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3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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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들. 드디어 소비자에서 판매자가 되는 그들! 다음 권에서는 그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우라라의 만화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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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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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무렵, 어느 공터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 시절 나 또한 <진주>의 주인공처럼 아버지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자전거 타기에는 무언가 엄청난 기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 아빠는 자전거를 뒤에서 붙잡아 주다가 나 몰래 놓으면서 페달을 계속 밟으라고, 다른 데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하다가, 나는 드디어 자전거를 혼자 탈 수 있게 되었다. “밟아! 계속 밟아! 앞을 봐!” 아빠가 그렇게 외치던 소리는 그 후로도 가끔 자전거를 타노라면 귓가에 울린다.

<진주>의 첫 문장은 나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버지와 긴 시절 불화를 겪었고, 이제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남남과도 같은 사이가 되었지만, 아주 드물게도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간혹 있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그날, 그 공터에서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기억만큼은 내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로,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두려움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운동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합니까. 누구에게도 넘어졌다 놀림 받지 않을 수 있는 이른 아침 시간이 필요합니다.”라는 <진주>의 첫 문장은 최근 읽은 그 어떤 소설의 문장보다 마음을 울린다.

자전거는 참 이상하다. 처음 배울 때는 앞만 보고, 쉼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지만,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게 된 뒤에는 페달을 밟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절로 터득하게 되고, 때로는 앞을 보지 않고도, 아니 앞을 보면서도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물론 뒤를 보는 일만큼은 아무리 자전거에 익숙해지더라도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진주>의 화자 ‘나’는 열두 살 무렵의 나처럼, 아버지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또한 내 아버지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나’의 아버지는 ‘그 때문에 네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거듭 큰 목소리로 말한다.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의심을 살 수 있다’며 아버지는 돌아보지 말라고,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정작 자유로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을까? 딸에게 뒤를 돌아보면 절대로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앞만 보라던 아버지야말로 뒤를, 주변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 세계를 너무나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영영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왜 아버지는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줄 알면서도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는 그런 어른이 되었을까? 아버지는 자기만이 성공하여 사는 인생보다는 더 나은 삶, 그러니까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보는 인생을 살았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를 위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몸을 던졌기에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겨우 세상에 나와도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동안 많은 계절이 지나간다. 그의 친구들은 유학을 떠나 학계에 자리 잡거나, 정치인이 되거나, 출판사를 차리거나 등등 모두가 세상에서 자기 자리 하나쯤은 갖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전과가 있기에 일반 회사에는 갈 수 없다. 친구가 주선한 회사에 겨우 가더라도 아버지는 임금 체불, 부당 해고 등 작은 부패를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묻고 따지다가 친구도 잃고 일자리도 잃는다. 이런 삶이 반복된다. ‘함께 투쟁을 시작했을 때는 모두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누군가에게는 졸업장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회사나 건물이 있으며 누군가의 가슴에는 의원 배지가 달려 있다.’ 모두가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간다.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진주>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기에 ‘진주’에서 옥살이를 했던 아버지의 ‘딸’의 시선으로 그 오랜 세월을 담담히 그려나간다. 형식이 매우 독특해서 때로는 시를 읽는 것 같다가, 르포 기사를 읽는 것도 같고, 어느 페이지에는 사진과 그림이 실려 있기도 하며, 또 때로는 신문 기사가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한다. 어느 구절은 딸, 그러니까 작가 ‘장혜령’ 그 자신의 어린 시절 일기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부재했던 아이. 언제나 없었지만, 그래서 있었던 아버지. 딸 곁에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책장 한쪽에 놓여 있던 가족사진 속에, 냉장고 위에 쌓여 있던 <세계철학사>와 <전환시대의 논리> 속에, 장롱 서랍 속 곱게 포개져 있던 새것 같은 양말들과 속옷들, 신발장에 넣어둔 낡은 검정 구두 한 켤레로. 수많은 편지, 수많은 비밀문서 속에 언제든 찢기고 폐기되고 소각되어 사라질 수 있는 익명의 문장으로’(173쪽) 존재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있어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 지난한 세월,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십 년 가까이의 세월을 좇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왜, 지금일까?

