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첫째 고양이를 만나게 된 이후로 나는 완전히 고양이 덕후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존재가 고양이라고 말하는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이 지구가 너무 심심하고 못난 것들로만 가득해서 단 하나 예쁘고 재미난 녀석들을 창조해야겠다, 결심하고 만든 녀석들이 바로 고양이’일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아니 세 마리와 함께 지낸다. 모두 길에서 데려온 아이들. 엄마에게 버림당해 빽빽 울고 있던 녀석들이 지금은 내 집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곳을 찾아 한낮의 게으른 잠을 즐기고, 지들끼리 우다다 뛰놀기도 하고, 집사에게 예뻐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세 마리가 모두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고양이 낸시>의 ‘낸시’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기 고양이 낸시는 나와 같은 인간 집사의 집 앞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낸시가 버려진 집 앞은 무려 평범한 쥐 가족의 집이다!

쥐의 천적이라는 고양이! 바로 그 고양이의 새끼가 집 앞에 버려져 있다니, 쥐들이 얼마나 놀랬으랴. 그럼에도 낸시를 처음 본 더거 씨는 가여운 아기 고양이 낸시의 귀여움에 홀딱 반해 낸시를 덜컥 집 안으로 들이고 만다. 아들 지미도 낸시를 보고는 완전히 반하고 만다. 너무 너무 귀여운 것이 아닌가! 사실 아기 때부터 우리 고양이들을 키워온 나로서는 아기냥의 그 귀여움을 공감하고도 남는다. 우주 최강의 귀여움이랄까. 그렇지만 나는 고양이보다 훨씬 덩치 큰 인간 집사, 그에 비해 더거 씨와 그의 아들 지미는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고양이 낸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다니 정말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낸시의 귀여움에 반한 더거 씨 가족이야 그렇다 쳐도, 산 넘어 산. 마을 사람들의 눈은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자기들 마을에 아기 고양이가, 그렇지만 무럭무럭 성장해 언젠가는 큰 고양이가 되어 자신들을 위협할 그런 존재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 누가 반길 수 있을까. 당장 목숨이 위협을 받는데 말이다. 더거 씨는 이런 염려 때문에 낸시에게 줄 우유를 살 때도 남몰래 비밀에 부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마을 사람들은 곧 낸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데! 와우, 놀라워라. 더거 씨의 걱정과는 달리 모두가 낸시의 귀여움에 반해 스르르 두려움도 공포도 잊은 채 낸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걱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존재하지만....... 이런 틈바구니에서 낸시는 무사히 쥐들과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쥐들이 낸시와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과정을 잔잔하고 귀여운 에피소드들로 그려나간다.

<고양이 낸시>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낸시’라기보다는 낸시를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대해주는 더거 씨와 지미, 그리고 마을 쥐들이 아닐까. 그들의 따뜻한 이해와 환대, 사랑이 없었다면 낸시가 그토록 귀엽고 다정하고 섬세한 고양이로 자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주는 존재들을 ‘본능’이라는 이유로 ‘사냥감’으로 생각해서 쫓아다니고 괴롭히거나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이해’와 ‘사랑’, ‘존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쥐’가 아닌 ‘인간’이다. 그럼에도 낸시처럼 귀엽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더거 씨와 지미에게 소중한 가족이 된 ‘낸시’처럼 내 고양이들도 내겐 세상 둘도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다. 그러나 쥐와 고양이처럼, 인간과 고양이도 엄연히 종(種)이 다르다. 얼핏 생각해서, 고양이 기준으로 봤을 땐 인간이 쥐에 비해 덩치도 크고 뭔가 도구도 잘 쓰니까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인간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읽기로 고양이들은 인간 집사를 털도 나지 않은, 아직 덜 자란 덩치만 큰 아기 고양이라 생각해서 자신들이 돌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 않는가. 실제로 그래서 서열이 높은 고양이가 낮은 고양이에게 주로 해주는 그루밍을, 고양이가 인간에게 해주는 일도 드물지 않다. 나만 해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 둘째 고양이에게 그루밍당해서 침범벅이 되곤 한다. 그럴 때 나는 녀석에게 “엄마! 회사 갔다 올게요.”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종을 뛰어넘어서 인간과 고양이가 애정을 나누듯이, 쥐와 고양이 또한 그런 관계가 가능하고도 남지 않을까.

