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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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몇 달 뒤에 읽어 보는 시나리오. 영화와 다른 부분들이 종종 보여 흥미롭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삭제되었기에 영화가 더 빛난 것 같다.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 동기인, 정희진의 글은 역시나 강렬하게 머리와 가슴을 울린다. ‘사랑은 윤리적인 사람만이 시도할 수 있는 행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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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상반기에 좋았던 책에 이어 7월 이후 현재까지 읽은 책 중 특별히 좋았던 책을 ‘신간’ 위주로 골라본다.

소설


1. 밀크맨
상반기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었다면, 올 하반기에는 단연코 <밀크맨>이다. 몇 년 만에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작품. 500쪽 남짓한 분량에 이 세계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담고 있다. 주인공이 사는 이런 세상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내가 사는 세계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독창성과 보편성을 두루 갖춘 수작. 중간 중간 터지는 블랙유머도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2. 천사는 침묵했다
아주 오래 전 작품이지만 올해 번역되어 나온 이 책. 하인리히 뵐을 모르는 이들이 처음 만나기에 좋은 작품은 아닐까. 이 작품은 전후 독일의 무너질 대로 무너진 사회상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폐허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이어진다. 두 남녀가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 무엇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는 작은 공간, 폐허와도 같은 공간에서 서로 마음을 아주 조금 확인하고 체온과 입김을 나눠가지면서 잠드는 장면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이 빚어내는 힘없는 이들을 향한 연민 어린 시선. 뵐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3. 숨겨진 삶
문장을 꼭꼭 씹으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책이 있다.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이 그렇다. 저마다 숨겨진 비밀을 안고 상처도 껴안은 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인간의 삶에 먹먹해진다. 그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겠지. 이 모든 얽히고설킨 사연을 알게 된 뒤 다시 훑어보는 이 작품은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아무것도 아닌 듯이 흩어져 존재했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숨기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면서 이야기 구조에 감탄하게 된다.

4. 카시지
한 소녀가 사라진다. 스스로 사라졌을까, 살해당했을까? 소녀의 실종을 둘러싸고 전쟁으로 망가진 영혼, 이 세계의 일상적인 폭력과 악의 형태가 날줄과 씨줄 엮듯이 펼쳐진다. 비뚤어진 인간의 어리석음과 결핍, 욕망, 그로 인한 파국 등등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빼어난 수작.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자기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인간. 그의 비밀 앞에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츠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책을 덮고도 한동안 이 복잡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5.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이 작품은 중반까지는 포도주병 공장에서 일하는 두 여성의 애증 섞인 관계를 묘사하며, 주변 인물을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그러면서 온갖 인물들이 벌이는 소소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독자를 낄낄 웃게 만든다. 그러나 중반 이후로 완전히 그 방향을 달리한다. 섬뜩할 정도이다. 그레이엄 그린이 이 작품을 일컬어 “충격적일만큼 우스우면서 공포스러운 소설”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다. 다 읽고 나면 맨 앞으로 돌아가서 두 여성이 아무렇지 않게 나눈 대화가 얼마나 의미심장했는지 깨닫고는 작가의 절묘한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6. 방랑자들
인간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흔히 ‘머무르는 상태’를 뜻하는 ‘안주한다’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는 쓰지 않는다. 현실에 안주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삶은 정체되었고, 더는 발전하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움직여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나고, 받아들여서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 <방랑자들>에는 그런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려진다. 떠나고 돌아오고 여행지에서 길을 잃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 <방랑자>들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 변화를 꿈꾸는 인간의 삶을 예찬한다. 여행 떠날 때 가방에 넣고 어느 페이지든 펼쳐 읽기 좋은 책.

7. 눈먼 암살자
이 작품은 처음엔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꼬장꼬장하고 어딘가 뒤틀린 듯한 노파 아이리스의 회상으로만 이어진다면 막힘없이 읽어나갈 텐데, 문제는 중간 중간 삽입된 로라의 ‘눈먼 암살자’와 그 안에서도 그가 들려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 때문이다. 게다가 틈틈이 기사 형식으로 그 무렵의 중요한 사건들이 나열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지 유추하느라 머리를 바삐 굴려야 한다. 그런데, 작품을 술술 읽어나가는 데 큰 장애가 되는 이 복잡한 구조는 사실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를 진심으로 찬탄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1권 중반을 넘어가면서 대부분의 독자는 진심으로 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면서 작가의 천재적인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8. 도어
마을 사람들의 집안일을 도와주며 혼자 고독한 수도승처럼 살아가는 여인, ‘에메렌츠’- 그녀는 하반기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인물로 꼽을 수 있다. <도어>의 화자이자 작가의 분신 또는 서보 머그더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 ‘나’는 ‘에메렌츠’와의 20여 년 동안 특별한 관계를 쌓아가고, 그 기억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써나간다. 독자는 에메렌츠의 수수께끼 같은 과거를 좇는 일과 두 여성의 관계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은 기꺼이 즐겁고 행복한, 기적 같은 일이 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늘 여러 의미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임을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준다.

