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랑 님의 최근 <밤으로의 긴 여로> 리뷰에 달린 붕붕툐툐 님의 댓글 “희곡이라니 무조건 담습니다. 요즘 희곡이 넘나 당깁니다!ㅎㅎ”를 보고, 또 그에 이은 새파랑 님의 댓글 “툐툐님의 희곡 추천이 기대되네요^^”를 보고 미천한 제가 희곡 몇 작품을 추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극은 좋아하지 않는데도 희곡은 좋아해서 이래저래 챙겨 읽다 보니 어느덧 북플에서 제가 일곱 번째 희곡마니아라고 알려주더군요. 물론 저 위에 폴스타프 님은 희곡마니아 세 번째라고 하니, 그분 앞에서야 조족지혈이지만 아무튼 제가 읽은 희곡들 가운데 너무 난해하지도 않고(예 : 외젠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같은 부조리극), 너무 오래되지도 않고(예 :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그리스비극), 너무 유명하지도(예 :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 체호프 희곡,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않은 작품들 가운데 살아있는 동안 이건 꼭 한 번 읽어보십쇼 하는 것들로 추천해봅니다.
카렐 차페크, <곤충극장>
새파랑 님이 최근 이 책을 사신 것 같아, 이 작품부터 소개합니다. 체코의 천재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카렐 차페크는 희곡도 많이 남겼는데(예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도 희곡입니다. 이 작품도 괜찮습니다), 그중 <곤충 극장>은 그의 희곡 3편을 맛볼 수 있는 알짜 구성입니다. 세 편 모두 100쪽 남짓으로 짧지만 강렬합니다.... 아 이제부터 늘 하던대로 걍 반말하겠습니다. 첫 희곡인 ‘곤충 극장’은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인간인 여행자가 곤충들의 세계를 엿보게 되는데, 그 곤충들의 삶이 볼수록 인간의 삶과 다름없다. 나비들은 암컷수컷 할 것 없이 짝짓기에 몰두한다. 그러다 곧 다른 짝한테 추파를 던지는 꼴불견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쇠똥구리는 또 어떠한가? 똥 덩어리를 끌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숭고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광적으로 집착한다. 쇠똥구리가 똥 덩어리를 대단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이 집착하는 돈, 성공,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어쩌면 저렇게 하나의 똥 덩어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가족 사이의 징글징글한 이야기. 가족에게 상처받아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 누가 이 고전에 공감하지 않으리. 인간이 혈혈단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가끔 가족은 너무나도 큰 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 이야기인 <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 굴레 같은, 멍에 같은 가족 이야기다. 겉으로 보기엔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집이지만, 어머니는 모르핀 중독, 아버지는 오로지 관심사라고는 돈, 형은 변변한 직업 없이 술과 여자에 빠져 살며, 유진 오닐 자신의 분신인 막내 ‘에드먼드’는 폐병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다. 이토록 우울하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왜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유진 오닐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어 했던 과거이자 자신의 전부를 만든 비극적인 가족사를 ‘글’로 써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 이 작품의 탁월함은 이 모든 비극적인 가족사, 비극의 원인이 되는 사건, 그래서 현재 이 가족의 붕괴된 모습을 단 하루! 오전- 점심- 저녁 -자정 안에 완벽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을 소재로 한 유진 오닐의 또 다른 희곡 중 <시인의 기질>도 더불어 추천한다.
