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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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많이 했나. 처음부터 지루했는데 중반 넘어가면 재밌다고 해서 계속 읽었는데 끝까지 지루했다. 여기저기서 본 이야기들의 잡탕. 그 대사들은 다 어쩔.... 대사가 너무 확 깬다. 어떤 영화도 생각나고(영화 제목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 밝히지는 않겠음). 암튼 꾸역꾸역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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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30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이거 너무 좋았는데요 흑흑 울면서 읽었다능 흑흑 ㅠㅠ

잠자냥 2020-12-30 08:28   좋아요 0 | URL
ㅎㅎ 다락방 님하고 유부만두 님 평 보고 읽기 시작했다는! 취향 차이겠지요. 전 문목하보다는 김초엽쪽이요. ㅎ

유부만두 2020-12-30 08:50   좋아요 0 | URL
전 옴머머 하면서 읽었고요. ^^

잠자냥 2020-12-30 09:42   좋아요 0 | URL
아마 두 분 극찬이 아니었다면 안 읽었을 책 ㅎㅎ 암튼 덕분에 이 책 인기의 비결(?)이랄까 궁금증은 풀었습니다. 그저 저랑 맞지 않는 책이겠지요.

2020-12-30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0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년에 좋았던 책을 정리하기에 앞서 실망스러웠던 책을 먼저 꼽아 보았다. 그렇다고 여기 언급된 책이 정말 형편없느냐고 묻는다면 100%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책일 수도 있을, 지극히 개인적인 평.


페르난도 데 로하스, <라셀레스티나>
출근길에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아침부터 짜증 폭발해서 중간에 읽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작품. 기괴한 표지도 그렇고 ‘스페인 최고(最古) 소설’ ‘만일 스페인에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대신 그 영광을 누렸을 작품’이라는 문구에도 혹했는데, 나와는 영 궁합이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뚜쟁이 이야기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문학 작품에서 좋게 말해서 사랑의 메신저, 나쁘게 말해서 뚜쟁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간교한 술수나 온갖 중상모략을 써서 원치 않는 상대와 다리를 놓아주는 오지랖 역할을 많이 한다. 나는 현실에서나 문학에서도 그런 사람들 좀 많이 싫어한다. 남의 일, 다른 사람 연애사에 참견 말라는 주의랄까. 그런데 이 작품은 뚜쟁이 ‘셀레스티나’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뭐 그렇다고 이 작품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할멈의 활약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 할멈은 남자들이 콕 정해주는 상대를 찾아가 온갖 말로 여자를 구슬려서 그 남자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대가로 당연히 돈을 받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처녀성을 잃어버린’ 여자들에게는 또 처녀막 재생수술을 해주면서 돈을 번다는 점이다. 이 노파로 인해 ‘처녀성을 잃었거나 다시 얻은 여자가 무려 5천 명 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설정부터 짜증이 솟구친다. 물론 이 작품 배경은 15세기, 아주 먼 옛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21세기에 처녀성 상실이니, 처녀막 재생수술이니 이런 글을 읽고 있자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게다가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 명문가의 미남자 칼리스토’는 사냥 중에 우연히 ‘멜리베아’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데, 이게 과연 사랑이냐? 내내 의문이 든다. 칼리스토가 찬양하는 멜리베아의 덕성이란 온통 외모뿐이다. 칼리스토가 멜리베아를 칭송하는 표현을 보라. “초록색 눈동자의 큰 눈에 긴 속눈썹, 가느다랗고 올라간 눈썹, 중간 크기의 콧매, 작은 입, 희고 가지런한 이와 빨갛고 탐스러운 입술, 둥글기보다 약간 갸름한 얼굴, 봉긋한 가슴, 둥글고 자그마한 젖꼭지들, 누가 그 황홀한 모습을 그대로 너에게 전할 수 있겠느냐. 이것들을 보는 남자는 모두 정신을 놓고 말 거다. 살결이 어찌나 매끄럽고 빛나는지 흰 눈을 어둡게 만든다니까.” 등등 난리도 아니다. 둥글고 자그마한 젖꼭지들이라니. 이게 칭송이냐? 이렇게 칼리스토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이 외모만 보고 반해서는 그녀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래놓고는 자기 사랑이 대단하다는 듯이 멜리베아를 찾아가 고백하는데, 멜리베아는 소름 끼친다는 듯이 단호하게 거절한다(이 설정도 나중에 가면 정말 기막히게 바뀐다). 그리하여 결국 뚜쟁이 셀레스티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칼리스토. 뚜 노파는 온갖 말로 멜리베아를 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토록 고집스레 거부하던 멜리베아는 사실 칼리스토를 너무나 깊이 흠모하고 있었고, 자기 정절을 잃을까봐(아이고야.......) 그렇게 거부하는 척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진심으로 이 책을 던지고 싶었으나 내 전자책이라 참았다.

