 글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각자들이 겪어내는 삶이라는 게 있겠지요. 인생이 쳐놓는 덫들을 하나하나 제거해왔다고 생각했는 데 그 자체가 덫이었을 지도 모르구요.

잠자냥 2021-06-24 23:06   좋아요 1 | URL
아이고 쟝쟝님 *덥석*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