9. 미지의 걸작
짧은 작품이지만 발자크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에서는 평생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공, 상류층이라는 신분 등 자신이 애초에 지니지 못했던, 그래서 결핍을 느꼈던, 때문에 더 간절히 바라고 욕망하게 되는, 그러나 끝끝내 가질 수 없었던 그 신기루와도 같은 것을 추구했던 발자크의 초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어떤 문장은 마치 시(詩)처럼 읽히기도 한다. 특히 ‘미지의 걸작’은 회화와 화가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진정한 걸작’을 쓰고자 평생을 바친 발자크 그 자신의 이야기, 즉 소설가와 문학의 이야기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10. 결혼, 죽음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단편 버전이라고나 할까. 계층별 결혼과 죽음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다. 이 짧은 단편들에서도 인간의 위선과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결혼’은 이른바 ‘적령기’가 있어서 대부분 주인공들이 젊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에 비해 ‘죽음’에서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의 나이가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에서는 한껏 냉소적이던 졸라가 ‘죽음’에서는 좀 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다. 삶 자체가 버텨나가기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다. 거장의 날카롭고도 통찰력 깊은 시선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



비소설

1. 나보코프 문학 강의
나포코프를 문학 과외 선생님으로 초대한 느낌이랄까. 여기 실린 7개 작품을 다 읽었다면 강의가 더 재미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롭다. 나보코프가 출제한 <보바리 부인> 관련 시험 문제를 풀다 보면 아니, 내가 대체 이 작품을 읽었단 말인가!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심지어 당신은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의 방, 아니 그 가족의 집 구조를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가? 주인공이 변신한 ‘벌레’는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을까? 이 책은 이렇게 ‘문학 작품 제대로 읽기’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적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장담한다. 이 책을 읽으면 문학 보는 눈이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라고.


2. 사건
자발적 임신 중단이 불법이던 시절에 목숨을 걸고 임신 중단을 선택해야만 했던 아니 에르노. 읽는 내내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생생히 전해온다. 흔히 태아의 생명과 살 권리를 말하며 낙태를 반대한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위해 산 사람의 삶과 목숨을 송두리째 걸어야만 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할까? 게다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온갖 낙인은 누가 찍는가? 임신이 여성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 왜 임신의 책임은 여성에게만 짐 지우는가? 아니 에르노의 이 고통스러운, 그러나 진실 가득한 문장은 낙태에 관한 그 어떤 책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3.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손택 일기의 첫 권에 해당했던 <다시 태어나다>가 빌둥스로만(Bildungsroman), 즉 일종의 성장 소설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손택이 성공 가도를 달리는 성년기의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작가로서의 위대한 성공 과정을 그리면서 그 무렵 손택이 어울렸던 각계각층의 작가, 예술가, 지식인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또한 어린 시절 꿈꾼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여력, 이 모든 걸 얻었음에도 ‘여전히 열렬히 배우는 학도’로서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손택의 글과 날카로운 지성,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에는 아낌없이 몸을 던져 행동하며 살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사랑한 이들에게 이 일기는 여전히 축복으로 다가온다.

4. 공간의 종류들
쓸쓸하고 애잔한 페렉 특유의 빛나는 글.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를 채워가면서 공간을 채우고 있었을 어린 페렉,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보며 공상을 즐겼을 어린 페렉, 온전한 추억들로 가득한 다락방 속의 어린 페렉.....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변함없고, 뿌리 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유년을 살았던 페렉. 그런 한 인간의 글쓰기를 통한 영원한 기억과 복원- 그것이 바로 <공간의 종류들>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공간’을 집요하게 기록한 에세이로만 읽히지 않는다. 잃어버린 유년 또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그 불안정한 삶의 형태를 기록해두고자 하는 인간의 절박한 몸짓으로 읽혀 가슴 깊이 남는다.