<라셀레스티나>는 21세기에는 사장되어 마땅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한다는 게 고작 외모와 몸매, 거기에 준한 것뿐이다. 처녀성에 정절에 처녀막에 아주 난리도 아니다. 더욱이 멜리베아의 갑작스러운 고백은 공감도 가지 않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여자가 거부하는 것은 사실 튕기는 것이라거나, 좋아하면서 괜히 그러다는 등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칼리스토 입장에서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의 폭력적인 신화까지 재생산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끝은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래도 읽을 분을 위해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에 공감이 간다면 그래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아닌 오직 육체적 욕망만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시대에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의 욕망에 충실하겠다는 설정이려니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런 욕망을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이라고 주장하니 21세기 독자가 읽기에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구나.


레오 페루츠, <9시에서 9시 사이>
얼마 전 레오 페루츠의 <스웨덴 기사>를 읽었다. 레오 페루츠 작품은 <9시에서 9시 사이>로 처음 만났다. 이 작품은 좀 짜증났는데, 그래도 이 작가는 작품이 출간되는 족족 읽을 것 같기는 하다. 뭐랄까, 그의 작품은 읽을 만한 가치는 있는데, 어떤 미묘한 지점에서 나랑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일단 레오 페루츠 작품은 잘 읽힌다.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재미는 있다. <9시에서 9시 사이>도 그렇다. 한쪽 팔을 망토 속에 감춘 채 이리저리 전전하는 가난한 대학생 뎀바가 주인공인데, 왜 그가 한쪽 팔을 감추고 다니는지, 궁금증에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 친구와 뎀바의 관계에 있다. 뎀바는 여자 친구가 갑자기 이별을 선언하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가난이 실연의 이유라고 생각하고는 여자 친구를 데리고 멀리 여행을 떠날 생각에 돈을 구하러 돌아다닌다. 그깟 여행으로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러고는 전 여자 친구의 직장에 쫓아가서 행패를 부리며 으름장을 놓질 않나, 그렇게 싫다는데도 여행 가자고 반 협박을 하지를 않나, 지 제멋대로 돈을 구하러 다니질 않나 등등 헤어진 여자 친구한테 하는 짓이 스토커나 다름없어서 지켜보노라면 불쾌해진다. 주인공을 응원할 마음도 들지 않고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연민은커녕 공감하기도 어려워 몰입이 떨어졌다. 뎀바의 여자 친구를 묘사하는 시선도 매우 낡았다. 돈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생각 없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대상일 뿐.

레지나 오멜버니, <광기와 치유의 책>
꽤 기대했던 책인데, 용두사미의 전형인 작품. 여자가 의술을 알면 마녀 취급받던 시대, 의사로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소개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아, 이 여성이 그토록 어려운 시대에 의술을 펼치면서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가 보다 예상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정작 책을 펼치니 주인공은 ‘아버지 찾아 삼만리’를 할 뿐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여성이 홀로 의사로 활동할 수 없었기에 의사인 아버지를 찾아와야만 다시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지만 환자와 여의사의 이야기를 기대한 내게는 좀 당황스런 전개였다. 무엇보다 결말이 정말 못마땅하다. 독립적인 여의사의 활약기를 꿈꾸며 책을 펼쳐든 사람에게 완전히 엿 먹이는 결말이랄까. 아버지 찾아 나섰던 여자가 고작 남편감 찾아 돌아오는 이야기라니 진짜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분노가 책장을 태울 기세로 활활 몰아친다. 이 작품은 나를 치유하는커녕 광기로 몰아갔다.



존 윌리엄스, <오직 밤뿐인>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의 초기작은 어땠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하, 읽지 말 것을, 괜히 존 윌리엄스에 대한 편견만 생겼다. 이 작품은 대도시 호텔에 머물면서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는 예민하고도 무기력한 청년 아서 맥슬리의 하루를 쫓는다. 근데 이 청년 정말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기 혼자 세상의 모든 고민과 고통은 짊어진 것처럼 우울하고 예민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죽지는 않아).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짜증이 솟을 때쯤 그 이유가 밝혀지기는 하는데, 그 이유도 사실 공감이 안 가고, 그저 중2병 걸린 청년 이야기로 느껴져서 한숨만 나온다. 그러다가 결국 막판에는 이 중2병 청년은 아무 이유도, 잘못도 없는 여자에게 폭력까지 행사한다. 이런 작품을 과연 읽을 필요가 있을까.  