테네시 윌리암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유리 동물원>
테네시 윌리암스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유명한데, 사실 나는 이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유리 동물원>을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여기 실린 <유리 동물원>때문인데, 이 작품 또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가족이야기, 그것도 테네시 윌리암스의 자전적 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테네시 윌리암스 쪽이 조금 더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래서 난 <밤으로의 긴 여로>보다 <유리 동물원>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테네시 윌리암스는 가족 안에서 행복했던 적은 그다지 없던 듯하다. 아버지는 떠돌이 외판원이었으며 어머니는 아름답지만 히스테릭한 사람이었다. 모계로부터 정신 병력이 이어져내려 왔고 그의 하나 뿐인 누나에게서 정신 분열이 발명한다(물론 윌리암스에게도 이런 정신 병력은 나타난다). 윌리암스에게는 또 하나의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그의 성적 취향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깨닫고 평생 동성애자로 살았다. <유리 동물원>은 윌리암스가 벗어나고자 했던, 그러나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가족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바탕으로 삼고 있다. 정신병을 가진 누나는 <유리 동물원>에서 절름발이 누나로 등장하며, 히스테릭한 어머니는 화려했던 과거를 잊지 못하는 다분히 허영기 가득한 어머니로 표현된다. 그리고 외판원이었던 윌리암스의 아버지는 <유리 동물원>에서 아예 집을 나가버린, 부재중인 아버지로 그려진다. <유리 동물원>의 화자이자 극 전개자인 ‘톰’은 윌리암스 자신으로 읽힌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공장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밤마다 극장으로 도피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남자, 가족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남자.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또한 가족 간의 이야기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거대한 유산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큰 아들 내외와 그들의 다섯 아이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좌절, 위선, 소통의 단절, 불협화음이 극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동성애자로서의 테네시 윌리암스의 고통이 드러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뒤렌마트 희곡선>
폴스타프 님 덕분에 읽게 된 작가. 뒤렌마트는 희곡이 아닌 작품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 희곡이 명불허전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는 <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두 편이 실려있는데, <노부인의 방문>은 진짜 웃기고 재미나면서 해학과 풍자가 쩌는 작품이다. 몰락한 소도시 귈렌에 평소에는 정차하지 않는 특급 열차가 멈춰 선다. 이유는 오직 하나 노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 세계가 주목하는 대부호이다. 이 노부인이 왜 이 마을을 찾았느냐고? 사실 귈렌은 그녀가 태어나고 10대 시절을 보낸 곳으로 45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은 것이다. 파산 직전의 귈렌 시 사람들은 이 노부인으로부터 한몫 단단히 챙기길 바라고, 노부인은 그들의 그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인간의 속됨이 낱낱이 까발려지는데……. 뒤렌마트는 거액의 돈과 정의 실현이라는 발칙한 제안으로 인간성과 공동체, 정의와 자본의 문제를 날카롭게 묻는다. <뒤렌마트 희곡선>에 실린 두 작품은 모두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 흥미롭게 읽힌다. 그로테스크한 설정 때문에 ‘저게 말이 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폭주하는 자본과 과학 앞에서 개인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빛나는 작품들은 보여준다.
헨리크 입센,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입센의 희곡도 유명하다. 물론 그중 원탑은 <인형의 집>일 것이다. 입센을 읽어본 적 없는 이들이라면 먼저 <인형의 집>을 추천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입센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썼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인 늙은 조각가 ‘루베크’의 모습에서 입센 그 자신의 모습이 종종 엿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인형의 집>의 노라와 비슷한 여인이 이 작품에도 등장한다. ‘이레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노라와 아주 닮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남성으로 인해 삶이 부서지고, 그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거침없이 떠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나 할까. <인형의 집>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입센의 이런 여성주의적 관점이 꽤 존경스럽다(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작품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같은 제목의 에이드리언 리치의 에세이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입센의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헨리크 입센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남성 예술가이자 사상가가―우리가 아는 대로―문화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작품 속에 여성들을 이용하고, 한 여성이 자신의 삶이 이용당했음을 서서히 깨닫고 투쟁하는 서사에 대한 희곡이다.”(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5쪽). 이런 설명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루베크와 울프헤임 두 남자, 이레네와 마야 두 여자, 남과 여의 대비뿐만 아니라 루베크와 이레네로 상징되는 예술과 정신적인 삶, 울프헤임과 마야로 상징할 수 있는 육체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삶, 산 정상과 산 아래의 삶 등의 대비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문제(대상으로서 종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여인들의 삶), 예술과 세속적 삶,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이레나와 마야 두 여인이 루베크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 둘은 결국 루베크와 함께 하면서 어떤 의미로든 균열을 발견하고, 그 기만된 삶을 깨닫고는 그의 곁을 스스로 떠난다. 버림받는 것도 아닌, 자기 발로 루베크를 떠나는 것이다. 입센을 이르러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까닭에는 아마도 이런 시대를 앞선 사상도 한몫 했을 것이다.
루이지 피란델로,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어느 마을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장모와 사위, 딸 셋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한 집에 살지 않는다. 사위와 딸은 함께 사는데, 장모는 그들의 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혼자 기거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딸 부부와 함께 사는 게 서로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딸과 장모, 그러니까 이 두 모녀는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장모가 딸네 집을 찾아가더라도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사는 딸을 엄마가 부르면 딸은 테라스로 얼굴을 내밀고 몇 마디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높은 곳에서 비추는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딸은 단 한 번도 엄마가 사는 집에 온 적이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사위는 날마다 장모가 사는 집에 찾아와서 장모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간다. 다정하기 짝이 없다. 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의 궁금함,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마침내 진실을 밝히고자 그들은 발 벗고 나선다. 자, 과연 그 가족의 진실은 무엇일까? 루이지 피란델로의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는 이런 모습을 그리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진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거짓이 될 수도 있는지를 날카롭게 그려나간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라는 제목이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을 본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보고 받아들인 대로 진실이라고 믿어버린다는 것,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지, 진실이라고 판단한 근거 자체가 모래성과 같다면 그 진실은 또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질문한다.
