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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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데 오래 걸렸다. 너무 낡고 진부하고 나이브한, 형편없는 작품. 이게 왜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올라갔는지 의아할 정도. 꾸역꾸역 읽은 시간이 아까움. 전형적 캐릭터의 목사들 이야기인 줄 알았으면 안 읽었을 텐데. 읽고 나니 <깊은강> 엔도 슈사쿠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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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0-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별 하나에 순간 놀랐습니다. 그 정도인가요...언젠간 읽어야지 했던 책이었는데 한 권 줄었네요.ㅋㅋ

잠자냥 2020-10-01 17:50   좋아요 0 | URL
인물의 극적 변화가 개연성 없이 너무 순진해 보여서 좀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제게는 기독교 홍보 전단지처럼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잠자냥 2020-10-01 17:51   좋아요 0 | URL
문동 세계문학전집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별로였습니다..

Falstaff 2020-10-01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나도 이 책 읽고 독후감 썼는데, 어떻게 썼더라.....˝ 이게 왜 궁금하냐고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0-10-02 01:35   좋아요 1 | URL
그닥 호평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거 기독교인 아니면 호평 나오기 어려운 작품 같기도 합니다.

coolcat329 2020-10-0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폴스타프님 독후감 찾아 읽고 왔네요. ㅎ 그렇군요...🤔

잠자냥 2020-10-02 12:30   좋아요 1 | URL
ㅋㅋ
왠지 읽어 보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ㅋㅋㅋ

coolcat329 2020-10-02 1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ㅋㅋ😆 네~궁금하긴 합니다.ㅋㅋ
 
[eBook] 미시시피씨의결혼 서문문고 178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 서문당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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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예상하든 상상 이상의 전개를 보여주는 뒤렌마트.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기구한(?) 삶을 그린 ‘미시시피 씨의 결혼‘과 로마제국의 기이한 멸망을 묘사한 ‘로물루스 대제‘ 두 편. 블랙유머와 냉철하고 깊은 통찰력은 역시 일품이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의 로물루스 정말 내 스타일 인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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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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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를 읽고 난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 시대 이후로 나는 이 지구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이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이 지구에 ‘혐오’를 양산하는 존재라고. 이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혐오라니? 내가? 난 아니야 절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부터 돌아보자면, 나 자신도 ‘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소수자나 여성, 어린이,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지극히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도 특정 대상에 혐오는 존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코로나 이후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가 생겼다(8.15 집회 이후). 그 집회에 참석했던, 번번이 이름만 바꾸는 특정 정당에 대한 혐오도 있다. 그리고 매번 마스크 시비로 난동을 부리거나 마스크 쓰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오륙남’에 대한 혐오도 생겼다. 이런 내 마음속 은밀한 혐오를 일기장이 아닌 곳에 글로 남긴다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명과 혐오>의 저자 ‘데릭 젠슨’이 세계의 차별과 혐오 문화에 대해서 이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자기 생각을 적나라하게(때로는 포르노를 본 후 여성에게 느끼는 생각까지) 밝히고 있기에,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려면 진실로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정 집단이나 대상에게 ‘혐오’를 갖고 있다고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렇지만 잘 돌아보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혐오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고, 그것이 혐오라고 지적하면 도리어 ‘표현의 자유’ 및 ‘역차별’을 운운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쉽게 볼 수 있다. 차별과 혐오가 일상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문명과 혐오>의 저자는 인류 문명 자체가 파괴와 착취, 혐오를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분석한다. 아니, 인류가 혐오를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문명이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그게 무슨 과대망상이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나 또한 혐오 집단은 인종 차별이나 소수자 혐오, 성차별을 일삼는 특정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마음속에 작은 혐오를 지니고 살지만, ‘세련되게’ ‘교묘히’ ‘잘’ 감추는 법을 알고 있어서, 그걸 숨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가장 덜 세련된 사람들만이 혐오를 그대로’ 드러낼 뿐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자기이익, 전통, 경제, 옛날 종교’와 자신의 혐오를 뒤섞어버린다고 지적한다. 잘 알다시피, 나치조차 자신들의 미덕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어떤 형태의 혐오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지, 안 보이는 형태의 혐오는 얼마나 많은지 질문한다. 혐오집단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일베’나 저 미국의 ‘KKK’ 같은 단체 떠올리기 쉬운데, 그렇게 드러내놓은 혐오집단보다, 아니 그에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혐오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혐오를 양산하고 있다는 말은 문명의 원동력이 된 경제 성장 자체가 혐오와 착취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 강철, 설탕, 석유, 초콜릿, 담배 등등 인류가 탐을 냈던 거의 모든 자원은 노예 노동이 빚어낸 상품들이다. 꼭 노예 노동이 아니더라도, 그런 자원이 생산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의 원주민 삶의 터전을 짓밟고, 착취한 결과물이다. 다국적 대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면서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잔학행위들은 지금도 사람들의 눈을 가린 채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상품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다. 노예 노동 상품들이 너무나 부드럽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전 지구적 경제 체제에서 살고 있고, 이제 노예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구화’된 것이다. 데릭 젠슨은 혐오라는 이름보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사회, 생명에 대한 혐오, 멸시, 무시가 우리 경제의 단단한 기초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문명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먹고 살지도 말란 말인가? 어떤 물건을 소비하고 그 물건을 생산하는 데 노동자로서 일조하는 일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게다가 그게 어떻게 혐오로 이어지느냐고, 지나친 일반화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예컨대 ‘큰 석유회사에서 일하는 개인들 각각은 혐오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없을 거야. 단지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뿐이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에 대해서도 단호하다. 그렇게 하다보면 스스로 끔찍한 잔학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그에 따르면 기업과 혐오 집단은 사촌간이다. 같은 문화적 요구에서 나온 다른 형태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주체성을 빼앗는 것,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사물로, 객체로 바꾸는 것이 목표이다. 기업들은 폐허를 만드는 자들로, 그들이 손만 대면 무엇이나 돈으로 바뀐다. 숲, 바다, 산, 강, 사람 등 생명체를 죽은 것, 즉 돈으로 바꾸어놓는 그들의 역할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고 지지받고 보호받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게 된다.