김은국, <순교자>
기대 많이 했던 책이다. <순교자>라는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제목 때문에 번번이 읽기를 미루다가 올해 드디어 읽었는데, 휴... 그냥 계속 미룰 걸 그랬다. 죽을 때까지 미룰 걸 그랬다. 이 작품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이념의 대립이 만들어낸 열두 명의 ‘순교자’를 둘러싼 진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파헤친다. 북한 공산당에 체포된 14인의 목사 가운데 12인이 전쟁이 일어난 당일 처형되고 두 사람만 살아남는다. 이 살아남은 목사를 사람들은 배신자라 욕하는데, 실은 죽은 12인의 목사가 도리어 공산주의자들의 고문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처신했던 것. 그런데 살아남은 두 목사 중 신 목사는 자신이 신을 배반한 죄인인 것을 참회하면서 12인의 목사를 순교자로 찬양하는 데 앞장선다. 미스터리 설정이라 초반에는 읽을 만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데 목사들뿐만 아니라 악역을 자처하는 인물도 하나같이 너무 전형적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기독교 홍보 소설 같다는 것. 엔도 슈사쿠 작품은 아무리 읽어도 종교를 홍보하는 소설로 느껴지지 않는데, 이 작품은 왜 그랬을까. 기독교 믿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듯.



하루키, <일인칭단수>
하루키 책은 가끔 읽고 싶어진다. 오랜만에 하루키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에세이인지, 그 옛날 단편 재탕인지. 여전히 동그란 젖가슴에 집착하는 주인공. 하루키는 이제 일흔이 넘었을 텐데, 작품은 여전히 20대 초중반 그즈음에 머물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청춘의 증거라고 좋게 읽힐 수도 있겠으나, 내겐 거기서 성장을 멈춘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하루키 소설과는 정말 안녕을 고하게 만든 책.








아무튼 이렇게 정리한 걸 보니 나는 주로 형편없는 여성관을 갖고 있거나, 공감이나 몰입하기 어려운 캐릭터, 전형적인 이야기에 실망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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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뚜쟁이 특유의 오지랖이 너무 싫어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도 싫어해요. 그 책 읽으면서 얼마나 짜증났던지 ㅎㅎ

그런데 이 페이퍼에서는 무엇보다 ‘존 윌리엄스‘의 책을 읽지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게 되네요. 온갖 세상 고민 끌어안은 남자 젊은이 보기 싫어서 그만... 저는 그런 남자, 유약한 남자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제일... 으으...... 그런 남자들은 민폐쟁이라는 편견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으...

잠자냥 2020-12-29 14:10   좋아요 0 | URL
세상에 뚜쟁이 때문에 이뤄지는 사랑이 사랑입니까? -_-;;암튼 뚜쟁이 문학 싫어요; ㅋㅋㅋ

<오직 밤뿐인>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짜증 치미는... 휴, 암튼 다른 분들은 몰라도 다락방 님은 여기 제가 올린 책 중에 읽고 좋아하실 책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다락방 2020-12-29 14:21   좋아요 0 | URL
어..저기..그러니까.... 저는 그렇지만 남동생과 올케를 제가 소개해주었습니다. (둘다 싱글이라 해줬지만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난답니다? ㅎㅎ)

그럼 이만.
=3=3=3=3=3=3=3=3=3=3=3=3=3=3=3=3=3=3=3

잠자냥 2020-12-29 14:22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 예외도 있겠지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1-01 0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진 책 정리하기!!! 이런 시도 아주
좋습네다.

<라 셀레스티나>는 어느 다른 책(당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에서 보고서는
부러 구해다가 읽어 보아야 하나 할 정도
였었는데... 안 읽길 잘했네요 참말로.

존 윌리엄스의 케이스는 설터의 경우처럼
작가의 모든 책들이 좋지 않더라는 -

<순교자>는 리뷰 대회 참전을 위해 다시
읽었었는데 쫌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에
만났을 적에는 대단한 소설이다라고 생각
했었답니다. 그것도 이미 십 수년 전에...
그런데 올해 다시 만난 <순교자>는 순한
맛이 들더라구요.
충격으로 리뷰도 쓰질 못했네요 세상에나...

그나저나
엔도 슈사쿠의 서사는 넘사벽이었습니다.