한때 후일담 문학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다. 80년대가 끝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던 문학들.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그 문학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난 2020년에 <진주>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딸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왜 하필 지금일까? 나는 그 생각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려야만 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다 지난 이야기잖아 너무 낡은 이야기는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왜 이제야?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바로 ‘지금’이기 때문에, 그 어린 딸이 다 자란 성인이 된 지금에야, 80년대도, 90년대도 아닌 오늘에야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들 모두가 ‘딸’의 ‘아버지들’이었기에 이제야 말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딸이 말하기에, 딸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아버지만의 이야기가 아닌, 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가족의 고생과 어려움을 더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딸의 일기는 그 삶의 어려움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 아빠는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엄마가 거의 모든 생계를 꾸려나간다.’ 엄마와 딸의 고통스러운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떤 사람들은 딸에게 아버지가 ‘참 훌륭한 일을 하신다.’ 말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딸과 엄마의 고생은 그 속에서 파묻히고 만다. 어린 시절부터 경찰이 싫고, 경찰이 밉고, 경찰의 옷을 입지 않은 경찰 아닌 척하는 경찰이 미운 딸. 남편이 없는 동안 생계를 도맡았지만 그때도, 그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 지속적인 월세 지출로 인해 거처를 옮겨야 할지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걱정. 그러고도 ‘너는 하루라도 빨리 외국어를 익혀 다른 나라로 떠나라’는 이야기를 듣는 삶. ‘너희 어머니 아버지는 그 어려운 시간을 참고 견디고 남한테 손 한 번 안 벌리고 훌륭하게 살아오셨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나라가 아니잖니.’(162쪽)라는 말을 듣고 거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삶.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십 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고작 오천만원. 그 대상도 직접 복역한 당사자에 한할 뿐. 오랜 세월 그 복역을 인내한 아내와 딸은 보상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라도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 그 ‘언젠가는, 언젠가는’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독재자는 죽었지만 여전히 독재자의 유령이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를 닮아 잘못된 관행과 잘못된 일들에 분노하지만, 아버지처럼 ‘행동’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아빠처럼 분노하다가는 평생 월세살이를 전전하고야 말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누군가를 돕다가는 평생 새카맣게 어린 상사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날만 올 것’임을 알고, ‘아빠처럼 제 몫을 챙기는 데 소홀하다가는 평생 연금은커녕 죽을 때까지 일을 구하러 다녀야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같은 고단한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평범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 딸은 오래 전 아버지의 가르침,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줄 때의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눈감아야 하고 입 다물어야 하고 고개를 처박고 견뎌야 하고 자신이 견딘다는 사실마저 깨끗하게 잊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갓 입사한 회사의 늙은 경비와 청소하는 여자를 잊어야’ 한다. 그들이 ‘그 건물의 가장 더럽고 습한 지하방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부조리함을 잊고 아침마다 어제를 잊은 듯 만원 전철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통근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만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모두가 ‘완전한 각자’라고 느낀다. ‘돈을 번다는 것, 이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각자라는 고독을 철저히 견디는 일임을 느낀다.’(181쪽)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만 평범하게 살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아버지가 ‘돌아보지 말라고, 앞만 보라고’ 크게 소리친 까닭은 어쩌면 딸에게 이 고단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인생이 정말 인간다운 삶일까. 나는 왠지 이렇게 앞만 보고 페달을 밟는 삶, 그런 ‘완전한 각자’의 인생이 서글퍼진다. 그렇게 다들 ‘완전한 각자’의 삶을 좇기 때문에 독재자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독재자의 유령이 판결을 내리면서 당신은 공산주의자이고, 당신은 빨갱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자전거를 잘 타는 딸, 앞만 보며 페달을 밟는 딸이 성인이 된 지금보다 오히려 ‘열 살 무렵의 내가 민주주의의 사명과 신념을 더 잘 이해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딸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처음 비행기를 탔고, 그 경험은 처음 하늘을 날아본 기억이 된다. 그때 딸은 신처럼 세상을 바라보았노라고 회상한다. 이제 다시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딸, 그 딸은 아마 그 어린 시절처럼  ‘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진주로 가는 비행기는 어쩌면 그래서 ‘완전한 각자’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리라.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게 된 뒤의 삶, 그러니까 속도를 줄이고, 주변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볼 줄 아는 삶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자동차 여행과 달리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골목골목까지 돌아보며 주변인의 시선을 갖출 수 있지 않은가. 이 작품에 따르면 한 프랑스 철학자는 ‘오늘날 이 세계에서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시야가 반딧불을 찾아낼 만큼 충분히 어둡지 못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라도 망설임 없이, 더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가’(91쪽)라고 말한다. 진주행 비행기에 오른 딸은 아마도 그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마침내 잃어버린 반딧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주>를 읽는 이들도 조금은 그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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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식가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8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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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 중 이 작품은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 더 이상 함정수사 하지마, 해미시! 그리고 프리실라하고 자꾸 감질나네... 그나저나 얼마 전 저자, M. C. 비턴이 세상을 떠났다. 이 시리즈가 한국에서는 인기가 많지 않아서 조마조마. 끝까지 번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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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20-02-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농처럼 나오다 말까봐 걱정입니다..

