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외로울 미래를 견디기보다,
외로운 현재를 참아내고 싶은 사람들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문학을 압도적으로 많이 읽음에도, 문학을 읽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문학에 질려버렸는지, 한동안 문학책을 멀리했다. 그런 덕분에 책을 많이 읽는 편임에도 나쓰메 소세키를 조금 늦게 만났는데 그래서 더 그의 가치랄까, 소세키의 작품에 빠지게 된 것 같다. 어릴 때 내가 소세키를 만났다면 그 참맛을 알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중고등학생에게 <도련님>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추천하는 것을 그다지 찬성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그 두 책은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게 뻔하므로.
내가 소세키를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한 친구 때문이다. 그 친구는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이 어언 15년 넘는 지기가 되었는데.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나쓰메 소세키이다. 그는 소세키의 진심어린 독자이다. 그 친구를 통해 저 구절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마음>에 나오는 구절인데, 친구는 저 글귀를 책을 산 영수증에 써 넣었고, 자신의 모토처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저 구절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서 소세키를 읽기 시작했다. 이 친구로 인해 소세키를 만났고 그러다 보니 소세키 전작을 다 읽게 되었다. 장편만이 아니라 에세이, 서한집, 단편 등도 모조리 찾아 읽었기에, 국내에 출간된 소세키 작품이라면 다 읽어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고 나니 소세키 그를 한 인간으로서 굳이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 작품만큼은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가 그래서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소세키의 글은 담백해서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는 확! 하고 순간적으로 입맛을 잡아끄는 게 있지만 심심한 음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자극적이지 않기에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곱씹을수록 음식을 이루는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나 먹는 기쁨, 맛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더욱 누릴 수 있다. 심심하고 자극적이지 않기에 두고두고 자주 꺼내 먹어도 좋다. 몇 년, 몇 십 년 생각날 때마다 먹어도 그때그때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그의 글이 바로 그렇다. 물처럼 심심한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심심한 맛에 그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게 된다. 심심해서 절대로 질리지 않는 평양물냉면 같다고나 할까….
나는 주로 봄, 가을에 소세키를 읽는다. 소세키는 너무 뜨거운 여름도, 너무 추운 겨울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른한 봄날이나 쓸쓸한 가을에 읽어야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소세키 작품 속의 ‘고등유민’들처럼 백수로 지낼 때 읽으면 더 몰입하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품이 쓸쓸하고 고독하며 인간이란 존재의 외로움, 타인과의 소통 부재 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런 계절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 대개 우울해진다. 인간이란 결국 이런 존재인가?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싶어 쓸쓸해지곤 한다. 소세키는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을, 삶의 비루함을 담담히 그려낸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어려움을 이토록 조용하고 담백하게 묘사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알라딘 서재 분들은 아마도 소세키 작품이라면 한 두 권쯤은 읽었을 것이다. 소세키의 작품 세계는 <산시로> 이전과 <산시로>, <그 후>, <문>에 이르는 전기 3부작,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마음>에 이르는 후기 3부작으로 나뉜다는 것도 대부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페이퍼는 그런 기준으로 살펴보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내 마음을 기준’으로 소세키의 작품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세키 작품은 <행인>, <마음>, <한눈팔기>이다. 그 다음으로는 순서를 가릴 수 없이 <명암>, <춘분 지나고까지>, <풀베개>를, 그리고 <그 후>, <문>, <산시로>에 이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을 놓고, 맨 끝으로 <우미인초>, <갱부>, <태풍>을 둔다. 여기에 숨겨진(?) 소세키의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 <유리문 안에서>로 이 작품은 소세키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단계인 <행인>, <마음>, <한눈팔기> 대열에 놓을 수 있다.
