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외로울 미래를 견디기보다,

외로운 현재를 참아내고 싶은 사람들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문학을 압도적으로 많이 읽음에도, 문학을 읽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문학에 질려버렸는지, 한동안 문학책을 멀리했다. 그런 덕분에 책을 많이 읽는 편임에도 나쓰메 소세키를 조금 늦게 만났는데 그래서 더 그의 가치랄까, 소세키의 작품에 빠지게 된 것 같다. 어릴 때 내가 소세키를 만났다면 그 참맛을 알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중고등학생에게 <도련님>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추천하는 것을 그다지 찬성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그 두 책은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게 뻔하므로.

 

내가 소세키를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한 친구 때문이다. 그 친구는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이 어언 15년 넘는 지기가 되었는데.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나쓰메 소세키이다. 그는 소세키의 진심어린 독자이다. 그 친구를 통해 저 구절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마음>에 나오는 구절인데, 친구는 저 글귀를 책을 산 영수증에 써 넣었고, 자신의 모토처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저 구절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서 소세키를 읽기 시작했다. 이 친구로 인해 소세키를 만났고 그러다 보니 소세키 전작을 다 읽게 되었다. 장편만이 아니라 에세이, 서한집, 단편 등도 모조리 찾아 읽었기에, 국내에 출간된 소세키 작품이라면 다 읽어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고 나니 소세키 그를 한 인간으로서 굳이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 작품만큼은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가 그래서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소세키의 글은 담백해서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는 확! 하고 순간적으로 입맛을 잡아끄는 게 있지만 심심한 음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자극적이지 않기에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곱씹을수록 음식을 이루는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나 먹는 기쁨, 맛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더욱 누릴 수 있다. 심심하고 자극적이지 않기에 두고두고 자주 꺼내 먹어도 좋다. 몇 년, 몇 십 년 생각날 때마다 먹어도 그때그때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그의 글이 바로 그렇다. 물처럼 심심한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심심한 맛에 그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게 된다. 심심해서 절대로 질리지 않는 평양물냉면 같다고나 할까.

 

나는 주로 봄, 가을에 소세키를 읽는다. 소세키는 너무 뜨거운 여름도, 너무 추운 겨울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른한 봄날이나 쓸쓸한 가을에 읽어야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소세키 작품 속의 고등유민들처럼 백수로 지낼 때 읽으면 더 몰입하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품이 쓸쓸하고 고독하며 인간이란 존재의 외로움, 타인과의 소통 부재 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런 계절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 대개 우울해진다. 인간이란 결국 이런 존재인가?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싶어 쓸쓸해지곤 한다. 소세키는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을, 삶의 비루함을 담담히 그려낸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어려움을 이토록 조용하고 담백하게 묘사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알라딘 서재 분들은 아마도 소세키 작품이라면 한 두 권쯤은 읽었을 것이다. 소세키의 작품 세계는 <산시로> 이전과 <산시로>, <그 후>, <>에 이르는 전기 3부작,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마음>에 이르는 후기 3부작으로 나뉜다는 것도 대부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페이퍼는 그런 기준으로 살펴보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내 마음을 기준으로 소세키의 작품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세키 작품은 <행인>, <마음>, <한눈팔기>이다. 그 다음으로는 순서를 가릴 수 없이 <명암>, <춘분 지나고까지>, <풀베개>, 그리고 <그 후>, <>, <산시로>에 이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을 놓고, 맨 끝으로 <우미인초>, <갱부>, <태풍>을 둔다. 여기에 숨겨진(?) 소세키의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 <유리문 안에서>로 이 작품은 소세키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단계인 <행인>, <마음>, <한눈팔기> 대열에 놓을 수 있다.

 

 

<행인>

소세키의 작품은 대개 염세적인데, <행인> 또한 그렇다. ‘이치로는 세상과 거의 담쌓고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드는 학자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 이치로는 자신의 아내와 동생 지로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지로에게 아내를 유혹해보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물론 지로는 이런 가당찮은 형의 제안에 화를 내지만 결국 형의 제안대로 형수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형수인 나오지로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소세키의 작품이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세키는 그런 이치로를 통해 비뚤어진 인간의 에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행인>은 소세키의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꽤 많이 반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이치로나 지로 두 형제의 결혼 관념은 매우 염세적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을 함께 묶어주고 그 두 사람이 서로 가장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통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전혀 다른 남남이 그저 행인처럼 서로의 곁을 스치며 더욱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지. 에고이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점과 타인을 믿지 못해 생기는 고독한 인간 실존을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내 마음속 나스메 소세키 No.1 작품이다.

