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들
장 주네 지음, 오세곤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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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주네 특유의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자신들이 해체하고 싶었던 그 세계는 스스로 동경하는 세계였기에 하녀들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 관계를 그리면서도 소외자들을 향한 섣부른 연민 없는 주네의 시선을 좇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욕망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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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본 키키 키린의 작품은 <인생 후르츠>이다. 사실 이 작품에는 키키 키린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2018년 세상을 떠난 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어느 노부부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키키는 이 작품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나는 이 영화를 그의 죽음 몇 달 후인 2019년 1월에 보았는데, 화면에는 키키가 나오지 않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라고 읊조리던 그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둘이 합쳐 177살, 65년을 함께한 부부의 노년의 삶과,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관조하는 하는 듯한 키키의 음성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 영화의 감동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을 좋아한다. 1950~6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 시절의 작품과 현대의 몇몇 감독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일본 영화를 크게 즐기지 않는데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챙겨보는 편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과장이나 오글거림이 없어서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키키 키린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고레에다의 작품을 통해서이다. 거의 10여 년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키키 키린은 어머니이자, 할머니로 등장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혜자 또는 고두심 같은 역할이랄까. 그런 까닭에 고레에다의 페르소나라고 불리기도 하는 키키 키린. 그이는 고레에다의 페르소나이자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의 말>을 읽노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2008년부터 키키가 세상을 떠난 2018년 사이 나눈 여섯 번의 대담을 담고 있다. 그 사이에 키키의 60여 년 연기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키키가 함께 한 작품 이야기도 여럿 나오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는 책이 되기도 한다. 고레에다는 이미 그의 에세이집인 <걷는 듯 천천히>에서도 키키를 향한 애정을 서슴없이 밝힌 바 있다. ‘배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옛날부터 키키 키린 씨의 팬이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어떤 점 때문에 키키의 팬이 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한 첫 작품 <걸어도 걸어도>의 한 장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아들 부부는 거실 쪽으로 걸어갈 때 준비해 둔 슬리퍼를 신는 걸 잊어버린다. 그러자 키키는 순간적으로 이 슬리퍼를 들고 허리를 구부린 채 그 뒤를 따라간다. 각본에 쓰인 대로가 아니다. 키키의 애드리브이다. 고레에다는 컷을 외치는데, 촬영감독이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최고잖아…… 몸을 굽힌 저 모습” 그때 고레에다는 그것은 바로 모두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임을 깨닫는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고레에다는 키키에게 주인공 소년의 외할머니 역을 부탁한다. 크랭크인 전날 키키와 그는 초밥을 먹으러 갔는데, 자리에 앉자 키키는 이렇게 운을 뗀다. “감독도 알겠지만, 어른 장면이 좀 많은 것 같아. 이 이야기, 어른은 배경이니까. 다들 배경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클로즈업 촬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걷는 듯 천천히), 124쪽). 실제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어린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이며, 그렇기에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오다기리 조’나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처럼 성인 배우들도 나오지만 지금 돌아보니 나왔는지조차 기억의 희미할 정도로 어른은 배경으로 머문다. 그러나 성인 배우들이 스스로 배경 머물기를 기꺼이 청했기에 그런 영화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키키 키린의 말>에 수록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메모. 그가 그린 키키의 얼굴이 참 귀엽고 앙증맞다.



