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정기구독한 적이 있다. 몇 년 동안 꾸준히 읽었는데, 국내 신문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 있고 넓은 시각으로 다룬 양질의 기사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갈수록 국내 기사 비중이 커져서 조금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어 구독을 끊었다. 지금은 구독하지 않지만 언제라도 다시 정기구독할 의사가 있는, 그리고 주변에도 권하고 싶은 보기 드문 신문임은 틀림없다. 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지난 가을 문화인문 계간지인 <마니에르 드 부아르>를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반가웠다. 독자 북펀드 형식으로 창간했는데,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북펀드에 참여했다. 그런데 내가 중간에 신청을 뭘 잘못한 것인지, 첫 호 북펀드에서는 결국 누락되고 말았다. 그래서 첫 호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알라딘에서 구매해서 읽었고, 역시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터라 2호 <문학, 역사를 넘보다>를 발간할 때 다시 북펀드에 참여했다. 이때는 1년 정기구독까지 신청했다.
2호를 꼼꼼히 읽고 나니, <마니에르 드 부아르>는 정기구독이 끝나도 계속 구독해서 읽을 것 같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엄청난 양의 기사를 한 달에 한 번 빠짐없이 읽어내기가 버거웠는데(그래서 나중에는 다 못 읽고 쌓이기도 했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는 계간지 형식이라 기사를 다 읽지 못하고 잡지가 쌓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1호 예술, 2호 문학 등등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가 깊이 있게 펼쳐지니 읽는 맛이 짜릿하다. <문학, 역사를 넘보다>는 프롤로그인 ‘소설과 역사의 불가분성’에서 “소설의 거장들은 다른 해석 체계나 표현 체계를 벗어나, 역사와 역사의 공식적인 거대 담론이 놓치는 부분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성과를 거뒀다” 말하면서 소설과 역사의 미묘한 관계를 밝힌다. 작가들은 다른 해석 체계나 표현 체계를 벗어나 역사와 역사의 공식적인 거대 담론이 놓치는 부분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성과를 거둔다. 소설의 목적은 인간의 경험에 대해 허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지점을 탐사하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관련 역사책을 참고하면 되지만, 현지의 스페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을 겪었는지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싶다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도움이 된다고 이 글은 말한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많은 중남미 소설가들은 가상의 역사를 풀어내거나 허구적 관점으로 역사를 재구성했다. 플로베르는 <감정교육>에서 1848년 2월 혁명을,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몇몇 소설에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통해 인간의 자아에 깃든 모순과 모호함을 파헤쳤다. 필립 로스도 <휴먼 스테인>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이렇듯 <문학, 역사를 넘보다>에서는 ‘역사 앞에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아래 1부 침묵을 깬 작가정신, 2부 아름다운 불복종, 3부 본질을 기록한 활자들, 4부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로 구분해, 사회적 굴레와 불합리에 저항하면서 불멸의 문학을 일궈낸 작가들과 그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사르트르, 입센, 브레히트, 쿤데라, 카뮈, 루이 아라공, 레닌, 르 귄, 셰익스피어, 위고, 발자크, 괴테, 버나드 쇼, 보들레르, 조지 오웰, 마르케스 등 다루고 있는 작가의 면면도 참 화려하다.
책을 받고 처음 읽은 글은 ‘페미니즘과 SF를 융합한 휴머니스트, 어슐러 르 귄’이다. 이 글은 ‘2부 아름다운 불복종’ 카테고리에 속한다. 이 장에서는 질서와 도덕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정책, 법률, 정당성을 사회구성원 대다수에게 주입해 자신들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는 권력과 자본에 끊임없이 반기를 들며 저항하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글쓴이인 ‘카트린 뒤푸르’는 르 귄에게는 페미니즘이 유일한 축이 아니라고 본다. 매우 전복적이지만 페미니즘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르 귄의 글쓰기는 무엇보다 ‘무정부주의자의 심장과 도교적 영혼, 민족학자의 교육정신을 지녔으며,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신 급진좌파에 가깝다’고 본다. 르 귄의 작품들은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방황에 집중함으로써 사회과학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보다 내밀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문학이라고 정의한다. 르 귄 자신도 <밤의 언어>에서 “신화와 전설의 고대 원형, 혹은 과학과 기술의 고대 원형을 통해 인간의 삶이 있는 대로, 그리고 살아 있을 수 있는 대로, 또한 살아 있어야만 하는 대로 인간의 삶에 대해 사회학자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런 글을 읽노라면 올해는 르 귄의 장편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괴테와 톨스토이에게 혁명을 배운 레닌’도 흥미롭다. 이 글에 따르면 레닌은 이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를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오블로모프’라는 지주 귀족의 권태와 나태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주인공 이름을 딴 ‘오블로모프주의’는 러시아 독재를 오랫동안 유지하게 해 온 지주계급에 대한 욕설로 쓰였다. 