5. 나, 시몬 베유
자발적 임신중단법을 합법으로 이끌어낸 시몬 베유의 자서전. 이 책은 그녀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시작해서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를 겪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대학에 진학하고, 교정행정국 판사가 되고, 프랑스 보건부 장관에 올라 임신중단 법안을 통과시키고, 유럽의회 최초 선출직 의장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숨 가쁜 삶이 펼쳐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의 그이가 있기까지 ‘공부하고 일해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강제수용소에서의 참혹한 기억이 ‘타인의 존재를 모욕하는 것’에 민감한 투사를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된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일어나 자기만의 성공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감동으로 다가온다.

6.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알고리즘은 공정하고 객관적일 것 같다. 그러나 구글 같은 검색사이트들은 ‘공공’ 검색엔진이 아닌, 기업이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추구. 때문에 자연스레 헤게모니 집단을 위해 운영될 수밖에 없다(여기서 성차별 인종차별이 교묘히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맥락과 정보가 형성되는 과정에 개입된 판단과 결과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정보는 맥락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정보는 동기와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문화나 사건 또는 당면한 문제 등이 얽힌 사회적인 배경과 연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서 ‘고급 정보’를 취득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광고를 구별하고 상업적 이익을 위해 유포되는 정보를 알아내는 능력임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7. 레이먼드 카버
이 책의 지은이는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의 역자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전기를 우리말로 옮긴이가 이번에는 저자가 되어 카버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아마도 그는 카버의 작품을 좋아하고, 또 그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으리라. 실제로 이 책은 카버와 그의 작품을 아끼는 독자의 진지하고도 정성어린 헌사로 읽힌다. 지은이는 카버가 태어나고 자라고 사랑하고 문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미국 곳곳을 돌아보면서 그의 좌절과 고통, 사랑과 이별, 성공과 실패, 삶과 문학을 더듬어 간다. 평생을 고단하게 살고 그러는 가운데 쓰고, 무너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서서 드디어 생애 처음으로 안락함과 명성을 얻고 누릴 즈음 세상을 떠난 카버. 그의 삶을 쫓는 이 애정 어린 글들을 읽노라면 카버의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지고 카버가 살았던 그 공간까지 찾아가 거닐고 싶어진다. 

8.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
처음에는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 때문에 눈이 간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내용도 매우 알차다. 책에 대한 애정 가득한 예쁜 그림과 글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중간 중간에 있는 책 관련 퀴즈를 푸는 재미도 쏠쏠하고. 아무튼 아직도 이렇게나 읽지 않은, 읽고 싶은 책들이 많다니 좌절하게 되고, 저자가 소개한 세계 곳곳 서점과 도서관에 빠짐없이 가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 책의 목표는 당신의 책더미를 세 배로 늘리는 것이다.’인데,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의 책더미는 3배로 늘고도 남을 것 같다.

9. 참 괜찮은 눈이 온다
개천, 서울 변두리, 단칸방, 철거촌 등 한지혜 그녀가 살아온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이 가르쳐준 세상을 보는 법에 대한 기록이다. 자신이 몸소 살고, 겪고, 버티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던 삶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라 진실이 문장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철거 현장. 부서진 담장 사이에서 꽃무더기를 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벽들을 바라보며 벽속에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일지, 아니면 모든 벽도 저마다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일지 그 둘 모두를 헤아릴 줄 아는 시선을 키워 온 사람. 그런 그가 작가로서 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기에 ‘빛과 어둠’이 모두 담긴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10.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저자 매슈 대니얼스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빼곡히 실려 있다. 아프리카에 100여개가 넘는 우물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난 꼬마, 모기장을 만들어 세네갈 가구의 80퍼센트를 살린 엄마와 딸, 히잡을 벗고 춤추는 동영상을 매주 올리는 여성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운전하는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여성 등등. ‘나’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많은 이들이 평등하게, 자유로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이들이 일으킨 큰 변화를 지켜보노라면 그들의 용기와 행동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되면서 나 또한 그런 세상의 변화에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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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2019-12-2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책들 많이 알아가요!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이 특히 좋네요. 꼭 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19-12-24 17:48   좋아요 0 | URL
네~ 연말연시에 좋은 책 많이 만나시길 바라겠습니다!

