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전곡 [3 for 2]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래틀 (Simon Rattle) 지 / DG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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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피아니스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짐머만. 그와 번스타인이 함께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말이 필요 없는 마스터피스였다. 짐머만의 절친 사이먼 래틀과의 조합은 어떨까. 한 달도 더 남은 예약 상품이지만 짐머만이니까 믿고 구매하고 행복하게 기다린다. 아아, 생각만 해도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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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겨놓아야만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래봤자 기껏해야 놀거나, 책을 읽거나, 자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래야지만 안심이 됐다. 아마,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리기가 일쑤여서 더 미리미리 해둔 건지도 모르겠다. 준비물을 챙기는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연필을 깎을 때였다. 샤파,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에 연필을 돌려서 그 뾰족한 심들을 나란히 필통에 넣어둘 때가 가장 좋았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모범생의 범주를 벗어났고, 그런 ‘경건한’ 순간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 그런 순간이, 아니 그와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요즘은 저녁마다 커피를 간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에 커피 알갱이를 넣고 커피가 분쇄될 때까지 손잡이를 돌린다. 마치 어릴 적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릴 때와 비슷하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아침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서 텀블러에 담아서 갖고 나가는데, 여름에는 아무래도 뜨거운 커피를 찾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게 전날 밤에 미리 커피를 내려놓고는, 아침에는 텀블러에 얼음과 커피만 넣어서 출근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 과정이 무척 귀찮아서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투 샷이나 내려서 얼음을 넣고 커피를 넣고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엊저녁도 커피 알갱이를 분쇄기에 넣고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부엌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면서 무심히 커피를 갈다가, 문득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리던 때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연필 몇 자루로 내일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커피를 갈면서 내일을 준비하는구나. 열 살 이전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늘 이렇게 뭔가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쩐지 한숨을 폭 내쉬다가 문득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준비할 게 있는 삶이 얼마나 좋아? 더는 연필을 깎지 않고,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온다면 또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았다. 손잡이를 더 열심히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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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왠지 어릴적에(지금도 그렇고) 완전 모범생에 학구파 이셨을거 같아요. 그리고 커피를 갈면서 저런 생각을 하시는군요. 전 맨날 사먹거나 카누만 타먹어서 ㅜㅜ 반성해봅니다^^

잠자냥 2021-06-14 16:28   좋아요 4 | URL
모범생이었다가 잠시 방황(?)하고 술마시고 놀다가 다시 범생이 라이프로 돌아왔습니다. 범생이라기보다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삶에서 벗어난 삶이랄까요. ㅎㅎㅎ 커피 갈다 보면 그 반복적인 행위에 멍때릴 때도 많은데 저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ㅎㅎㅎ

다락방 2021-06-14 16:0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주 어릴적엔 모범생일 수 있어도 청소년기에는 모범생도 아닌 그렇다고 날나리도 아닌 그 어디쯤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생(사실은 국민학생) 때는 엄청난 모범생이어서 전교에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대단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리퀸 문고 읽다가 선생님께 걸리는... 그런 아이였지요.. 흠흠.

그렇지만 준비하는 삶, 이라는 잠자냥 님의 페이퍼에는 매우 많이 진심으로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매일에 대해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는 삶이 슬프다면, 저는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도 슬플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아주 많은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는 분명 ‘어떤 책을 가져가지?‘ 하고 고민하는 과정 그리고 챙기는 과정도 필수거든요. 세 권 가져갈까 다섯권 가져갈까, 어느 책을 가져갈까 고르는 순간은 정말 너무 짜릿하고 행복하죠.

삶은 그런 작은 준비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오늘 페이퍼 너무 좋네요, 잠자냥 님.
:)

잠자냥 2021-06-14 16:34   좋아요 4 | URL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는 친구들이 보통은 얌전한 성향이 있지요. 그래서 어른들은 그걸 범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같고 어린이들은 어른 말 듣고는 아 내가 그런가보다 하는데, 사실 마음속으로는 (특히 문학 같은 책 많이 읽다 보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삐딱선 타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지요. 저도 그랬던 거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은 소심한 성격이라 대놓고 반항은 못하고 은근히 그 어디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노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 다락방 님도 그랬겠지요.ㅎㅎㅎ

맞아요. 준비할 게 없는 삶은 참 여러 가지로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여행이 즐거운 것도 준비하는 그 과정이 즐겁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 그것도 슬플 것 같아요. 그래서 다부장님(과 저를 비롯해 여기 알라딘 개미지옥 개미들)은 그렇게 읽을 책을 무쟈게 준비하나 봅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21-06-14 16:2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뒤돌아 보면 모범생이었던 적이
1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숙제는 귀찮아서 안하고 그냥 몸으로
때웠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타이어를
받치고 담치기를 하여 야자 시간에
오락실에 가서 스노볼인가 뭔가하는
오락을 했습니다.