잠자냥 2020-02-04 15: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시리즈 정말 안타까워요 ㅠ_ㅠ
 

어린 시절 나는 법은 평등하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결코 그렇지 않음을 절감한다. 하다못해 법은 여전히 양성(兩性) 평등조차 이루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판결이 날마다 일어난다. 법과 법조문을 다루는 사람들, 그러니까 판사, 검사, 변호사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더 많아진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법의 불평등함은 이 땅에서 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현대의 모든 인권 관련 문서는 법 앞에 양성(兩性)이 평등하다는 진술을 담고 있다. 미국의 헌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딸과 외손녀, 그 후에 올 모든 딸들을 위해 나는 그 진술을 우리 정부의 근본 통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싶다’고 말하며 그 자신이 법 앞에 양성 모두가 평등해지도록 평생을 바치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다.

미국 역대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자, 차별에 맞서 싸우는 진보의 아이콘이 된 긴즈버그. 그가 이렇게 여성이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삶을 살기까지는 그 자신의 차별 경험이 큰 역할을 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는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 코넬대학교에 입학한다. 코넬대 졸업 후에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입학생 오백 명 가운데 여자는 단 아홉 명이었다. 긴즈버그는 여성으로는 최초로 권위 있는 <하버드 로리뷰> 발간에 참여했으며, 컬럼비아 로스쿨로 편입학해 공동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렇게 눈부신 이력에도 로스쿨 졸업 후 일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유대인이자 여성이며 아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얻는 데서만 차별을 겪은 것은 아니다. 성장 과정 내내 일상적으로 여성이라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제한받고 차별받았다.

긴즈버그는 자신이 자랄 때는 여자아이가 장래희망으로 꿈꿀 수 있는 것에 제약이 많았다고 술회한다. 경찰관도 소방관도 광부도 될 수 없었고, 밤에 일할 수도 없었다. 여성 변호사는 극소수라서 전체 변호사의 3퍼센트가 될까 말까 했고, 여성 판사는 더 적었다. 생계를 꾸리려면 선생님이 되는 편이 나았기에 긴즈버그는 변호사는 물론이고 판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여자아이가 롤 모델로 꼽을 만한 여성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긴즈버그는 실제 롤 모델과 가상의 롤 모델을 한 사람씩 두었다고 고백한다. 실제 인물은 ‘어밀리아 에어하트(Amelia Mary Earhart)’로 그는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비행사였다. 가상 인물은 ‘낸시 드루’로 미스터리 소설 <낸시 드루>의 주인공인데, 낸시는 행동가이자 실천가로 독립적이고, 자신감 있고 똑똑한 여성의 표본이 되어 미국 여성들의 이상적인 롤 모델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긴즈버그 말고도 힐러리 클린턴, 로라 부시 등 많은 여성들이 유년 시절 영향 받은 책으로 꼽는다고 한다.