<고양이 낸시>는 이렇게 남들이 보기엔 서로 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인 고양이와 쥐의 우정과 사랑을, 그것도 돌보는 고양이, 돌봄당하는 쥐가 아닌, 작은 쥐들이 덩치 큰 고양이를 돌본다는 설정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가 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나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쥐 마을의 쥐들과 같다면, 이 지구에 폭력과 혐오라는 단어는 몽땅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 고양이들에게도 분홍색 리본 머리핀 꽂아주고 공주님놀이를 하자고 해볼까 싶은데, 녀석들은 우다다 뛰기를 더 좋아하는 철부지들이구나.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3-02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투땡투!! >.<

잠자냥 2020-03-02 22:28   좋아요 0 | URL
아마 이 책은 다 읽고 조카에게 주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_^

다락방 2020-03-03 11:58   좋아요 0 | URL
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구매하려는 것입니다! >.<
 

요즘 뉴스를 보면 몇 년 뒤에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정식으로 국어사전에 오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나라 언론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지만, 코로나 관련 쏟아지는 기사만 보면 언론사는 물론 이 땅의 기자들도 진심으로 그 자질이 의심스럽다. 한국 언론인 중에 ‘기레기’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를 읽다 보면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이런 기자들은 왜 없는 걸까 싶어져 한숨이 밀려온다.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다룬 인물로는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르크스가 있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 시리즈를  좋아하고 아꼈던 나로서는, 시리즈가 새로 발간될 때마다 다음에는 어떤 작가가 기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될까 기대하곤 했다.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들이 누가 있지? 생각하며 다음 권에 소개될 이를 마음속으로 점찍어 보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3권이자 마지막으로(여기서 멈춘다니 안타깝다!) 소개된 이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세 번째 주인공이 마르크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조금 놀랐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에 비해 뜻밖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에서 일한 이력도 있고, <뉴욕 데일리 트리뷴> 유럽 특파원 자격으로 10여 동안 유럽 정세에 관한 보고를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널리스트’로서 마르크스의 모습이 조금 낯선 까닭은 아마도 그가 사상가로서 아주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탓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 <더 저널리스트:카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가 언론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뜨고 현실 문제들을 인식, 저널리즘 같은 결과물을 통해 어떤 과정으로 그의 사상을 구체화해 나갔는지를 좇는다.

이 책에 실린 17편의 기사들을 읽노라면 자본주의의 폐해와 자본가 계급의 이중성을 고발하며 노동자 계층과 서민의 삶을 다루고 알리는 데 주력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는 ‘팩트’에 매우 충실한 기사를 썼다는 점이다. 그가 쓴 기사들은 하나 같이 책, 보고서,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한다. 주요 사건을 경제, 법철학 관점에서 논박하는데,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에 알맞은 통계와 자료를 열거하고 분석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데, 그가 쓴 기사들에서는 근거 없는 주장을 찾기 어렵다. 이른바 망상처럼 휘갈긴 기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에 입각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풍자와 비판을 잃지 않는다. 때로는 날카롭고도 해학적인 비유에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도 한다.


소위 객관적이라는 부르주아 통계전문가들이 남들에게 이상주의자다 뭐다 떠드는 데, 따지고 보면 이 부르주아 낙천주의자들보다 더한 이상주의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25쪽)

노동자들이 ‘생활필수품’ 이상을 요구하거나 근면으로 얻은 수익을 ‘공유’하려 들 때,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적 경향을 띤다는 혐의를 받곤 한다. 식료품 가격이 정말로 ‘영원하고 완벽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관계있는 걸까? 1839년부터 1842년까지 계속해서 식료품 가격이 오르는 동안 임금은 기아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런데도 공장주들은 “임금은 식료품 가격과 연동되는 게 아니다. 불변의 수요공급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선데이타임스>는 “노동자들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그 요구가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손한 태도가 대체 ‘불변의 수요공급법칙’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무역 도매상들이 커피 값을 올리겠다고 “공손한 태도로 요청”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여느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거래될 거라면 최소한 다른 상품과 동일한 기회라도 주여야 하는 게 아닐까? (83쪽)