<행인>
소세키의 작품은 대개 염세적인데, <행인> 또한 그렇다. ‘이치로’는 세상과 거의 담쌓고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드는 학자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 이치로는 자신의 아내와 동생 ‘지로’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지로에게 아내를 유혹해보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물론 지로는 이런 가당찮은 형의 제안에 화를 내지만 결국 형의 제안대로 형수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형수인 ‘나오’와 ‘지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소세키의 작품이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세키는 그런 이치로를 통해 비뚤어진 인간의 에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행인>은 소세키의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꽤 많이 반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이치로나 지로 두 형제의 결혼 관념은 매우 염세적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을 함께 묶어주고 그 두 사람이 서로 가장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통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전혀 다른 남남이 그저 행인처럼 서로의 곁을 스치며 더욱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지. 에고이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점과 타인을 믿지 못해 생기는 고독한 인간 실존을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내 마음속 나스메 소세키 No.1 작품이다.
<마음>
<행인>을 가장 좋아하지만 누군가 내게 소세키 작품 중 단 한 권만 추천해달라고 <마음>을 읽으라고 할 것 같다. <마음>은 현재까지 3번 읽었다(이레출판사, 문예출판사, 현암사). 나는 여태까지 소세키의 <마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잘 그린 소설은 본 적이 없다. 내용은 참 단순하다. 자기가 마음으로 흠모하던 여자를 자기 친구도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자, 그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인 줄도 모르고 그 여자를 냉큼 아내로 맞아들인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간사한 ‘마음’과 ‘욕망’을 꿰뚫어보는 소세키의 시선이 탁월하다. 내가 그렇게까지 열광하지 않았던 대상인데도 남이 탐을 내면 어쩐지 더 욕심이 나는 심리. 자기 마음이 던진 올가미에 걸려 평생 죄인처럼 사는 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토록 좋아했던 친구인데도, 친구가 어쩐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자 괜스레 친구가 얄미워지는 마음까지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게 표현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마음>은 인간의 욕망, 시기심, 질투, 외로움, 고독감 등 ‘마음’이 지닌 온갖 모순을 절절하게 탐구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라고 따로 분류되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진 인간은 없네. 평소에는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지. 적어도 그냥 보통 사람들이라구. 그러던 것이 한순간에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지. 그러니 방심하면 안 된다는 말이네.” (<마음>, 90쪽, 문예출판사)
“깃이나 커프사와 마찬가지야. 때가 탄 것을 내놓을 바엔 아예 색이 짙은 걸 까는 게 낫지. 흰 천을 깔려면 티끌 하나 없는 걸 깔아야지.” (<마음>, 102쪽, 문예출판사)
누구나 아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자주 만나고 막역해진 남녀 사이에는 사랑으로 발전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호기심이란 게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향기에 반하는 것은 향기를 피워올린 그 순간뿐이고, 술맛에 감동하는 것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찰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충동에도 그와 같은 순간이 존재한다고 믿네. (<마음>, 190쪽, 문예출판사)
소세키는 <마음>을 읽고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어린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쓰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면에서는 인간적으로 끌리기도 한다.
그 <마음>이라는 소설 속에 있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벌써 돌아가셨어요. 이름은 있지만 알아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그런 것도 다 읽는군요. 그건 아이들이 읽어 봐야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니 그만 읽으세요. 내 주소를 어디에서 알았죠? (나쓰메 소세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318쪽, 독자에게 보낸 편지 중)
<한눈팔기>
<한눈팔기>라는 제목보다는 <도초(道草)> 또는 <길 위의 생>이라는 제목을 더 좋아한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세키의 가장 자전적인 작품으로 그의 고뇌와 외로움, 고독감이 그 어떤 작품보다 절절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양자로 보내졌던 소세키는 스무 살이 넘어 다시 본가로 돌아오는데, 친부모에게서도 양부모에게서도 사랑보다는 환멸을 먼저 느꼈다. 그리고 그런 환멸과 생에 대한 쓰라린 시선이 <한눈팔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굴레 같은 가족 관계, 무능력하고 불만족스러운 자기 처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경멸감, 그런 인간들이 아옹다옹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기도 그렇게 닮아가는 것에 대한 모멸감, 미래와 현실에 대한 불안감 등등 <한눈팔기>는 인생의 쓰디쓴 모든 면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삶’이라는 길 위에 뿌려진 한 포기 풀이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을.