후안 마요르가, <맨 끝줄 소년>
<맨 끝줄 소년>은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한때 작가를 꿈꾸던, 그러나 이제는 고등학교에서 형편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헤르만은 학생들이 제출한 작문 과제를 채점하느라 고통스럽다. 글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형편없는 문장의 나열을 보며 아내인 후아나에게 투덜투덜 학생들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문득, 한 학생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주말 친구인 ‘라파’네 집을 방문해서 그들 가족을 관찰하고 쓴 글인데, 그것을 아내에게 읽어주던 헤르만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고 잠자코 듣던 후아나도 귀를 기울인다. 그 글을 쓴 학생의 이름은 ‘클라우디오’. ‘맨 끝줄’이란 ‘아무도 거기는 보지 못하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은 둘 다 그 자리에서 앉아본 경험이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작가가 되기를 꿈꿔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겠다면서 개인지도를 하게 되고, 클라우디오는 헤르만의 가르침을 받으며 글을 써나가는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교사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하게 된다. 게다가 처음에는 교사이자 편집자나 마찬가지인 헤르만의 말을 유순하게 듣는 것 같던 클라우디오는 어느 순간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깨닫고는 헤르만과 그 아내 후아나까지 갖고 노는 경지에 이른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까닭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관객 또는 독자가 보는 대로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오가 쓴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떤 부분은 허구일까? 이 모든 이야기 자체가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이야기의 현실과 상상, 그 경계의 구분을 어떻게 독자가 설정하는가에 따라 <맨 끝줄 소년>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씩 달라진다. 이 작품은 그렇게 활짝 열린 상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유진 오닐, <느릅나무 아래 욕망>
또 유진 오닐이다.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원초적인 욕망 때문에 파멸해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이 작품 역시 한 가족의 이야기다. 탐욕스럽고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한 아버지 ‘캐벗’과 그의 세 아들 시미언, 피터, 에벤, 그리고 이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하는 한 여자 ‘애비’- 이렇게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극은 흘러간다. 줄거리는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계속 책장을 넘기다보면 조금 충격적인 전개로 흘러간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신화’도 느껴지고 애비와 에벤의 관계에서는 ‘페드라’도 느껴진다. 이 작품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와 비슷하지만 욕망으로 끈적끈적한 분위기와 조금은 더 충격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혹시라도 이 작품을 이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을 사람이 있다면 책 뒤표지는 읽지 마시라. 스포일러 투성이다!
장 폴 사르트르, <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알고 싶다면, 그의 철학책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문학, 그것도 이 희곡을 읽는 편이 오히려 더 빠르게 쉽게 다가올 것이다. <닫힌 방>은 지옥에 갇힌 세 사람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그의 작품 중 연극적이면서도 가장 참여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나마 그의 작품 중 재미있다는 소리). 이 작품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안내를 받아 전혀 지옥처럼 보이지 않는 한 장소로 세 영혼이 차례로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신문기자였던 가르생과 우체국 직원이었던 이네스, 그리고 부유한 유한마담 에스텔. 극이 서서히 진행되면 각자의 고백을 통해서 그들의 과거와 죽은 사연이 밝혀지고, 각각이 품은 욕망과 비밀이 서로 얽히고 충돌하면서, 이들의 공존은 지옥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악마와 선한 신>은 2차 세계 대전 후 세상이 뒤바뀌고 있음을 불안해하는 프랑스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1950년대 프랑스의 사회적 동요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을 담아내고 그 속에서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이 작품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 나이로 치면 환갑을 넘긴 윌리 로먼은 세일즈맨으로 삼십 년이 넘게 일했다. 지금도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나이 들어 운전하기 어려운 지경인데도 매일 무엇인가를 팔고자 차를 타고 집을 나선다. 한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었지만 그의 현재는 초라하다.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기라도 할 생각으로 집착했던 두 아들은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다. 특히 그토록 사랑했던 첫째 아들 ‘비프’와는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만나기만 하면 싸움뿐이다. 윌리는 이런 초라한 현실을 잊고자 자꾸만 찬란했던 과거에 집착한다. 과연 윌리 로먼과 그의 가족에겐 그가 꿈꾸듯 더 나은 미래, 희망이 있을까?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비극이다. 그런데 그 비극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탁월하게 그려진다. 윌리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는 찬란했던 과거와 남루한 현재의 적절한 대비, 이웃이자 친구인 찰리와 그의 아들 버나드의 성공한 삶과 대비되는 윌리 로먼 가족의 초라한 현실, 아들 비프와 아버지 윌리의 갈등과 그 갈등의 원인인 된 비밀 등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극은 탄탄하게 전개된다.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의,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희곡임에도 그 안에서 전달하는 주제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은 묵직하다.