그랬던 닝겡이 지금은 꾸역꾸역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질을 하고 있습니다.

뭐 그랬다고 합니다.

잠자냥 2021-06-14 16:40   좋아요 5 | URL
오, 레샥매냐 님이 책 읽는 모습 보고 부모님이 기절하신 거 아닙니까? ㅋㅋㅋ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늦게 철들다니! 이런? ㅋㅋㅋㅋ
스노우볼이 뭐지? 하고 검색해보니... 아아, 이 게임 저도 해봤어요. ㅋㅋㅋㅋ 잘하지는 못함.

페넬로페 2021-06-14 16: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밤 쌀을 씻으며 내일을 준비해요. 그러면서 아이고 또 낼은 무슨 음식을 헤서 먹여야하나 하는 고민을 합니다~~커피콩을 갈면서 하는 잠자냥님의 생각들이 넘 좋네요^^

잠자냥 2021-06-14 17:04   좋아요 4 | URL
아, 쌀씻기! 요즘 코로나 때문에 회사에 도시락 싸갖고 다니다 보니 며칠에 한 번 씻는데도 쌀 씻는 거 정말 귀찮더라고요. =_= 쌀씻기보다는 커피콩 가는 게 덜 귀찮은 거 같아요. ㅎㅎㅎㅎ

mini74 2021-06-14 1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저녁을 드시고 나면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주셨어요. 연필잡는게 서툴러 자꾸 연필심이 부러져서 하루에 다섯자루에서 여섯자루씩 깎아야 할 연필이 늘어나자. 아버지가 잠자냥님꺼와 같은 연필깎이를 사오셨어요 ㅎㅎㅎ

잠자냥 2021-06-14 22:38   좋아요 2 | URL
ㅎㅎ 그때 초딩들의 가장 인기 있는 연필깎이가 아니었을까요! ㅎㅎ

그레이스 2021-06-14 19: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들을 너무 잘 쓰셔서...
소재도 다양하고...
^^;

잠자냥 2021-06-14 22:38   좋아요 1 | URL
알라딘 개미지옥에서 이 정도는 보통입죠! ㅎㅎ

단발머리 2021-06-15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필 깎는 삶도 커피콩 가는 삶도, 잠자냥님 손끌을 거치니 근사한 추억이자 오늘의 기억이네요. 숙제 마치고서야 놀았다는 범생이 생활은 저에겐 좀 멀지만 ㅋㅋㅋㅋㅋ 저도 오늘은 커피를 좀 내려야겠어요. 마침 비도 오고 딱이에요. 알라딘 너무 좋네요. 이런 좋은 글을 공짜로 읽네요 ㅎㅎ

잠자냥 2021-06-15 09:1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알라딘 개미지옥의 개미들은 다들 너무 칭찬을 잘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오늘 날씨 비오니까 커피는 더 맛나겠죠?ㅎㅎ

독서괭 2021-06-15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출산 전에는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콩을 갈았었는데.. 살며시 올라오는 그 향기. 너무 좋죠? 전 연필깎기는 이용하지 않고 커터칼로 깎는 걸 좋아했어요. 요즘은 서재이웃님들 글 보며 힐링합니다~

잠자냥 2021-06-15 14:37   좋아요 1 | URL
저는 칼로 연핀을 정말 잘 깎는 사람 부러워했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재주가 있는지. 독서괭님도 그런 재주를 갖고 계시군요!