<명암>
소세키가 끝을 어떻게 맺었을지 너무나 궁금한 미완성 작품. 그러나 소세키 작품은 스토리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라서, 이 미완성작 하나로도 충분히 여느 완성작보다 훌륭하다. 소세키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 <명암>도 부부의 이야기이다. ‘쓰다’와 ‘노부’ 두 사람을 통해 사랑의 심리와 에고이즘 문제를 다룬다. 쓰다와 노부는 연애 결혼한 신세대 부부로 신혼 6개월이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경제 문제도 있고 쓰다의 옛 여인 문제도 두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재미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과 달리 주인공 한 사람의 심리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 특히 아내의 심리도 엿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소세키 최후의 걸작이라고나 할까.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마음>과 함께 후기 3부작에 속한다. 나는 <피안 지날 때까지>(예옥, 2009)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현암사 책은 사두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언젠가는 다시 읽으려고 한다. 이 작품에도 고등유민이 등장한다. 소세키를 좋아하는 친구와 나는 고등유민이 등장한 소세키 작품을 읽으면 그놈들 참 부럽네-라는 말을 하곤 했다. 회사 다니지 않고 놀면서 유유자적 고독과 불안을 논하고 있으니 참, 한량스러운 그 삶이란! 아무튼 이 작품의 고등유민은 대학 졸업후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청년 ‘게이타로’로, 그는 같은 하숙집에 사는 모리모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모험 욕구를 충족시킨다.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일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 스나가를 통해 그의 이모부 다구치로부터 사적인 일을 의뢰받게 되는데, 그 일이란 정류장에서 어떤 남자의 거동을 관찰해서 보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게이타로는 스나가와 그의 사촌인 치요코, 스나가와 그의 어머니를 둘러싼 갈등에 점점 더 가까이 들어가게 된다. 한 인간의 비밀스런 내면에 접근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약간 탐정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든다.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중 크게 관심 가던 작품은 아니다. 몇 번 집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고는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다지 길지 않았던 창작 시기 동안 소설은 물론 한시, 하이쿠,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다. 이 작품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를 맛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작품 전체가 한 편의 긴 ‘하이쿠’를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첫 시작부터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이 문장을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까지 적어도 5분 이상은 첫 페이지에서 멈춰있던 것 같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옮겨 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하다.” 첫 페이지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군데군데 동서양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도 묻어나온다. 주인공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연 속 여정을 담은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곳곳에 ‘아-’하는 감탄이 나오는 하이쿠가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이 느껴지고 그 여백 안에서 풀내음이 올라오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예술이나 인간의 삶, 근대 문명에 관한 쉽지 않은 철학적 질문을 만날 수 있다.
발길을 멈추면 싫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렇게 하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쫓는다. 도회는 태평한 백성을 거지로 오인하고, 소매치기의 두목인 탐정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다. (<풀베개>, 134쪽, 현암사)