이 두 가지 일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는지, <키키 키린의 말>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고레에다와 키키, 두 사람의 감독과 배우로서의 자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고레에다는 자신의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의 톤이나 밸런스까지 염두에 둔 키키의 조언에 감명한다. 키키는 애드리브도 결코 그 자리에서 생각난 대로 연기하지 않는다고 평한다. 이렇게 기꺼이 ‘배경’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는 키키의 배우로서의 철학은 이 <키키 키린의 말>에서 숱하게 만날 수 있다. 키키는 2007년 영화 <도쿄타워>에서 어머니 역을 맡기 이전에는 주로 영화에서 단역만 고집했다. 고레에다는 왜 큰 역할을 맡지 않았는지 묻는데, 그에 키키는 TV방송과 달리 영화는 계속 남겨지기에 꺼려졌다는 말을 한다. 그 옛날에는 TV방송을 비디오로 녹화해두는 경우도 없었으니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게 좋았는데, 이제는 TV방송도 기록이 남아버리는 시대가 돼서 무섭다는 말이다. 그러나 키키는 병(암)을 앓고 나서부터 영화에 대한 마음가짐이 크게 변했다고 말한다. 조금은 겸허해진 것 같다는 말. 연예계는 재능이 아니라 인품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 자신을 물처럼 만들어서 세모난 그릇이라면 세모, 네모난 그릇이라면 네모, 동그란 그릇이라면 동그라미가 되어 꾸밈없이 거기에 들어가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요. (<키키 키린의 말>, 17쪽)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 걸까. 영화 속 키키를 보면 그이의 말처럼 세모 그릇, 네모 그릇, 동그란 그릇 어디에나 꾸밈없이 거기에 그대로 들어가 자연스레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키키는 ‘평범한 대목의 평범한 움직임을 봐주는 게 배우로서 굉장히 기쁘다’ 말하는데, 이 평범한 움직임을 자연스레 재현하는 게 가장 쉬워 보이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배우였음에 틀림없다. 한편 고레에다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카메라에 담아내는 재주가 빼어난 감독이다. 키키 또한 그런 고레에다를 칭찬한다. ‘인간이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고 멈춰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레에다 감독은 확실히 보고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 찍는다.’라고 말한다. 나 또한 이 의견에 공감한다. 키키는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다 하는 착각이 드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있기에 인간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키키의 말은 그의 철학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말이 아닐까.

<키키 키린의 말>에는 이렇게 키키의 연기와 삶에 대한 자세,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노인을 연기하는 그이의 자세와 관찰력, 시선 등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나이 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든다고 한다. 예컨대 앉아 있을 때 젊은 시절에는 등을 쭉 펴고 앉았지만 노인을 연기할 때는 점점 작아져서 마지막에는 얼굴 바로 아래에 가슴이 오도록 하는 식이다. 서툰 배우일수록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을 알기 쉽게 내려고 등을 구부리는데, 키키는 ‘목이 없어진다는 느낌’을 살리는 식이다. 또 ‘뼈를 뺀다’는 표현도 눈길이 간다. 중심을 확 아래에 두고 밑위를 길게 해서 다리를 짧아 보이게 만들고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게 티가 나지 않도록 헐렁헐렁한 옷을 입는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앉아서 옆으로 두꺼워지게’ 만드는 일이나 ‘입 주위 근육을 느슨하게’ 한다는 표현도 눈길을 끈다. 키키는 평소 여러 노인을 보고 관찰하며 이런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가 없는 사람과 생활하면 어떨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각본에도 없는 틀니를 빼서 씻는 연기를 애드리브로 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나이를 먹으며 이렇게 된다는 걸보여주고 싶었’다며 ‘배우로서는 솔직히 본인의 이상한 모습, 추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무척 부끄럽지만 그런 묘한 사명감과 결점을 내보이려는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라 그렇게 되어버린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넘기는 말이지만, 자신의 추한 모습까지도 꺼리지 않고 연기하는 그 자세에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키키의 연기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요, 키키와 함께 있으면 ‘제대로 된 감독이 되고 싶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어떤 배우에게 ‘이 사람은 제대로 된 연출가다’라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주는 배우가 있다는 게 연출가에게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배우의 연기를 제대로 보고, 배우에게 ‘아아, 그런 부분을 보는구나.’라는 인상을 주는, 연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연출가이고 싶다고 말하는데,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그런 배우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 고레에다는 키키에게 그의 장점을 알아보고 그것을 극대화해주는 감독이었을 테고. 이처럼 서로의 장점을 잘 알아보고 믿고 존중하며 함께 했기에 그들이 함께한 10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처럼 수많은 명작을 빚어낼 수 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절묘한 조합은 마침내 빛을 보아 두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작품인 <어느 가족>은 2018년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는 병색이 완연한 키키가 바닷가에 앉아 어렴풋이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각본에 없는 장면이라 고레에다도 나중에 편집실에서 키키의 입 모양을 한참이나 돌려보고 나서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 그 말은 키키 키린이 고레에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가슴 깊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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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8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키키린이 출현한 영상을 본적이 없는데 ‘키키키린‘책에 있는 그녀가 남긴 말은 정말 좋더라구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21-04-28 11:42   좋아요 1 | URL
영화를 보면 또 놀라운 연기를 펼치는 배우입니다. ㅎㅎ <키키 키린의 말>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대화 상대로 나오기 때문에 키키의 매력을 한결 돋보이게 해준 것 같습니다.

mini74 2021-04-28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가족. ㅠㅠ 펑펑 울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고레에다 영화도 정말 좋고 키키키린의 연기도 정말 좋고 ㅠㅠ 잠자냥님 글도 좋고 ㅠㅠ 울적하네요.