 

<마음>

<행인>을 가장 좋아하지만 누군가 내게 소세키 작품 중 단 한 권만 추천해달라고 <마음>을 읽으라고 할 것 같다. <마음>은 현재까지 3번 읽었다(이레출판사, 문예출판사, 현암사). 나는 여태까지 소세키의 <마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잘 그린 소설은 본 적이 없다. 내용은 참 단순하다. 자기가 마음으로 흠모하던 여자를 자기 친구도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자, 그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인 줄도 모르고 그 여자를 냉큼 아내로 맞아들인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간사한 마음욕망을 꿰뚫어보는 소세키의 시선이 탁월하다. 내가 그렇게까지 열광하지 않았던 대상인데도 남이 탐을 내면 어쩐지 더 욕심이 나는 심리. 자기 마음이 던진 올가미에 걸려 평생 죄인처럼 사는 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토록 좋아했던 친구인데도, 친구가 어쩐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자 괜스레 친구가 얄미워지는 마음까지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게 표현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마음>은 인간의 욕망, 시기심, 질투, 외로움, 고독감 등 마음이 지닌 온갖 모순을 절절하게 탐구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라고 따로 분류되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진 인간은 없네. 평소에는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지. 적어도 그냥 보통 사람들이라구. 그러던 것이 한순간에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지. 그러니 방심하면 안 된다는 말이네.” (<마음>, 90, 문예출판사)

 

깃이나 커프사와 마찬가지야. 때가 탄 것을 내놓을 바엔 아예 색이 짙은 걸 까는 게 낫지. 흰 천을 깔려면 티끌 하나 없는 걸 깔아야지.” (<마음>, 102, 문예출판사)

 

누구나 아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자주 만나고 막역해진 남녀 사이에는 사랑으로 발전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호기심이란 게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향기에 반하는 것은 향기를 피워올린 그 순간뿐이고, 술맛에 감동하는 것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찰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충동에도 그와 같은 순간이 존재한다고 믿네. (<마음>, 190, 문예출판사)

 


소세키는 <마음>을 읽고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어린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쓰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면에서는 인간적으로 끌리기도 한다.

 

<마음>이라는 소설 속에 있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벌써 돌아가셨어요. 이름은 있지만 알아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그런 것도 다 읽는군요. 그건 아이들이 읽어 봐야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니 그만 읽으세요. 내 주소를 어디에서 알았죠? (나쓰메 소세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318, 독자에게 보낸 편지 중)

 


 

<한눈팔기>

<한눈팔기>라는 제목보다는 <도초(道草)> 또는 <길 위의 생>이라는 제목을 더 좋아한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세키의 가장 자전적인 작품으로 그의 고뇌와 외로움, 고독감이 그 어떤 작품보다 절절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양자로 보내졌던 소세키는 스무 살이 넘어 다시 본가로 돌아오는데, 친부모에게서도 양부모에게서도 사랑보다는 환멸을 먼저 느꼈다. 그리고 그런 환멸과 생에 대한 쓰라린 시선이 <한눈팔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굴레 같은 가족 관계, 무능력하고 불만족스러운 자기 처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경멸감, 그런 인간들이 아옹다옹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기도 그렇게 닮아가는 것에 대한 모멸감, 미래와 현실에 대한 불안감 등등 <한눈팔기>는 인생의 쓰디쓴 모든 면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라는 길 위에 뿌려진 한 포기 풀이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을.

