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색깔에 관한 에세이를 써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색을 머릿속에 떠올릴까. 빨강? 검정? 초록? 파랑? 아니면 흰색? 그리고 그 색에 대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풀어갈 수 있을까? 나 또한 머리로 특정한 색과 관련된 이야깃감을 떠올려본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카키색?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누군가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검정? 그래 검정은 그래도 몇 자 끼적일 수 있을 것 같다.

검은색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상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째서 당신은 늘 검은 곳을 입고 다니는 거죠” 묻는 메드베젠코에게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에요. 불행하니까요”라고 말하던 마샤. 체호프의 <갈매기>에 나온 그 유명한 대사처럼 검은색 옷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복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아직은 장례식에 갈 일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그럼에도 이십대의 어느 날, 지금보다는 낯설었을 장례식에 참석했던 날이 떠오른다. 한 여름이었고, 얇은 천으로 지은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장례식 내내 입고 있으려니 햇볕을 고스란히 흡수해 무척이나 더웠던 기억. 슬픔도 더위 앞에서는 무색해지던 그런 기억.  

어린 시절의 검은 고양이도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영향 탓인지 검은 고양이를, 아니 고양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에는 완벽하게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마당의 쥐를 잡고자 할머니가 어디선가 데리고 온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귀엽다면서 늘 끌어안고 다니던 동생과 달리 나는 녀석과 마당에서 마주치면 무서워서 도망가곤 했다. 어둑한 밤이면 까만 몸은 보이지 않고 마당 어디선가 번쩍 빛나던 그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이 오싹해지곤 했다. 변덕이 심했던 할머니가 어느 날 고양이는 아무래도 요물이라면서 내다버릴 요량으로 녀석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셨는데, 할머니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서 지붕 위에서 느긋하게 가르랑거리던 녀석. 그걸 보고 질겁하던 할머니. 나는 그 후로 검은 고양이는 역시 무서운 존재라고 그렇게 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몇 가지 더 풀어갈 수 있을 만큼 검은색과 관련한 기억은 다른 색깔보다는 많은 편이다. 다른 이들도 그럴까? 적어도 알랭 바디우는 그런 것 같다. 아니 그이만큼 이토록 검은색에 관해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어려우리라.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에서 바디우는 ‘검정(le noir)’이라는 단어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철학적 사유로 빛나는 어려운 글들이 아니라서 더 친숙하다. 그는 먼저 군대에서의 춥고 ‘어두운 밤’에서 시작해 유년 시절의 깜깜한 방에서 이루어지던 어느 놀이를 추억한다. 손가락에 묻은 잉크와 그 잉크와의 씨름을 통해서 얻은 글쓰기의 기쁨을 노래하고, 스탕달의 <적과 흑>의 주인공 ‘소렐’로부터 자리 잡음의 욕망(검은 충동)과 자기도취의 욕망(붉은 충동)이라는 이중적 욕망, 초라한 삶의 충동과 과도한 죽음의 충동을 탐색하기도 한다. 때로는 ‘누아르 데지르(noir desir)’라는 이름의 1990년대에 절정의 인기를 누린 유명 록밴드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기도 한다. 어둠, 밤, 석탄, 잉크, 검은 개, 음흉함, 검은 대륙, 적과 흑, 블랙 유머, 검은 표범, 흑인……. 검은색의 찬란한 사유는 그칠 줄 모른다.

그의 글 한 편 한편은 깊이와 아름다움에서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잉크통’에 관한 사유는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더럽고 지저분한 재료의 검은색과 잉크통 속에 담가 놓으면 ‘잉크 덩어리’라 불리는 것을 쏟아내곤 하는 변덕스러운 펜의 마술을 통해 기적적으로 얻게 되는 기호들의 검은색. 분명하고 또 어쩌면 매력적일지도 모를 한 문장을 끈적한 잉크로부터, 그리고 그 덩어리들 사이로부터 굽이쳐 나가며 얻게 되는 기적! 그것은 재료의 검은색으로부터 떼어 낸 의미의 검은색이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는 읽기와 쓰기라는 필수적인 기초를 통해 변증법의 기초를 가르쳤던 셈이다. 무시무시한 검은 색과 흰색 간 변증법의 기본. 시험, 작문, 쪽지 시험, 보충 과제 등등 이 모든 학습의 함정을 생각해 보라. 처참하게 망쳤을 때 우리는 백지를 낸다고 말하지 않는가? 반대로 영감을 받으면, ‘여섯 페이지를 까맣게’만들었다고 거만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잉크통’, 22~23쪽)