긴즈버그의 말에 따르면 1950년대 초반 코넬대학교는 여학생 한 명에 남학생 네 명이었기 때문에 여학생에게 좋은 학교로 통했다. 엄격한 쿼터제였으며, 그 말은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똑똑한지를 보여주는 건 곤란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파티나 쫓아다니는 여자라는 인상을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그녀는 대학교 화장실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기숙사로 돌아갈 때에는 이미 숙제를 다 한 상태였다고. 하버드대 로스쿨 원장이 신입 여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저녁식사 초대를 하고는, 여학생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게다가 로스쿨에서는 긴즈버그에게 시아버지의 재정 증명서를 내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긴즈버그가 지적하듯이 ‘기혼 남학생 중에 장인의 재정증명서를 내라고 요구 받는 학생’이 과연 있었을까? <하버드 로리뷰> 발간에 참여하던 무렵, 라몬트도서관에 정기 간행물을 보러 갔는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문에서 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한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당했던 긴즈버그가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차별 철폐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긴즈버그가 비로소 여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로 부임했을 때이다. 그는 종신 재직권이 보장된 첫 여성 교수였고, 학생 몇몇으로부터 여성과 법에 대한 강좌를 열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법원에 제소된 성차별 사건은 거의 전무했고, 미국의 법과 법령은 여성에게 불리한 판례로 가득했다. 긴즈버그는 곧 이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법률가로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와 협력해 여성 인권 사업을 추진하면서 무엇보다 젠더 차별과 관련한 소송 사건들을 맡아 판례를 바꿔나가는 전략으로 차별을 크게 개선해 나갔다. 연방대법관에 오른 후에는 남성 입학생만 받던 버지니아군사대학교에 여성이 지원할 기회를 최초로 여는 판결을 내린다(‘연방정부 대 버지니아 사건’). 이 사건은 남성에게 늘 열려있는 기회를 여성에게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긴즈버그 경력의 백미로 자주 꼽힌다. 남성 동료보다 임금이 적었던 여성 노동자를 위해 반대 의견을 작성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법정 활동은 법 앞에서 평등을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긴즈버그는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교재로 널리 사용된 1968년판 재산법 판례집에는 다음과 같은 희극적인 문장이 실려 있었다. ‘땅은 여자와 마찬가지로 소유의 대상이다.’ 지금은 아득한 시절이 된 그때로부터 우리는 먼 길을 걸어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와는 달리 ‘오늘날 미국 로스쿨 재학생 절반가량이 여성이고 연방대법관 세 명을 비롯하여 연방법원 판사의 3분의 1이상이 여성이다. 미국 로스쿨 원장의 3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고,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24퍼센트 정도가 여성고문 변호사를 두고 있다.’ 그의 말대로 ‘엄청난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셈이다. 때로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 이제 여성 대법관이 세 명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몇 명 있어야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긴즈버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홉 명이 될 때”라고. 사람들이 의아해한다면 이렇게 덧붙인다. “대법원이 대법관 9인 체제가 된 이후로 오랫동안 대법관 아홉 명이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 대법관이 아홉 명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긴즈버그의 딸 또한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어머니가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의 딸은 이렇게 말한다. “좋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법원 곳곳에 여성 법관이 더 많이 생겨서 숫자를 일일이 세지 않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54쪽)라고.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변화를 겪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긴즈버그는 ‘평등권을 그저 종이에 적힌 진술문이 아닌 실재하는 권리로 만들려면 그것을 실행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긴즈버그는 교향악단에서 여성 단원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오디션 참가자와 심사위원 사이에 커튼을 치자는 근사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곧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거의 하룻밤 만에 여성들이 교향악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긴즈버그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 모든 영역에 그때처럼 커튼을 치면 좋겠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커튼을 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사람,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녀 자신이 세상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실재 롤 모델로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부디 더 오래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 (32쪽)