 

<명암>

소세키가 끝을 어떻게 맺었을지 너무나 궁금한 미완성 작품. 그러나 소세키 작품은 스토리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라서, 이 미완성작 하나로도 충분히 여느 완성작보다 훌륭하다. 소세키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 <명암>도 부부의 이야기이다. ‘쓰다노부두 사람을 통해 사랑의 심리와 에고이즘 문제를 다룬다. 쓰다와 노부는 연애 결혼한 신세대 부부로 신혼 6개월이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경제 문제도 있고 쓰다의 옛 여인 문제도 두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재미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과 달리 주인공 한 사람의 심리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 특히 아내의 심리도 엿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소세키 최후의 걸작이라고나 할까.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마음>과 함께 후기 3부작에 속한다. 나는 <피안 지날 때까지>(예옥, 2009)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현암사 책은 사두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언젠가는 다시 읽으려고 한다. 이 작품에도 고등유민이 등장한다. 소세키를 좋아하는 친구와 나는 고등유민이 등장한 소세키 작품을 읽으면 그놈들 참 부럽네-라는 말을 하곤 했다. 회사 다니지 않고 놀면서 유유자적 고독과 불안을 논하고 있으니 참, 한량스러운 그 삶이란! 아무튼 이 작품의 고등유민은 대학 졸업후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청년 게이타로, 그는 같은 하숙집에 사는 모리모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모험 욕구를 충족시킨다.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일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 스나가를 통해 그의 이모부 다구치로부터 사적인 일을 의뢰받게 되는데, 그 일이란 정류장에서 어떤 남자의 거동을 관찰해서 보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게이타로는 스나가와 그의 사촌인 치요코, 스나가와 그의 어머니를 둘러싼 갈등에 점점 더 가까이 들어가게 된다. 한 인간의 비밀스런 내면에 접근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약간 탐정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든다.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중 크게 관심 가던 작품은 아니다. 몇 번 집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고는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다지 길지 않았던 창작 시기 동안 소설은 물론 한시, 하이쿠,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이 작품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를 맛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작품 전체가 한 편의 긴 하이쿠를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첫 시작부터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이 문장을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적어도 5분 이상은 첫 페이지에서 멈춰있던 것 같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옮겨 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하다.” 첫 페이지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군데군데 동서양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도 묻어나온다. 주인공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연 속 여정을 담은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곳곳에 -’하는 감탄이 나오는 하이쿠가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이 느껴지고 그 여백 안에서 풀내음이 올라오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예술이나 인간의 삶, 근대 문명에 관한 쉽지 않은 철학적 질문을 만날 수 있다.

  

발길을 멈추면 싫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렇게 하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쫓는다. 도회는 태평한 백성을 거지로 오인하고, 소매치기의 두목인 탐정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다. (<풀베개>, 134, 현암사)

 

세상은 집요하고 독살스럽고 좀스럽고 게다가 뻔뻔하고 지겨운 놈들로 가득 차 있다. 애초에 뭣 하러 세상에 낯짝을 내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놈도 있다. 게다가 그런 낯짝일수록 하나같이 크다. 속세의 바람을 맞을 면적이 크다는 걸 무슨 명예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5년이나 10년을 다른 사람의 엉덩이에 탐정을 붙여 방귀 뀌는 수를 헤아리고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 앞에 나와 너는 방귀를 몇 번 뀌었다, 몇 번 뀌었다, 하며 부탁도 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 준다. 앞으로 나와 말한다면 그것도 참고로 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뒤쪽에서 너는 방귀를 몇 번 뀌었다, 몇 번 뀌었다, 고 말한다. 시끄럽다고 하면 더한다. 그만하라고 하면 점점 더한다. 알았다고 해도 방귀를 몇 번 뀌었다, 뀌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처세의 방침이란다. (<풀베개>, 147, 현암사)















 