120퍼센트 2019-12-2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마음속에 담아갑니다~소개해주신 책들 다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19-12-25 00:40   좋아요 0 | URL
넵! 즐거운 독서 되시길!

ider427 2019-12-2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소설도 사랑해주세요

잠자냥 2019-12-25 00:40   좋아요 0 | URL
세계에 읽을 책이 더 많아서요.

블랙겟타 2020-01-0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여기에 소개해주신 책들, 차차 읽어봐야겠어요.
올해는 글로도, 댓글로도 자주 뵈었으면 좋겠어요.
잠자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잠자냥 2020-01-01 13:41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블랙겟타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akdbdn 2020-02-07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책들 소개감사합니다😊 혹시 인스타나 블로그하시나요~? 하시면 팔로해서 꾸준히 추천해주신 책들 알림받고싶어요!!👍🏻👍🏻

잠자냥 2020-02-07 10: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블로그나 인스타는 모두 하기는 하는데, 둘 다 책 이야기를 하지는 않아요. ^^;; 책 이야기를 원하신다면 이 서재를 이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_^ (알라딘 북플 친구 추가를 하시면 될 것 같아요).

Kakdbdn 2020-02-07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설 11, 책 18
다그 솔스타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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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가 저지르는 충격적인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는데 뒷맛이 참 씁쓸하다. 인생이 얼마나 권태로우면 그런 짓까지 벌이는지 묻고 싶다. 연인 투리, 아들 페테르를 보는 부정적인 묘사는 결국 비에른 그 자신의 얄팍한 모습은 아닐지. 북유럽이라 가능한 발상 같기도 하다. 아, 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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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12-23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러니까 읽지 않아도 좋아는 말씀입죠? 고맙습니다. 전 이런 글 무척 좋아해요. ^^

잠자냥 2019-12-24 09:3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작가 책을 또 읽을 것 같지는 않아요. ㅎㅎ 오십줄에 들어선 중년 남자가 인생을 돌아보는 방식이라 그 나이대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있는 것 같기는한데.... 이 사람이 벌이는 그 충격적인 행동이 참.... 아무리 생각해도 전 좀 이해불가네요. ㅎㅎ

잠자냥 2019-12-24 09:3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느니, 신간으로 나온 그레이엄 그린 <폭탄파티>나 헤르만 브로흐 <현혹>에 시간을 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ㅎㅎㅎㅎ 물론 이 신간 두 권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읽으시겠지만요. 연말 잘 보내세요~

Falstaff 2019-12-28 14:09   좋아요 1 | URL
아, 이 답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봤으면 블로흐의 작품을 중원의 고수들에게 묻는 수고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요.
난생 처음으로 북플이라는 걸 열어보니까 글쎄 답글이 있잖아요. 사실은 어제 주문해버렸답니다. 망하면 팔아서 빵 사먹지요 뭐. ㅋㅋㅋ

slobe00 2019-12-24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가 읽기 시작하니 놓을 수가 없어서 번역했다고 해서 궁금한 책이었는데..그렇군요. 하루키도 중년남자 아니 노년이시지..;;

잠자냥 2019-12-24 17:13   좋아요 0 | URL
네 하루키가 추천한 책인 것 같습니다. 저는 취향에 맞지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아주 별로인 책도 아니니 ㅎㅎ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는 것도 좋을 겉 같습니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 감시, 조종, 거짓에 맞서 싸운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영웅들
매슈 대니얼스 지음, 최이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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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대 시절에는 나도 꽤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수요집회를 비롯해 이런저런 ‘운동’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사회운동에 회의감이 들어 이제는 그냥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처지, 방관자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모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면서 더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의감은 살아 있는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사회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점을 목격하게 되면 참지 못하고 욱하고는 한다. 예전처럼 거리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을 통해 그런 소식들을 접할 때면 ‘리트윗’을 한다거나 ‘좋아요’를 누른다거나, 그런 뉴스 링크를 내가 아는 이들에게 전해주면서 참여를 종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인권이나 동물권 등 약자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에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그 정도가 내가 여전히 할 수 있는,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작은 참여 중의 하나이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는 일도 어떤 의미로는 그런 참여에 속하기도 한다.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아직 이 세계에는 변화를 꿈꾸며 행동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그런 이들 때문에 세상은 좀 더 진보하고 있다고, 그 열정을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 책은 저자 매슈 대니얼스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빼곡히 실려 있다. 그리고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오늘도 내가 익숙하게 사용한 평범한 기술을 이용해 세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매슈 대니얼스는 법학박사 겸 인권 운동가로 오늘날 자신의 목소리를 이렇게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위치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뉴욕 할렘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퇴근길에 괴한의 공격을 받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야 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 그의 소원은 오직 하나. 강도를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흉기로 위협받고 헤아릴 수 없이 물건을 빼앗겼으며, 일상처럼 살인 현장을 목격하기도 한다. 칼로 난자당해 죽은 시체에서 흘려진 피는 그가 살던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고, 그는 그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 지역을 벗어나도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그는 그 악몽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나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살피라는 명령’을. 악몽은 그에게 다른 삶을 살아보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는 마침내 “아무도 혼자여서는 안 되며, 타인의 고통은 우리 자신이 고통만큼이나 중요하다.”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삶을 시작한다.