에드워드 올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제목과 달리 작품에는 버지니아 울프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와 아무 상관도 없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라는 말은 아기돼지 삼형제 애니매이션에 등장하는 노래를 패러디한 것으로 그 의미는 ‘누가 환각 없는 삶을 두려워하랴’이다. 이야기 배경은 뉴잉글랜드 지방의 조그만 대학 캠퍼스에 있는 주택의 거실로, 평범한 부부들이 등장한다. 조지는 무능력한 대학교수인 남편, 마사는 대학총장의 딸이다. 이 집에 젊은 교수 닉과와 그의 부인이 초대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성공하지 못한 남편에 대한 불만과 성공만을 강조하는 부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그들은 손님을 앞에 두고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우는데……. 1962년에 공연된 에드워드 올비의 희곡으로 올비는 이 작품으로 토니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고 큰 성공을 거뒀다. 1966년에 개봉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차드 버튼 주연의 동명의 영화도 추천한다.
수잔 손택,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절망 속에 살다간 앨리스 제임스를 위하여’라는 손택의 서문에서는 셰익스피어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여동생이 없었지만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서막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헨리 제임스’에게는 그러한 여동생이 있었다. 바로 이 희곡의 주인공인 ‘앨리스 제임스’가 그녀다. 헨리 제임스뿐만 아니라 앨리스 제임스의 또 다른 오빠인 ‘윌리엄 제임스’ 역시 철학자로 그 이름을 떨쳤다. 이런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찍이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문화적 교육적 환경에 노출된 ‘앨리스 제임스’- 그녀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Alice in Bed>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던 19세기는 그녀의 그런 재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우울했고, 늘 자살충동에 시달렸으며 마흔네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병과 싸워야 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앨리스’로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손택의 이 희곡에서 앨리스가 누워있는 침대(정확히는 ‘매트리스’)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앨리스가 직면한 현실의 무게일 수도 있고, 앨리스에게 허용된 세상, 그러니까 영리하고 명민하지만 앨리스가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매트리스’만큼의 작은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손택은 이 희곡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고 한다. ‘이 연극은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연극이며, 결론적으로 상상력에 대한 연극이다. 정신적 감옥의 현실, 상상력의 승리 말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라는 그녀의 서문 또한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연극, 희곡 이야기하는데 브레히트가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희곡 선집에는 ‘서푼짜리 오페라’ 외에 ‘억척어멈과 자식들’이 수록되어 있다.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브레히트는 체제 밑바닥의 부도덕성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과 결혼, 우정과 애정을 모두 겉치레일 뿐이라고 비웃는다. <억척어멈과 자식들>은 30년 전쟁 중 전쟁터를 쫓아다니면서 군인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그 외의 다른 문자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종군상인 억척어멈 안나 피어링과 그의 세 자식들의 이야기이다. 브레히트는 억척어멈을 통해 자식을 잃은 후 슬픔과 회한에 젖은 어미의 모습이 아닌, 전쟁 통에 자식을 잃고도 먹고살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조지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차용한 희곡으로 음성학자가 거리에서 꽃을 팔던 소녀를 데려다가 언어를 교정시키면서 상류사회 여자로 만들어 놓는다는 내용. 이 희곡 안에서 버나드 쇼는 영국의 계급 사회 및 여성 문제 등을 다룬다.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제목으로 뮤지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꽃집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거리의 꽃 파는 소녀 일라이자. 어느 비 오는 날 그녀는 런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을 받아 적는 히긴스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한마디만 듣고도 말한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 알아맞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음성학자이다. 일라이자는 다음 날 히긴스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꽂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상류층의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데……. 쇼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빈민가의 소녀가 교육을 받아 상류층으로 진입하고, 삶이 통째로 뒤바뀌어 버리는 것을 통해 신분 제도의 허위와 영국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해롤드 핀터, <해롤드 핀터 전집 1>
해롤드 핀터 전집이 국내에 나와 있다(품절된 것도 많지만). 대부분 추천한다. 1권에는 그의 대표작인 <생일파티>와 짧은 시사 풍자극이 실려 있는데, <생일파티>가 꽤 볼만하다. 어느 바닷가 하숙집에 살고 있는 피아니스트 출신의 스탠리는 하숙집 안주인의 지나친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골드버그와 매캔이라는 정체불명의 두 남자가 그를 찾아온다. 그들은 스탠리가 원하지도 않는 친절을 잔뜩 베풀더니 급기야 스탠리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생일잔치를 베풀어 한바탕 소란을 피운다. 그러고는……. 핀터의 작품도 대부분 부조리극이라 쉽지는 않다. 그러나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작품과는 달리 여느 부조리극보다 구체적이며 대사는 일상적인 구어체라 조금 더 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날카롭고 시적이다.