<그 후>, <>, <산시로>

<그 후>는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불신과 질투를 다루고 있어서 소세키의 여느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재미(?)는 고등유민 다이스케의 뻔뻔한(?) 삶을 지켜보며 그의 궤변을 살피는 데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않고 집에서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다이스케는 빵과 관련된 경험을 저열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고귀한 부류로 치부한다. 그런 주인공을 지켜보노라면 헛웃음이 절로 나기도. 소세키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삼각관계, 즉 사랑에 방점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그 관계를 통해 인간의 윤리 의식이나 내적 갈등을 살펴본다. <산시로>가 평범한 대학생이 주인공인 청춘 방황 소설이고 <그 후>가 그 이후를 쓰고 있다면 <>은 친구를 배반한 후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는 남자의 어두운 내면을 그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과 비슷하지만 <마음>이 개인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면 <>은 도리에 어긋난 사랑을 선택한 데 대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부부의 고뇌를 담고 있다. <산시로><그 후>, <>보다 먼저 읽는 게 좋은데, 나는 이 작품을 앞선 두 작품보다는 좋아하지 않는다. 소세키 작품 중 드물게 대학생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 심리에 딱히 공감하기 어려워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외대출판부(2005)에서 나온 버전으로 처음 읽었는데 번역이 이상해서 몰입을 못한 것인가 싶어 나중에 현암사 버전으로 다시 읽었는데도 큰 감흥은 없었다. “그 우울한 청춘의 시대, 옆에서 늘 속삭이듯 말을 걸어준 것은 나쓰메 소세키였습니다라고 강상중이 극찬한 작품인데, 여기서 말하는 청춘은 내가 보기엔 딱 대학생 남자이다. 이 시기를 지나왔거나 거기에 위치한 남성들이 유독 좋아하는 작품인 듯. 단발머리 님이 헤맸다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두 작품은 소세키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특히 <도련님>은 그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으로, 초기에 소세키는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몰염치함이나 뻔뻔함 등에 관심을 두다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인간 내면의 질투, 시기, 사랑 등 근원적 욕망에서 비롯된 윤리적 문제에 집착했다. 시골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한 가 겪는 짧은 기간의 이야기를 담은 <도련님>에서는 그런 오합지졸 인간 군상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시골이라는 한적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많고 겉으로는 품위와 순수 고결함을 지향하지만 그 속내는 썩을 대로 썩었다. 그런 이들이 오히려 도쿄에서 온 를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고 비아냥대며 그들 사회에 걸맞은 인물로 만들고자 애를 쓴다. 소세키 작품을 읽으며 웃었던 적이 없는데 이 작품은 읽으면서 몇 번 웃음이 터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내가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고양이 눈에 비친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작품으로 소세키의 첫 작품이다. 고양이가 인간을 풍자한 구절들이 속 시원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을 무렵엔 내가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터라 그렇게까지 재미나게 읽지는 못했는데, 고양이 집사로 어언 8년째 살고 있는 지금 다시 읽어보면 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튼 이 두 작품은 소세키 작품 중에서는 그나마 덜 염세적이고 해학적인 면도 있어서 청소년들에게도 권장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우울한 기운이 가득한 소세키 작품들이 더 매력적이다.

 

 














<우미인초>, <갱부>, <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전집 중 4~6번에 속하는 <태풍>, <우미인초>, <갱부> 는 그의 작품 중에는 가장 질이 떨어지는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우미인초>에는 흥미로운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철학자, 문학자, 시를 쓴다는 수재. 거기에 나중에는 법학을 전공한 이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인 셋도 나온다. 철학자의 이름은 고노, 문학자는 무네치카, 시를 쓴다는 수재의 이름은 오노이다. 법학자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인물이지만 작가의 눈에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으로 그려진다. 책을 읽다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시선과 생각은 철학자인 고노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갱부><태풍> 이 두 작품은 소세키 전집을 다 읽겠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두 작품 모두 몹시 지루한 데다가, 어떤 부분은 궤변을 줄줄 늘어놓는다는 듯한 인상도 든다. <갱부>는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소세키를 찾아와서 자신이 갱부가 된 사연을 꼭 좀 소설로 써달라고 부탁해서 탄생한 작품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로 소세키 작품 중 이색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소세키도 섬세하게 그 내면을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태풍>은 소세키 장편 중 가장 인기 없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읽어보면 왜 인기 없는지 이해가 절로 간다. 가난하고 정의롭지만 어딘가 꽉 막힌 도야 선생, 유한계급청년 나카노, 도야 선생의 옛 제자이자 나카노의 친구,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인문학도 다카야나기 등이 주고받는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 읽다보면 도야 선생으로 분화한 소세키의 꼰대 강좌를 듣고 있는 느낌이라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소세키 작품 중 꼭 읽으라면!

<마음>, <행인>, <한눈팔기>

 

어디 가서 소세키에 대해 두루 아는 척 하고 싶다면

<마음>, <그 후>, <도련님> 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팬이 아니라면 굳이 읽지 말라공!