그토록 참혹한 성장 배경을 딛고 일어서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는 저자의 이력도 감동적이지만, 이 책에 그려진 평범하지만, 세상에 큰 변화를 불러온 다른 이들의 삶은 더 큰 울림을 준다. 아프리카에 100여개가 넘는 우물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난 꼬마, 모기장을 만들어 세네갈 가구의 80퍼센트를 살린 엄마와 딸, 히잡을 벗고 춤추는 동영상을 매주 올리는 여성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운전하는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여성 등등. ‘나’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많은 이들이 평등하게, 자유로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이들의 작은 저항이 일으킨 커다란 변화를 읽노라면 그들의 용기와 행동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에게 운전할 권리를 찾아준 ‘알 샤리프’의 이야기는 가장 인상 깊다. 2011년, 볼일 때문에 외출해야 했던 알 샤리프는 적절한 교통수단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중교통 수단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그럼 운전하면 되잖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 운전이 금기시된 나라이다. 더욱이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법적 지위는 미성년자와 같기 때문에 가야할 곳이 있으면 무조건 남성을 대동해야만 했다. 그녀는 자동차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국제운전면허증이 있는데도 이동의 자유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운전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법 어디에서도 여성 운전이 불법이라고 명시되어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드디어 직접 운전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직접 운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녀는 9일 동안 구금됐고, 일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욕설을 들어야 했으며, 감옥에 간 것으로도 모자라 태형에 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형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페이스북을 통해 ‘우먼 투 드라이브(#Women2Drive)’ 운동을 이끌어 나갔고, 마침내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 운전을 허용하기에 이른다. 알 샤리프가 운전 영상을 올린 뒤 7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국에 돌아갈 수 없으므로 이 소식을 나라 밖에서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런 조치는 여전히 남성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억압적 현실을 호도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이 운전해서 병원에 가는 것은 허용됐지만 여성은 남성 후견인의 허락이 없으면 의료보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여성이 운전해서 은행이나 직장, 공항에 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시설은 남성의 공간이므로 여성은 남성의 허락이 있어야만 시설을 쓸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알 샤리프는 이에 대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운전이 아니라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남성 후견인 제도가 종식되는 것, 즉 여성이 완전하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비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현실은 아직도 답답하고 갈 길이 멀지만 여성들은 이제 운전하고 이동할 수 있다. 알 샤리프 같은 여성이 존재하는 한 저 드높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장벽도 조금씩 허물어지지 않을까?