세상은 집요하고 독살스럽고 좀스럽고 게다가 뻔뻔하고 지겨운 놈들로 가득 차 있다. 애초에 뭣 하러 세상에 낯짝을 내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놈도 있다. 게다가 그런 낯짝일수록 하나같이 크다. 속세의 바람을 맞을 면적이 크다는 걸 무슨 명예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5년이나 10년을 다른 사람의 엉덩이에 탐정을 붙여 방귀 뀌는 수를 헤아리고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 앞에 나와 너는 방귀를 몇 번 뀌었다, 몇 번 뀌었다, 하며 부탁도 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 준다. 앞으로 나와 말한다면 그것도 참고로 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뒤쪽에서 너는 방귀를 몇 번 뀌었다, 몇 번 뀌었다, 고 말한다. 시끄럽다고 하면 더한다. 그만하라고 하면 점점 더한다. 알았다고 해도 방귀를 몇 번 뀌었다, 뀌었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처세의 방침이란다. (<풀베개>, 147쪽, 현암사)
<그 후>, <문>, <산시로>
<그 후>는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불신과 질투를 다루고 있어서 소세키의 여느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재미(?)는 고등유민 ‘다이스케’의 뻔뻔한(?) 삶을 지켜보며 그의 궤변을 살피는 데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않고 집에서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다이스케는 ‘빵과 관련된 경험’을 저열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고귀한 부류로 치부한다. 그런 주인공을 지켜보노라면 헛웃음이 절로 나기도. 소세키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삼각관계, 즉 사랑에 방점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그 관계를 통해 인간의 윤리 의식이나 내적 갈등을 살펴본다. <산시로>가 평범한 대학생이 주인공인 청춘 방황 소설이고 <그 후>가 그 이후를 쓰고 있다면 <문>은 친구를 배반한 후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는 남자의 어두운 내면을 그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과 비슷하지만 <마음>이 개인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면 <문>은 도리에 어긋난 사랑을 선택한 데 대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부부의 고뇌를 담고 있다. <산시로>는 <그 후>, <문>보다 먼저 읽는 게 좋은데, 나는 이 작품을 앞선 두 작품보다는 좋아하지 않는다. 소세키 작품 중 드물게 대학생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 심리에 딱히 공감하기 어려워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외대출판부(2005년)에서 나온 버전으로 처음 읽었는데 번역이 이상해서 몰입을 못한 것인가 싶어 나중에 현암사 버전으로 다시 읽었는데도 큰 감흥은 없었다. “그 우울한 청춘의 시대, 옆에서 늘 속삭이듯 말을 걸어준 것은 나쓰메 소세키였습니다”라고 강상중이 극찬한 작품인데, 여기서 말하는 ‘청춘’은 내가 보기엔 딱 ‘대학생 남자’이다. 이 시기를 지나왔거나 거기에 위치한 남성들이 유독 좋아하는 작품인 듯. 단발머리 님이 헤맸다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두 작품은 소세키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특히 <도련님>은 그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으로, 초기에 소세키는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몰염치함이나 뻔뻔함 등에 관심을 두다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인간 내면의 질투, 시기, 사랑 등 근원적 욕망에서 비롯된 윤리적 문제에 집착했다. 시골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한 ‘나’가 겪는 짧은 기간의 이야기를 담은 <도련님>에서는 그런 오합지졸 인간 군상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시골이라는 한적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많고 겉으로는 품위와 순수 고결함을 지향하지만 그 속내는 썩을 대로 썩었다. 그런 이들이 오히려 도쿄에서 온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고 비아냥대며 그들 사회에 걸맞은 인물로 만들고자 애를 쓴다. 소세키 작품을 읽으며 웃었던 적이 없는데 이 작품은 읽으면서 몇 번 웃음이 터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내가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고양이 눈에 비친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작품으로 소세키의 첫 작품이다. 고양이가 인간을 풍자한 구절들이 속 시원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을 무렵엔 내가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터라 그렇게까지 재미나게 읽지는 못했는데, 고양이 집사로 어언 8년째 살고 있는 지금 다시 읽어보면 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튼 이 두 작품은 소세키 작품 중에서는 그나마 덜 염세적이고 해학적인 면도 있어서 청소년들에게도 권장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우울한 기운이 가득한 소세키 작품들이 더 매력적이다.