<태풍>, <갱부>

 

 

그 밖에 추천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죽기 1년 전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던 산문을 모은 책으로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한 한 작가의 생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쓸쓸한 관념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그래서 소세키의 어떤 소설들보다 더 진실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다만 책 표지는 민음사나 문학의 숲 버전이나, 다들 참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만들었단 생각이 든다.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마사오카 시키와 나쓰메 소세키- 스물두 살 때부터 서른다섯 13년 가까이 그 누구보다 가까웠을 두 사람 사이의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한 사람은 시인이자 수필가, 또 한 사람은 소설가로 그 빼어난 문장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들 관계 또한 문장만큼이나 아름답다. 1889년 스물두 살 동갑내기로 처음 만난 그들은 관심 있는 공연이나 문학(주로 하이쿠) 이야기로 가까워진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 대화들은 해가 갈수록 한결 풍요롭고 해박하며 윤택해진다. 친구 사이이니 때로는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 조차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늘 그 바탕에 흐른다. 때로는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기도 한다. 서로 문학적 가치관 차이에서는 뜨끔할 정도로 훈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비판과 질타 설전이 매섭다. 그러나 절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로 말미암아 관계가 변질되지는 않는다. 가벼운 인간관계에 익숙한 오늘날엔 참 생소한 풍경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살던 문학청년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 참된 우정의 기록은 그들이 주고받은 하이쿠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나쓰메 소세키, 추억 - 아내 교코가 들려주는 소세키 이야기>

저자가 나쓰메 교코로, 소세키의 아내이다. 소세키가 세상을 떠난 후 1928년에 교코가 소세키와의 결혼 생활을 구술하고 이를 소세키의 제자이자 사위인 문학가 마쓰오카 유즈루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이 발표되자 교코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소세키를 미치광이 취급한 악처라는 차가운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타인의 눈으로 본 소세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세키 팬이라면 흥미가 생길 자료이긴 하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소세키 서한집> 등에 실린 소세키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아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음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아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까다롭고, 예민하며 이기적인 남자와 함께 사는 게 쉬웠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딱히 구매하고 싶지는 않아서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는데, 소세키에 대한 환상을 와장창 깨뜨려준다는 점에서 또 나름 의미 있는 책이 아닌가 싶기도. 그러나 소세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금합니다.





나의 소세키 컬렉션(?) 현암사 전집을 마련하면서 갖고 있던 다른 출판사 버전은 누구 주거나, 빌려줬는데 못 받았거나... 하면서 사라진 책이 좀 있다. 그런데 <명암>, 범우사 버전은 누구 주지도 않고, 처분하지 않았는데 책장에서 사라졌다...! 어디 간 것일까?! 현암사 <명암>은 책 제목이 저렇게 지워졌다. 저 전집 표지 내구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 -_-;



댓글(53)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잠자냥 2022-03-18 16:26   좋아요 0 | URL
아니 이 긴 글을 다 읽으셨어요? 제가 감사~
<행인> 정말 좋아요. 요즘 읽으면 딱일 거 같습니다. 저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ㅎㅎㅎㅎ
블랑카 님 리뷰 기대할게요~

은오 2024-01-29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너무 재밌을거같읍니다.......🤤 근데 이 페이퍼 진짜 최고네요. 결혼하고 싶어요ㅠ

잠자냥 2024-01-29 16:05   좋아요 1 | URL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 읽어보세요. 현암사 전집 그렇게 마련!
30대, 40대, 50대... 그때마다 다른 맛이 느껴질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행인> 보내면서 보니까 저 위에 페넬로페 님이 이 페이퍼에 댓글 달 때만 하더라도 소세키 작품 하나도 안 읽었다고 하시더니 그새 <행인> 리뷰 읽고 남긴 게 있어서 땡투는 페넬로페 님에게 ㅋㅋㅋ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욕망의 모호한 대상
피에르 루이스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욕망에 눈이 먼 남자, 타자의 내부에 들어가기란(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의 처절한 희극.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루이스 브뉘엘이 진짜 영화로 잘 만든 것 같다. 영화가 원작을 뛰어넘는다. 영화에 반해서 원작이 궁금했는데 그 호기심을 채운 것에 만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1-05-14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일단 사두기는 했습니다.

잠자냥 2021-05-14 10:44   좋아요 1 | URL
매냐 님 예상 별점 몇 개일지 가늠됩니다. ㅋㅋㅋ
제 예상이 맞을지 아닐지는 매냐 님이 책 다 읽고 올리시면 공개하겠습니다.
 