공장주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목숨이나 팔다리를 지켜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일하다 잃은 팔과 다리에 대한 보상금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이 ‘움직이는 기계’들의 ‘마모 비용’을 어떻게 남에게 떠넘길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119쪽)


이런 논조의 기사들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기자 자신도 노동자일 텐데 그 누구도 노동자 편에서 기사를 쓰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기득권이나 권력층에 맞설만한 저항 정신을 지닌 기자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니 하나 같이 언론사에서, 윗선에서 내려주는 지침에 따라 받아쓰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모자라 조회수에 눈이 먼 자극적인 헤드라인 뽑기, 사실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아님 말고’식의 저질 기사들이 난무한다.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에서 다룬 인물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르크스는 적어도 기득권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서 진실을 좇고 그것을 폭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라인신문> 편집장 시절 마르크스는 정부 검열과 싸워가며 비판을 실었으나, 주주들의 안일한 대처에 실망해 편집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때 그는 “정부의 위선과 어리석음, 원칙 없음에 질렸고, 신문사가 아첨하고 몸을 사리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조심을 떠는 데 질렸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 땅에 이런 저널리스트가 있을까?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착각하는 기자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추종하는 권력이나 이념에 부응하는 쓰레기 같은 기사나 양산할 뿐이지 않은가.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는 이 나라 ‘기레기’ 책상마다 3권 세트를 모두 놓아주고 싶은 심정인데,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낄만한 언론인이 얼마나 될까,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사회가 계층 간 반목의 토대 위에 서 있는데, 그 사회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착취 구조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전쟁을 치러야 한다. 파업과 연대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파업과 연대를 통한 경제적 이득이 겉보기에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정신적 정치적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현대 산업은 주기적으로 불경기와 호황, 경기 과열, 위기 빈곤기의 큰 흐름을 반복한다. 그 결과 임금이 오르내리고, 임금과 이윤의 변동에 따라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계속된 투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큰 흐름이 반복되는 과정이 없다면 영국과 유럽 전역의 노동 계층은 기력이나 의지를 잃고 저항할 줄 모르는 집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기 해방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노예의 경우처럼 불가능해질 것이다. (62~63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0퍼센트 2020-02-29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시리즈도 있었군요, 읽어봐야겠습니다, 잠자냥님 늘 감사드립니다^^

잠자냥 2020-02-29 17:14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이 시리즈 중에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이 마르크스보다는 좀 더 좋았습니다. ^^

2020-03-11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2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틀로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9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을수록 반하게 되는 플라토노프. 이 작품은 정말 압권이다. 살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데, 그 구덩이는 그야말로 무덤이 되는 현실.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 이 세계와 삶에 대한 보셰프의 질문과 그에 따른 절망감이 마음을 울린다. “진실은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법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찬란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56
마거릿 드래블 지음, 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읽을 책들은 쌓여만 가는데,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2월에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거기에 마거릿 드래블의 <찬란한 길>이 한몫했다. 장장 600쪽이 넘는 분량. 대산세계문학총서 이 시리즈는 알다시피 글자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자간도 촘촘하다. 그런데다가 600쪽. 그래서 읽는 데 오래 걸렸느냐 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읽어내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복잡하지도 않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세 여성의 삶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잘 안 읽히는가? 한마디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배경에 그 까닭이 있다.