어린 시절, 흰 종이 또는 새하얀 스케치북 위에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그려 넣은 기억, 삐뚤삐뚤한 숫자나 글자를 맨 처음 적어보았을 때의 그 희열과 놀라움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 같다. 알랭 바디우는 ‘펜, 필통, 불완전한 잉크, 종이, 강렬한 생각과 어쩔 수 없는 덩어리 사이에 놓인 아이의 고민 사이에서 이미 문자의 심급과 그 바탕의 얼룩이 보이며, 글쓰기를 지지하는 것의 미묘함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오직 하얀색 위에 검은색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적당한 정도로 쓰여서 통제되고 형상이 부여될 때, 그것은 구원의 장소’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잉크 얼룩을 묻히지 않기 위해 애써가며 흰 종이 위에 적당히 써내려간 그 글, 그것들이 곧 ‘구원의 장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글이 곧 구원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있을까. 이 글쓰기라는 행위는 곧 바디우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만만찮은 불변성을 지닌 하얀색 위에 세심하게 고안된 양으로 던져진 검은색에서 나온 결과’이며 그렇기에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검은색은 색상이 아니며 빛의 스펙트럼 분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검은색은 모든 색체의 결여인 데 반해, 하얀색은 모든 색채의 불순한 혼합’이라고 말한다. ‘검은색은 색채의 무이며 하얀색은 색채의 전체’인 것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검은색은 식별되지 않는 것들을 상징하며 결여와 초과를 상징’한다. 그러는 한편 ‘검은 물질은 이름이 잘못 붙여진 구멍처럼 과도한 빛의 어두운 결과물이 아니다. 한동안 하늘의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밝힐 수도 있고, 때로는 심지어 대낮에도 밝게 빛나고 남은 육중한 별이 폭발한 뒤 남은 검은 잔여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발견될 수 없는 채로 사유에서의 결여를 메우는 데 열중’한다. 우리는 늘 알지 못하는 것을 검게 칠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식에서 결여된 무언가를 검은색으로 명명하여 사유에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도록 한다. 따라서 ‘우주론에서의 검은색은 하늘의 푸른색에서 대한 시적 대립항인 밤의 어둠이라기보다는, 사라진 무언가의 이름(블랙홀)이며, 모든 가능적 인식의 이름이자 그 무엇도 개념을 결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이름(검은 물질)’이다. 결국 바디우가 보기에 우주론의 검은색은 부재나 죽음보다는 사유에 대립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상복을 떠올렸듯이 바디우 또한 검은색은 당연히 우리에게 애도의 색상임을 지적한다. 그는 ‘빛의 부재, 꺼져 버린 삶, 최초의 오염으로서의 음흉한 생각이라는 이 끔찍하고 치명적인 역할에 수반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검은 휘장을 가득 휘감은 영구차 뒤로  검은 의복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천천히 따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음들 속에 오로지 삶의 덧없음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불가피한 사라짐에 대한 사색만이, 어두운 생각만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애도의 색상인 검은색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흔히 분위기를 살리는 농담의 바탕’ 즉 ‘블랙유머’가 비롯되기도 함을 지적한다. 삶과 죽음, 애도와 슬픔, 유머가 공존하는 검은색이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검은색의 변증법, 의복, 문학, 대중문화, 물리학과 생물학 분야를 아울러 검은색을 사유하던 바디우는 마침내 인류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검은색은 정말 어떤 색깔이냐고, 그것은 백인들의 발명품이지 않느냐고. “검은 고양이를, 악마의 음흉함을, 까마귀를, 검은 누더기를 걸친 마녀들을, 흑사병을, 영혼의 우울함을 악마화한 이후에 우리들, 이른바 서구 유럽의 백인들은 대다수의 아프리카 거주민들이 오로지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노예 또는 점령된 식민지의 유형수가 되도록” 정해버린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누군가의 색깔을 정말로 결정하려고 해보라. 한 사람의 백인은 하얀색인가? 확실히 아니다. (.....) 흑인, 황인, 홍인, 그리고 특히 백인은 그저 억압적인 분류 방식이나 의심스러운 상징적 계산을 지탱하며, 경멸적인 판단 혹은 비참한 자기만족을 떠받치는 헛된 ‘객관적’ 지지대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배열 가운데 어떤 것이든 하나의 색깔을 포함하려 하는 모든 상징화, 집합적 평가, 정치적 시도, 일반적 판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보편적 차원에서는 백인도 흑인도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 (‘백인들의 발명품’, 128쪽)