에콰도르 라 파파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부드럽고 산뜻, 진하게 내려 마셨더니 숙취 해소에 좋습니다.(응?), 네 지금 마시고 있거든요. 아이고 숙취야.....-_-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05-1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마셨는데요, 저는 오늘 진탕 술마실 예정이니 내일 아침 이 커피가 꿀맛이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3 12: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꼭 진하게~ ㅋ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1-05-13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응??˝ ㅋ 카페인 숙취해소법도 좋은 가봐요^^

잠자냥 2021-05-13 12: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네 그렇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마셔봤더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술 많이 마신 담날은 꼭 진한 커피.... 그리고 또 해장.. ㅋ

2021-05-13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3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1-05-13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술마시고 마시는 커피가 너무 맛있어요~잠도 더 잘 오구요~~^^

잠자냥 2021-05-13 21:50   좋아요 0 | URL
우아 강철 체력이군요! 술 마시고 커피!!
 

얼마 전에 작은 오디오를 하나 샀다. 크기는 작지만, 소리가 꽤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 오디오였다. 반신반의했는데 물건을 받아 시디를 넣고 돌려보니 생각보다 훌륭했다. 기대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작은 오디오 때문에 삶의 큰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좋은 오디오에 대한 욕심이 있다. 지금은 경제 여건상 이 정도 오디오를 살 수 있을 뿐이지만 능력이 된다면 나중에라도 꼭 어마어마한 음질의 오디오를 마련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자동차라든가 집이라든가 이런 것에 쏟는 욕심처럼 나는 오디오에 꼭 그런 욕심이 든다.

그런 오디오를 마련해서 책과 시디로 둘러싸인 방에 오디오를 설치해놓고 책과 음악 나, 이렇게 그 방 안에 머무는 것이다. 어떤 방해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은 오디오를 타고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에 그대로 온몸을 맡긴다.... 볼륨을 한없이 올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그런 곳이라면 더없이 좋다.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어떤 책은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예전에 읽은 <스토너>를 보면서 더욱 확고해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사람에게서 구할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은 매우 가변적이고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가족, 연인, 친구, 배우자, 동료 등등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 관계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며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변하기 쉽고 그 변화 때문에 관계는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감 또한 한결같을 수는 없다.

어쩌면 그렇기에 '스토너'가 더더욱 문학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자신의 고독한 삶을 위로받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문학에 자신의 삶을 바쳤기 때문에, 아니 꾸준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간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그리고 그런 삶의 의미를 아는 이들의 눈에는 스토너가 그저 외롭고 고독하게 죽어간 가련한 인간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음악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만든 이의 의도를 알고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애쓴다. 그렇지만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의 의도를 100%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사람 또한 나 아닌 타인을 100% 완벽하게 알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알고자,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지만 완벽한 이해나 앎은 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책이나 음악은 사람의 해석을 기다리고 환영한다. 비록 작가나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독자나 청자의 주관이 깊이 배인 해석일지라도 환영한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수록 작품이 풍요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아주길 바란다. 해석이 있으면 오해가 생기고, 이해가 아닌 오해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는 늘 불협화음이 따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주관적 해석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이런 까닭에 어떤 예술 작품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일보다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알아가는 과정이, 사람과의 관계가 한층 어렵고 까다롭다. 그러나 그 공들임에 비해 쉽게 어긋나는 것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사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은 변하기 쉽고 제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돌아보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람과 함께 할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에는 창고처럼 쓰이는 뒤꼍이 있었다. 형제가 많아 온전한 내 방이 없던 나는 그 뒤꼍을 어느 곳보다 사랑했다. 여름이면 그곳에 돗자리를 깔고 라디오(이종환, 김기덕, 배철수 같은)를 들으며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나는 친구가 많았던 적도 없었고, 많기를 바랐던 적도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그 시기에는 사람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기도 했지만,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곧 모두 지나갈 것임을. 쉽게 변해버릴 한없이 가벼운 것임을.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인간은 인간에게 좋은 존재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분명 타인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해석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 받는다. 그렇기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 아니면 해석할 여지를 아예 주지 않던가. 그러나 이조차도 불가능하다. 사람은 꼭 가까운 사람만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친구가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그 숫자가 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친구를 늘이고 싶어서 마음이 다급하지도 않다. 그런데 묘하게도 좋은 책이나 음악을 만나는 일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책도 읽어보고 싶고, 저 음악도 들어보고 싶고..... 어떤 이에게는 무척이나 외롭고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이런 삶에 나는 아주 만족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내게는 진리나 다름없다. 그 구석방에 좋은 오디오까지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과 딱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그래서 행복하다. 어린 시절, 그 안에선 한없이 평화로웠던 뒤꼍에서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5-12 11: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내일 할 얘기지만, 스토너가 사실은 소세키의 겐조하고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에게 과하게 선역을 시켜서 말입죠. 사실은 스토너 역시 찌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가정과 사회생활에서는요. 이번에 소세키 읽으며 확실하게 느낀 건, 소세키 >>>>>> 윌리엄스!!!