“여성의 권리”라는 표현은 다소 문제가 있다. 인간의 권리다.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모든 인간의 권리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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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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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리는 세계는 분명히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몇 백 년 뒤에나 존재할 수 있을까 말까한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이제 인류가 꿈꿔온 우주 탐사도 가능해졌고, 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조작해 완벽한 인간을 만들 수도 있으며, 행성에서 행성 간 이동도 자유롭다. 그런데다가 저 먼 우주에 지구인과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까 하는 인류의 질문도 응답을 받아, 외계 생명체를 만나는 지구인도 있으며,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류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에서 사랑하는,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모두가 정말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아주 먼 미래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아닌, 지금 내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일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술은 매우 진보했는데,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한, 틀림없이 아주 먼 미래이다. 그런 시대에 슬렌포니아라는 제3행성에 가기 위해 ‘안나’라는 한 노인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그래서 철거를 앞둔 어느 우주정류장에서 혼자 우주선을 기다린다. 한때 과학자였던 이 노인은 어쩌다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일까? 남편과 아이를 먼저 보낸 그 행성으로 그녀 또한 곧 따라갈 계획이었지만, 아주 잠깐의 차이로 함께 떠나지 못한다. 그 사이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개척 행성에서 ‘먼 우주’로 급격하게 밀려난 행성들은 수십 개가 넘게 되고, 그 수십 개의 행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보내기에는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지기에 안나는 가족과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녀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은 제법 되지만 우주 연방은 그들을 외면한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일이므로 당연한 조치이다. 제아무리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해졌어도 인간은 여전히 빛의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군다. 그러면서도 경제성에 떠밀려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을 고통스럽게 감내해야만 한다. 안나는 말한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1~182쪽)하고. 이 작품은 오직 경제적 이윤만을 으뜸으로 여기면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갈수록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이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관내분실>에서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하는 도서관에서 마인드 접속기를 통해 죽은 사람과 재회할 수 있다. 그런 미래에서 그리는 세계 또한 지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민은 어느 날 엄마의 데이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접속할 수 없지만 엄마의 마인드 자체는 데이터베이스 어딘가에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사망과 실종이 다른 것처럼, 이미 세상을 떠난 엄마이지만 도서관 어디에서 실종된 상태이다. 엄마의 마인드를 찾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지민은 엄마의 상상하지 못한 과거를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적이 없었던 엄마, 늘 우울한 모습으로 자식에게 상처만 준 그 엄마도 한때는 일하고 자기만의 꿈을 꾸던 여자였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함께 일을 놓아버리고 결국 집안에만 갇혀버리는 지민 엄마의 모습은 지금 이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인류 최초의 터널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왜소한 체격의 동양인 여성, 임신과 출산을 겪은 비혼의 중년 여성 최재경의 삶을 다룬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더 현실과 중첩된다. 신체 조건에서 월등한 백인남성들을 제치고 나이도 많고 체격도 볼품없는 동양인 여성이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최재경의 자격에 의문을 품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녀의 능력과 노력은 깡그리 무시당한 채 오직 그녀가 선발된 이유를 ‘인종과 성별 쿼터제’ 덕분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재경의 마지막 선택을 두고 언론 및 대중들이 비난하는 행태는 또 어떤가. 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우주 탐사가 가능해진 그 먼 미래에도 인간의 성찰이나 깨달음, 각성이 없다면 인간의 지성과 의식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미래에도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별다른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주를 탐사하느니 자유로이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가 되고자 했던 최재경의 선택에는 깊은 공감과 함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우주로 날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성차별, 인종차별이 존재하면서 한 개인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지구- 그렇다면 인간 배아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되어 어떤 결점도 없이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들만이 모여 사는 그런 세계는  행복할까? 서로의 결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들만 모여 사는 사회,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회는 진짜 유토피아일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 때문에 지구인들에게 마음껏 멸시당하고 혐오 받았던 이민자의 딸 ‘릴리’. 릴리는 인간 배아를 디자인해 선량하고 아름다운 인간들만 모여 사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지구로 순례를 떠난 뒤에, 이상하게도 고통의 행성 지구에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마을로 돌아오더라도 몇몇 이들은 지구를 그리워한다. 지속적으로 고통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그 지구에 과연 무엇이 있기에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와서도 지구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감정의 물성>에서 사람들이 ‘우울’이나 ‘분노’, ‘공포’ 등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돈을 주고 사서 소유하려고 하는 것처럼 순례자들도 고통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지구에 남기를 선택한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만난 외계 생명체 ‘루이’는 친절함, 배려, 상냥함 등등 인간의 긍정적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점들을 갖고 있다. 루이가 속한 무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는 조금 특이해서 ‘색채 언어’이다. 루이가 ‘다르다’라고 표시하는 수많은 붉은색들 사이의 차이점을 지구인 희진은 알 수 없다. 수많은 파란색, 수많은 보라색, 수많은 초록색과 노란색이 있다. 루이는 그 색상들을 모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 어느 것도 같지 않다. 희진이 외계 생명체인 루이를 연구하듯, 루이 또한 자신에게는 외계 생명체인 희진을 연구한다. 희진을 연구한 루이의 종이 위의 색채들은 마치 누군가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희진은 그 가운데 한 문장을 겨우 해석하게 된다. 자신을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말하는 루이. 그들의 색채 언어에 비하면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제한적이다. 해석의 다양성이나 미묘한 차이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루이가 희진이라는 한 사람을 연구하고 기록한 종이는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사람은 저마다 모두가 그만큼의 ‘다양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오롯이 표현할 수 없는 다양성, 개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모두가 존중할 줄 아는 세계라면, 결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세상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루이와 같은 외계 생명체는 아주 수만 년 전,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인류를 찾아와 우리 뇌에 자리 잡으며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하면서 인간을 윤리적 주체가 되도록 가르쳐왔을지도 모른다(<공생가설>).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외계 생명체가 꼭 저 우주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런 존재라고만 볼 수 있을까? 내가 아닌 타자,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어쩌면 꺼려하고 혐오하기도 하는 대상. 그런 존재 또한 외계 생명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존재를 ‘루이’의 색채 언어처럼 무수히 많은 다양성 표현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함으로써 인간에게도 더 열린 세계가 가능해지고, 거기에서 잃어버린 윤리 의식까지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넓고도 넓은 우주에서 외로움의 총합은 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조금 줄어들 수도 있다고, 김초엽의 작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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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2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읍. 급관심!
잠자냥님 서재 들어오면 잔고 떨어지는 소리가 막 들려요. ^^;;

잠자냥 2020-01-28 14:0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사실은 별 관심 없어서 이제까지 미루다가 읽었는데요.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알라딘에서 폴스타프 님처럼 잔고 떨어지게 만드는 분도 없을 텐데요? ㅎㅎ

김은정 2021-07-18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편과 단편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아 리뷰를 쓰신 점이 색다르면서도 좋았습니다 잠자냥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책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네요.

잠자냥 2021-07-18 21:20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