자본과 성장을 앞세운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고, 그것은 다시 분노와 혐오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대상’이 된다. ‘혐오는 타자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본다. 타자가 아예 안 보일 수도 있다.’ 경쟁이 정당화 되고, 경쟁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소유하는 것, 즉,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이 존경받는 문화’, 즉 전체를 희생하고서라도 개인이 이익을 보는 행동이 보상받는 문화라면 그 문화는 전쟁을 좋아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학대하며, 경쟁이 심하며 개인들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데릭 젠슨은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미국 사회의 예를 드는데, 멀리 가지 않고도 지금 혐오로 물든 이 땅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쟁이 일상화 되고, 그 경쟁을 통해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특히 돈) 존경으로 이어지는 사회,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키우기 위한 목표를 정하고, 나머지들은 하나같이 그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몰두하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10대와 20대들이 여성을 성적 착취의 도구로만 보고 ‘노예’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붙여서 소비한 N번방과, 그 비슷한 방들, 날마다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 성범죄……. 이 모든 일들은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혐오를 양산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사회가 낳은 끔찍한 결과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중산층에서 떨어져 나가서 예전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전에는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겼던 자원을 가질 수 없게 될 때’ 불안해지고 혐오를 저지르기 쉽다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 폐지 이후 린치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 노예주들이 노예의 목숨과 노동에 무제한적인 권한을 가졌던 때에는 노예주가 노예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자기보다 ‘낮은 존재’로 내려다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가 이와 같은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전의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바뀐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대대적인 폭력 행위로 드러난다. 이렇게 겁을 주는 행동은 자신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 또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건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경기가 나쁘거나 경제가 몰락하는 시기에 혐오 행위가 늘어나는데, 현재 우리나라도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특정 세대와 성별을 중심으로 혐오가 당연하듯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누군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을 대상, 사물로 인식하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만일 자신이 혐오하는 존재가 ‘대상’이 아니라, ‘사물’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류는 혐오를 멈출 수 있다. ‘당신이 타인들을 물건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대로 대우하고 인식하는 것이 당신한테도 가장 이롭다고’ 느낀다면 인류는 혐오를 걷어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N번방에 있는 여성들이 자기의 ‘노예’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수치심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며,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많은 남자들이 그 방에 들어가서 여성을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을 한 개인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양성은 타자를 수많은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선입견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타인을 파악할 줄 아는 것이다. 타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성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340쪽)


데릭 젠슨이 생각하는 진짜 다양성이란 ‘나무, 물고기, 인간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써먹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그들을 이용해서 이익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마주할 수 있는 인간 공동체의 능력이다.’ 다양성은 생산에 대한 생각 없이 사는 삶이자 그냥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 댐으로 막히지 않고 산에서 바다까지 흐르는 강물, 풍부한 야생의 문화들이다. 다양성은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다. 다양성은 인간과 생명체의 통제되지 않으며 통제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런 다양성을 통해, 하나의 대상에서 개개인의 개성을 갖춘, 인격을 갖춘 한 사람으로, 생산의 도구가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경제적 이윤을 남길 대상이 아닌 생명을 지닌 존재로, 자연을 비롯한 사람 하나하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이 지구에 혐오는 더 이상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경제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꾼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새로운 홀로코스트나 마찬가지이다. 홀로코스트 때 제노사이드 참가자들 대부분은 유대인 아이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았고 가스실에 가스를 틀지도 않았다. 관료 대부분은 메모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회의에 참가했을 뿐이다. 나치는 인간을 죽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단지 지구를 죽이고 있다.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말이다. 대기업 간부들은 나치 고위층처럼 어떻게 생산과 통제를 극대화할지,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착취할지 여념이 없다. 이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것,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혐오를 멈추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채, 우리가 홀로코스트에 동조한 수많은 아이히만처럼 이 착취 경제와 그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문명이 주는 혜택에 젖어 그저 기쁘게 소비하기 바쁘다면 ‘우리 스스로 조용히 가스실’로 들어가, 혐오의 구덩이 속에 온 인류가 끝내 절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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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 2020-09-25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인상적인 후기 잘 읽었습니다. 지구는 천국처럼 완벽한 곳도 아니지만 지옥처럼 멀 해도 안되는 불가능의 지역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함으로써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의 땅인 것이겠지요. 알라딘밖에서도 유명해지신 잠자냥님의 글을 이렇게 보니 저도 많이 배우고 느낍니다. 제 공간에도 들러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종종 뵙겠습니다~

잠자냥 2020-09-25 14:54   좋아요 2 | URL
네, 율리시즈 님 말씀처럼 이 책은 인간이 더 이상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울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ㅠ_ㅠ....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봅니다. 저부터 그렇고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서재에서 종종 뵙겠습니다.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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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뒷모습 만큼 많은 것을 보여주는 신체가 또 있을까? 이 책에 실린 사진과 글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만으로도 황홀한데, 미셸 투르니에의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담긴 글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두 예술가가 빚어내는 환상의 세계, 더 말해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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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 검은 머리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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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이 서로의 상실과 상처, 외로움을 알아보고 함께 한다. 각자의 기억 속 사랑의 그림자를 헤매며 깨져버린 자기 사랑의 복원을 꿈꾼다. 그러나 그 욕망과 바람은 신기루와 같다. ‘파란 눈 검은 머리’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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