잠자냥 2021-05-12 11:19   좋아요 4 | URL
아 맞습니다! 겐조하고 비슷한 인물이죠! 하지만 전 겐조는 어떤 면에선 좋은데 스토너는 좋아할 수는 없더라고요. 스토너는 사실 딱히 매력적인 인간은 아니죠.
소세키>>>> 윌리엄스라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내일 기대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5-12 1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읽을 때 조금 답답하단 생각을 했는데,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더라구요.^^
움베르토 에코의 말 저도 동의해요~
책이 있는 구석 방안 쉴 곳이라는...♡

잠자냥 2021-05-12 11:32   좋아요 2 | URL
아마 알라딘 서재분들은 다들 책이 있는 방구석을 가장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Falstaff 2021-05-12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살면 오디오 좋은 거 전혀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출력대로 들을 수 없어요. 아래층, 위층, 벽 넘어 옆집에서 날마다 쳐들어올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1:3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또 단독주택이 필요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능 ㅋㅋㅋ

2021-05-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2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5-12 11: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살짜쿵 태클을 걸자면,
고 쿼테이션은 에코가 아니라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분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새로운 관계에 점프하
길 원했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그 관계들을 유지하는 데 더 중점
을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휘발되고
나니, 어느 시절 사람들과 함께
보내던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었구
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 땐 그랬
지 하구요.

오디오에 대한 로망은... 회사에서
놀고 있는 티악 앰프부터 어떻게
슈킹을...

잠자냥 2021-05-12 11:55   좋아요 4 | URL
아하, 그렇군요.<장미의 이름>에서 나왔기에 그렇게 인용했으나, 정확히는 그게 맞군요. 감사합니다!

mini74 2021-05-12 1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싼값에 얼릉 주워왔다는 오디오, 형부가 우와하며 가격을 말한 후 잔잔한 음악과 책이 있던 방의 평화는 잠시 깨졌었죠 ㅎㅎㅎ

잠자냥 2021-05-12 14: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디오에 환장한 사람들도 은근 많죠. ㅋㅋㅋ

새파랑 2021-05-12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과 씨디에 둘러쌓인 방에서 살고 싶어요. 언젠가는~!
스토너 읽고 인간관계에서 많이 생각했었는데~ 역시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만 있으면 혼자있어도 어디있어도 즐겁다는^^

Falstaff 2021-05-12 14:03   좋아요 2 | URL
흠... 자랑으로 읽으시면 곤란하고요,
제가 책 읽는 곳으로 쓰고 있는 방에 한 줄로 늘어놓으면 28미터의 책꽂이와 33미터의 CD 꽂이가 꽉 차있는데요, 책 읽을 땐 음악 못 듣고, 음악 들을 땐 책을 못 읽습니다. 마음 먹고 책이나 음악을 좀 즐기려면 또 술에 취해 있기 십상이고요. ^^;;
책은 두 번 읽기가 쉽지 않고, CD는 두 번 이상 듣기가 쉽지만 듣는 것만 들어서 한 번 달랑 듣고 먼지만 쌓이는 애들 불쌍해 바라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책은 모르겠으나, 음반은 많이 사지 마세요. 딱 들을 것만 사시는 것이.... 전 반올림 해서 3천 장 가지고 있는데, 정작 듣는 건 한 2백장 되려나 그렇습니다.
오디오는 아파트 기준해서, 잠자냥님이 즐기시는 자그마한 거면 충분합니다. 괜히 오디오 입문이네 뭐네 해서 인켈 하이파이 팔아버리고 전문가용이네 뭐네 하는 거 샀다가 아직도 후회 막급입니다. ㅜㅜ

잠자냥 2021-05-12 14:15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맞습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어떤 날은 사람하고 악속해놓고도 집에서 그냥 혼자 책이나 읽고 싶다고 생각하죠.