- 2021-06-1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맘 잘 알지만... 잠자냥님께 자동 커피 그라인더를 추천하며... (쿠팡에서 3만원) ... 원두 오도독 가는 거 참 좋아요. 근데... 그라인더 사고 나서 ㅋㅋㅋㅋ 이걸 왜 이제야 샀노.... ㅋㅋㅋ 원두 갈 때 솔직히 좀 손목 팔 아프지 않아용??? ㅋㅋㅋ

잠자냥 2021-06-18 09: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저도 그거 써봤는데(엄마집에 있음요), 편하긴 합디다. 식구들이 여럿 있을 때 수동으로 갈면 그거 가는 사람은 거의 ㅋㅋㅋㅋㅋㅋㅋ 막판에 알통이 ㅋㅋㅋㅋㅋ 그래서 사람 많을 땐 자동으로 쓰는데요, 저처럼 고작 1~2인용 내리는 사람은 수동으로도 만족합니다요- 난 계속 칼리타 쓰겠소.(왜 계속 희곡 말투냨ㅋㅋㅋㅋㅋ)
 
맹인 악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지음,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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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인간애 넘치는 시선.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 그리고 끝끝내 잃지 않는 희망.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중단편을 읽노라면 작가가 참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첫 번째 작품 <마카르의 꿈>은 톨스토이식 우화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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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호텔을 위한 의상 곰곰나루 명작선 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정학 옮김 / 곰곰나루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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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에 갇힌 젤다 피츠제럴드와 스콧 피츠제럴드를 주인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테네시 윌리엄스. 글 쓰거나 미치거나 술 마시거나 아니면 정신병원에 가거나 하는 삶. 그의 전성기 시절 작품에는 못미친다. 덧붙여 젤다가 스콧한테 극존칭하는 것으로 번역한 거 정말 시대착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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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6-13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다보면 부부사이 대화인데 남편은 반말하고 아내는 존대하는 거 많아요. 특히 번역서.. 일부러 바꾸어서 둘다 존대하거나 반말하는 걸로 읽어주는데 은근 스트레스입니다 ㅠ

잠자냥 2021-06-13 20:29   좋아요 1 | URL
번역서 중에 그런 책 참 많죠. 이 책은 젤다가 스콧한테 당신 ~하셨어요. 막 이러고 있어요. 두 부부가 절대 그랬을 리 없고 영어라서 더더욱 그럴 리도 없었을 텐데, 읽다 보니 증말 빡치더라고요. 번역자가 늙은 한국 남자인 거 같아 그렇게 한 거 같은데, 그걸 편집자들도 못 걸렀다는 게 더 노답…
 
물망초 을유세계문학전집 112
요시야 노부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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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근대 문학 시기를 보면 남성 작가들 이름만 주르륵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나 역시, 한국 근대문학이나 일본 근대문학을 접할 땐 주로 남자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예전보다는 그 무렵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종종 만날 기회가 생기고 있다. 덕분에 히구치 이치요, 하야시 후미코에 이어 요시야 노부코의 <물망초>를 읽는다. 이 작품은 서문부터 말랑말랑하다.
 


시냇가 기슭에 홀로 피어난
은은한 하늘빛 작은 물망초
물보라 밀려와 입맞춤하고
아무도 모르게 잊히어 가네.


작가는 이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쓰려 한다고 밝힌다. ‘이 세상의 여자아이가 한 번은 지났을 법한, 그런 날도 있었지-하고 미소 지을 법한 혹은 멀리 떠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쓸 법한’ 그런 이야기들. 실제로 <물망초>는 여고시절을 거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 또한 그 시절을 잠시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작품 초입은 온건파, 강경파로 나뉘어 한 학급을 소개하고 있다. ‘온건파’란 한마디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말한다. 공부보다는 영화나 음악, 연극을 즐기고 로맨스를 꿈꾸는 아이들로 학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에 비해 ‘강경파’란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교과서만 판다. 강경파의 머릿속에는 학교의 자랑이라든가 모교의 명예 같은 관념으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재미를 찾는 온건파 아이들이 보기에 강경파는 앞뒤 꽉 막힌 답답한 종족이다. 물론 중립지대도 있다. 온건파와 강경파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들로 그들은 ‘자유주의자’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온건파 아이들처럼 영화든, 연극이든 종종 보러 간다. 그러나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어느새 강경파로 돌변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교과서와 노트로 달려든다.