바디우의 말처럼 인간에게 정말 색깔이 있는가?  당신은 무슨 색인가? 누군가를 색깔로 결정할 수 있는가? 백인이 정말 하얀색이며, 황인은 노란색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손은 정말 노란색인가? 이 색이 정말 노랗다고 말할 수 있는가? 흑인은 정말 검은색인가? 그 피부를 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는 그의 선언은 그래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130쪽 남짓의 짧은 책이지만 검은색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수많은 이야기를,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니 책을 덮을 때는 나도 모르게 찬탄이 나온다.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 앞에서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주저하는 이들이게도 이 책은 검은색에 관한 다정하고도 친숙한 에세이로 읽힐 것이다. 바디우는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책 <행복의 형이상학>에서 ‘모든 철학은 일종의 행복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했는데,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을 읽는 내내 검은색과 사유의 발견이라는 또 다른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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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와 숫자들 - 정규 4집 서울시 여러분
9와 숫자들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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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색깔을 이렇게 계속 비슷한 수준으로 잘 이끌어나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 낭만 넘치던 전작들의 분위기에 서울의 쓸쓸한 생활을 담았다. 음반 듣고 있으면 서울살이는 아이들부터 어른, 노인까지 참 고단하구나 싶어져서 왠지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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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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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해야만 하는 로자. 실제 실화에 더 가깝게 썼다면 어땠을까. 읽는 내내 기분이 개운치 않다. 로자 그녀 또한 나치의 희생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대인에 비하면 편하게 살지 않았나? 심지어 그와중에 사랑까지 하고. 살아남은 자의 변명, 또 다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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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베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강승현 옮김 / 모모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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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은 남편을 설득해 던컨 왕을 살해하도록 종용하고,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은 왕비가 된다. 그 후로 ‘레이디 맥베스’는 흔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권력욕 넘치는 여성을 일컫게 되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레이디 맥베스>에는 바로 그런 여성이 등장한다.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즈마일로프’가 바로 그녀이다. 그러나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부인’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하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를 뒤에서 은밀히 조종하거나 살인을 종용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직접 나선다. 그것도 여러 차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이 강렬한 여인의 일생을 거침없는 입담으로 폭풍처럼 몰아 써내려 간다.

작품은 ‘우리 지방에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떠올릴 때마다 영혼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인물들이 간혹 나온다. 상인의 부인이었던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즈마일로프도 바로 그런 인물에 속하는데, 언젠가 그녀가 일으켰던 끔찍한 사건 이후 우리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간단히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그리고 그가 일으킨 일이 ‘끔찍한 사건’임을 예상하게 하고, 이 모든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레스코프가 형사재판소의 말단 기록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경험한 엽기적인 살인 사건에서 소재를 따왔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레스코프의 상상력이 더해졌으리라.

타고난 미녀는 아니지만 매우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카테리나 리보브나’ 그녀의 나이는 이제 스물넷. 그런데 매력적인 외모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녀의 인생은 권태로 가득하다. 부유한 상인이지만 쉰 살이 넘은 남편 ‘지노비 보리스이치’와 오래전에 홀아비가 된 아흔 살에 가까운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카테리나 부부에게는 아이도 없다. 지노비 보리스이치는 카테리나와 결혼하기 전 20년을 함께 살았던 전 부인에게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 아이도 없이, 늙은 두 남자와 사는 권태에 사로잡힌 젊은 아내. 게다가 그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난에도 질린 상태이다.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체 뭐 하러 결혼을 했느냐는 비난. 사실,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면 문제는 남편에게 있을 가능성이 큰 데도  마치 그녀가 기품이 넘치는 그들 집안에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듯하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침묵과 권태 속에 나날을 보낸다.

큰 변화 없이 소소하게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 꼭 권태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삶이 알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테리나에게는 그렇지 못했으니, 그녀의 성격이 원래부터 불같았기 때문이다. 부잣집 남자와 결혼해 조신하게 살아가기 이전, 가난한 처녀 시절 그녀는 꾸밈없이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일례로 ‘양동이를 들고 강에 나가 나룻가에서 셔츠만 입고 목욕하는 것’을 좋아했고, ‘쪽문 밖으로 지나가는 청년에게 해바라기씨 껍질을 뿌리며 농을’ 걸기를 즐겼다. 그런데 이곳에선 모든 것이 달랐다. 강가에서 셔츠만 입고 목욕은커녕 해바라기씨 껍질을 뿌릴만한 청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카테리나의 권태를 감지한 집안의 하인 세르게이는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젊음과 빛나는 외모를 무기삼아 주인마님인 카테리나에게 폭풍처럼 밀어붙이고 카테리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에 불을 붙인 자를 기꺼이 맞이하는 것이다.