잠자냥 2021-04-28 18:00   좋아요 1 | URL
네, <어느 가족> 그 영화 정말 좋았죠. 오랜만에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어요. 보면 또 울지도;;

stella.K 2021-04-2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아까 스맛폰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수정하는 사이
앞에 썼던 말이 사라지더라구요. 그래서 아예 삭제하고 다시 쓰려고 했는데
서재 북풀로는 댓글 일부가 살아있네요. 알라딘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는 저 두 사람을 저도 좋아한다구요.
이번에 윤여정 씨 오스카상 수상 개기로 아시아계 노여배우의 위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예측해 봅니다.
전 나문희 씨도 멋진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김혜자 씨나 고두심 씨도 좋은데
언제부턴가 TV에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잠자냥 2021-04-28 22:21   좋아요 0 | URL
네, 아까 댓글은 지워지기 전에 잘 읽었고요, 거기에 댓글 달았더니 제 댓글만 남는 형국이 되어 저도 일단 삭제했었습니다. ㅎㅎㅎ 우리나라 나이 든 배우 중에도 멋진 여성 배우가 많아서 참 좋네요. 저도 나문희 배우 좋아합니다. ㅎㅎ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랜드> 그 드라마 정말 완소. ㅎㅎ

유부만두 2021-04-2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키키 카린의 영화는 ‘앙‘ 과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좋았어요. 특히 ‘앙‘의 단팥 장인의 마지막 나날들은 계속 생각나고요.
이렇게 오래 자기 일을 가진 (하드 워킹 마미) 분들의 이야기가 좋네요. 찜.

잠자냥 2021-04-29 16:21   좋아요 0 | URL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참 좋죠. 아, 저는 <앙>은 못 봤는데 챙겨봐야겠어요.
맞습니다. 하드 워킹 마미들이 자기 일에서도 우뚝 서는 모습 정말 존경스럽고 보기 좋습니다.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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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내 고양이가 몹시 아팠다. 장염과 췌장염으로 이틀 입원했는데, 퇴원하고 집에 와서는 오히려 상태가 나빠져 다시 병원을 가니, 녀석 폐에 물이 찼고 심장병 진단까지 받아 또 다시 입원을 했다. 그때는 심지어 ‘산소방’에 들어갔는데, 너무나 절망적인 소리를 들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었다. 어떤 존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존재가 너무나 아프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울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녀석 없이 일주일 가까이 지내는 날들은 참 이상했다. 허전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녀석이 혹시라도 그렇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그 이후 내 삶을 상상할 수 없어서 하루하루가 몹시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건강해졌고 어쩐지 병원에서 과다 처치를 해서 일시적으로 심장에 무리가 갔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장 크기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건강해진 녀석은 다시 내 곁에서 잠들고 일어나 내 눈썹을 그루밍해주면서 애정을 표현하는데 지금도 가끔은 그날 길에서 펑펑 울던 순간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곤 한다.