학창시절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지금쯤 난 이 세 무리 가운데 어디에 속했을까 생각해 볼 것이다. 나는 굳이 따지라면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완벽히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자유주의자 말고도 극소수의 개인주의자’가 있다고 소개한다. 그들은 어떤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고 고독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딱히 이것도 아니었다. 자유주의자와 개인주의자 그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런 학급 분류가 이어지고는 그 파의 대표격인 아이들이 소개된다. ‘아이바 요코’는 온건파의 여왕으로 예쁜 수다쟁이이다. 수업 말고도 프랑스어와 피아노를 따로 배우며, 아버지는 사업가로 집안이 부유하다. 닉네임은 클레오파트라인데, 줄여서 ‘클레오’라고 부른다. 강경파의 대장은 ‘사에키 가즈에’로 으뜸 모범생이다. 닉네임이 무려 ‘로봇’- 인조인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피도 나오지 않을 것처럼 공부만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세 남매를 키우고 있으며, 집안도 넉넉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걸출한 개인주의자인 ‘유게 마키코’가 있다. 말이 없고 개성 있는 성격으로, 모 대학교수 이학박사인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산다. 닉네임은 따로 없고, 다만 반 아이들은 유게 마키코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엄숙해진다. 이 작품은 이 개성 넘치는 세 소녀의 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면서 그 시절 소녀들이 겪은 집안에서의 억압과 성차별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강경파의 대장인 ‘가즈에’와 걸출한 개인주의자 ‘마키코’는 둘 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데다 개성도 뚜렷하고 자기만의 꿈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소녀가 저마다 자기의 꿈을 이뤄나가기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앞에 놓여 있다. 돌덩이처럼 무겁다. 그런데 그 돌덩이는 집안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두 소녀에게 안겨줬다. 앞서 가족 구성원을 소개했는데,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두 소녀는 저마다 한 집안의 장녀이고, 둘 다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그들 집안에서는 그 어린 남동생을 신처럼 떠받든다. 가즈에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마키코처럼 아버지가 살아있어도 아들이 집안의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은 다르지 않다.

가즈에의 아버지는 직업이 군인으로, 만주 수비대 있을 때 병을 얻어 퇴직 후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병사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이들 앞으로 남긴 유서가 참으로 가관이다. 가즈에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남긴다. ‘너는 장녀다. 내가 죽은 후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집안일을 해다오 아버지 뒤를 이을 아들 미쓰오를 위해서나 어린 막내 동생 유키에를 위해서 평생 좋은 누나와 언니가 되어주길 바란다. 때에 따라서는 동생들을 위해 네가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임해다오.’(45쪽) 이런 막중한, 말도 안 되는 돌덩이를 남긴 것이다. 그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너는 집안의 소중한 아들이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군인이 되라는 말을 남긴다. 이처럼 죽은 아버지가 떠받든 아들을 어머니 또한 충실히 맹목적으로 따라서 섬긴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미쓰오를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어 아버지 뒤를 잇게 하겠다는 목적에만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미쓰오가 일가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었고,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준다. 가즈에가 보기에는 마치 ‘아들에게 복종’(76쪽)하는 것 같다. 로봇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아들, 남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쓰여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나 가즈에는 이런 집안 분위기에 얼마쯤은 이미 체념한 것 같다.

살아있는 또 다른 아버지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마키코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학박사이면서도 여성들의 지식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딸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은 자기 뒤를 이을 든든한 학자로 여긴다. 그에게 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식이다 마키코의 학교 성적이 좋은 걸 기뻐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다. 본인의 전공인 과학 말고는 음악이니 미술, 문학에 아무 흥미도, 관심도 없는 이 꽉 막힌 아버지는 소중한 외아들이 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는 데에도 불쾌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마키코에게 만에 하나 병약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와타루의 누나이자 어머니 대신’이라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런 주제에 비열하게 성공하고자 하는 혐오스러운 속물근성까지 갖추고 있다.

