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습관적으로 트위터를 열어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나는 어떤 방송 이미지를 캡쳐해 올린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방송은 도움이 필요한 가출 청소년을 봤을 때 주변에서 어떤 반응을 하는지 살펴보는 일종의 실험 카메라 같았다. 캡쳐된 이미지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성인 남자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가출한 그 아이에게 성인 남자가 성매매를 제안하는 대화들이 오갔는데, 그 대화를 엿들은, 카페 안 성인 여성들이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소녀에게 다가가 ‘오지랖’인줄 알지만 아무래도 나쁜 일인 것 같다고, 돈이 없다면 언니가 주겠다고 밥은 먹었느냐면서 소녀를 달래 그 장소를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언니가 도와줄게’ ‘밥 먹었니?’하는 말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카페에서 친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가까운 테이블에서 이와 같은 장면, 그런 대화를 듣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런 소녀에게 다가가 선뜻 도와주겠다고, 밥은 먹었느냐고 말할 수 있었을까?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 저 애를 어떡하지, 생각하면서 친구와 소곤거리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섰을까? ‘오지랖’일 거야, 하면서 내 마음속 외침, 그러니까 지금 저 아이는 도움이 필요해, 어서 도움의 손길을 주라는 그 목소리를 억누르고 말지 않았을까. 결국 그 아이가 성인 남성과 함께 카페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어쩌면 세상이 이럴까 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말지 않았을까. 그냥 거기서 멈추지 않았을까. 이렇게 소시민 같은 내게 이 방송 이미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그 트윗을 살며시 북마크했다. 때로는 오지랖 부려야 할 때도 있다고,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바라면서 신호를 보내고 있을 거라고, 그 신호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그런 신호에 예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 때문에 이 장면들이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충실한 마음> 이 작품에는 바로 그렇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한 소년이 등장한다. 이제 고작 열두 살, 중학생인 테오, 작고 연약하고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이 소년은 언뜻 보기엔 그럭저럭 잘 자란 편인데도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있다. 테오의 선생님인 엘렌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집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어디가 아픈 것일까? 학대당하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테오를 주시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엘렌이 해 줄 일이 없다. 오히려 테오에게 집착할수록 동료 교사 및 교장과 마찰을 빚게 된다.
테오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은 곧 알게 된다. 테오는 유일한 친구인 마티스와 종종 사람들 눈을 피해 술을 마신다. 고작 열두 살짜리 꼬마가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그런데도 술 냄새 감추는 법을 기막히게 잘 알고 있어서 감쪽같이 엘렌의 눈을 비롯해 선생님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술에 절게 했을까? 사실, 테오의 부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테오는 일주일씩 번갈아 전혀 소통하지 않는 두 부모의 집을 오가며 살아간다. 전남편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엄마와 직장에서 쫓겨난 뒤 점점 더 무기력해져만 가는 아빠 사이에서 테오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 대한 멈출 수 없는 미움 때문에 테오를 향한 엄마의 증오어린 말들은 아이를 짓밟는다. 작고 연약한 몸으로 테오는 그 많은 말들을 견뎌낸다. 말들이 그를 갉아먹고 마침내 테오는 ‘참기 힘든 초음파, 그에게만 들리는 하울링. 그의 뇌를 찢는, 들리지 않지만 반복되는 진동’(31쪽)과도 같은 이명현상에 시달리게 된다. 엄마의 고통은 고스란히 테오 몫이다. ‘어떤 때는 전기 충격 같았고, 어떤 때는 깊이 베인 상처 같았고, 또 어떤 때는 주먹으로 한 방 얻어맞는 느낌’이다(60쪽). 그런데도 테오의 부모는 아이의 문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테오를 계속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다. 과연 테오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엘렌이 테오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테오의 신호, 도와달라고 온몸으로 조용히 소리치고 있는 그 신호를 알아차린 것은 엘렌 자신도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그래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상처, 그 깊은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녀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테오가 보내는 그 희미한 신호, 아니 신호랄 것도 없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징후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아마 어쩌면 저 방송 속의 소녀에게 도움을 준 여성도 비슷한 경험-그것이 꼭 가출이나 성매수 남성을 만났거나 하는 경험이 아니더라도-이 있었기에, 이 사회가 어린 소녀들이, 아니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곳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저 소녀의 신호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게 아니었을까. 테오를 계속 눈여겨보았던 엘렌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게 고작 이런 거구나.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약속들을 지키는 것. (<충실한 마음>, 168쪽)
따뜻한 마음, 밝은 마음, 예쁜 마음, 상처받은 마음, 순박한 마음……. 마음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충실한’이라는 수식어는 마음 앞에 놓이기에 조금 낯설기도 하다. ‘충실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제목을 놓고 생각해본다. 엘렌은 애써 잊으려 노력한, 어린 시절의 자기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고통을 무릅쓰더라도 테오를 돕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동료 교사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도 도우려는 마음을 막지 못한다. 테오의 엄마로부터 문제 있는 선생 취급을 받으면서도 “아세요, 부인? 아이들을 구멍 속이나 줄 끝자락에서 발견하면, 그땐 너무 늦은 거예요.”(93쪽) 말하며 테오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자기의 상처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도우라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마음, 바로 그게 인간의 마음이자, 사람다운 ‘충실한 마음’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디 테오의 상태가 ‘구멍 속이나 줄 끝자락’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기를 내내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가 ‘충실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리라.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누군가의 희미한 신호일지라도 외면하지 않는 마음, 내게 이득이 될지 않을지라도 조금은 ‘오지랖’을 부려볼까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다친 참새’를 다시 날게 해줄 것이다.
걸어가면서 그는 소니아와 함께 뱅센 숲에서 돌멩이를 줍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돌멩이들을 다친 참새라고 얘기하곤 했다. 조심스레 그것들을 잡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고, 때로는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대화를 건네기도 했다. 고쳐주겠다고, 키워주겠다고 약속했고, 곧 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윽고 돌멩이가 손바닥의 열기를 빨아들이며, 그래서 기력을 차린 듯싶으면, 그는 막 구해준 다른 돌멩이들로 채운 주머니 속에 그것을 넣었다. (<충실한 마음>,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