우리와 밀접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북한 인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탈북민인 태영호 전(前) 주영 북한 대사관 공사의 말을 빌려 북한 인권의 참혹한 현실을 소개한다. 태영호는 외교관 신분으로 다른 세계를 접하면서 북한이 얼마나 잘못된 체제인지 깨닫고, 자식들에게는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목숨을 걸고 탈북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외부 정보에 철저히 차단되어 있어 자신이 사는 세계의 모순을 깨달을 기회가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이유로 북한 주민에게 다른 세계의 삶이 담긴 USB를 보내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인터넷이 차단된, 감시와 검열이 일상화된 세계에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이 방식은 참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밖의 생활을 알려주고 싶지 않으세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USB를 노 체인 포 노스코리아(no chain for north korea)에 기증하세요. 기증하신 USB는 대한민국에 보내져 드론이나 열기구, 물병 등을 통해 북한에 전달됩니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디지털 비디오, 위성 영상, 모바일 기술 등을 이용해 정부의 가혹한 억압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를 온 세계에 전하고 큰 변화를 일구어낸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기술은 선한 목적으로 싸우는 이들이 승리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었다. 때문에 저자는 ‘인터넷은 좋은 생각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보편적 인권 운동의 추진력을 마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말한다. 물론 기술은 나쁘게 쓰일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해방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나쁜 선전을 퍼뜨리고 테러리스트를 모집하고, 사생활을 침해해서 국민을 억압할 때도 이용된다. 그래서 저자는 어떻게 ‘인터넷의 악용을 막고 선용을 늘릴’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보내기, 트윗하기, 게시하기, 게제하기 등의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클릭해서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괴롭히며 따돌리는 사이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유를 선사하기도 한다. 꼭 거리로 나가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자신의 집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등등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악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훌륭한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폭로하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해서 아동 노동 착취가 늘어날 것이고, 여성은 차별당할 것이며, 소녀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그의 말, ‘타인의 죽음을 간과할 때 우리의 품격은 손상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은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는 그의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좀 더 열심히 인터넷으로라도 세계 변화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거리로 나가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지는 않더라도 손가락마저 침묵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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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12-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꼭 읽어보고 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잠자냥 2019-12-22 11:41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 그래도 희망을 품게 하는 책이었어요. ㅎㅎ
 
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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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읽는 내내 심적으로 조금 힘들었다. 작품이 폭력적이거나 끔찍한 것은 전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와 ‘에메렌츠’라는 두 여성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기록이라 어느 땐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었을까? 책을 다 읽은 뒤 며칠이 지난 뒤에야 깨닫는다. ‘에메렌츠’라는 사람, 바로 그녀 때문이라고.

상반기에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아일린>의 ‘아일린’을 주저 없이 꼽겠다. 그런데 ‘에메렌츠’는 그 아일린에 버금갈 정도로 강렬하게 개성적이다. 하반기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랄까. 그렇지만 ‘에메렌츠’를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 같다. <도어>의 화자이자 작가의 분신 또는 서보 머그더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 ‘나’는 이 ‘에메렌츠’와의 20여 년 동안 특별한 관계를 쌓아가고, 그 기억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써나간다.

유명 작가인 ‘나’는 집필에만 전념하고자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 친구는 ‘에메렌츠’라는 여성을 추천하는데, 묘한 말을 남긴다. ‘그녀가 널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니, 뭔가 주객전도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메렌츠는 마치 자신이 주인으로 모실 사람을 고르듯이 ‘나’와 ‘나의 남편’을 꼼꼼히 심사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먼저 일을 해보고 나서 급료를 직접 정하겠단다. 게다가 자기 근무 시간 외에는 절대로 성가시게 해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고마움의 표시나 사례 따위도 거절한다고 고집스럽게 말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메렌츠는 ‘나’의 집안일을 해주기로 승낙한다. 거의 말이 없고, 괴팍스러우며, 고집불통인 이 에메렌츠는 ‘나’의 집안일에 대해서도 직접 규칙을 세운다. ‘나’는 자기 집의 주인이면서도 에메렌츠의 규칙을 말없이 따라야 한다. 그런 상황에 묘하게 반감이 들고 짜증이 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정말이지 일을 너무나 잘하기 때문이다. 요리면 요리, 청소면 청소, 빨래면 빨래……. 일하는 티도 나지 않는데 놀라울 정도로 집안은 잘 정돈되고 ‘나’와 ‘남편’은 그런 에메렌츠의 방식에 만족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여러 면에서 남다른 구석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의 집안일을 거들어 주면서 꽤 많은 돈을 모은 것 같은데, 홀로 매우 검소하게 수도승처럼 살아간다. 심지어 자기 집안으로 절대 그 누구도 초대한 적이 없다. 에메렌츠의 집 ‘도어’는 누구에게나 늘 굳게 닫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괴팍한 여성을 마을 사람들은 좋아해서 종종 그녀를 방문하는데, 그럴 때면 에메렌츠는 자신의 집 마당에 식탁을 차려놓고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나’ 또한 에메렌츠와 관계를 쌓아가면서 이 마당에 차려진 식탁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늘 거기까지이다.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절대로 열 수 없다. 에메렌츠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토록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골수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이 책의 첫 번째 재미는 바로 이 에메렌츠의 비밀을 알아가는 데 있다.