이 작품은 1979년 한해가 끝날 즈음, 희망찬(?) 1980년의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 장면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저택에서 파티를 주최한 ‘리즈’는 정신과 의사로 성공했으며, 자신의 부와 성공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남편 ‘찰스’ 또한 남부럽지 않은 지위와 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시절은 무려 21년. 그들의 지인들 중 그렇게 길게 결혼 생활을 유지한 커플은 없다. 그들은 ‘전쟁과 유혈 사태. 배신’을 지나 이제 이 넓은 집에서 평화롭게 만나 각자의 방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주말에는 마멀레이드를 앞에 놓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가장 중요한 것, ‘애정’이 빠져 있다. 찰스는 몇 달 뒤 새 직장 때문에 뉴욕으로 갈 것이며 그들은 절대로 서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파티에 초대된 그 누구도 리즈가 ‘여자답게 아내답게’, 자신의 삶을 뿌리 뽑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즈는 지금 여기에 머물며 커리어를 좇고 그것이 무엇이 됐든 자신만의 정신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찰스와 리즈 헤들린드 부부는 남들에게 관습을 깨고 선구자가 된 능력 있는 커플로 비친다. 그런데 정말 그 속내도 그러할까?

파티에 초대된 이들 중에는 리즈의 오랜 친구들, 케임브리지 동창인 ‘알릭스’와 ‘에스터’도 있다. 오랜 세월 아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로 지내온 그들. ‘제인 오스틴 시대’였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1952년 케임브리지에서 만났다. 알릭스는 영국 문학을, 리즈는 의학을 전공할 목적으로 자연과학을, 에스터는 현대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 시절에 지방 출신의 사회 지위가 낮은, 그러나 똑똑한 젊은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 중 하나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이 세 여성은 이들 세대 중에서 일류 중 일류에 속했다. 명문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명문 학교들에서 탐내며 끌어오고 싶어 했던 재원들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은 특별한 지위는 없지만 특권을 가진다. 젊음, 지성, 미, 그리고 때때로 부. 그들이 사는 시골 마을의 공주나 다름없다. 리즈, 알릭스, 에스터는 공주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젊었고, 지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는 최소한 모범적이어야 했다. 그들에겐 분명 기회가 주어졌고, 선택지가 있었으며 열여덟 살에 세상이 그들 앞에 열려 다양한 것을 제시했고, 복지국가와 장학금, 성평등이라는 멋진 신세계가 그들 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엘리트, 선택 받은 자들, 위대한 사회적 꿈을 성취하고, 화환을 목에 건 이들이었다. 모험과 가능성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몇 십 년이 지나 이제 마흔을 넘어선 이들, 1980년대를 앞둔 이 세 여성의 현재 모습은 엘리트로서 꿈을 성취하고, 선택 받은 자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나마 정신과 의사라는 확고한 지위 아래, 대저택에 살면서 이런 파티를 열고 있는 리즈가 그 오래 전 꿈꾸던 멋진 신세계에 가장 가까운 인생을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 마저도 확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리즈는 찬란한 19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찰스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이 세 여성의 삶은 어디서부터 그 꿈에서 멀어졌을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기만의 힘으로 그 계급을 벗어난 리즈, 좌파 지식인 부모 때문에 남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알릭스, 난민 출신 유대인이자 성소수자인 에스터. 애초부터 이들은 영국의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여학생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입학했고, 그러기에 특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왜 인생은 순조롭지 못했을까? 에스터를 제외하고 리즈와 알릭스는 졸업과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결혼이라는 굴레 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은 여성이라는 한계에선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알릭스에게 결혼은 가장 치명적이다. 졸업 초기에 커리어를 쌓지 않고 전업주부가 되었던 알릭스의 선택은 중년까지도 풍족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경제생활로 이어진다. 직업적 성취와 명성을 모두 얻은 리즈마저도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자신만을 신경 써주는 ‘참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결혼하지 않은 에스터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만 충만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소수자로서 살아가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게다가 ‘찰스’보다 지적으로 뛰어난데도 작은 아파트에 살며 가끔씩 강연, 기고, 수업을 통해 푼돈을 버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흰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선 알릭스는 자신이 틀린 선택을 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세바스찬에게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세바스찬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바스찬을 배신했다.