이 녀석이 사라진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물론, 언젠가는 정말 작별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녀석이 사라진다면 나는 내 고양이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떤 존재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는 아픔이 크다. 그 상실감과 빈자리.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또 다른 존재를 그 자리에 ‘대신’ 앉혀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경우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고, 아이를 잃었다면 다시 아이를 낳거나, 반려 동물과 이별했다면 또 다른 동물에게 애정을 준다. 그런데 만일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잃어버린 존재를 똑같이 본떠 만든 AI가 그 존재를 대신한다면, 그건 그 존재일까 아닐까? 예컨대, 내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녀석의 겉모습을 똑같이 만들고, 녀석의 평소 행동, 취향, 습성까지 인공지능이 정확히 모방해 그 똑같은 겉모습 속에 이식되어 내게 주어진다면 난 행복할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눈썹을 핥아주는 녀석과 나만 아는 이 깜찍한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AI라면? 나는 녀석이 복제된 인공지능 로봇임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AI 고양이는 내 둘째 고양이의 ‘마음’까지 완벽하게 학습해서 자기 것으로 삼았는데, 그 마음은, 그 사랑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클라라와 태양>을 읽다 보니 ‘조시’와 조시의 엄마 ‘크리시’의 관계를 문득 내 고양이와 내 관계로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클라라’는 ‘유전자 향상’으로 지능과 능력은 향상되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병약해지고 사회적 소통 능력도 떨어지는 소녀 ‘조시’가 매장에서 사오는 AF(Artificial Friend) 로봇이다. 조시 같은 아이들이 선택하는 친구 아닌 친구인 셈이다. 클라라는 갓 출시된 모델 B3에 비해서는 한 단계 아래인 B2 모델로 점점 아이들의 선택을 받는 일이 줄어들고 있는데, 다른 에이에프들과 달리 세상을 관찰하면서 보고 배우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시가 클라라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능력에서 생겨난 클라라 고유만의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설정 때문에 작품 초반을 읽을 때는 클라라와 조시,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크리시가 클라라를 선택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작품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게 가끔은 좋을 거야. 네가 부럽다.”
나는 이 말을 잠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저에게도 여러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더 많이 관찰할수록 더 다양한 감정이 생겨요.”
어머니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려서 나는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 열심히 관찰하지 않는 게 좋겠다.” (<클라라와 태양>, 150쪽)


몸이 약한 조시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크리시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학습하게 한다. 조시를 대체할 존재로 클라라를 점찍은 것이다. 크리시를 위해서, 조시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클라라는 조시를 이어, 조시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문을 받는다. 그러면서 크리시는 클라라에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느냐고,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마음을 믿느냐고 질문한다. 만일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클라라도 아리송하기만 한 이 ‘마음’에 대해서는 인간들도 확답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조시를 복제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카팔디’는 인간에게 고유한 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그런 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부류로, 그런 게 있다고 믿는 크리시 같은 사람들을 ‘감상적’이라고 말한다. 클라라를 비롯한 에이에프들을 차갑게 대하는 조시의 아버지는 카팔디를 혐오하는데, 사실 그런 마음 깊은 곳에는 카팔디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 그는 정말 딸 조시만의 고유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내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며 함께 살았지만 모두 잘못된 가정에 근거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일종의 무지나 미신은 아니었을까 두렵기만 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마음’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지켜보며 그런 기준으로만 해석해 본다면 클라라는 단순한 인공지능 로봇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관찰하고, 보고, 학습해서 ‘마음’을 배운다면 그 마음은 그저 하나의 학습물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조시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죽었다고 생각한 ‘거지 아저씨’를 살려낸 태양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해를 찾아가 간절히 조시를 위해 기도하는 그 마음, 누군가를 위해 희망을 품을 근거를 찾고, 그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도 그저 모두 ‘학습의 결과물’, 또는 ‘기술적 복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클라라의 이 타인을 위한 순수한 마음들에 비하면 유전적으로 향상되어 지적 능력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 서투르기 짝이 없어서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 주는 조시의 교류 모임 친구들이 오히려 인공지능 로봇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클라라보다 향상된 모델인 B3는 AF매장에 전시되었을 때 자기들끼리 서로 눈짓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오래된 에이에프들을 슬금슬금 피한다. 능력이 떨어지는 에이에프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이 로봇들은 어디서 이런 행태를 익혔을까? 인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인간다운 마음일까 아닐까? 이 작품에서는 인간을 ‘대체’한 로봇으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이 시위하는 장면도 나오고, AF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인간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인간’을 또 다른 ‘인간’으로 대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폭력과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과 마음들도 인간 고유의 것이기에 인간다운 것일까? 특별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 클라라와 조시의 관계도 어느 순간에는 변한다. 조시와 릭의 관계가 변하듯. 그러나 조시와 릭의 관계와는 달리, 조시가 클라라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내가 돌아오면 넌 여기 없겠구나.” 말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클라라에게 조시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조시에게 클라라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지닌 ‘인간’에 비해 클라라의 헌신과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다운 마음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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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4-26 13: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네요... 다행히 나아졌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저 역시 고양이를 키우다보니 반려동물과 이별을 생각하면 먹먹해 집니다. 물론 피할 수 없겠지만요... 그저 함께 하는 순간을 감사하며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잠자냥 2021-04-26 14:25   좋아요 3 | URL
겨울호랑이 님도 귀요미 때문에 마음 졸였던 일이 있으셨잖아요. 귀요미도 저희 집 고양이도 집사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다들 무사히 곁으로 돌아왔으니 참 다행입니다. ㅎㅎ 고양이 녀석들 참 요물이에요.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들었다놓았다.... ㅎㅎㅎ 맞습니다. 함께 하는 순간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지요.