잠자냥 2020-12-29 15:09   좋아요 0 | URL
푸하하, 충격으로 리뷰 쓰지 못하셨다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12-29 15:10   좋아요 0 | URL
참, 그리고 <라 셀레스티나>는 희곡이라서 대사가 정말 길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0-12-29 15:47   좋아요 0 | URL
ㅋㅋ 충격으로 리뷰를 못 쓰셨다니🤣🤣

유부만두 2020-12-3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사놓은 거 저기 있는데....

잠자냥 2020-12-30 09: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자꾸만 하루키 읽을 의지를 꺾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ㅎㅎㅎ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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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거닐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글이 쓰고 싶어지는 책. 다만 진 리스, 울프, 상드 등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그리면서 정작 지은이 자신은 가기 싫었으면서도, 파리를 떠나기 싫었으면서도 남자친구 따라서 도쿄로 가고, 거기서 불만 가득한 글을 쓴 건 진짜 어처구니 없다. 확 깬달까. 그 장은 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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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12-2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자의 태도나 (딱 유럽 동경하는 미국 여자 - 아, 그런 여자 캐릭터로 넷플릭스에서 코메디 나온 거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엇어요) 인종 문화 차별적 일본 체류 이야기는 너무 싫었어요. 책에 소개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 읽은 것에 만족했어요.
책 다시 생각하니까 거닐고 싶어요. 마스크를 쓰더라도 카페에 앉아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싶고요. 그게 파리라면, 뉴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잠자냥 2020-12-27 18:50   좋아요 0 | URL
도쿄 이야기는 진짜 뭥미 싶더라고요. 여성 예술가 이야기는 재미난 부분 많았습니다. 진 리스 이야기도 모르는 부분 더 알게됐고요. 진짜 마스크 없이 카페에 앉아 있고 싶습니다. ㅎㅎ
 
스웨덴 기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264
레오 페루츠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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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판 <왕자와 거지>라고나 할까. 결국 이 모든 것이 ‘사랑’ 또는 ‘욕망’때문에 벌어진 일이구나. 진짜 스웨덴 기사를 좀더 입체적으로 그렸으면 더 흥미로웠을 거 같다. <9시에서 9시 사이>도 그렇고 레오 페루츠 작품은 고전치고는 문장이 쉽고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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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12-26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작가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나는 그런겁니까?

잠자냥 2020-12-26 21:4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익숙한 향기는 아닙니다
ㅎㅎㅎ

유부만두 2020-12-27 17:58   좋아요 0 | URL
그래도 궁금해서 맡아보고 싶어지는데요. 킁킁

Falstaff 2020-12-26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동화,,,,는 아니지만 비슷한가요?
1월에 읽으려고 사놨는데, 흠.....

잠자냥 2020-12-26 21:42   좋아요 0 | URL
ㅎㅎ 성인용입니다!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만 비슷합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어린 시절 책벌레였다. 친구와 놀기보다 혼자 책 읽는 게 더 좋았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이 그렇게 좋니? 친구들하고도 놀아야지.” 그때도 나는 책이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답했다. 사람들이 지인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릴 때도 나는 딱히 외롭거나 괴롭지 않았다. 극장을 가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점을 제외하면 내 일상은 코로나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책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책과 함께 따뜻한 방 안에 있노라면,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책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저 먼 곳, 먼 시대로까지 이끌어가 주기도 하며, 좋은 말벗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펼쳐보여 준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공간의 종류들>은 너무나 익숙한,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페렉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공간, 그 흔하고 사소한 것에 주목해 글쓰기를 시도한다. 페렉이 말하듯 그곳은 ‘아무것도 아닌 곳, 만질 수 없는 곳, 비물질적인 곳, 넓이를 갖는 곳, 우리 외부에 있는 곳, 우리가 이동해가는 도중에 있는 곳, 주위 환경, 주변 공간’들이다. 공간에 대해 그토록 쓸 이야기가 많을까?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까? 궁금해진다. 페렉은 아무것도 아닌 그 ‘공간’이라는 대상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고 분류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며 써 내려간다. 침대, 방, 아파트, 문, 계단, 건물, 거리, 구역, 도시, 시골, 나라, 국경, 유럽, 세계로 차츰 뻗어나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써내려갔듯이 페렉은 ‘잃어버린 공간’, 너무나도 무심해서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들, 쉽게 잊힐 것들, 하지만 한때 나를, 당신을,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기록한다. 많은 이들이 지나치고 말았을 대상을 기발한 생각과 시선으로 바라보고 의심하고 기록함으로써 다시 그것들을 우리 주변에 새로이 불러온다. 요즘 같은 시기, 집 안에만 갇혀 있는 이들에게 페렉의 이런 사유는 신선하기 짝이 없다. 그의 눈으로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 공간들은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장소가 된다. 책을 통한 새로운 앎과 깨달음의 여행이 시작된다.