우린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릴 때 결혼했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너는 그걸 왜 또 하려고 하니? 알릭스가 물었다. 아 이번은 달라, 하고 리즈는 말했다. 스물다섯 살의 리즈는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알릭스는 “난 다시는 결혼 안 할 거야.”하고 말했다. 리즈는 “어떻게 살려고 그래?”라고 했다. 알릭스는 “강의하잖아, 시험지 채점도 있고. 근근이 살아갈 수 있어.”하고 말했다. 리즈는 찰스 헤들린드와 함께 부(富)의 세계로 입성하고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결혼’이라는 개인의 선택, 그러나 사회적으로 강요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굴절된 삶을 살게 된 이들 앞에 1980년대는 또 한 번 좌절과 절망을 안겨준다. 희망의 시대가 결코 아니다. 1980년대와 함께 대처정권이 시작되면서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흐름 속에서 알릭스와 에스터의 일자리는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 사람이 지닌 힘을 믿으면서 교화 시설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범죄자들에게 영문학을 강의하는 알릭스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휘청거리게 되고, 주류에서 벗어난 재야 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에스터도 거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알릭스의 주변 인물들, 사회주의자 ‘브라이언’,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과도 같은 리즈의 동생 ‘셜리’ 등등에게 80년대는 더 가혹하다. 심지어 거침없을 것만 같았던 찰스에게도 대처주의가 남기는 상흔은 깊기만 하다. 대처리즘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에 있는 인물인 알릭스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평화로운 삶, 사람들을 위한 삶, 두려움이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은 이제 없다. 두려움이 자라고, 번영하고, 번식하고, 피어나고, 타오른다. 나는 패배했다.’

이렇게 <찬란한 길>은 중산층 지식인의 눈으로 대처의 집권 이후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기록하면서 그 시대의 결코 풍요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풍경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너무나도 상세히 기록해 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회보고서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는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선뜻 권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난 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별 다섯 개를 주게 되는 작품이자, ‘마거릿 드래블’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2-2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그러면 또 제가 장바구니에 넣어야지요. 인용해주신 문장이 완전 제타입이라서요.

잠자냥 2020-02-25 15:11   좋아요 0 | URL
ㅎㅎ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화자가 ‘찰스‘나 ‘브라이언‘ 같은 남자들 이야기하다가 이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일단 이쯤에서 접고... 뭐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해요. ㅋㅋㅋㅋ) 저 세 여성 말고도 노동자 계급 여성의 삶이 또 너무나도 와닿는... ㅠ_ㅠ 그러나!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유형의 책은 아닙니다! 참고하세욧. ㅎㅎ

Falstaff 2020-02-2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두었습니다. 4월 쯤에 읽을 거 같은데 별 다섯 개라니 기대 만빵입니다!

잠자냥 2020-02-25 15:12   좋아요 0 | URL
80년대 대처주의를 혹독하게 겪은 영국인이라면 정말 극공감하면서 읽을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이 작가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있더라고요? <붉은 왕세자빈>이라고. 다 읽고 나니, 이 책도 궁금해지더라고요.

Falstaff 2021-06-09 08:46   좋아요 0 | URL
윽.... 근데 이 서평 올리신 날짜가 2월 25일.
인간의 임신기간이 열 달.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2월 25일 더하기 열달은 성탄절.

그러면 2월 25일은, 우리는 찬양합니다. 기쁘다, 구주 배셨네! 이름하여, 성임절.
우연히 이 날이 ㅋㅋㅋㅋ 폴스타프 생일. ㅋㅋㅋㅋㅋㅋ 천생이 복받고 나왔습지요!!!!

이 책 왜 안 팔리는 거예요. 좋기만 하던데. 지금 살 거 읎나, 싶어서 서핑 중이었습니다.

잠자냥 2021-06-08 23:11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이게 뭐예요. ㅋㅋㅋㅋ 옛날 글에 생일 광고! 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또 책을 사시다니! ㅋㅋ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쁜 세상에서 인간답게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랄까. 정희진이 읽고 본 것들을 중심으로 이 사회에 대한 단상을 예리하게 펼쳐놓는다. 전작에 비해 좀 아쉽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밑줄긋고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 ‘쓴다는 행위에는 성실성, 노동, 윤리’가 따라야 한다는 말을 새겨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