유치진 외 <한국 현대희곡선>
유치진 <토막>, 이근삼 <국물 있사옵니다>, 최인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이강백 <봄날> 등 한국 희곡의 ‘정수’만 담겼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전후 혼란한 시대, 전쟁 후 무기력한 시대, 70~80년대 군부독재 시대, 현대의 물질만능, 인간소외시대까지 이 책에 실린 희곡들로 우리나라 변화상을 훑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수록 작품들은 하나 같이 우리나라 현대 대표 희곡인지라 역시 잘 썼다, 감탄하게 된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가난에 허덕이거나 가난하지 않더라도 결국 몰락하는 집안과 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그 집안의 맏이는 거의 아들인데, 이 장남들은 끌려갔거나 유학 갔거나 소식을 알 수 없거나 등등 가족 내에서 사라진 상태이고, 그 어머니들은(또는 가족은) 장남의 부재를 고통으로 여기고 이제나저제나 소식을 들을까 기다린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 장남이 가족과 함께 있더라도 전쟁터에서 돌아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불모지’). 그러다 결국 가족을 파멸로 몰아간다.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장남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 또는 제 구실을 못하는 장남을 안쓰러워하는 어머니-그리고 주변인과도 같은 나머지 자식들 등등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집을 태그로 설명하라면 #가난#가족#밑바닥 삶#부재하거나 제 능력을 상실한 장남#가족의 몰락이랄까. 아무튼 안타깝게도 이 책은 절판인데(성범죄자 이윤택의 작품 <오구―죽음의 형식> 때문), 독자를 위해서 그의 작품만 빼고 재출간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어느 계단의 이야기>
자, 이 긴 페이퍼를 다 읽은 분들을 위한 오늘의 하이라이트. 사실 오늘 이 기나긴 페이퍼는 어쩌면 이 한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잡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나만 알고 싶지만, 나만 알기에는 매우 아까운 작품이다. 숨겨진 명작이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무대는 어느 맹인 학교이다. 이곳 학생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졌다면 우울할 법도 한데, 그들은 하나 같이 밝고 명랑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면면을 보니 이른바 부잣집 자식들- 그러니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데다가, 주변에는 자기처럼 모두 똑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 뿐이니, 장님 나라의 장님이라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고도 외면한다. 그런데 이 학교에 이그나시오라는 ‘어둠’의 자식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문제가 일어난다. 작가는 이그나시오를 통해 고통을 알고 느끼고, 응시할 때 비로소 삶의 진실을 마주하고 그럼으로써 진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물리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눈을 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묵직한 진실을 전한다. “우리 모두는 장님들과 같은 어둠 속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어둠의 장님들이다.”라는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말은 이 작품과 더불어 본다는 것의 의미, 눈 먼 상태의 의미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한다. <어느 계단의 이야기> 또한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어느 도시의 허름한 연립주택 계단이다. 모든 사건이 이 계단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이 허름한 주택의 낡은 계단을 떠나 성공으로 가길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등바등 살아보지만 10년 뒤에도 그 계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느 계단의 이야기>는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생각대로 펼쳐나가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하층민의 삶을 한 계단을 중심으로 30년 동안 보여줌으로써 그 시절 스페인의 어두운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이상, 희곡 7번째 마니아 잠자냥이 아룁니다. 더 궁금한 점은 3번째 마니아 폴스타프 님께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