페렉이 생각하기에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이 그것들을 닳게 하고 파괴한다. 그래서 그는 글로 기록함으로써 기억이 그를 배반하는 일을 막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보는 법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특이한 것, 특별한 것, 비참할 정도로 예외적인 것만을 기록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일상은 무료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그래서 다들 이벤트를 만들고 멀리 떠나려 한다. 그러나 페렉은 어리석을 만큼 천천히 접근해서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더 평범하게 보도록 다짐’한다.(<공간의 종류들>, 84쪽) 왜냐하면 그런 것일수록 더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때문에 페렉의 공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이 글쓰기는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는 행위이자,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은 그저 ‘공간’을 집요하게 기록한 에세이로만 읽히지 않는다. 너무나 평범해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불안정한 삶의 형태를 기록해두고자 하는 절박한 몸짓으로 읽힌다.

레몽 크노도 <문체 연습>에서 일상을 새롭게 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출근 시간 S선 버스에 탄 한 남자를 묘사하고, 두 시간 뒤 다시 그 남자가 생라자르역에서 친구와 우연히 맞닥뜨린 장면을 99가지 문체로 변주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출근길 일상이 99가지 새로운 사건이 된다. 크노는 가장 쉽게 말투를 바꾸거나, 글 형식을 달리하거나, 장르를 다르게 하는 방법을 쓴다. 조심스럽게 말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꿈결에서 하듯, 머뭇거리는 어조로 저 아침 버스에서의 일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희곡과 시(詩)로 바꾸기도 하는데, 그 시는 때로 소네트가 되기도 하고,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철학 특강 재료가 되기도 하고 신나는 동요로 부를 수도 하고, 구성진 가락의 창(唱)이 되기도 한다. 전보, 편지, 광고, 공식서한 등등 레몽 크노의 세계에서는 이 짧은 일화로 모든 게 가능하다.

한 사건인데도 보는 방식, 관점에 따라 어조는 물론 의미가 달라지고, 다른 정보가 드러나기도 한다. <문체 연습>은 소설, 시, 희곡 그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하다. 크노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쓰기를 시도했을까? ‘당사자의 시선’, ‘다른 이의 시선’, ‘객관적인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문체는 곧 시선임을 증명한다. 이 책의 99가지 색다른 문체 시도는 하나같이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문학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다른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닐까? <문체 연습>은 문체가 곧 하나의 시선임을 증명하면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을 우리에게 전한다. 크노는 이런 문체 연습이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문체 연습>, 157쪽) 말한다. 그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된 즐거운 문체 연습이 기존의 낡은 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 새롭게 세상을 보는 방식을 알려준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세상을 보는 신선한 관점까지 제시해주는 문학. 내가 문학을 이토록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올드 스쿨>에는 나처럼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잔뜩 모여 있다. 주인공을 비롯한 학생들은 문학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자 소설 쓰기에 매진한다. 꿈은 오로지 하나, 헤밍웨이로부터 평가받고 그를 만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학교에서 우상 같은 존재이다. 인기가 시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명성이 날로 커져만 가는 그런 존재. 헤밍웨이 자체가 이 학교에서는 문학의 상징이다. 주인공 ‘나’는 헤밍웨이를 신처럼 받든다. 그는 과연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헤밍웨이를 만나게 될까.

이 작품은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뛸 만한 공감 가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작품 자체로 하나의 문학 강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곳곳에서 시나 소설을 어떤 자세로 써야하는지가 종종 드러나는데, 그러한 구절을 읽노라면 오래된 문학 교실, 즉 ‘올드 스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문학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내 이십대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을 써 와서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고, 소설가 또는 시인인 교수들에게 보여주면서 좋은 평가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때로는 초빙한 작가들에게 문학 재능을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던 20대의 나와 그들. 누군가가 문학경연대회에서 상이라도 받으면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해서 입상한 이의 작품을 남몰래 헐뜯곤 하던 못난 모습들. 그 모든, 문학으로 이루어진 순간들이 떠오른다.


<올드 스쿨>은 문학이 인간에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문학에서 높이 사는 진정성이나 진실함이 작품을 쓴 작가의 허위나 기만, 이중성과 연결될 때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이 작품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허위와 가식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나’가 문학을 통해 진실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한다는 점에 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 스스로 부끄러웠을 과거를 고해성사하듯이 써내려간 토바이어스 울프. 그에게도 문학이 빛을 던져주었음을 알리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문학은 이렇게 나를, 우리를 감동시키고 일깨우며 변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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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2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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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2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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