폴스타프 님/ 책하고 음악 같이 감상하기 어렵긴하죠. 책도 두 번 읽기 쉽지 않고, 음반도 듣는 것만 듣는다는 말씀 공감해요. 저도 소싯적엔 음반(주로 락 음악)도 사 모았는데, 결국 듣는 것만 듣고 자리만 차지하고.. 요즘은 정말 어쩌다 삽니다. 올봄 알라딘 수입 음반 할인 행사도 생애(?) 최초로 그냥 넘어갔다능. ㅋㅋㅋ 책도 읽고 되파는 경우가 많고요. 짐이다 짐.

근데 폴스타프 님 그 방 구경하고 싶네요- ㅋㅋ 술 취했을 때 함 올려주세요. ㅋ

로자 2021-05-12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작은 크기에 소리가 훌륭한 오디오가 궁금하네요.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잠자냥 2021-05-12 15:06   좋아요 2 | URL
제가 완전 반했던 미니 오디오는 필립스 mcm 2150입니다. 전 이 오디오를 두 번이나 샀습니다. 그런데 이 오디오는 시디 넣는 부분에 먼지가 쌓이면 판이 튀는 단점이 있어서... 현재는 브리츠 BZ-T7600 WC 쓰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브리츠가 예쁜데요. 소리는 아무래도 필립스가 더 좋았습니다(특히 중저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 느낌이니, 실제로 여러 후기 검색해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2021-05-1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는데 행복해졌어요..* 음악들으면서 고독한 독서하는 모습이 근사하게 느껴졌어요. 저도 오늘은 음악독서를..*
저는 책도 사람도 너무 좋아해요. 불가해하다는 거 알아도 사람에 대해서도 책만큼 혹은 책 처럼 알아가고 싶어요.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책처럼 누군가에게 열렸을 때 수많은 질문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요. 많을 필요는 없어요. 마치 책처럼요.
아직은 책도 사람도 일단은 많이 보고 읽어가야하는구나 싶긴해여ㅡ 고르는 눈이 없거든요 ㅠㅠ

잠자냥 2021-05-13 14:06   좋아요 1 | URL
쟝쟝님은 사람 좋아하는 거 글에서도 느껴져요. ㅎㅎ
그래서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
행복해지셨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두부 2021-05-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책이 최고의 벗이죠.

잠자냥 2021-05-15 23:37   좋아요 1 | URL
네 살아갈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ㅎㅎ

행복한구름 2023-10-20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학생 시절의 작은 키에도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서로 마주보는 벽에 닿을 것만 같은 작은 방에 엎드려서 과자와 우유를 놓고 역사책을 읽던 시절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둘의 아빠라 나만의 공간이 전혀 없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독립하고 저도 은퇴하면 저는 다시 골방에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언젠가는 나만의 작은 휴식처를 찾을 수 있기를.

잠자냥 2023-10-20 16: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행복한 구름 님의 옛추억을 읽노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언젠가의 그 로망이 꼭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행복한 고양이 아저씨 - 2021 칼데콧 명예상 수상작 비룡소의 그림동화 289
아이린 래섬.카림 샴시-바샤 지음, 시미즈 유코 그림,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전히 내가 읽고 싶어서 산 책. 자기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전쟁 중에 고양이들을 돌보는 인간의 모습이란,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을 돕는 인간들의 손길이란! 고양이들이 마냥 귀엽게 그려지지 않은 것도 이 책의 장점. 오히려 생생해서 그림 뜯어보는 즐거움도 크다. 조카 안 주고 내가 가져야지ㅋ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1-05-12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보다
‘칼데콧 명예상‘이란 단어가 눈에 콕 박혀요~~
그럴 때가 있었는데^^
잠시 아련히 추억에 잠겨 보네요**

잠자냥 2021-05-12 00:39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그 아련한 추억도 궁금합니다.

바쿠스 2021-06-2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스러운 리뷰입니다🐈

잠자냥 2021-06-20 08: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