온건파 여왕인 아이바 요코가 어느 날 마키코를 자신의 생일 파티에 초대하는데, 개인주의자인 마키코는 그답게 그 초대를 거절한다. 친하지도 않은 아이가 초대한 것이 의아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가 영 마뜩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식탁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마키코의 아버지는 ‘아이바 요코’라는 이름에 떡하니 입이 벌어진다. 알고 보니 아이바 씨는 그가 앞으로 세우려는 과학연구소에 막대한 기부금을 약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비굴한 아버지는 감히 그런 분 따님의 생일 파티초대를 거절하느냐며 성을 낸다. 미친놈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부모,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마키코가 거절하고 안가면 아버지 겐스케 씨 기분이 어떻겠냐고 딸을 윽박지른다. 아니, 초대한 당사자 요코의 기분이 아니라 왜 그 아버지 겐스케 기분을 생각하는지? 참으로 역겨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그는 엉겁결에 자기 본심을 털어놓기까지 한다. “나중에 내가 궁지에 처할 수도 있어.” 오오, 너무 싫다. 영리한 마키코는 이런 아버지의 속물근성을 꿰뚫어보고 그를 싫어하고 어려워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과 협박에 못 이겨 마키코는 결국 요코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요코-마키코-가즈에 세 사람의 우정과 연애, 그 중간 어디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들은 잔소리만 해대잖아. 생각도 고리타분하고, 따지고 보면 엄마한테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나 벌써 각오했어. 엄마가 돌아가신 대도, 아빠가 돌아가신 대도, 소녀 소설 속에 나오는 애들처럼 울거나 우울해 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담담해질 거야. 근대에는 여자애들의 심리도 옛날과 다르게 진보해야 해.”(132쪽)


이 작품에서 빛나는 캐릭터는 단연 ‘아이바 요코’이다. 요코는 공부보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렇기에 마키코에게도 서슴지 않고 다가가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고, 그 애정공세를 할 때도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여자애들의 심리도 옛날과 다르게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요코는 가즈에나 마키코와 달리 집안이 부유하고, 그렇기에 누구도 어린 요코에게 남동생 같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요코가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물론, 엄마한테서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 깜찍한 소녀의 말은 한번쯤 귀 기울여 볼만하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짐 지운 장녀 콤플렉스와 착한 딸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요코의 이 말은 통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마도 이 요코는 작가의 분신은 아닐까? 그 오래전,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숏 컷을 하고 남성이 아닌 여성을 평생 동반자로 삼아 50년을 함께 살아온 작가의 당당함은 이 캐릭터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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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6-09 10: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딱히 땡기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역시 잠자냥님 리뷰는 독서욕구를 불러 일으키네요. 요즘은 딸을 더 원하는 부모가 많고 딸이라고 대놓고 차별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만, 딸과 아들이 둘다 있으면 대하는 태도 차이가 은근히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르신들.. 제 남동생이나 아들에게 ˝장손˝이라는 표현 쓰는 거 너무 싫어요.

잠자냥 2021-06-09 11:28   좋아요 6 | URL
이 책은 180쪽 남짓한 가벼운 분량이라 아기 잘 때 한 번에 쭉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요즘 딸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기는한데, 그 심리 한쪽엔 나중에 돌봄 노동을 은근 기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저는 그것도 성차별이라고 생각해서요. 아무튼 옛날 사람들 정말 그놈의 아들타령 장손타령... 진짜 싫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요즘엔 온 나라가 이십대 남자 우쭈쭈하고 있는 꼴이라니..........에휴.

잠자냥 2021-06-09 11:32   좋아요 3 | URL
전 이 책으로 알게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도쿠가와의 부인들>을 썼던데 이게 더 재미날 거 같기도 합니다.

다락방 2021-06-09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즈에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 딥빡이네요. 다들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온걸까요 ㅜㅜ

잠자냥 2021-06-09 11:37   좋아요 3 | URL
책 읽다가 정말 쌍욕이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근데 그 엄마도 너무 싫어요;;;; 하......

바람돌이 2021-06-09 14: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이나 일본이나 저놈의 가부장제. 에휴!! 근데 한국보다 일본이 좀더 심한거 같더라구요.

잠자냥 2021-06-09 14:10   좋아요 2 | URL
네, 제 생각에도 일본이 좀더 심한 거 같아요. 뭐 영화나 소설 보다 보면 엄마가 자기 아들한테 아드님 하면서 절할 분위기;; 으윽..... -_-

레삭매냐 2021-06-11 09: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을유문화사 하드커버 세문
이 새로 나왔나 보네요...

요즘 읽을 책들이 너무 많
아 즐거운 비명을 내질러
봅니다 꺄오 ~~~

잠자냥 2021-06-11 09:37   좋아요 3 | URL
저도 신간 사제끼고 있으면서 그 와중에 어제 또 도서관 가서 책 빌려오고 미쳤나봐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