<우미인초>, <갱부>, <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전집 중 4~6번에 속하는 <태풍>, <우미인초>, <갱부> 는 그의 작품 중에는 가장 질이 떨어지는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우미인초>에는 흥미로운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철학자, 문학자, 시를 쓴다는 수재. 거기에 나중에는 법학을 전공한 이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인 셋도 나온다. 철학자의 이름은 고노, 문학자는 무네치카, 시를 쓴다는 수재의 이름은 오노이다. 법학자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인물이지만 작가의 눈에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으로 그려진다. 책을 읽다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시선과 생각은 철학자인 고노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갱부>와 <태풍> 이 두 작품은 소세키 전집을 다 읽겠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두 작품 모두 몹시 지루한 데다가, 어떤 부분은 궤변을 줄줄 늘어놓는다는 듯한 인상도 든다. <갱부>는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소세키를 찾아와서 자신이 갱부가 된 사연을 꼭 좀 소설로 써달라고 부탁해서 탄생한 작품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로 소세키 작품 중 이색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소세키도 섬세하게 그 내면을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태풍>은 소세키 장편 중 가장 인기 없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읽어보면 왜 인기 없는지 이해가 절로 간다. 가난하고 정의롭지만 어딘가 꽉 막힌 도야 선생, 유한계급청년 나카노, 도야 선생의 옛 제자이자 나카노의 친구,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인문학도 다카야나기 등이 주고받는 대화가 주를 이루는데, 읽다보면 도야 선생으로 분화한 소세키의 꼰대 강좌를 듣고 있는 느낌이라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소세키 작품 중 꼭 읽으라면!
<마음>, <행인>, <한눈팔기>
어디 가서 소세키에 대해 두루 아는 척 하고 싶다면
<마음>, <그 후>, <도련님> 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팬이 아니라면 굳이 읽지 말라공!
<태풍>, <갱부>
그 밖에 추천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죽기 1년 전 아사히신문에 연재했던 산문을 모은 책으로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한 한 작가의 생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쓸쓸한 관념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그래서 소세키의 어떤 소설들보다 더 진실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다만 책 표지는 민음사나 문학의 숲 버전이나, 다들 참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만들었단 생각이 든다.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마사오카 시키와 나쓰메 소세키- 스물두 살 때부터 서른다섯 13년 가까이 그 누구보다 가까웠을 두 사람 사이의 편지를 수록하고 있다. 한 사람은 시인이자 수필가, 또 한 사람은 소설가로 그 빼어난 문장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들 관계 또한 문장만큼이나 아름답다. 1889년 스물두 살 동갑내기로 처음 만난 그들은 관심 있는 공연이나 문학(주로 하이쿠) 이야기로 가까워진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 대화들은 해가 갈수록 한결 풍요롭고 해박하며 윤택해진다. 친구 사이이니 때로는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 조차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늘 그 바탕에 흐른다. 때로는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기도 한다. 서로 문학적 가치관 차이에서는 뜨끔할 정도로 훈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비판과 질타 설전이 매섭다. 그러나 절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로 말미암아 관계가 변질되지는 않는다. 가벼운 인간관계에 익숙한 오늘날엔 참 생소한 풍경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살던 문학청년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 참된 우정의 기록은 그들이 주고받은 하이쿠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나쓰메 소세키, 추억 - 아내 교코가 들려주는 소세키 이야기>
저자가 나쓰메 교코로, 소세키의 아내이다. 소세키가 세상을 떠난 후 1928년에 교코가 소세키와의 결혼 생활을 구술하고 이를 소세키의 제자이자 사위인 문학가 마쓰오카 유즈루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이 발표되자 “교코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소세키를 미치광이 취급한 악처”라는 차가운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타인의 눈으로 본 소세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세키 팬이라면 흥미가 생길 자료이긴 하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소세키 서한집> 등에 실린 소세키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아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음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아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까다롭고, 예민하며 이기적인 남자와 함께 사는 게 쉬웠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딱히 구매하고 싶지는 않아서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는데, 소세키에 대한 환상을 와장창 깨뜨려준다는 점에서 또 나름 의미 있는 책이 아닌가 싶기도. 그러나 소세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금합니다.

나의 소세키 컬렉션(?) 현암사 전집을 마련하면서 갖고 있던 다른 출판사 버전은 누구 주거나, 빌려줬는데 못 받았거나... 하면서 사라진 책이 좀 있다. 그런데 <명암>, 범우사 버전은 누구 주지도 않고, 처분하지 않았는데 책장에서 사라졌다...! 어디 간 것일까?! 현암사 <명암>은 책 제목이 저렇게 지워졌다. 저 전집 표지 내구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