바람돌이 2021-04-26 1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같이 사는 어린 것들, 작은 것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 애달프고 애면글면하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다행이에요. 고양이가 나아서....
이 책의 내용을 보니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미래를 그린 듯하네요. 지금의 발전 속도면 불가능하지도 않을듯해서 그 때가 되면 고민이 될듯해요.

잠자냥 2021-04-26 14:36   좋아요 2 | URL
그렇죠. 같이 사는 어린 것들, 작은 것들은 참 애달픈 존재에요.
정말 가까운 미래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할지 저도 궁금하네요. ㅎㅎ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청아 2021-04-2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궁..저희집 츄츄(🐶)도 심장이 약한데다 기관지협착증이 와서 한번은 숨이 멈춰 인공호흡해 살렸어요. 😭몇 번이나 오늘 내일 이랬는데 다행히 아직도 살아있답니다. 자는 사이 떠나버릴까 불안한 시간들..저도 엄청 울었어요.미래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통한 존재는 대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자냥 2021-04-26 15:24   좋아요 2 | URL
아이코 그렇군요. ㅠㅠ 그래도 또 그렇게 작은 존재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지 싶기도 해요. 츄츄가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mini74 2021-04-26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자들은 이미 반려견과 반려묘를 복제한다고 들었어요. 결국 우린 모두 헤어지고 그 후에 남는 가슴아픔까지도 포함하는 세트가 사랑이 아닐까싶기도 하고요. 그게 잠자냥님이 쓰신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겠죠 ㅎㅎ모든 분들의 반려묘와 반려견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잠자냥 2021-04-26 18:17   좋아요 1 | URL
오 벌써 그렇게 하고 있군요. 하지만 저도 미니 님 말씀처럼 헤어짐과 그로 인한 고통까지도 온전하고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인간다운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피 데이스
사뮈엘 베케트 지음, 김두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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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절반이 땅 속에 묻힌 채, 평생 함께 했지만 이제는 대꾸조차 없는 남편을 향해 줄곧 혼자 떠들어대는 한 여인. 개미는 들끓고 태양은 이글거리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상황인데도 “오늘은 행복한 날”을 외치는 이 여인을 바라보노라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혹하고 끔찍한지 섬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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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4-2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게트에게 이런 책이. 잠자냥님 리뷰에 궁금하여 냉큼 상호대차 신청했어요. 고마워요^^

잠자냥 2021-04-25 23:45   좋아요 0 | URL
ㅎㅎ 짧지만 참 만만치 않은 작품입니다. ㅎㅎ 재미나게 읽으세요~

유부만두 2021-04-29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몇 쪽에 나가떨어졌습니다. 페란테 소설에서 언급되는 희곡인데 궁금했거든요. 근데 ...하아.... 고도도 못읽더니 이것도 ...

잠자냥 2021-04-29 16:51   좋아요 0 | URL
짧은 덕분에 두 번 읽으니까 그나마 그때야 좀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래도 그게 제대로 이해한 것이지 아리송. 고도도 저는 한 서너 번은 읽은 것 같아요. 그나마 짧은 희곡들이라 다행...ㅋㅋㅋ
 
키키 키린의 말 - 마음을 주고받은 명배우와 명감독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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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간적 애정과 존중을 담은 질문들과 그에 답하는 키키의 연기와 삶에 대한 연륜 넘치는 대답들. 두 사람 사이에 신뢰와 존중, 나이를 초월하는 우정이 있었기에 이런 대화들이 가능했겠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키키의 팬에게는 선물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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