레닌은 오블로모프주의라는 질병이 상류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차르 정부의 관료제와 그 하부 계층까지 전염시켰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볼셰비키당원들까지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봤다. 레닌은 톨스토이의 러시아 절대주의에 대한 공격을 흡족해 했으나 톨스토이의 기독교 신앙과 평화주의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특히 레닌은 어떻게 그렇게 천부적인 작가가 혁명적인 동시에 정치적 진보에 반동적일 수 있는지 반문했다.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서 경제 착취와 소작농들의 집단 분노는 뚜렷하게 인지하고 명백한 진단을 내렸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레닌은 생각했다. 레닌은 톨스토이를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고 추모하면서 “톨스토이의 관점과 신조 사이의 모순은 결코 실수가 아니다. 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라고 썼다. 톨스토이의 모순이 레닌의 정치 분석에 유용한 안내서 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 레닌은 도스토옙스키의 필력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문학을 지배하는 ‘고통 숭배’에는 반감을 느꼈다고 한다. 무엇보다 레닌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작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로, 이 책은 레닌을 급진주의자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투르게네프와 나보코프 등은 쳬르니솁스키를 증오했다. 나보코프는 “평민인 체르니솁스키를 향한 동시대 귀족 소설가들의 태도에는 계급적 우월감의 기미가 분명 있었다.” 인정하면서 사석에서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는 그를 ‘빈대냄새 나는 신사’라고 부르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야유했다.”고 말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 시대에만 유효했을 듯한, 이를테면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와 비슷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러시아 작가들의 뒷이야기들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와 브레히트, 빅토르 위고 등이 인기가 없다는, 더 이상 잘 읽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우리에게 사르트르는 침묵하지 않은 작가, 권력과 자본에 길들여지지 않는 반 순응주의의 작가로 비춰진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를 향한 비난과 혐오의 시선이 분명 존재하며, 그에 대한 비난은 주로 (<말>을 제외하고는) “문학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철학자”라는 것이다. 이런 농담이 대학가에서 널리 유행, 급기야는 대학교수들까지 전염돼 일종의 학설로 둔갑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글쓴이는 문학 자체만 보면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고 그를 변론한다. 또한 <구토>, <벽>, <자유의 길> 등은 모두 다채로운 문체와 서술 방식을 자랑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닫힌 방>, <더러운 손> 등 사르트르의 희곡 세계 또한 다채롭고, 창의적이며, 시의성 있는 작품들로 가득하며 여전히 사회에 큰 울림을 주주는 문제작들이라고 말한다. 글쓴이의 이런 평가에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구토>는 모르겠지만 <벽>이나 <닫힌 방> 등은 빼어난 작품에 틀림없다.
‘빅토르 위고, 사형 제도를 비판한 검정색 화가’에서는 화가로서 빅토르 위고를 조명한다. 나는 위고의 그림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위고가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글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칭송과 경멸의 대상이던 위고가 오랜 세월 동안 읽히지 않으며 한물간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만 1950년대 그의 데생화가 세상에 소개되며 그가 다시 부각됐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데생 열풍이 그에 대한 독서 열풍으로 이어지진 않았다고 글쓴이는 안타까워하며 ‘데생이 위고의 사랑, 광란의 에로티시즘, 욕설, 창작 활동 등 독자들이 매서운 눈으로 위고의 시 속에 담긴 내용을 모든 차원에서 읽어내도록 도와줄 수도 있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무척 흥미로운 기사들이 많아서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문학의 본질을 묻는 것으로 나아간다. 작가의 글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에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고, 우리는 문학을 읽으며 활자의 행간을 탐험하면서 작가의 내적 세계를 해석하고 추론하며 상상해낸다. 셰익스피어가 없었다면 어떻게 <햄릿>의 비장미를 느꼈을 것이며,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가난과 혁명의 관계를 고민했을 것이며, 나딘 고디머의 고뇌를 몰랐다면 요하네스버그를 한낱 잘 꾸며진 도시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마르케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그의 호탕한 성격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면서 올해는 꼭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그의 미출간 유작인 <월식의 밤>이 실려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아무튼, <마니에르 드 부아르> 두 번째 호인 <문학, 역사를 넘보다>는 실린 글도 하나같이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문학 작품을 더 열심히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앞으로 나올 3, 4호 제호는 <당신을 뒤흔들 음모론의 숨은 실체>, <그 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는가?>이다.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는가?

소장 가치 1000%

2호 북펀드에 참여한 독자 이름 실어줬다. 장국영 위에 내 이름(?) 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