두 번째 재미는 작품 초반에 보이는 문장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10쪽)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에메렌츠를 죽인 것일까? 만일 그랬다면 어떤 방식으로 죽였을까?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데, 과연 에메렌츠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를 ‘구원’하려고 죽이게 됐을까 등등. 이 한 문장으로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에메렌츠의 과거를 좇는 일과 두 여성의 관계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나’는 에메렌츠에 대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알게 된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에메렌츠 스스로, 절대로 열 것 같지 않았던 그 무거운 입을 열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나’를 여느 사람과 달리 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작가라는 신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책과 언어의 세계에서 사는 ‘지성인’이자 ‘교양인’으로서 에메렌츠가 이제까지 상대해온 이들과는 조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에메렌츠가 ‘나’에게 매우 투박한 방식으로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은 ‘나’가 그런 지성인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에메렌츠 그녀에게 섣불리 질문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성격. 또 그러면서도 인간이기에 에메렌츠에게 기분 나쁘거나 상처받거나 화가 나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게 되는 그 솔직함 때문에 에메렌츠가 ‘나’를 한 사람으로,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것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으로 점찍게 된 것은 아닐까.

에메렌츠의 세상에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대표되는 두 부류가 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가 속한 세계,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고, 언어로 뭔가를 만들어 내고, 방송에 나와서 유식한 소리를 떠드는 ‘지성인’들은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가짜’와도 같다. 에메렌츠가 보기에 ‘나’와 같은 사람이 왜 그런 가짜 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듯 에메렌츠는 문학이나 영화처럼 ‘빗자루질’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모두가 가짜이며 오히려 노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진 삶이 진짜라고 믿는다. 그래서 에메렌츠는 ‘나’에게 선물 받은 텔레비전으로 가짜 세계를 보느니, 마당에 나가서 내린 눈을 조용히 쓸 뿐이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뭔가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삶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고, 주변의 길 잃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으며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이리라.

에메렌츠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녀가 왜 그토록 자기 집의 문은 물론 마음의 문도 닫아버리고 살아왔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힘들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꽤 스트레스 받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인간적으로 끌리게 될까? ‘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나’의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때 이미 ‘나’와 ‘에메렌츠’는 단순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뛰어넘어 그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또 때로는 엄마와 딸 같은 단단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에메렌츠의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둘은 파국을 맞는다.

이 책을 덮고 나서도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내가 판단하기에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좋을 법한 것을 해주는 게 그를 위한 최선인지.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은 기꺼이 즐겁고 행복한, 기적 같은 일이 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늘 여러 의미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임을 <도어>는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이 문장의 의미를 마침내 깨닫지만, 에메렌츠 처지에서는 그것이 과연 구원이었을지 ‘나’의 회한 어린 기록 속에 여전히 묵직한 질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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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20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읽고 싶네요.. 잠자냥 님 리뷰 읽으면 너무 다 읽고 싶어지는 거 큰 문제입니다...

잠자냥 2019-12-20 16:19   좋아요 0 | URL
그러면 해결책이 있습니다! 사두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제 리뷰를 읽지 않는 것입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9-12-20 16:20   좋아요 1 | URL
그러면 저 지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잠자냥 님 리뷰를 읽지 말아야 하는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19-12-20 17:17   좋아요 0 | URL
아니 대체 책을 얼마나 사두신 겁니까!!!!!!!!!!!!!! (라고 말할 처지는 저도 아닌 것 같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19-12-2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잠자냥님 리뷰 보다보면 읽고 싶은 책이 자꾸 생겨서 심적으로 부담이 갑니다ㅠ 에메렌츠란 여인에게 급 관심이 가네요. 이 책 도서관 갈 때마다 신착도서 칸 늘 같은 자리에 꽂혀 있어요. 표지색이랑 제목이 좀 지루한 느낌이 들어 그냥 넘어갔는데 새해에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19-12-22 11: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문학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그런 책 같았어요. 에메렌츠의 비밀이 뭘까 궁금해서 책장도 잘 넘어가는 편이고요.

Falstaff 2020-04-20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고 책 사서 지금 막 다 읽었습니다. 알라딘하고 프시케의 숲에선 잠자냥님한테 상 줘야 해요!
아, 참 좋은 책. 헝가리에 소설 잘 쓰는 사람이 많네요.

잠자냥 2020-04-20 11:47   좋아요 1 | URL
참 좋은 책입니다. 헝가리 작가들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어요.
에메렌츠가 또 떠오르네요. 왠지 오늘 날씨 같은 사람... ㅠㅠ