부유하지만 나이 많은 남편과 사랑이나 애정 없이 사는 지루한 삶, 거기에 나타난 젊고 잘생긴 남자. 그와의 애정행각…….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여럿 있다.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레이디 채털리 등등. 그러나 이들과 카테리나는 완전히 다르다. 욕망에 눈뜨고 남편이 아닌 남자와 벌이는 애정행각에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면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린다. 아니, 욕망에 눈뜬다는 표현조차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권태에 짓눌려있던 욕망이 폭발한 것이다. 그 욕망은 고삐가 풀린 채 질주한다. 시아버지를 비롯해 남편이 알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부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당신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밝혀낼 거야.” 말하는 남편에게 카테리나는 그를 비웃으며 오히려 조롱한다. “당신의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겁쟁이가 아니랍니다. 나는 그런 거 두려워하지 않아요.”(56쪽). 이렇게 거침없는 여성이 있었던가? 한편으로는 통쾌한 생각에 왠지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카테리나는 한술 더 뜬다. 외도 현장을 덮친 남편 앞에 “여기 그 사람이 있다”며 연인을 당당히 소개하는 게 아닌가. 세르게이의 팔을 잡고 남편 앞에 선 카테리나는 말한다. “어디 나하고 이 사람을 심문해 보시죠.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도망가지 못하게 재빨리 방문을 잠근 뒤 주머니에 열쇠를 집어넣고는 앞섶을 풀어헤친 채 세르게이와 함께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계속 도발한다. “왜? 마음에 안 드시나? 한번 보라니까. 내 사랑하는 양반아, 얼마나 좋은지!” 그러고는 마침내 남편 앞에서 세르게이에게 정열적으로 키스한다. 이 광경을 낱낱이 지켜볼 수밖에 없던 카테리나의 남편은 격노한 끝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야 마는데, 그마저도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권태로웠던 지난날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남편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잘 들어 세료자! 다른 여자들이 어땠는지 나는 알 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내가 너를 원하기도 했지만, 네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고, 또 네 술수 때문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세료자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 대신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나는, 결코 살아서는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41쪽)


카테리나의 이 극악무도한 잔인함에는 세르게이조차 몸서리친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욕망에 걸림돌이 된다면 연인인 세르게이에게도 불행이 닥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카테리나가 내뱉은 위와 같은 말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외도 상대에게 사랑만을 갈구하면서 끌려 다니던 가련한 비운의 여주인공들과 사뭇 다르다. 당당히 ‘내가 너를 원했다’고 말할 줄 아는 한편으로는 ‘너는 나를 유혹했고, 네 술수’라고 명확히 언급한다. 술수임을 알아도 나는 그 욕망에, 젊고 잘생긴 남자를 끌어안는 것을 ‘내가’ 선택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를 배신한다면 결코 살아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 아닌가.

그러나 이처럼 거칠 것 없이 잔인하고 당당한, 그 여자도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만다. 아무리 욕망을 채우고자 몸을 던진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이 자기 자신을 옭아매고 만 것이다. 그의 ‘술수’인지 알았어도 이제 세르게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지은이가 레스코프, 그러니까 ‘남자’임을 상기해야만 했다. 단순히 욕망을 채우는 상대였더라면, 아니 그러다 보니 사랑하게 되었더라도, 그놈의 배신을 알았더라면 웬만한 여자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갈면서 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세르게이에게 돌렸을 것이다. 레스코프가 여성 작가였다면 그렇게 썼을 텐데, 남성이라 그런지 복수의 칼을 세르게이에게 돌리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캐릭터를 일구어놓고도 막판에 조금 힘이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이 책에 함께 실린 또 다른 작품 <쌈닭>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레이디 맥베스 ‘카테리나’ 못지않게 당당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강렬한 캐릭터 ‘돔나 플라토노브나’- 그런 인상 깊은 인물을 창조하고도 그런 허무한 결말을 짓다니, 오호 레스코프여 오호 통재라.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레스코프가 빚어낸 이 두 여성은 너무도 강렬해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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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ue76 2020-04-0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여주의 대사가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군요. 강렬합니다!

잠자냥 2020-04-07 20:40   좋아요 0 | URL
저것보다 더 시원한 대사들이 많습니다~ 한 번 꼭 읽어보세요. ㅎㅎ

유부만두 2020-04-0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는데요, 일꾼 세르게이가 영 매력적이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나겠다는 생각만....) 여주인공이 훨씬 더 우위에 선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영화에선 일련의 사건들이 별 특별하지 않게 반복, 처리 되어서 지루했어요.

잠자냥 2020-04-08 12: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더럽고 냄새날 거 같은 느낌 알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사실 책에서도 그래요. 그깟 세르게이 따위... 에휴.
 
검은색 - 무색의 섬광들 민음사 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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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검은색부터 시작해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에 이르기까지 ‘검은색’에 관한 이토록 깊고 너른 사유라니 그저 놀랍다. 알랭 바디우를 잘 몰라도 누구나 친숙하게 읽을 수 있는 철학 에세이. 짧지만 깊고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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